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랑으로 뜨겁게 봉사하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베드로후서는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신앙 전부를 함축시켜 주는 신앙보고서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승천 하신 이후 주님을 위하여 귀하게 쓰입받기를 원하는 그의 중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주님을 따르는데 앞장섰던 베드로의 믿음, 그의 성품 삶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도 어떻게 주의 일을 해야하는가를 크게 교훈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본질에 충실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을 보배로운 믿음(precious faith)이라고 고백합니다. 과거에 베드로는 의심이 많았던 인물입니다. 마태복음 14장 31절에 보면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며 물에 빠져들어가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으십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라고 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26장 56절에 보면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6장 72절에 보면 당신도 갈릴리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맹세하고 또 부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맙니다.
이렇게 의심 많은 베드로가 어떻게 보배로운 믿음으로 변하게 된 것일까요? 베드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열정이 있던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1-22))고 항변합니다. . 또한 예수님께 입 맞추며 예수님을 잡기 위해 왔을 때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자른 사람도 베드로입니다(요 18:10).
이와 같이 베드로는 불같은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배로운 믿음의 소유자로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의가 앞섰습니다. 무조건 나서고 덤벼들면 믿음이 좋은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뛰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열심이나 자기의 의에 의하여 솟아나거나 불타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보배로운 믿음이 무엇인지를 발견했습니다. 보배로운 믿음은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에 의하여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생기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4 장 13절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본문 3절 말씀입니다.“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믿음이란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이라고 베드로는 교훈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생명과 경건이 나옵니다. 믿음은 영광과 덕을 위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입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제 베드로의 믿음은 과거처럼 불안하거나 흔들리거나 혼란스러운 모습이 아닙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유업을 간직하는 보배로운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당신도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정말 존귀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베드로는 자신이 변화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힘으로 해보려고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열심히 배우고 결단도 하고 야단도 맞고 기도도 하고 병자도 고치고 정말 많은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의와 신기한 구원의 능력에 비하면 초라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일어난 새로운 변화는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고 높아지고 물위를 걷는 신비한 기적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일어난 변화는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4절입니다.“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보배로운 예수를 만났을 때 자신의 믿음도 보배롭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어떤 특별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보배로운 예수, 존귀한 예수를 발견하지 못하면 믿음도 사역도 보배롭고 존귀하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으로 보배로운 교회를 세우고 보배로운 사역을 하며 보배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합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세워진 믿음입니다.
2. 신의 성품으로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믿음만이 새롭게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보배로운 약속(precious promises)도 발견했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하나님으로 부여 받은 생명의 약속을 위하여 인간의 성품 대신 신성한 성품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적 자격이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신적 성품입니다. 산상수훈 가운데 온유, 긍휼, 청결, 화평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보배로운 약속을 향하여 가는 사람은 그런 영적 성품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치명적 약점이 있다면 그의 성품은 너무 인간적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과 형제를 용서하는 것에 대해서 말할 때도 일곱 번 정도면 되겠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최대의 용서는 일곱 번 정도라는 판단입니다. 사람을 일곱 번까지 용서한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달랐습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 왜 이렇게 까지 용서를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려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용서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하라는 것에 대한 결론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4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렇게까지 용서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무한대로 용서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무한대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적 성품이 필요한 것입니다. 본문 5-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즉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의 여덟 가지 성품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단어들 사이의 접속사 ‘더’라는 헬라어 카이(kahee)는 그 위에, 더욱더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한 가지 목표를 향하여 점점 극대화 되어 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과연 그가 말하려는 마지막 목표는 무엇입니까? 바로‘사랑’(Love)입니다. 최고의 신의 성품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출발하여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끝으로 사랑까지 전개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최고의 보배로운 것이 사랑입니다. 베드로에게 사랑은 신기한 능력입니다(3절). 큰 영광입니다(17절).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사람에게서 볼 수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신적 사랑은 전혀 다른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6:27-35절입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
인간적인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지만, 신적인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성품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후서를 쓰면서 사랑에 대해 17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8절입니다. “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베드로전서 4장 8절입니다. “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5장 14절입니다.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주님의 사랑은 특별한 사랑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일방적이었습니다. 주고받는 사랑이 아니라 항상 먼저 베풀어 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했던 원수 같이 행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이러한 베드로를 변화시켜 충성된 제자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역사는 베드로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8-9절입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말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당장 눈앞의 것을 보지 말고 멀리 보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성품으로 주의 사역을 하고 있습니까? 신의 성품으로 주의 사역을 해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돌보고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은 인간적 결심이나 각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대하는데 최고의 위력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교회도 살고 사람도 살립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교회이든 가정이든 사람이든 죽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신적 사랑으로 신적 성품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3. 마지막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본질에 충실한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는 신의 성품, 주님의 사역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마지막을 바라보는 삶을 살았습니다. 본문 10-11절입니다.“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여기서 베드로와 같은 우리들의 모습을 표현해 준 말이 ‘실족’(fall)이라는 단어입니다. ‘실족’이란 넘어지다(stumble). 베드로전서 2장 8절입니다.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베드로는 과거에 뼈저린 실족의 경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실족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하여 자신과 우리들에게 그의 비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0절에 보면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11절에 보면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두 가지를 지키는 삶을 살아야 자신이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더욱 힘썼습니다(5절, 10절).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힘썼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더욱 힘썼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나라가 아닌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기를 더욱 힘썼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8-13절에서 최고의 정상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얼마나 굳게 하며 흔들림 없이 힘써 감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시대 앞에, 교회 앞에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 삶입니까? 성도는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고 인생의 마지막을 향하여 갈수록 삶이 좌우로 치우침이 없어야합니다. 그리고 바라보는 것이 확실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정말 마땅한 것입니까?(11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12절). 이런 사람은 이 세상의 썩어질 것에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버려야할 것을 붙잡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생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명에 충실’합니다. 사람들은 부귀영화, 길융화복, 무병장수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주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날을 기다립니다. 간절하게 사모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할까요? 이 세상은 영원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잠시 머무를 곳입니다. 만약 이 세상이 우리의 인생의 종착지라면 더 좋은 집을 짓고 더 큰 집을 지으며 성을 높이고 망대를 높여 아무도 무너뜨리지 못하는 요새를 만들면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약 4:14). 잠시 왔다 가야하는 곳일 뿐입니다.
고린도후서 5:1-2절입니다.“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베드로는 지난 날의 부끄러운 제자의 모습에서 영광스런 제자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주의 일을 크게 이루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복음 전파와 초대교회의 부흥의 역사를 일으킨 주인공이었습니다. 마침내 당당한 최후의 순교자로서 살았던 용기있게 자기십자가를 지고 인생을 마무리한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베드로를 말하면서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얼마나 부족하고 형편없는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연륜이 깊어갈수록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야할 것인가를 알고 더욱 힘써야 합니다. 내가 지고 갈 십자가를 찾아 그것을 이루어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잘 버텨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버티는 믿음을 넘어서야합니다.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생애를 통해서 도전받기를 소원합니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피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주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끄럽게 살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영광스러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 나의 모습에 변화가 필요합니다.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야합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본질에 충실한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신의 성품으로 살아야합니다. 마지막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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