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인내의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동안 잘 참았는데 더 이상은 못참겠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오래 참았던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본인이 신앙생활을 잘 한 것 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잔치를 마치고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봐 번제를 드릴 정도입니다. 간혹 한 번씩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신앙 생활을 칭찬하실 정도였습니다. 7남 3년둔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부모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효자 효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 않은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하루 아침에 자기의 전 재산이 다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사랑하는 10남매가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태풍이 집 네 모퉁이를 치는 바람에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이 시련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온 몸에 종기가 나서 얼마나 가려운 지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어야 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 본 그의 아내는 남편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폭언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내에게 당신이 말하는 것 보니깐 어리석은 여자의 말과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않겠느냐하고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누구일까요? 야고보서 5장 11절입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는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하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욥은 그 누구보다 인내의 한계를 철저하게 느낀 사람입니다. 자기의 재산이 하루 아침에 허무하게 사라질 때 욥은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를 폭발할 뻔했습니다. 10남매 전부가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떠날만도 했습니다. 자기의 몸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탄식할만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래도 인내하였습니다. 그는 오래 참음의 본을 보였습니다.
인내의 한계 피할 것인가, 직면할 것인가?
야고보 저자는 오래참음과 안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래참음이란 잘못에 대해 성급하게 보복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는 고난에 쉽게 압도되지 않는 기질을 말합니다. 인내의 한계를 언급하면서 농부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농부는 씨를 심고 파종하면서 수확하기까지 오래 참아야 합니다. 제 때에 비가 오지 않으면 속이 탑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제때 오지 않으면 그해 농사는 망치게 됩니다. '이른비'는 10월에서 11월에 오는 비를 가리키며 '늦은 비'는 4월에서 5월간에 오는 추수 직전의 비를 말합니다. 이른비는 10월에 오는 것으로 씨를 뿌리기 전에 땅을 준비ㅏ시텨 주고 기다립니다. 늦은 비는 3월과 4월에 내리는 비로 곡식을 영글게 하고 풍작을 위해 내리는 비입니다.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주시리라는 약속을 굳게 믿어 기대하고 인내합니다. 농부가 이렇게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은 귀한 열매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구원의 완성을 기대하며 심판하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참는 자가 복이 있다는 일반 은총의 원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신자는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사람인지라 인내의 한계를 느낄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부부 관계에서도 인내의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녀를 키울 때에도 뚜껑이 열릴 때가 있습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모습 때문에, 일하는 스타일이나 잘못된 태도로 인해 속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피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이번에도 참아야 합니다. 이것까지도 참아야 합니다.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오래 참아야 합니다.
다이아몬드가 땅 속 깊은 곳에 고압과 고열의 압력을 받으면서 견디면서 보석이 된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인내의 한계를 느낄 때 믿음의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4절에 보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마지막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인내의 한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인내하는 것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 주셔야 가능합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 하반절입니다.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하나님께서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오래 참아야 합니다(벧후 3:9). 우리는 인내의 한계를 느낄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도저히 인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인내할 때 힘들다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5장 9절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느니라.”인내할 때 원망하면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인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불평할 때 그들은 가난안 땅에 들어가지 모하고 광야에서 멸망하여 죽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0-11절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기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우리는 공동체를 지키고 세우는 일에 있어서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의 한계를 느낄 때 마음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인내의 한계를 느낄 때 마음이 약해져서 포기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저히 인내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마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굳게 할 수 있을까요? 에베소서 3장 16절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야고보 저자는 인내의 문제를 가르면서 기도와 연결시킵니다(13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랫동안 인내할 때 약속의 복을 주십니다. 히브리서 6장 14-15절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75세 때에 갈대아 우리를 떠나서 약속의 자녀를 얻기까지 25년동안 오래 참았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축복의 약속을 받고도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축복의 문턱에서 포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랫동안 참을 때 약속의 복을 이루어주십니다.
우리는 인내의 한계를 느낄 때 어떤 마음으로 견디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인내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결말이 무엇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인내하는 욥에서 곤경에서 돌이키사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때문에 참고 인내하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재림의 때는 구원의 완성의 때이며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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