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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생각이 변해야 말이 변한다(눅 6:45)

by liefd 2024.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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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마음에 있는 생각이 말이 되어 입으로 나오는 것이다. 입어서 나온 말은 곧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행동들이 모여 습관이 되고 그 습관들이 모여 인격이 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가장 안쪽에 생각이 있습니다. 세상은 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교정하려고 합니다. 인격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늘 사람의 마음을 주목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과 행동을 동일한 비중으로 다루십니다.

 

당신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옵니다. 곧 그 말을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잠시 후 그가 어떠한 하게 될 행동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뀝니다. 생각을 알면 인생이 보입니다. 생각이 인생을 좌우합니다. 말이 인생입니다. 말은 행동을 낳습니다. 습관이 인격을 형성합니다. 생활을 알면 인생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제들을 향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을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마음의 생각을 말이나 행동과 동일하게 여기셨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마음의 생각이 인생의 출발점입니다. 그 사람이 생각이 어떠한 지가 그 인생의 어떠함입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237).

 

나아만과 게하시(왕하 5:9-14)

나아만은 아람나라 군대장관입니다. 그는 문둥병에 걸려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가면 엘리사가 나와서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 부위세 손을 흔들러 문둥병을 고쳐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엘리사는 나오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노를 발하며 몸이 돌이켜 떠나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지혜로운 종의 충고로 인해 다시 돌아와 치료를 받았지만 하마터면 평생을 문둥병자로 살 뻔했습니다. 이렇게 순간적인 기분에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좌우됩니다.

 

나아만이 문둥병 치료를 받은 후에 엘리사에게 예물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고사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의 순간적인 욕심이 그의 인생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요?

 

열왕기하 520-27절 말씀에 보면 가지고 온 예물을 도로 싣고 가는 나아만에 대해서 게하시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좇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그리고 게하시는 나아만에게 달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이렇게 게하시의 생각이 나아만에게 달려가 거짓말을 하게 했습니다. 이 일로 게하시는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 게하시의 생각 하나가 그의 인생을 이렇게 만든 것이다.

 

미갈과 다윗(삼하 6:12-23)

다윗의 아내 미갈이 법궤를 도로 찾아오면서 춤을 추는 다윗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미갈의 이러한 생각의 결과가 다윗을 업신여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생각은 이내 말이 되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이 말은 다윗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축복을 하려고 돌아온 다윗의 입에서 축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미갈의 생각 하나가 그 인생에 이런 결과를 낳게 했습니다.

 

다윗과 사울 왕(삼상 18:6-9)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승리하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한 말을 듣고 사울 왕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사무엘상 186-9절에 보면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를 가지고 사울왕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뛰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울의 죽은 지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사울이 이 말을 듣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사울은 심히 노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811-12절 말씀에 보면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로 했습니다. 그날 이후 사울의 주업무는 국사가 아니라 다윗을 죽이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삼삼 3:16).

 

만약 사울이 이러한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면 그의 인생을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의 죽인 자는 만만이라". 그래도 그렇지 이 여인들은 철이 없기를 없구만. 그냥 다윗을 칭찬하면 될텐데 왜 나와 다윗을 비교할까? 허나 이런 승리의 날에 내가 작은 일로 마음이 상해서는 되겠는가?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다윗이 나타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제 우리 나라에도 다윗과 같은 인물이 있으니 블레셋이 다시는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꺼야. '다윗을 잘 키워서 군대장관으로 삼아야지. 하나님이 내게 참 귀한 사람을 붙여 주셨도다." 어서 나가 백성들과 함께 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자' 라고 생각해야 했습니다..

 

욥의 말(욥 1:13-19)

욥의 경우를 통해서 생각의 힘을 살펴 봅시다. 욥기 113-19절에 보면 욥이 현실적으로 당한 고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 325-26절 말씀에 보면 욥은 이런 일이 있을까와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과 같은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이 그에게 두려움이 되었고 무서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대로 현실화되자 탄식하며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속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41:10, 1 4;1, 1 4:27, 벧전 5:7, 6:34, 6:19).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화되기 때문입니다. 욥은 아마 자신의 생각이 그렇게 현실화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마치 오눌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생각이 현실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두려워하는 대신, 근심하고 걱정하는 대신, 염려하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 관리에 최고의 길이 있습니다(4:6-7).

 

 

말과 건강(16:24)

 

상황이 우리 뜻대로 풀리지 않고 자꾸 어려운 일만 터질 때 특히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고통 속에서 당신이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순간이 얼마나 오래갈지 결정이 됩니다. 즉 고통 속에서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면 그 시간이 오래갑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면 그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려운 순간을 빨리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보고 싶다면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려고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어느 학자가 같은 종류의 식물을 같은 장소에 두고 같은 양의 영양을 공급해 주면서 한 식물에게는 매일 사랑의 말을 들려주고 한 식물에게는 나쁜 말을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주 후 두 식물을 비교해 보니 사랑의 말을 들려준 식물은 건강하게 잘 자라났지만 나쁜 말을 들려준 식물은 시들어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말의 힘이 그것입니다. 긍정적인 말은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을 건강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 1624절 말씀입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양약'이라는 단어의' 마르페'는 히브리어로 '라파''치료'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즉 말은 사람을 치료하기도 하고 병들게도 합니다. 말은 마음이 상한 것과 병든 것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관계도 치료합니다.

 

선한 말은 치료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면 "선한 말"이란 어떤 말일까요? 에베소서 429절 말씀입니다.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여기서 "선한 말"이란 기쁨을 주는 말, 아름다운 말, 친절한 말, 은혜스러운 말, 위로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이사야 401절 말씀입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하는 말은 마음이 상한 자나 고통을 겪고 있는 자에게 해주는 따뜻한 말입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이 답니다.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이것이 뼈에 양약이 된다고 합니다. 즉 선한 말은 뼈를 즐겁게 하고 이 즐거움이 뼈를 치료한다는 의미입니다. 뼈는 피를 만드는 공장입니다. 즉 선한 말은 피를 만드는 공장인 뼈를 치료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늑골, 두개골, 척추에 있는 골수에서는 피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 뼈는 일평생 500 Kg 이상의 피를 만들어냅니다. 즉 선한 말은 가장 효과있는 보약입니다.

 

선한 말은 사람을 치료하지만 악한 말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잠언 1218절 말씀입니다.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병들게 하는 말이란 함부로 하는 말, 독한 말, 날카로운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우리는 말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몸이 상하고, 관계가 깨어진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선한 말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말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은 비난과 바판이지 교훈과 책망은 아닙니다. 교훈과 책망은 선한 말입니다. 칭찬과 격려가 사랑이듯이 교훈과 책망도 사랑입니다. 교훈과 책망은 지혜로운 사람을 만듭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은 비난과 비판이지 교훈과 책망은 아닙니다.

 

교훈이 잘못하기 전에 하는 것이라면 책망은 잘못한 후에 하는 것입니다. 교훈과 책망은 잘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른 길을 가라고 교훈했는데 듣지 않고 그릇된 길로 가면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해 책망을 합니다. 교훈이 예방적 차원이라면 책망은 치료를 위함입니다.

 

교훈과 책망을 할 때 그 동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면 그것은 비난과 비판이 됩니다. 동기는 하나님이 아시고, 말하는 당사자가 압니다. 교훈과 책망을 할 때마다 늘 동기가 사랑인지를 체크해야 합니다. 책망이 책방 맏는 사람에게 사랑으로 전달되었다면 그것은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미움으로 전달되었다면 잘못된 책망입니다.

 

성경은 당신이 산을 향해 말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123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이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여기서 산이란 우리가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들을 가리킵니다. 오랫동안 가슴에 맺힌 상처들, 틀어진 관계, 휘청거리는 사업이나 직장, 병마 등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여기서 "산을 향하여 선포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산적한 문제 앞에서도 당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당당하게 선포하십시오. 믿음으로 선포하는 당신의 언어와 기도는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무엇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마가복음 112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래도 되리라."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요한복음 317절 말씀입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분명한 자화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당신은 과연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당신이 치료받기를 원하고, 살기를 원하고, 성공하기를 원하고,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선한 말을 하십시오. 이제부터 당신은 기쁨을 주는 말, 아름다운 말, 친절한 말, 은혜스러운 말, 위로하는 말, 긍정적인 말을 하십시오. 사람이 선한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합니다. 힘이 납니다. 신이 납니다. 소망이 생깁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의욕이 넘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가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이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성경적인 용어의 공통된 특징은 살리는 말, 위로하는 말, 평안을 주는 말, 소망을 주는 말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예를 들면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 중에 하나는 그것이 현실화되기 때문입니다. 욥의 경우가 바로 그런 케이스입니다. 욥기 325-26절 말씀입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빌립보서 46절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부모와 자녀 이렇게 대화하라(6:4)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우리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가정이 축복의 가정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뭔지?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먼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녀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의 최고의 모델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떠한 관계로 묘사하고 있을까요? 마태복음 317절 말씀입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아버지가 자녀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녀, 내가 기뻐하는 자녀라고 부르기를 축원합니다.

 

시편 1273절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독특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니라". 자녀는 부모가 짊어져야 할 짐이나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요 상급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잘 키우라고 맡겨주신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상급입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축복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은혜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귀하고 복된 자녀를 주셨는데 어떻게 잘 양육할 수 있을까요? 에베소서 64절 말씀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어떠한 경우에도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됩니다. 골로새서 321절 말씀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니라".

 

이것은 무조건 자녀들에게 잘 해주라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책망하고 징계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녀의 마음에 오랫동안 고통이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격한 분노를 유발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강요하거나 낙심케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저는 "부모와 자녀의 대화 이렇게 하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기독교 가정사역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나에게 상처를 주며 고통을 준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40.7%가 아버지, 32.1%가 어머니, 27.2%가 집안식구를 뽑았습니다. 1, 2, 3위가 다 가족이었습니다. 소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어야 할 가족에게서 우리는 가장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주범이 바로 언어입니다. 가족 간에 오가는 언어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주범이고 부정적 자아상을 만드는 주범입니다.

 

언어는 사람의 자아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만약 자녀들에게 " 이 병신 같은 놈". 어디 마음에 드는 곳이 한군데라도 있어야지", 네가 잘하는게 뭐냐"는 식의 말을 들으면 자아상이 부정적으로 형성됩니다. 그러나 ", 참 잘 한다", "대단한데", "수고했다", "네가 제일이다", "넌 소중한 존재다", 넌 하나님의 자녀고 귀한 존재야"라는 말을 들으면 긍정적 자아상이 형성됩니다.

 

잠언 2721절 말씀입니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 도가니는 은을 만들어 냅니다. 풀무는 황금을 만들어 냅니다. 칭찬은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간혹 어떤 부모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에게 칭찬할 게 있어야 칭찬을 하죠".

 

그런데 칭찬에는 두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칭찬을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조그만 장점이라도 발견되면 계속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문제가 있는 것을 더욱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못하는 것이 있고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못하는 것만 문제 삼으면 더 못하게 되고, 잘하는 것마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잘하는 것을 찾아 칭찬하면 더욱 잘하게 되고, 못하는 것도 잘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실수와 허물이 많은 사람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그것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18절 말씀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는 흔들리는 믿음을 가졌지만 앞으로 반석을 가진 믿음의 소유자가 될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칭찬은 잘하는 것만 부각시켜서 수고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한번은 부부가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는데 아들이 부엌이 깨끗하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칭찬합니다. 다른 것은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데 그릇 하나는 잘 씻어 놓았네!. 옆에 있는 어머니가 공부를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은 칭찬이 아닙니다. 칭찬을 할 때에는 칭찬만 해야 합니다. "부엌을 깨끗이 해 놓았구나, 수고했다."

 

또한 부모는 자녀와 대화를 할 때 마음을 닫히게 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을 닫히게 하는 언어란 일방적, 지시적, 명령적, 위협적, 단정적 언어입니다. 간혹 거리에서 우는 아이를 부모가 달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뚝 그쳐", "입 다물어", 그러면 두고 갈꺼야", "매맞는다", ""혼날 줄 알아", "아빠한테 이른다". 이렇게 위협하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 어머니들의 자녀교육법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녀들이 울음을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서러워서 울게 됩니다. 아이는 속으로 "엄마는 내 마음은 이해해 주지 않고 협박만 한다고 생각해서 억울하고 분해합니다. 물론 아이들은 논리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품게 되고 마음에 분노가 생겨서 더 크게 웁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이들은 결국 마음의 문을 닫게 됩니다.

 

우는 아이는 울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누나 집에 놀러가서 너무 즐거웠는데 이제 집에 가자고 하니 울고 싶은 겁니다. 그때 부모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누나가 더 놀면 좋겠지만 이제 누나도 숙제를 하고 씻고 자야 돼, 내일 다시 오면 누나가 놀아줄꺼야, 누나에게 안녕해 봐. 아이가 그럼 내일 또 올거야. 그럼. 누나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누나랑 손가락 걸고 약속하자.

 

이와같이 부모는 자녀와 대화를 할 때 마음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권면하고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고 부탁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와 대화를 할 때 어떻게 마음을 여는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추궁형에서 이해형으로 대화로 바꾸어 보십시오. 요한복음 81-11절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에게 예수님은 "왜 긴음했느냐"고 추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모가 시험지를 갖고 온 자녀에게, "이거 왜 틀렸어", 혹은 이렇게 쉬운 문제를 틀리다니 말이 돼?" 라고 말하면 자녀는 민망해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다 틀렸어"라고 하면, ", 그만 착각을 해서 잘 아는 문젠데 틀렸어요. 그래 속이 많이 상하겠구나 격려해야 합니다.

 

또한 부모는 자녀와 대화를 할 때 해답형에서 질문형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라고 물으십니다.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아,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 하더이다"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니밍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랴 하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와 같이 부모가 자녀들에게 먼저 해답을 제시하지 말고 질문을 해야 합니다. 아빠 아 특별활동을 하는데 나 축구부에 들어갈까요?, 영어회화부에 들어갈까요? 영어화회부에 들어가려면 앞으로 영어를 잘해야 해. 이렇게 자란 사람은 우유부단하고 항상 누구의 지시를 받아야 하고, 의존적이 됩니다. 그러나 네 생각에는 어디에 들어가는 좋겠니, 네 생각을 좀 이야기 해보겠니? 질문형 대답은 이렇게 판단력, 결정력, 창의력을 갖게 해주며 마음을 열어주고 지속적인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게 대화할 때 명령형에서 권면형으로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실 때 위압적이거나 명령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원어의 표현을 보면 "저를 따라 오십시오. 제가 당신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명령을 하시더라고 위압적으로 하시지 않고 권면하는 형식으로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이제 TV끄고 네 방에 들어가서 공부해? 그렇게 하면 마음이 닫혀서 자기 방에 가도 공부가 싫어지고 지겹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만 쉬고 공부하면 어떻겠니? 네 알았어요. 5분만 보고 공부할께요. 그렇게 하면 열린 마음이 되므로 공부를 해야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 대화를 하는게 중요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대화를 하면서 많은 상처를 받는 또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YOU 메시지 법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I 메시지를 많이 사용하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YOU 메시지는 너는 중심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I 메시지는 나를 중심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늦게 왔을 때 어머니가 "너 왜 이제 오니?"라고 말하면 대부분 꿀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되풀이해서 "어디 갔다 왔어"하면 마지못해 이렇게 저렇게 되어 늦었노라고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속으로는 조금만 늦으면 야단치고 잔소리한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YOU 메시지는 무시당하는 것 같고 추궁받는 것 같아 불쾌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늦게 온 아이에게 반갑게 맞이하면서 "이제 왔어?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느지 몰라. 오다가 무슨 사고라도 났는지 해서 말이야". 라고 말하면 아이는 "엄마는, 친구랑 좀 놀다가 왔어요"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게 됩니다. 이럴 때 아이는 엄마가 나를 걱정하고 계셨구나 앞으로 걱정을 안 끼쳐 드려야지"라고 생각하게 되고 스스로 늦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I 메시지를 사용하면 수용적이 되고 긍정적 친근감을 갖게 됩니다.

 

누가복음 16장의 탕자의 아버지는 YOU 메세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 너 그 지산 어떻게 했느냐? 어쩌다 이 모양이 됐느냐? 꼴 좋다?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대신 I 메시지로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보니 너무 기쁘다. 다시 돌아오니 너무 기쁘다"고 말하면서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아빠가 피곤해 있는데 아이가 와서 뭔가 이랴기 하려고 합니다. 아빠가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말해, 저리가". 그럴 때 아이는 알았어요, 그러면서 나는 귀찮은 존재로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는 절망, 단절, 좌절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YOU 메시지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아빠가 아이에게 " 아빠가 지금 몹시 피곤하거든 나중에 애기하자". 그렇게 하면 아이는 "네 아빠가 지금 피곤하시구나 편안하게 해드려야지". 그래서 아이는 아빠를 이해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제 부모된 우리가 자녀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요 상급인 줄 알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앙육하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항상 긍정적인 자아상을 심어주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칭찬을 통해서, 마음을 열어주는 대화를 통해서, I 메시지를 통해서 행복한 자녀로, 위대한 자녀로 양육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이대로 좋은가(6:1-3)

 

요즘 노인 자살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2003년 통계로 하루에 10명가량의 노인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삶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살하는 노인들이 왜 자살하는지 아십니까?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기 싫어서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우리의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조금이라고 짐을 덜어 주려고 자살이라고 하는 극단적 선택까지 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가 50대 이상 중장년층 부모에게 자녀들에게 가장 상처받는 말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문을 조사했다고 합니다. 1위가 말이 안통해요”. 2위가 휴대폰 인터넷 작동을 두고 이것도 못해요”. 3위가 바빠서 못찾아 뵙겠습니다.

또한 부모님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 1위가 잘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2위가 저희 걱정 마시고 이젠 부모님만 위해서 사세요, 3위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이전에 통계에 의하면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상처받는 말은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어요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은혜를 망각한 채 자격을 따지는 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것 때문에 감사하기 보다는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것 때문에 불평합니다.

 

성경은 자녀들이 부모님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1-2절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경하라”. 먼저 자녀들은 부모님에게 공경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태도를 가져야만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어떤 자녀들은 부모님에 대한 실망 때문에 존경 자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물론 자녀들의 입장에서 받은 상처가 크기 때문에 부모님으로 인정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녀들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출애굽기 201-17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

 

이어서 출애굽기 20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모를 공경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부모를 공경하는지 그것을 시험하십니다.

 

신명기 516절 말씀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성경은 부모의 자격이 있는 경우에만 공경하라고 말씀하신 곳은 단 한군데도 없습니다. 부모의 자격이 없는 경우에는 더 이상 공경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곳도 단 한군데도 전혀 없습니다. 자녀들이라면 부모의 자격여하에 관계없이 공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필수사항입니다. 또한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부모의 권위는 사람이나 제도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가게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게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자녀는 부모를 반드시 공경해야 합니다.

 

또한 왜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잠언 2322절 말씀입니다.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잠언 2325절 말씀입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즉 부모님이 우리를 낳아주셨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녀들은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더 이상 부모님이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느냐? 는 것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자녀에게 해준 것이 없어" 늘 마음 아파하는 분들입니다. 일반 서민들의 마음도 영부인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세상에서 악한 자라 하더라도 자녀들에게 만큼은 좋은 것 주고 싶어합니다.

 

마태복음 79-11절 말씀입니다. "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때로는 부모님에 대해서 실망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 그것 한 가지만은 놓쳐서는 안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 주고 싶어하신다는 그 마음 하나 만큼은 그대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때로는 부모의 생각과 자녀의 생각이 달라서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의 스타일과 자녀의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서로 마음이 상한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언어와 자녀가 사랑하는 언어가 달라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 때문에 자녀는 "부모와 안통한다"고 힘들어합니다. "이것도 모르면서 뭘 한다?고 그러느냐"고 합니다. 세대 차이가 나서 도저히 안맞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스타일과 부모님의 스타일이 다르다고 힘들어하지 마십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서로 다르다고 틀렸다고 말하지는 마십시오. 서로 다른 것들을 통해서 배우고 인정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녀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는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자녀들의 스타일을 부모님에게 요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모님들이 휴대폰이나 인터넷을 잘 사용하지 못한다고 무시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부모님이 핸드폰를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입니다. 게다가 문자를 보내는 것은 탁월한 것입니다. 이모티콘을 보내지 못한다고 업신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것 그것만으로도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버이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머님께 잘못했다고 걸리는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제가 군대에 갔다고 휴가차 집에 갔을 때 어머님이 이것저것 맛있는 것을 쉬지 않고 챙겨주시는지 귀찮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모처럼 집에서 좀 쉬고 싶은데 쉴만하면 이것 먹으라, 저것 먹으라고 방에 가져 오십니다. 그래서 저는 인내의 한계를 느낀 나머지 그만 화가 나서 마지막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왜 나를 귀찮게 하느냐고, 제발 좀 그냥 두시라고 안먹겠다고 하는 데 왜 자꾸 그러시느냐고?"

 

그때 어머님이 아무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슬그머니 방에 나가시는 뒷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모처럼 휴가차 나온 아들에게 잘 먹이고 싶은 그 어머님의 심정을 왜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끝까지 감사하다고 너무 수고하셨다가 말씀드리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립니다. 부모님의 스타일이 다르다 하더라도 좋은 것 주고 싶어하시는 마음만 그대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부모님을 민망케 해서는 안된다. 어떻게 하든지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할까요? 에베소서 61절 말씀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자녀들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씀에 어디까지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골로새서 320절 말씀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즉 자녀들은 부모님의 말씀이라면 모든 일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신명기 2120-21절 말씀입니다.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여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려 쳐 죽일지니 이같이 내가 너의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잠언 3017절 말씀입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자녀가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싫어하면 그 영이 죽게 됩니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부모의 말씀을 거역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부모님에게 마음이 상한 경우에도 어떠한 폭언을 해서는 안됩니다. 출애굽기 2117절 말씀입니다.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더구나 부모를 학대하거나 폭행을 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됩니다. 물론 부모로 인해 많은 고통과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녀를 학대하거나 때리는 것을 절대로 금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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