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택한 성도가 되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주권에 이끌리는 사람(11-12절)
첫째, 누가 나를 택했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이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11절).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12절).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의 주체적 결정권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그 독립된 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사방에 의지할 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배도자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자로 양쪽에서 모두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예수님과 직접 대면하여 생활한 적이 없기에 사도로서 자격이 없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긴 복음, 즉 그가 전하는 복음의 정당성이 확보될 수 없기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참으로 축복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하는데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믿어주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의 출처를 어떤 사람에게 두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두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체적인 역사를 인정하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복음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사도된 것에 대해 특별히 이것을 강조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절). 이런 의식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지만, 나를 택하신 분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나를 부르셨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내가 택정함을 입었든지 지금 내가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로 말미암았다는 고백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의지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선택에 의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맛디아처럼 제비뽑아 하나님의 사도의 반열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은 자기를 몰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는데, 누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실수하신 것 같은데요? 그 사람은 한됩니다. 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 사람 과거가 좀 그래요. 포기하시고 다른 사람 선택하시죠!” 이렇게 할 사람있습니까?
바울은 이 은혜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한 적도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사람이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서신서 곳곳에 이런 표현을 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김집사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람이 아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택정함을 입은 감격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길 축원드립니다.
2. 과거가 회복된 사람(13-15절)
둘째, 하나님께 택정함을 입은 사람이라는 것은 과거에서 참으로 자유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택정함을 받고 좋은 일에 헌신하려고 할 때 마귀는 늘 과거의 행적과 실수를 우리 앞에 펼쳐 놓고 너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비방합니다. 그 독화살에 우리는 꼼짝을 못하고 쓰러져 과거의 독화살을 붙들고 평생을 신음하며 인생을 낭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거에 즐거웠던 것들이 오늘을 저장 잡고 놓지 않은 경향이 우리의 삶 속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사도로 사역하는데 가장 큰 장애거리의 하나는 자신의 과거의 행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대단한 일인 것 같았지만, 지금은 엄청난 장애거리였습니다. 없었으면 좋을 뻔한 과거였습니다. 그의 과거의 엄청난 실수는 자신에게 스스로 자격지심이 생기게 할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알고 있어 자신을 신뢰해 주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바로 서있는지 거꾸로 서있는지 분간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1절에서 자신있게 자신의 과거를 밝히면서 “너희도 들었거니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 소문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그것을 숨길 수 없었기에 오히려 스스로 시인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돌이킬 수도 지울 수 없는 과거에 대해 그는 신학적인 승화를 통해서 해소해 나갑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택정함을 입었다는 고백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라고 반전을 시키고 있습니다. 도저히 자격이 없는 현저한 과거의 죄악에 대해 주눅 들지 않고 ‘그러나’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15절). “그런 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택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쩔래!” 하고 오히려 그의 대적자들과 사탄에게 당당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시간설정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정하실 때 그 때가 언제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지금 회개한 이후가 아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실수마저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 속에 있었음을 새롭게 깨달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택하신 시점이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시점이 아니고, 태어나기도 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의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13절).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16절). “모태에서부터 나는 당신께 의지하였고,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당신은 나의 힘이었으니, 나는 언제나 당신을 찬양합니다(시 71:6).”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시 22:10).”
그렇다면 우리의 과거의 실수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 죄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사함 받고 나니, 그 죄를 사용하시어 선으로 바꾸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는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일지라도 주님 앞에 나아올 때 가장 효과적인 은혜의 도구로 쓰일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실수 때문에 더욱 헌신적이 되기도 하고, 더욱 겸손하게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전능하시기에 결코 낭비가 없으신 분이시며, 주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밝은 빛을 통해서도 축복하시고 성장시키시지만, 어두운 폭풍우 속에서도 삶을 정하게 하시고 더 풍부한 영양을 우리 인생 속에 공급하시어 성장시키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그 고난이 죄악으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애매히 당하는 것이든 하나님 앞에 드려진 과거는 위대한 미래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무의식의 심연에서 우리의 생애를 짓누르고 있는 어두운 과거의 실수도 누구 앞에서나 언급할 수 있는 애착이 가는 내 인생의 일부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치유 받지 못한 과거의 실수와 죄는 그 사람을 정신분열이나 우울증이나 절망으로 몰아갑니다. 심한 죄책감으로 사람을 견딜 수 없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이 자유하게 되었듯이 아니 자유를 넘어 위대함으로 나아갔듯이 우리도 주님께 택함 받은 자로서 과거에서 온전히 자유하고 영광을 누리게 되길 축원드립니다.
3. 새로운 사명감으로 충만한 사람: 타인을 용인하는 사람(16-17절)
셋째, 하나님께서 택정하셨다는 것은 사명을 위해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택정함을 입은 사람은 새로운 사명감으로 충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택정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상상도 못했던 방향의 새로운 사역으로의 부르시는 사명의 초대로 받아 들였습니다. 과거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부르신 섭리, 이것은 자신의 구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명과 직결되는 놀라운 측면을 가지고 있음을 바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바울이 깨달은 바는 놀랍게도 “이방”에 예수를 전하게 하기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의 그 치명적인 죄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기를 어떻게 바꾸시는지 보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 즉 그리스도인들도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보내서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자기와 다른 사상이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놀라운 사실을 한 가지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도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 같이 훌륭한 성도를 죽게 만들었고, 죄없는 순수하고 착한 성도들을 감옥에 가둔 용서받지 못할 죄인입니다. 예수를 핍박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그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죄인인 자기도 택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자기가 개들로 취급한 이방인들도, 자기와 너무나 다르기에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대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 확 눈이 뜨이게 됩니다. 모두가 각각 하나님께 택정함을 받은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들이라는 의식입니다.
우리는 다르기에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이방인도 있고, 유대인도,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고, 아이도 있고 어른도 있기에 세상이 다채롭고 화려한 것입니다. 다들 택정함을 입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의 삶의 과정이 나와 차이가 날 뿐입니다. 주님이 오실 그날 택정함을 입은 사람들은 주님처럼 거룩한 모습으로 모두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자처하게 됩니다. 만약 자신의 죄성을 통감한 이런 바울이 아니라면 이방인을 구원의 대상으로 간주할 유대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울에 대해 적개심과 경계를 늦추지 않는 아나니아라는 성도에게 바울을 소개할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자신의 과거의 그 모든 실수와 죄를 이용하여 자기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몰아가시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여기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오고 있습니다. 즉 하나는 “혈육”이란 묘사를 보아 바울이 가깝게 지내던 유대교에 속한 사람들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이라는 묘사를 통해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인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의미합니다.
이 두 부류는 모두 바울의 전향에 대해 쉽게 용납할 수 없었던 집단들입니다. 유대교인들은 바울의 전향을 배도자로 이해하여 박해했고,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박해했던 과거행적에 대한 이미지로 인해 그의 사도성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 양쪽 모두에게 거부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두 집단에서 바울이 자신의 입지에 대해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즉 그가 유대인들에게는 14절에서처럼 지나치게 열심을 내었다가 하루아침에 예수쟁이가 되니 배반자요 원수가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를 죽이지 않고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심한 40명의 결사대가 조직될 정도입니다(행 23:12-13).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받았느냐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많은 교회를 핍박했었던 경력이 있고, 그 때문에 감옥에 아직도 감옥에 갇힌 형제와 자식을 둔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보고 이를 갈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가 사도로 나서서 큰소리치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분노한 대적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이방인들에게로 갈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과거가 자기를 몰아넣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주 예수의 구원의 놀라운 복음을 전하는 일이 이런 일이 없이는 결코 이방인에게 전해질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바울의 과거를 그렇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찬양한 것입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라”(롬 11:13). 하나님은 조금도 손해 보시지 않고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죄는 죄일지라도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택정하신 사람에게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과거는 낭비로 지워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은혜로 새롭게 재생되고, 과거가 현실에 막강한 비료를 주며, 미래를 향한 부요한 삶으로 사명이 충만한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자신을 옭아맸던 것이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놀랍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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