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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양승훈 교수의 기독교 세계관

by liefd 2024.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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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점 천국에서 받을 상은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속사람, 즉 우리의 됨됨이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적 동기, 중심의 모습이 천국에서 받을 상을 결정하리라 믿는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감옥에서 사는 것과 같다. 창살없는 감옥이다, 이 감옥에는 검사의 기소도, 판사의 논고도 없지만 수감된 사람은 스스로 종신형을 살고 있는 것이다.

 

좋은 학벌이나 지적인 능력 등은 단지 다른 사람들을 섬길 의무가 많음을 의미할 뿐이다. 학력이나 학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귀중한 것이 세상에는 참 많다. 성실, 겸손, 정직, 신의 등은 학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비하면 학벌이나 가계는 아무 것도 아님을 발견하였다(3:5-6). 열등감은 사단의 속임수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훨씬 더 귀중한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가리고,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릭은 노숙자와 마약 중독자, 매춘부를 도덕적 상대주의의 산물로 보면서 사회가 지불하지 못한 계산서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은 탁상공론만을 할 때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계획이 섰으면 실천으로 옮길 때입니다. ”

 

이메일을 통해 전달되는 트리니티 웨스턴대학교 교내소식 중 자주 눈에 띄는 것은 환송식이다. 입학처 접수원으로 일하던 수잔이 두 주 후인 725일자로 우리 학교를 떠나 토론토로 가게 되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밝은 미소와 친절한 안내로 우리 ㅇ비학처를 찾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수잔은 우리 보고서에서 성실하게, 그리고 창의적으로 일하면서 입학 업무가 차질없이 이루어지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수잔이 그동안 우리 입학처에서 함께 근무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떠나는 수잔을 위해 조졸한 자리를 마련하였사오니 오셔서 떠나는 수잔과 작별인사를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서구인들은 이런 이별이 기술을 어디서 배웠을까요? 돈 들지 않고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는 환송식을 하려니 칭찬만 한 아름 안겨주는 환송식을 끝내는 것이다. 이런 관습은 오랜 유목민으로 살아온 서구인들이 조상에게 배운 지혜가 아닌가 생각된다.

 

창세기 31장에는 떠나가는 야곱과 그의 와삼촌 라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야곱은 야반도주를 한다. 하나님의 강압적인 간섭으로 야곱과 라반은 이별의 기술을 배웠다.

 

미국에 사는 여러 소수 민족 중에 한인의 빈곤율이 가장 높다. 이러한 수치는 한국인의 빈곤율이 아니라 탈세율 아닐까?

반도체 물성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론과 상반된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데 왜 그리스도인은 사소한 차이를 가지고 서로 총격전을 벌일까? 성경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4:15). 사랑으로 얘기해도 진리가 아니라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아무리 진리를 얘기해도 사랑이 없다면 상대를 감동시킬 수 없다. 우리는 언제쯤 진리란 미명하에 형제 미워하기를 그칠 수 있을까?

 

미국 역사상 최고 부자였던 록펠러는 52세때 근무력증, 탈모증, 불면증, 웨궤양 등으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막대기처럼 말라갔다. 그때 그의 삶을 바꾼 것은 누가복음 638절 말씀이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후히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주는 것으로 인해 록펠러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으며 무려 98세까지 장수했다. 최근 심리학자들은 실제로 주는 사람이 더 건강하고 행복하고 더 장수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금연보다도 주 4회 운동보다도 구제가 장수에 더 좋다고 한다. 심리학자인 브라운 교수는 단도입적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킨다.

 

바둑에 복기라는 말이 있다. 전문 기사들이 완전한 복기를 하는 가장 큰 비결은 의미라고 한다. 한 알, 한 알을 무심히 놓지 않고 상대방과 자신의 모든 정황을 따지고 분석한 끝에 최적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알을 놓는 것이다.

 

기억력에 관해서는 글을 쓰는 사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전문기사가 완전한 복기를 하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도 한 문장 한 문장 의미를 생각하면서 쓰기 때문에 자신의 글을 기억하는 것이다.

 

바이러스를 만드는 사람들의 그런 악한 심보는 도대체 어디서 나올까?

 

첫째, 거짓 전능을 확인하려는 사단에게서 온다(3:5).

 

둘째, 바이러스는 만드는 마음은 자기 이름을 나타내려는 마음에서 나온다(11:4).

 

셋째, 바이러스를 만드는 마음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인 도둑의 마음이다(10:10).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717절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지금까지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손해본 것이 없었지만 이제는 확실히 손해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제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하려는 마음이었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isse oblige)란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 즉 귀족의 의무를 말한다. 초기 로마 시대에 왕과 귀족들은 투철한 도덕 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을 가졌다. 로마사회에서는 사회 고위층의 공공 봉사와 기부, 헌납 등의 전통이 강했고, 이러한 행위는 의무이자 명예로 인식되면서 자발적이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정 시대 이후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고 귀족들이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은 퇴색되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지도자들의 도덕적 수준이 낮은 것이다. 노블리스 오브리제 정신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이것은 원래 성경에서 나왔다. 예수님이 이를 몸소 실천하셨다(2:6-8).

 

찰스 스원돌은 부모가 자녀를 그 은사에 맞게 인도하지 않으면 자녀는 일평생 행복할 수 없으며 결국 언젠가는 그 길로 떠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그 많은 병자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고치신 적이 없으시다. 병자들을 모아 놓고 한꺼번에 고치신 적도 없다. 예수님의 사역은 바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광심과 사랑에서 출발하였다.

 

캐나다 교육은 실습을 위주로 하는 실용적 교육인데 한국은 이론적인 주입식 교육을 한다고 비판한다.

우리 교육의 진정한 위기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우리 부모들의 문제다. 실상 무너진 것은 학교교육이 아니라 가정교육이요 부모교육이다.

 

다음은 우리의 의식 문제다. 우리가 선진국보다 부족한 것은 자기 것을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우리 교육의 진정한 위기는 자존감의 위기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어도 우리가 자신의 삶을 예배의 일부로, 자신의 직업을 거룩한 소명으로, 자신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여기고 구별된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신앙생활과 경제생활은 일정한 관계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무종교임보다는 종교인이, 타종교인보다는 기독교인이, 카톨릭 신자보다는 개신교인이 더 잘 산다고 했다. 그리고 개신교인의 경제가 발전하는 이유를 교회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바른 신앙과 생활이 바른 경제와 건전한 부를 약속한다는 것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어느 늙은이가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 코끼리 한 마리를 끌고 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여러분 이 코끼리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에게 큰 상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외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슬픔에 몸부림치며 잠 못 이루던 얘기를, 어떤 사람은 일찍 부모임을 잃고 고아원을 전전하며 굶기를 밥 먹듯이 하던 어린 시절 얘기를, 또 어떤 사람은 거지처럼 밥을 얻어먹으면서 엄마 찾아 삼천리를 하던 얘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코끼리는 눈만 껌뻑거릴뿐 도대체 눈물을 흘릴 생각을 하지 않앗다. 그때 나이든 어느 중년 신사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코끼리에게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그랬더니 그 목석같은 코끼리가 눈물을 주럭주럭 흘리는 게 아닌가! 궁금해서 못견디던 사람들이 그 중년 신사에게 몰려와서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들려주었기에 코끼리가 저렇게 슬프게 눈물을 흘리느냐고 물었다. 그러지 그 사람은 이민교회; 얘기를 조금 해주었지요라고 대답했다.

 

다음으로 주인은 코끼리로 하여금 앞다리를 쳐들게 하는 사람에게 더 큰 상을 주겠노라고 했더. 사람들은 온갖 기가 막힌 얘기를 해주었지만 이번에도 앞 다리는커녕 꼬리도 움직이지 않앗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코끼리를 울린 사람이 다시 코끼리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눈이 휘둥그래진 코끼리가 몸을 벌벌 떨면서 제발 그 일만은...“하는 표정으로 앞발을 번쩍 들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와 이번에는 또 무슨 얘기를 해주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코끼리에게 , 너 이민 목회 한번 해볼래라고 물었다고 한다.

 

해외 나온지 10년이 지나면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민병이라는 것에 걸린다. 이 병은 일종의 정서적 부적응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민을 오면 1년에 1도씩 돈다는 말도 바로 이민병을 지칭하는 말이다.

 

모든 매체가 외모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예쁘니까 용서해 준다.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라틴어로 우상이라는 단어가 “idolum”은 모습 영상을 의미한다. 우상숭배가 눈으로 보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눈이 진리를 보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네덜란드의 하웃즈바르트는 우상숭배 형성 과정을 설명하면서 우상숭배가 성장하면 이데돌로기가 된다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순간에 발생하며 이데올로기의 특징으로 다음 몇 가지를 들고 있다.

 

1. 목표가 비상한 중요성을 갖는다. 외모 중시는 당연히 아름다운 삶을 목표로 삼는다.

 

2. 수단이 제약없이 활동한다. 아름다운 외모를 갖기 위해 기능이나 형태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도 보기에 안좋다는 이유만으로도 성형수술도 마다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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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목적이 참된 가치 기분과 규범을 왜곡한다. 외모를 지나치게 가꾸는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사랑의 삶에 대한 가치 규범을 왜곡한다.

 

4. 목적이 그 자체로 거짓 원수를 만든다. 외모가 뒤떨어져서 취직이 안되는 등 외모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창조해 낸다. 그러므로 외모 가꾸기, 즉 성형 수술을 한 후 성공적 삶을 산 사람들에 대한 거짓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구해야 합니다(27:4). 제임스 돕슨 박사는 그의 저서, 자신감있는 자녀로 키우자에서 현대를 지배하는 것은 지식과 외모라고 했다.

 

그러면 외모에 대한 열등감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성경은 진정한 자유는 외모가 아니라 진리를 통해, 즉 진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8:32).

 

어떤 사람을 성직자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다음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먼저 성직자는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 즉 거룩한 일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목사나 선교사, 선교회 간사, 신학교 교수 등 소위 전임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조건을 만족한다.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만이 성직자인가?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와 관련된 일뿐 아니라 세상의 일반 직업도 성직에 포함될 수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바로 세상의 직엄들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일을 소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성직자가 될 수 잇다.

 

더 중요한 일은 바로 그 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는 가이다. 말로는 성직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성직이 아니다.

 

전문가에 따르면 우울증은 상실감이 내면화되어 무력감과 낮은 자존감에 빠지는 정신질환이다. 우울증에 걸리면 슬프고 침울해지며 고통, 긴장, 두려움, 죄의식 공허감 등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잃게 되어 심하면 자살도 한다.

 

우울증이란 절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상황보다는 자신에게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주고나적인 확신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병이라고 할 수 있다.

 

덴마크 실존주의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며, 절망이란 자기 상실이고, 이것은 결국 자기를 존재하게 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생기는 문제라고 보았다. 따라서 근원적 절망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는 것 밖에 없다.

 

1960년대 어느 날 우주 과학자들은 미래에 쏘아 올릴 인공위성의 궤도를 결정하기 위해 컴퓨터로 현재부터 1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태양과 달의 궤도를 조사했다. 그런데 계산하는 도중 그들은 정확하게 24시간이 빠진 것을 발견했다. 과학자들은 여호수아 시대에 전체의 궤도를 조사한 결과 23시간 20분 동안 전체들이 정지했다는 결과를 얻었다(10:13).

 

그 과학자는 40분의 행방을 열왕기하 2011절에서 찾았다. 히스기야 왕의 생명을 15년간 연장시킨다는 증표로 일영표의 그림자를 10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는데 24시간(10/360)=2/3시간=4-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방법으로 성경의 무오성을 증명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종교개혁자 칼빈은 성경을 안다고 하면서 성경 밖의 다른 지식이 없는 자는 성경을 모르는 자라고 했다.

창조-타락-구속의 틀에서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여 실천하려는 것이 세계화 운동의 핵심이다.

어떻게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에 기초한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것은 가정과 직업, 학문을 포함한 개인적인 삶의 전 영역에서 사회나 국제정치, 전 지구적 문제들에 이르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적용되는 것을 목표로 부단히 노력하고 훈련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건강한 직업관과 교회관을 갖게 하는 것이 세계관 목회의 핵심이다. 그러면 그렇게 할 때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첫째, 성도들이 신나게 살아갈 수 있다.

 

둘째, 목회자는 목회가 쉬워진다.

 

셋째, 세계관 목회는 건강한 교회의 기초가 된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성도, 건강한 목회자,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기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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