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마음이 과거에 있으면 지혜를 얻고, 미래에 있으면 소망을 얻는다.’ 역사를 알면 현재를 직시할 수 있고 더 밝고 찬란한 미래를 꿈꿀 수 있다. 역사를 아는 민족에게 희망이 있다.
교회사를 배우면 먼저 자기 자신, 다음으로 교회, 그리고 과거와 미래의 보편 교회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교회를 잘 섬기게 된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만들 듯, 과거 한국 교회 역사를 통해 현재의 교회를 돌아보고 더 나은 미래 교회를 고민해 보자.
한반도에서 교회는 오히려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항하는 3.1운동과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앞장설 수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교회는 애국하는 종교라는 구도가 자연스레 생겨났다. 심지어 개신교회를 통해 한민족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고 세계 속으로 약진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실제로 교회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근대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조상숭배를 효의 근본으로 여기던 조선 사회에서 이런 입장이 이해될 리 없었다. 조선의 양반과 보통 사람들에게까지도 ‘무부무군’(無父無君, 아버지도 없고 군주도 없다)의 종교로 비쳐 ‘이단자’ 혹은 ‘사학’(邪學)으로 오해받았다.
신해박해(진산사건, 1791)
1791년 바로 이 ‘조상제사’ 문제로 인해 ‘신해박해’(辛亥迫害)가 일어났다.
* 한글 성경을 번역하는 아름다운 발
한반도에 복음이 전파되기 전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 성경이 번역되면서 선교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마치 그리스 로마의 공용어인 헬라어로 성경이 기록된 후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의 계획과 상상을 초월한다.
서상륜은 1885년 20여 명의 개종자와 함께 개신교 공동체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소래교회’(송천교회)다. 이들 중 3명은 1887년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언더우드를 초청하여 세례를 받았다. 후에 소래마을 58가구 가운데 52가구가 개종할 정도로 복음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렇듯 ‘소래교회’는 한반도 최초의 교회이자 장로교회의 요람이었다. 소래는 ‘대구면’에 있었는데 ‘대구’(大救)는 ‘큰 구원’이라는 뜻이다. 정말 이 지역에 ‘큰 구원’이 일어났다! 이 교회에는 직분자도 없고 조직과 제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었다. 성경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한 것이다. 번역된 한글성경은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존 로스는 1882년 인쇄된 한글성경을 가지고 식자공이던 김청송에게 권서인 역할을 하도록 했는데 아주 성공적이었다. 압록강변에 위치한 옛 고구려의 고도 집안(集安, 광개토왕릉비가 있고 국내성이 있었던 곳)에 있는 한인촌을 중심으로 선교한 결과 많은 결신자를 얻었다. 그들은 로스에게 찾아와 세례를 요청했다고 한다. 1884년 압록강 연안 계곡에 있는 28개의 한인촌에 100명의 세례자, 600명의 세례 요청자가 있었다니 대단했다.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수천 가정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883년 10월 서상륜(徐相崙, 1848-1926)이 ‘권서인’으로 파송되어 의주에 왔을 때는 백홍준이 교리 문답반을 개설하여 가르치고 있었다. 나중에 백홍준은 1885년 18명의 신자와 예배처소를 마련했다. 한국인 스스로 만든 개신교 신앙 공동체였으니 바로 ‘의주교회’(義州敎會)다.
서상륜은 1885년 20여 명의 개종자와 함께 개신교 공동체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소래교회’(송천교회)다.1 이들 중 3명은 1887년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가서 세례를 받았고 나머지는 나중에 언더우드를 초청하여 세례를 받았다. 후에 소래마을 58가구 가운데 52가구가 개종할 정도로 복음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렇듯 ‘소래교회’는 한반도 최초의 교회이자 장로교회의 요람이었다. 소래는 ‘대구면’에 있었는데 ‘대구’(大救)는 ‘큰 구원’이라는 뜻이다. 정말 이 지역에 ‘큰 구원’이 일어났다! 이 교회에는 직분자도 없고 조직과 제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었다. 성경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한 것이다. 번역된 한글성경은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소래교회 출신 성도들은 1887년에 문을 연 서울 새문안교회의 주력 교인이 되었다. 서울여자대학교 설립자 고황경 박사의 조부 고학윤(高學崙) 조사, 한국 여성 지도자 김필례(金弼禮, 1891-1983), 남궁혁 박사의 부인 김함라,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후일 김규식 박사의 부인이 된 김순애(金淳愛, 1889-1976),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金瑪利亞, 1891-1944), 연세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김명선(金鳴善, 1897- 1982) 박사도 소래교회 출신이다. 과연 소래교회는 한국 교회의 요람이었다.
1883년에는 김청송에 이어 두 번째 식자공이 된 동지사 수행원 출신의 한 청년이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와 1천 권의 성경을 뿌려 평양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서상륜은 두 번째 식자공으로부터 400권의 복음서를 가지고 와 서울에서 6개월간 전했는데, 그 결과 여러 명의 기독교인이 생겼다. 그는 로스 선교사에게 13명의 친구에게 세례 줄 것을 요청하면서 교회를 조직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이렇듯 한반도에 복음이 전해질 때 먼저 조선 ‘권서인’ 혹은 ‘매서인’을 통해 선교가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권서인’은 한인 전도자 혹은 선교사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한민족이 아직 복음을 잘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럼에도 성경이 한글로 번역된 덕분에 전도가 매우 용이했다
한편, 견미사절단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로 가는 도중에 놀라운 만남이 있었다. 볼티모어 감리교 목사 존 가우처(John F. Goucher, 1845-1922) 한 감리교회 선교에 불이 당겨졌다. 대륙 횡단 열차의 침대차 좌석을 구하지 못한 가우처가 할 수 없이 한국인 사절단이 여행하는 특별 차량의 2층 칸을 이용한 것이 이들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가우처 목사는 아침에 낯선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를 들었고, 커튼 밖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한 무리의 이방인 남자들을 보았다.
그는 한국인 사절단들과 한나절 대화를 나누었다. 가우처는 이미 중국과 일본 선교에 헌신하며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해 11월 6일 감독에게 편지를 써 한반도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했고, 2천 달러의 선교 기금을 약속했다. 1884년 1월 31일, 일본 선교사로 있던 매클레이에게 편지를 써 한반도를 방문하여 선교 가능성을 타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신기하고 놀라운 만남이었다.
최초의 한반도 선교사, 알렌
이미 언급했듯이 미국 장로교회가 1884년 헤론을 의료선교사로, 언더우드를 교육선교사로 보내기로 동시에 결정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한반도에 발을 디딘 선교사는 알렌이었다. 알렌은 일찍이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공부했지만,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 소속으로 중국 난징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알렌은 일단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에서 공의(公醫)로 취직했다. 그해 12월 4일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익이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어 출혈이 심하자, 고종 밑에서 외교와 세관 업무를 담당하던 독일인 묄렌도르프(P. G. von Möllendorff, 1848-1901)2의 주선으로 알렌이 치료를 하게 됐다. 알렌은 민영익의 출혈을 멎게 하고 상처를 수술로 치료했다. 조선 정부는 그의 의료기술에 감명을 받고 알렌을 고종 황제의 주치의로 임명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먼저 외국인 대상 교회를 시작했다. 그것이 나중에 주한 외국인 교회인 ‘서울연합교회’(Seoul Union Church)의 시작이다. 한반도에 들어와 있는 선교사와 공사관 직원의 가족이 모여 예배하는 곳이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고 풍토병으로 죽어 가는 자녀와 선교사의 장례를 책임지기도 했다.
1887년 9월 언더우드가 정동에서 ‘새문안교회’, 10월에는 아펜젤러가 ‘정동(제일)교회’를 시작했다. 둘은 1888년 4월 북부 지방 전도여행에 함께하기도 했다. 그들은 경쟁하지 않고 서로 협력하며 복음을 전했다. 나중에 조선 선교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지역을 나누어 선교하면서 교파별, 선교부별로 분할하게 되지만, 복음을 위해 협력했다. 나중에 선교사 존스가 평가한 두 사람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언더우드는 지칠 줄 모르고 늘 희망적이었고, 아펜젤러는 건설적이고 통찰력이 있었다.” 둘은 선교 사역에서 최고의 협력자였다. 이들의 협업으로 한반도 선교는 성공적으로 정착되고 있었다. 한반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겼던 네덜란드인 하멜도 그의 책에서 조선이 자기를 풀어 주지 않은 이유로 “조선은 조선이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썼다.
조선 정부가 조난당한 불쌍한 네덜란드 선원을 가족과 고국으로 돌려보냈다면, 만국 상호 인륜적 호혜를 베푼 것이 되고, 그로 인해 좋은 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외인을 억류하고 붙잡아 두었다. 그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라, 본래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좋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선교사가 타 문화권에 살면서 만인에게 적용 가능한 보편적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그 어려운 장애물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첫째, 당시 전반적으로 위생 상태가 좋지 못했다. 양반을 제외하고는 일반 대중의 위생 상태는 매우 열악했다. 우물과 샘이 시궁창과 가깝고 그 곁에서 빨래도 했다. 위생적이지 못한 데다 불편하기도 했다. 나중에 서울과 인천 등지에 공공 상수도를 설치하면서 점차 좋아졌다.
둘째, 선교사들은 우유를 즐겨 마셨지만, 조선인은 동물이나 먹는 우유를 사람이 먹으니 짐승 같다고 놀렸다.
셋째, 조선인이 소나 돼지를 도살할 때 목을 따 피를 그대로 받아 마시는 것을 선교사들은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넷째, 선교사의 아내와 자녀들이 아버지와 겸상을 하는 모습을 조선인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런 것들은 문명과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이다. 그런 것들은 쌍방적 측면이 있다. 이런 차이와 오해와 편견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동화되면서 해결되었다.
885년 문을 연 제중원에는 연간 만 명의 환자가 방문할 정도로 융성했다. 알렌과 조선 왕실 간의 좋은 관계는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선교 불가능이 가능한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제중원은 고위 관직뿐 아니라 신분이 낮은 하층민들까지 드나드는 곳이었다. 의료선교는 조선 사회의 신분제도를 허무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제중원은 훗날 남대문 밖의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다가 연희전문학교와 통합해 오늘의 ‘연세대학교’(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 의과대학)가 되었다. 1893년 11월 에비슨(O. R. Avison 어부신, 1860-1956)이 제중원의 원장이 되어 재정적 책임을 맡은 장로교 선교회의 기관으로 체제를 변경했다. 에비슨은 안식년에 미국에서 세브란스(L. H. Severance, 1838-1913)로부터 5만 달러의 후원금을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 1904년 9월 23일 병원 건물을 증축하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명했다.
1885년 입국한 북감리교 의료선교사 스크랜턴은 정동에 최초의 민간인을 위한 ‘시병원’(侍病院)을 세우고 가난한 자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물론 병원에 예배실을 두고 복음을 전하는 일도 겸했다. 스크랜턴은 더 가난한 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1894년에 남대문 근처 빈민 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다. 이렇게 상동(지금의 서울역 근처)으로 옮긴 병원에서 나중에 ‘상동교회’가 생겼다. 후에 정식 병원은 아니지만 간단한 치료와 약을 나눠 주는 ‘시약소’(dispensary)를 서대문 밖 애오개(아현)와 동대문에도 마련했는데, 그것이 아현교회와 동대문교회로 발전한다.
‘보구여관’(保救女館)은 1887년 10월 20일 감리교 여선교사 미스 하워드(Miss. Dr. Meta Howard, 1858-1932)가 이화학당 안에 세운 한국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이다. 명성황후가 친히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1892년 동대문에 분원을 설치하고 ‘볼드윈시약소’라고 했는데, 1899년 본원을 분원과 합쳐 나중에 ‘동대문부인병원’이 되었다. 스크랜턴과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이 ‘보구여관’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남녀가 유별한 전통으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나중에 로제타 홀(Rosetta S. Hall 허을, 1865-1951)이 이어 받아 운영했는데, 이때부터 한국 여성들에게 의료 교육을 실시했다. 그중에 박에스더(김점동, 1877-1910)는 미국 존스 홉킨스 의대에서 공부하고 귀국해 1901-1910년까지 한국인 최초의 여의사로 일했다. 그녀는 과로로 폐질환에 걸려 사망했다. ‘동대문부인병원’은 현 이화여자대학교병원이 되고,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현재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이어진다. 홀 가문의 한국 선교 역사를 보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서울에서 시작된 의료선교는 1890년부터 지방으로 확장되었다. 주로 장로교 의사들은 서울에서 활동하고 감리교 의사들은 지방에서 사역했다. 호주 선교사들은 부산, 북장로교 선교회는 평양, 성공회는 인천에서 주로 사역했다. 평양에는 ‘기홀병원’(1893)과 ‘제중병원’(1895), 대구에는 ‘동산병원’(1899)과 ‘나병원’(1913), 청주에는 ‘진료소’(1912), 부산에는 ‘일신병원’(1893)과 ‘나병원’(1910), 전주에는 ‘예수병원’(1904) 등이 생겨났다.
느리지만 확실한 방법 교육선교
조선의 교육기관으로 ‘서당’과 ‘향교’가 있다. ‘서당’(書堂)이 초등학교라면 ‘향교’(鄕校)는 중등학교다. 사립으로 운영된 중등교육기관으로 ‘서원’(書院)도 있다. 대학 수준으로는 성균관이 유일한 교육기관이다. 1911년 통계에 의하면 서당 16,540개로 학생은 141,604명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이 개화를 시도하면서 근대식 학교를 하나 세웠다. 그것이 ‘육영공원’(育英公院)이다. 일찍이 견미사절단으로 미국을 다녀온 민영익은 공립학교 제도에 감탄했다. 그는 근대 교육을 감당할 학교에 대한 노하우와 교사를 보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미국은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 원하는 유니온 신학교 출신 길모어(G. W. Gilmore 길모 吉毛, 1884-1984), 벙커(D. A. Bunker 방거 房巨, 1853-1932), 헐버트(H. B. Hulbert 허할보 許轄甫, 1863-1949) 등 세 명의 교사를 보냈다.
미국 정부 교육위원회 위원장이던 이튼 장군이 독실한 신자여서 가능했다. 이들은 1886년 9월 고종의 허락을 받고 30명의 학생들을 받아 ‘육영공원’에서 근대식 교육을 시작했다. 개혁 의지가 별로 없는 양반의 자제들과 현직 관료들이 이 학교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변화에 소극적이어서 별 교육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의료선교는 자연스럽게 교육선교와 연결되었다. 병원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의학 교육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1885년 제중원이 시작된 후 1년이 지나 1886년 4월 10일 조선인을 위한 의학 교육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시작이다. 언더우드 목사가 교사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고, 알렌과 헤론이 해부학과 생리학을 가르쳤다.
1899년 정식 학교로 인가를 받아 한국 최초의 의학 교육기관으로서 근대 고등교육기관의 시작을 알렸다. 1908년 첫 졸업생을 배출하여 한인 의사가 나왔다. 언더우드가 1886년 설립한 경신학교(1905년 정식 등록)를 1915년 ‘연희대학’으로 발전시켰는데,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1920년대부터 협력하다가 결국 1957년 통합하면서 오늘의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학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람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다. 1884년 일본 주재 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가 일본을 방문했던 민영익과 김옥균의 중재로 고종에게 학교 설립 허락을 받았다. 아펜젤러는 1885년 8월 3일 첫 학생을 가르쳤고, 1886년 6월 8일 7명의 학생으로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했다. 같은 해 9월에 시작된 최초의 근대 국립학교인 ‘육영공원’보다 앞선다.
고종이 직접 지어 준 이름, ‘배재’(培材)는 ‘인재를 늘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32명의 학생이 몰려와 관심이 대단했다. 지금까지 서당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만 배웠지만, 이곳에서는 언어, 사회, 생물, 과학, 역사, 지리, 음악, 미술 등을 가르쳤으니 근대식 교육이 처음 시작된 것이다. 물론 학생들 중에는 선교사가 전해 준 성경을 읽거나 교회에 참석하고 세례를 받은 이들이 있었다.
1887년 두 명의 학생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게 되었다. 1887년 아펜젤러는 르네상스식 벽돌 건물(강의실.도서실.예배실)을 지었다. 현재 이곳에는 1916년에 지은 ‘동관’이 남아 있는데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배재학당을 나온 유명한 인재들이 많다. 이승만, 윤치호, 주시경, 나도향, 김소월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가 근대 한국에 미친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1886년 1월부터 부모가 없는 아이를 데려다가 고아원을 설립하면서 일종의 기술학교를 시작했다. 1886년 5월 11일 한옥을 구해 학생 한 명으로 시작한 ‘언더우드 학당’은 일종의 고아원이면서 학교였다. 이 학교는 나중에 1905년 ‘경신학당’(儆新學堂)으로 정착하여 ‘경신학교’의 모체가 된다. ‘경신학당’은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학교’라는 뜻이다. 1915년 3월 언더우드의 노력으로 ‘조선기독교학교’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연희전문학교’로 발전한다.
스크랜턴 선교사의 어머니 메리(Mary F. Scranton, 1832-1909)가 정동 미공사관 건너편 언덕에 초가집 19채를 구입해 200여 칸 되는 한옥 기와집을 지어 학교를 시작했다. 여성들을 위한 학교였다. 그것이 1886년 5월 31일에 시작된 ‘이화학당’(梨花學堂)이다. 먹고 자고 공부할 수 있는 기숙사를 갖추었으니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문이 열린 학교였다. 충청도에 사는 한 가난한 선비의 딸 이경숙은 신혼 3일 만에 청상과부가 되었는데, 스크랜턴 대부인의 친절함에 감동을 받아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후 나중에 최초의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 교사가 되었다.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은 다음 해 명성황후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다. 배꽃이라는 뜻의 ‘이화’(梨花)는 조선 왕실의 문양이며 동양 미인을 상징한다. 이화학당은 현재 정동 이화여고 자리에 있었는데, 한옥 교사 자리는 이화여고 본관 앞 잔디밭이다.
알렌이 살던 정동 집에서 1886년부터 호톤(Lilas S. Horton), 헤이든(Mary E. Hayden) 등 독신 여선교사들이 살았는데 이곳에서 ‘정동여학당’(貞洞如學堂)이 시작되었다. 1887년 6월 언더우드가 고아가 된 다섯 살배기 여자아이를 데려다 키우며 교육시켰는데, 간호사 엘러스가 이 아이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장로교 최초의 여자 학교가 세워졌다.
1895년에 지금의 종로5가 연지동으로 이전했고, ‘연동여학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1886년 1월부터 부모가 없는 아이를 데려다가 고아원을 설립하면서 일종의 기술학교를 시작했다. 1886년 5월 11일 한옥을 구해 학생 한 명으로 시작한 ‘언더우드 학당’은 일종의 고아원이면서 학교였다. 이 학교는 나중에 1905년 ‘경신학당’(儆新學堂)으로 정착하여 ‘경신학교’의 모체가 된다. ‘경신학당’은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학교’라는 뜻이다. 1915년 3월 언더우드의 노력으로 ‘조선기독교학교’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연희전문학교’로 발전한다.
스크랜턴 선교사의 어머니 메리(Mary F. Scranton, 1832-1909)가 정동 미공사관 건너편 언덕에 초가집 19채를 구입해 200여 칸 되는 한옥 기와집을 지어 학교를 시작했다. 여성들을 위한 학교였다. 그것이 1886년 5월 31일에 시작된 ‘이화학당’(梨花學堂)이다. 먹고 자고 공부할 수 있는 기숙사를 갖추었으니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문이 열린 학교였다.
충청도에 사는 한 가난한 선비의 딸 이경숙은 신혼 3일 만에 청상과부가 되었는데, 스크랜턴 대부인의 친절함에 감동을 받아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후 나중에 최초의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 교사가 되었다.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은 다음 해 명성황후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다. 배꽃이라는 뜻의 ‘이화’(梨花)는 조선 왕실의 문양이며 동양 미인을 상징한다. 이화학당은 현재 정동 이화여고 자리에 있었는데, 한옥 교사 자리는 이화여고 본관 앞 잔디밭이다.
알렌이 살던 정동 집에서 1886년부터 호톤(Lilas S. Horton), 헤이든(Mary E. Hayden) 등 독신 여선교사들이 살았는데 이곳에서 ‘정동여학당’(貞洞如學堂)이 시작되었다. 1887년 6월 언더우드가 고아가 된 다섯 살배기 여자아이를 데려다 키우며 교육시켰는데, 간호사 엘러스가 이 아이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장로교 최초의 여자 학교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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