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자신은 이제 마음을 비웠다고 말합니다. 욕심을 버렸다는 의미에 있어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마음을 비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무당에게 신이 내릴 때에 몸이 시들 시들 아프게 됩니다. 생각하기 조차 싫어지고 마음이 텅비어 있을 때 귀신이 들어가게 됩니다. 무당이 굿을 할 때에 머리를 왜 흔드는지 아십니까? 아무 생각이 없게 만들고 자기를 비울 때 귀신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텅 빈 사람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이렇습니다. 하루는 벙어리 귀신에 들려서 말을 하지 못했던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서 벙어리 귀신을 내좇았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주위의 사람들은 매우 놀라워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당신에 종교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늘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본문 1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쫒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낸다면 당신의 아들들도 귀신을 쫒아낸다면 그것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너희들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본문 21절과 22절 말씀을 하십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처음에 “강한 자”란 누구를 가리킬까요? 귀신에게 지배당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귀신이 강한 자로 와서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 있으면 나름대로 안정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불신자라 해서 다 불안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귀신이 악한 영의 무기로 마음을 지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킵니다.
여기서 더 강한 자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과 사탄의 관계는 숙명적인 적대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집을 뚫고 들어가 그를 결박하고 그에게 억눌린 인간을 해방시킵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결박하고 그의 소유를 빼앗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사탄에게 결박된 인간을 놓아주기 위함이며, 모든 사탄적 굴레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기 위함입니다.
1. 팅빈 마음은 위험합니다
'빈집의 비유'로 알려져 있는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이 들렸다가 귀신이 나감으로 깨끗해졌습니다. 이 귀신이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머물 곳을 찾지 못하자 다시 전에 머물던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예전의 집은 청소를 깨끗이 해 놓은 집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쫓겨나지 않기 위해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함께 거합니다. 오히려 귀신의 상태는 처음 빈집에 머무를 때 보다 더욱 악하고 더 심각해졌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렸기에 예전보다 더 포악해지고 더 더럽게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모습을 신자의 영혼 상태로 적용을 하면 이렇습니다. 예수 믿기 전의 상태는 우리의 영혼이 세상 적인 것들로 가득 찼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깨끗하게 영혼을 청소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영혼이 깨끗해 진 것입니다. 죄를 씻은 받은 것입니다. 육정과 세속을 따르는 사상이나 생각을 깨끗하게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세상 것은 없어졌지만 아직도 내 영혼은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빈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상태를 가리켜 ‘영혼의 빈집’이라고 말합니다. 깨끗하게 청소는 했지만 아직도 그 집은 비어있는 상태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강하더라도 더 강한 예수님 자신이 사단을 내어 쫓고 자유와 믈질과 건강과 바른 삶을 찾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21절입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그리고 에수님은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4-26절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귀신이 나간 사람은 나간 빈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빨리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먄 더 악한 귀신이 더 많이 들어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맏는 우리들도 우리 속에 무엇이 채워져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 채워져 있어야 할 것이 과연 채워져 있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속에 진정으로 채워져야 할 것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빨리 채워야 합니다. 채우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나의 간절함과 사모함이 필요합니다. 나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귀신들은 더러운 영입니다. 윤리적이고 정결한 귀신은 없습니다. 불신자의 마음은 귀신이 그 마음에 거주하고 통치하며 무기를 갖고 그 마음을 소유합니다. 그리고 더 강한 자가 빼앗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지킨다 하였습니다. 불신자 중에서 깨끗하고 윤리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한 자가 그 마음에서ㅠ나갔기 때문입니다. 본문 24절을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사람이 현재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을지라도 계속 교회에서 말씀 듣고 성경을 한 자라도 더 읽어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이 지배할 때에는 강한 자가 역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빈 마음은 위험한 것이고 세상적인 수양과 개혁은 불완전한 것이 불과하지 그 것으로 인해 근본이 달라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2. 그렇다면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요?
첫째, 성령으로 채워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 속에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고린도전저 3장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말씀은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마음껏 일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는 항상 갈등과 싸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8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대로 '육신의 소욕을 따르느냐, 성령의 소욕을 따르느냐' 입니다.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강제적으로 이 문제에 개입하셔서 성령의 소욕을 따르도록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따르기 위해서 의지를 발동해야 하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로 성령으로 우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채우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씀은 명령형입니다. 계속형입니다.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서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간구해야 합니다.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 받지 않으면 우리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마음껏 일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성령께서 일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영적으로 점점 말라 죽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우리의 육의 행실이 점점 말라 죽게 됩니다. 로마서 8장 13절을 봅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래서 성령으로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으로 채우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가 없는 것이지요.
둘째,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양식입니다.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결과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점점 메말라가고 병들어 갑니다. 우리의 믿음이 견고히 서시 못합니다. 즉 우리의 신앙기반이 약화됩니다. 선악에 대한 분별과 판단이 흐려집니다. 세상의 거짓 교훈과 유혹과 미혹에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거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우리를 채울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그것은 다 응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는 어두움의 세력들이 거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말씀은 능력이 권세요 영적인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를 채워야 합니다. 말씀으로 체우는 것도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투자가 필요합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러기 위해서 시간도 투자해야 합니다. 사모해야 합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수고의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의자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으로 채워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그 사람의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비어있는 상태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물질, 음란, 미움, 열등감, 권력, 욕심으로 채워지는 것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만일 당신과 저의 영혼의 집에 예수 그리스도가 왕노릇 하지 못하며, 마음과 삶을 다스리지 못하며,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여전히 빈 집, 즉 공허한 집일뿐입니다. 회개했다고 해서 영혼의 집에 무엇이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계속적인 보충이 필요함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한 번 은혜 받은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기도했다고 해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빈집을 채우는 것은 날마다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지 못한 집은 별수 없이 약령의 처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귀신들은 신자의 삶을 약탈하고,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영혼을 파괴시킵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빈집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져 있는 집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으로 활동하지 못하는 집은 빈집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는 하지만 주님이 주인 역할을 못하는 상태에 있을 때 그 집은 쓸모가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우리의 영혼에 주님의 활동이 멈춰지면 곧 바로 사탄과 악령들의 놀이터가 되버리고 맙니다. 세상의 것들에 지배를 받으면 신자의 마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본문 2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강력하게 왕 노릇하시며 나는 그분 앞에 순종하며, 그분은 거룩한 영으로 내 마음과 의식을 채우시며 나를 지배하게 될 때 영혼의 집은 안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자는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텅빈 사람, 가득찬 사람’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떠한 경우에도 텅 비어 있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텅 비어 있으면 반드시 그 어떤 것으로 채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습관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때 그것을 끊으려는 노력만으로는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채워야 할 것으로 제대로 채워지면 잘못된 습관을 끊을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여기에 컵이 있습니다. 이 컵에 공기를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만 가능합니다. 물을 부으면 됩니다. 만약 성령이 내 속에 충만하게 임재 하시면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은 내 속에서 사라질 것이며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당신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성령이 당신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성령 충만으로 사십시오. 내 마음의 집, 영혼의 집을 빈집으로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장막집으로 내버려 두지마십시오.
주님과 연합되고 성령으로 채움을 받고 적극적으로 내 몸과 내 시간과 내 물질과 내 삶을 드리며 주님이 충만 된 영혼의 집을 만드십시오. 성령의 주권(spirit anointing)을 강력하게 요구하십시오. 말씀의 접촉(word contacting)을 끊임없이 하십시오. 믿음으로 채우십시오, 말씀으로 채우십시오, 성령으로 채우십시오. 그렇기 위해서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열심히 예배 생활과 기도 생활에 성공해야 합니다. 귀신도 이기고 죄악도 이기고 모든 문제와 좌절과 허무함도 이기는 비결이 영혼의 집을 주의 능력으로 채우는 길이 신자가 끝까지 싸워야할 믿음의 길입니다.
나의 믿음을 점검(check up)해 보십시오. 내 영혼의 집이 비어있는지 무엇인가 채워져 있는지 따져보십시오. 얼마나 주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며 그 분의 활동을 수용하고 그분의 지시에 따를 수 있는지 믿음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좋은 열매가 남습니다. 이제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 모두가 탁월한 믿음과 모험의 믿음으로 충만하며 성령이 일하시는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교회를 찾고 계시며 능력 있는 교회를 원하십니다. 세상 장막집이나 빈집으로 서 있는 교회가 아니라 능력으로 채워져 있고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 기도로 충만한 교회, 믿음으로 충만한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가 그러한 교회가 된다면 하나님은 모든 축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성도 개인 한사람 한사람이 그렇게 되어야 하고 우리 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모험입니다. 믿음은 도전입니다. 믿음은 새로운 나라를 향한 꿈입니다. 믿음의 꿈을 갖고 달려가는 교회를 세우는 믿음의 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보고서에 의하면 교인들의 95%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교인들이며 그들의 영적인 상태와 교회생활의 모습은 일종의 벤치 워머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벤치 워머(bench warmer)란 교회의자의 앉은자리만을 따뜻하게 하고 돌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 95%가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예배당에 나와서 한 시간 동안 예배를 드리면서 의자를 따뜻하게 하고 사라질 뿐 단지 5% 그리스도인들만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95%에 해당되는 명목상의 신자(nominal christian) 그들은 누구입니까? 일주일에 한번 정도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 종교의식에 참여할 뿐 어떤 영적인 영향력이나 변화도 없이 적당하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그들의 삶은 영적인 힘을 잃고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 강력한 힘을 주지 못하고 무기력하고 어둡고 메말라 있습니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활동하기 싫어하기 때문에 신앙의 어떤 감격이나 의미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상위 5%에 해당되는 믿음으로 사는 참된 신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행동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봉사하며 활동적이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통해 교회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 갑니다. 만일 95%의 명목상의 신자로만 교회에 가득하다면 그 교회는 점점 침몰해 갈 것입니다. 그러나 5%의 참된 신자가 있다든지 또한 그런 부류의 신앙인이 되기 위해 희생하고 노력하는 성도들이 늘어가고 있다면 교회는 엄청난 변화와 함께 큰 부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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