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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번은 원하는 인생을 살자(고전 15:10),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4.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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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융은 인생은 40세를 정오로 해서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진다고 했습니다. 오전에는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이기는 것이 목표이지만, 오후가 되면 나에게 가치있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였는가? 나는 지금부터 누구여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있다가 없어지는 것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항상 있는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카이스트의 윤태성 교수가 한번은 원하는 인생을 살아라는 책 제목이 저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연봉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의 인생입니다. “사실 인생은 하나의 산이 아니라 몇 개의 산으로 이루어진 산맥이다. 일생동안 몇 개의 산을 오르고 또 내려와야 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 번쯤은 내가 오르고 싶은 산에 올라야 한다. 정상에 오르지 못해도 좋다. 단지 내가 오르고 싶어서 올라가는 산이 하나쯤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자신은 한 번도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모태 신앙을 가진 분들이나 범생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느끼고 피해의식을 느끼곤 합니다. 잘 해야 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새로운 길을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도 되는 것일까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름을 쪽 열거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맨 마지막에 언급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부활의 사건을 먼저 다룬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의 말과 행동과 일과 태도를 통해 주님의 생명을 어두운 세상에 밝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한번 원하는 인생을 살자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누구한테도 제재받지 않고 마음껏 한번 살아보자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먼저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해 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불행할까요?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산다면 행복할까요? 과연 당신은 누구를 위한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사도 바울의 인생은 당시에 유대교에 열심을 가지고 기독교를 핍박하였습니다. 심지어 다메섹 도상에 원정을 가서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적극성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그에게 강권적으로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614절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가시채는 끝에 뽀족한 쇠나 뼈를 박은 채찍을 가리키는데 밭을 갈 때 소가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때리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만약 매를 맞은 소가 반항하고 뒷발질을 하면 할수록 더욱 심하게 찔리고 고통을 당합니다. 이는 열심을 낸다고 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항하는 어리석음을 끝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방향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대적하고 있는가 점검해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바라보실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스럽고 소중하며 유능한 존재로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13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게 하시나니.”

 

한번 원하는 인생을 살자는 것은 한 번이라도 주님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 보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며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59-10절에서 이렇게 회고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로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주님의 일을 위해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교회를 핍박하는 일이고 주님을 핍박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은혜 받은 이후에도 내가 처음 주님 만났을 때의 그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의 나 된 것이 무엇일까요? 사도가 된 현재의 나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간증합니다.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인생의 주인이 되셔서 그분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정말 당신 안에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금까지 이루어 왔고, 이루어 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번도 손을 대지 못하고 이렇게 끝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는 주님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과거에 우리가 성공했던지, 실패했던지 상관없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자리매김하기를 원합니다.

 

솔직하게 주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아직도 주님은 나의 그 어떤 것을 위해서 도움을 주어야 하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믿음의 위대한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적인 연약함과 실패의 모습이 자주 나타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그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기반을 잡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거기를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이삭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모습을 나타날 때 아비멜렉이 그와 불가침 협정을 맺자고 찾아옵니다. 모세도 나이 80세에 지위와 명예와 소유와 모든 스펙을 다 잃었던 순간에도 여호와께서 쓰시겠다고 했을 때 안된다고 버티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주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하게 됩니다. 요셉은 애굽의 노예로 갖은 고통과 배신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들은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습니까?

 

 

왜 한 번이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야 할까요?

 

본문 10절 하반절입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니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었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나도 주님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 삶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그렇게 핍박했던 자신에게 사명을 맡겨 주실 때 어떻게 했을까요?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더 잘했다고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헤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많이 받고도 헛되게 사장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옛날에 중국의 무술 영화를 좋아했습니다. 이소룡이 나오는 영화, 날아다니는 영화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스토리가 거의 비슷하게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부가 악당들의 습격을 받아 비참하게 죽어가면서 이 원수를 갚아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인공은 눈물을 삼키면서 그 악당들에게 찾아가서 기어코 원수를 갚습니다. 사부의 죽음을 헛되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그 사명을 감당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보다 못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얼마나 사용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교회를 핍박했던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아프게 생각하고 그것 때문에 견솜해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가 다른 사도들보다 훨씬 더 많이 수고하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모든 것이 진짜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을 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고 성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교회를 세워가는 그 일을 위하여 희생과 헌신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내가 어느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지만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입니다. 즉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신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829절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 우리도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어떤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어떻게 한 번이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15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로 이방인들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 일을 구하지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219-21절에서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뜻을 같이하여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사람이 이 사람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는다고 실상을 말합니다.

 

나는 교회에서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 자기 일을 구하지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누구를 보낼까 생각하면서 이런 저런 사람들을 떠올려 보지만 그들은 자시의 사적인 문제와 유익을 추구하려고 하지 주님을 위해 희생할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나는 지금 어떠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든" 사람입니까? "난" 사람입니까? "된" 사람입니다.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소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라고 합니다. 예수의 흔적이 나타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사용하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크게 많이 하려고 하지 마시고 작은 일부터 계속해서 하겠다고 결단하십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성공하십시오. 과연 나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나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하고 있는가? 이것이 나의 인생관이고 가치관이고 교회관이고 직업관이고 국가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붙잡아야 합니다. 어떤 책에서 이런 통계를 본적이 있습니다. 어느 대학교에서 자살을 시도한 60여명의 학생들에게 자살이유를 물어 보었다고 합니다. 자살한 학생들 중 85%가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고 목적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들 가운데 93%가 겉으로는 성적도 우수하고 사회적으로도 저극적이었다고 합니다. 겉보기엔 멀쩡한데 내면이 공허하고 방향성이 없는 삶이 계속되자 그런 선택을 한 거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가 그동안 의심하고 믿지 못하여 굳게 닫았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의 내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동안 내 안의 편견과 선입견, 색안경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판단한 저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나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도록 나의 마음을 넓혀주옵소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았던 어리석은 삶을 용서하옵소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보다는 자신의 문제에 잡착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했던 죄를 용서하옵소서. 한 번이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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