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미국 부대통령을 지낸 엘 고어라는 사람이 지구 온난화라는 주제로 만든 영상이다. 엘 고어는 그 안에서 거짓으로 가려져 있거나 무관심에 의해 버려졌던 ‘진실’을 파헤친다. 우리는 영상을 보면서 잊었거나 무심코 무시했던 진실과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 고발적인 다큐멘터리는 또 있다. 대표적인 예로 마이클 무어를 들 수 있다. 그는 2002년 ‘볼링 포 콜롬바인’과 2004년 ‘화씨 9/11’로 인해서 주목받은 감독이다. 이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사회의 음지의 이야기를 수면 위로 꺼냄은 물론 그것의 내부를 끌어내어 우리들 앞에 철저히 해체한 점이다.
그들은 사회 현상의 ‘현재’를 낱낱이 들어냄은 물론 이거니와 원인을 분석하고 우리에게 해결책으로 가는데 도움이 되는 퍼즐조각들을 하나씩 나누어 준다. 물론 그 해결책이 모두가 원하는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사이비 종교집단이나 어설픈 동정에 근거를 둔 입 발린 소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들어 사회 전반에 ‘힐링’이라는 수상한 단어가 널리 퍼지고 있다. 하나의 유행을 넘어서서 병적으로 정치, 문화, 사회에 퍼져가고 있다. 수상하다. 도대체 ‘힐링’은 무엇이며 어째서 우리는 이것에 목말라하는 것일까? 힐링은 2012년 문화 트렌드로 떠올랐다.
김난도씨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200만 부가 팔렸으며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100만 부 이상 팔렸다. 그것뿐인가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는 연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사회 유명 인사들은 서로 저마다 힐링 전도사를 자처하며 ‘아픈 서민’, ‘아픈 청춘’을 치유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우리 시대의 힐링 문화에는 진정성이 없다. 게다가 해결책도 없다. 말과 상품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시대에 지치고 뒤쳐진 무리에게 말한다. ‘너의 고민을 말해봐, 들어줄게’ 그리고 결론을 맺는다. ‘힘내.’ 그들은 우리에게 악한 현실과 부당한 사회, 그리고 도대체 왜 우리가 이렇게 비틀어진 프레임 안에서 익숙해야만 하고 익숙해져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우리에게 ‘세상은 원래 그렇게 생겼고 그래서 넌 그 안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워야해’ 라고 말할 뿐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구는 둥글다고 하여 재판에 회부되었던 태도처럼 우리 사회에는 변화를 위한 힐링 전도사가 필요하지 사이비 종교 집단 주교와 같은 힐링 전도사는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글을 쓰고, 말을 하고, 방송을 하면 마치 힐링이 된 것이라도 된 것처럼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대안도 없이 고뇌도 없이 사색도 없이 그렇게 사회의 가장 심각한 시스템적 오류도 힐링이라는 덧칠을 하면 보이지 않는다.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책이 있다. 장하준교수가 쓴 책인데 이 책은 자유무역시장의 문제점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는 책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리가 흔히 선진국이라고 일컫는 미국, 일본, 독일, 영국과 같은 나라들은 18세기, 19세기에 산업혁명과 동시에 가파른 성장률을 보였는데 이는 바로 국가적 차원의 보호무역주의, 관세를 높여 자국 상품을 보호하고 상대국의 무역장벽을 낮춰 상대적 이익을 보는 전략을 선택하여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WTO, IMF, 세계은행이 출범하면서 이들 선진국들이 주축이 되어 이제 막 올라오는 개발도상국들에게는 보호무역주의가 아닌 자유무역주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했는데 보호무역주의보단 자유무역주의가 더 발전하는데 좋은 것 같다’ 하지만 자유무역주의는 보편적 진리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선진국들은 보호무역주의를 채택했을 때 더 빠른 성장률을 보였다. 공정무역이 우리의 경제 시스템의 사회적 치료책인양 주장하지만 실상 이는 선진국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함정과 같은 것이다. 교묘하게 만들어진 토끼 덫은 토끼 자신이 잡혔는지도 모르게 만들어져 있다. 다시 바라보자 경제사회의 나쁜 사마리아 인들이 선진국을 대표하는 악의 삼총사, WTO, IMF, 세계은행, 라면 우리 사회에 전반에 퍼져있는 힐링 신드롬의 나쁜 사마리아 인들은 누구일까.
사회는 공동체(Community)이다. 발전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모두의 의견’이 필요하고 적절한 ‘비판’과 ‘개혁’이 필요하다. 고여 있는 우물은 썩기 마련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제 각각 의견을 가지고 있다. 이 의견들은 반드시 수렴되어 반영되고 다듬어져서 다시 사회 전반에 뿌려지게 해야 한다. 사회가 만약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색하고 고뇌하여 문제의식을 가지고 발언을 하여 수정하고 수정하여 의견을 표출해야 한다. 이것이 사회가 발전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힐링 문화를 다시보자. 우리 사회의 많은 미디어, 유명인사, 그리고 우리 저마다는 우리 스스로의 내부의 문제뿐 아니라, 외부의 어떤 원인으로 초래된 것 조차 겉만 도려내고 그 속은 다스리지 않는다. 다시말해 ‘외과수술’적 치유를 시도하는 것이다. 물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고민을 들어주며 심리적 안정을 찾아주는 ‘요즘의 힐링’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우 복합적이고 구조적이며 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단지 ‘개인의 문제’인 양 치부하여 ‘외과수술하듯’ 해결하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배신으로 볼 수밖에 없다.
‘힐링’은 이윽고 특정한 ‘상품’의 이미지로 탈바꿈하였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될 만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만한 자원은 상품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힐링’이라는 상품은 사회의 소외 계층과 경쟁사회와 배금주의가 만연한 우리 사회의 피해자들에게 상당히 고가의 상품이라는 점이다.
‘힐링’을 상품화하는 자들, 이들을 나는 ‘힐링’신드롬의 나쁜 사마리아 인이라고 본다. 이들의 세태는 자본주의가 낳은 최악의 ‘사이비 종교 집단’이다. 이들의 지지자들은 보호무역주의를 따랐으나 올라갈 사다리를 차버린 선진국들과 비슷하다. 사회의 어느 정도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기득권층이고 현재의 사회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자들이다.
이들은 엄청난 자본력과 사회 장악력을 이용하여 ‘힐링’이라는 아편을 팔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댓가는 처절하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던 사회의 다친 사람들은 일시적인 위안과 고통을 잊기 위해 ‘힐링’을 피운다. 그 아지랑이 속에는 사회의 비판의식과 새로운 대안, 그리고 더 나은 공동채를 위한 제언이 사라진다. 잠시의 고통을 잊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나 뼈아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사실 ‘힐링’이라는 말이 2012년에 대두되었긴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는 알게 모르게 ‘힐링’을 하고 있었다. 인간 사회는 공동체 사회로 함께 더불어 가는 사회이다. 따라서 우리네 조상들은 서로 서로 도와가는 ‘상부상조’, ‘품앗이’와 같은 공동체 활동을 해왔다. 이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문화이다.
그런데 문화적 의미의 ‘힐링’이 자본주의라는 사상과 맞물리면서 비틀어졌다. 우리는 교묘한 함정에 빠진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힐링’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축약하고 검열하는 ‘나쁜 사마리아 인’들이 사라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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