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인간을 찾아온 종교를 본 적이 있는가?
제 1장 회의적인 생도(요 1:1-3, 14)
예수를 만나기전까지 나다나엘도 회의적인 생도들 가운데 하나였다(요 1:43-51).
나다나엘의 첫 번째 중요한 측면은 자만심과 경멸의 문제이다.
두 번째 측면은 깊고 근원적인 영적필요이다.
그가 나사렛이라고! 거기서 무슨 훌륭한 것이 나올 수 있는가? 말하면서도 곧 이어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라고 말한다.
세 번째 측면은 그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예수가 그에게 주는 처방이다.
예수는 그를 거짓이 들어있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부른다. 어떻게 저를 그렇게 잘 아시는지요.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보았노라. 나다나엘은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당신이 메시야입니다. 예수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보게 되리라.
제 2장 인사이더어와 버림받은 자(요 4:7-19)
특별히 지금의 세상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죄는 결코 무기로 사용될 수 없다. 성경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죄인이라는 판결을 피할 수 없다.
이 이야기의 첫 번째 놀라운 면모는 예수가 이 여인과 대화를 시작한 것이 얼마나 금진적인 것인가를 설명해야 한다.
이 여인은 도덕적으로 버림받은, 완전한 아웃사이더였던 것이다. 인종의 장벽, 문화의 장벽, 성의 장벽, 도덕적 장벽, 그리고 모든 관습을 넘어섰던 것이다.
이 만남의 두 번째 면모는 예수가 여자에게 분명 마음을 열고 따뜻하게 대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자와 대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네가 육체적으로 물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너에게 영적으로 필요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없다면 넌 완전히 길 잃은 존재다. 생수의 비유는 목숨을 구해준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내면으로부터 동시에 만족을 준다는 것을 동시에 밝히고 있다. 네가 주는 물을 먹으면 네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거의 언제나 당신 밖에 있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답할 것이다. 누구나 나는 이것을 위해 산다고 할 수 있는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신에게 그 목적이 예수가 아닌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을 실망시킬 것이다. 무엇보다 너는 그것의 노예가 될 것이다.
예수는 왜 대화의 주제를 생수 주제로부터 이제 남성편력으로 갑자기 바꾸는 것인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라는 사람, 즉 인사이더와의 만남에서는 강압적이고 직접적이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바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왜 니고데모가 구원이 필요한 죄인으로 간주되어야 할까?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자나 똑같이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이다.
제 3장 애도하는 자매들(요 11:17-36)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는 무엇이 혹은 누가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답이 예수라고 믿는다.
마르다와의 만남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고 말씀하신 것은 신성을 주장한 것이다. 다음 순간에 마리아의 슬픔의 무게에 울음을 터뜨린다. 신성이 인간의 나약함과 만나는 것을 목격한다. 예수가 마리아에게 보이는 반응을 우리는 진리의 사역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눈물의 사역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다가오는 진리 그 자체다.
그는 육신을 입고 나타난 신성 그 자체다.
예수님은 38절에서 극도로 분노하시는데 죽음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다. 악과 죽음은 죄의 결과이지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아니다. 하나님은 질병과 고통과 죽음으로 채워진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자신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그는 알고 있었다.
제 4장 결혼 잔치(요 2:2-11)
이번 장에서는 세상의 일들을 어떻게 해야 바로 잡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고대의 전통적인 문화는 개인보다 가족과 공동체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레널즈 프라이스, 세 개의 복음이란 책에서 예수의 위대한 사역에서 최초의 표적을 한낱 어떤 모임에서 벌어진 실수를 기적으로 해결해 내겠는가? 아무도 그런 일을 꾸미지 않을 것이다. 예수가 세상에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왔는가에 관하여 그의 행동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가 이 상황을 위해 그리고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 살펴보자.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잔치의 주인이다. 결국 나는 기쁨을 주기위해 온 것이다. 내 명함, 혹은 나의 첫 기적이 모든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일반적으로 성결예식에서 사용되는 항아리를 사용함으로써 예수는 그가 세상에 온 것이 구약의 의식법과 희생법이 예표 했던 것을 현실에서 성취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에게서 죄에서 깨끗이 씻겨주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 영혼이 잘못된 바를 정화하기 위하여 오셨던 것이다.
예수는 어떻게 그런 치유, 씻겨줌, 용서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가? 예수는 자신의 모든 기쁨을 잃어버림으로써, 외롭고 오래 받는 삶을 영위함으로써,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 대신 죽음으로써.비록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슬픔 가운데 있을지라도 다가오는 기쁨을 마시라. 당신의 마음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오직 한 사랑 뿐이며, 이 모든 것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제 5장 최초의 그리스도인(요 20:1-18)
이제 우리는 그가 한 일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보게 될 것인데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외부로부터의 개입 혹은 도움이 없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것이다.
당시에 어느 누구도 –유대인이든, 희랍인이든, 로마인이든-신이 역사의 중간에 어떤 개인을 죽음에서 다시 살릴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예수 자신의 모든 예고에도 불구하고, 부활이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것이라 그들이 믿을 수도 바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진짜 믿음은 언제나 개인적이다. 은혜가 우리 믿음의 원인라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은혜는 우리 믿음의 내용이기도 하다고 알려준다. 진짜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순전히 은혜로 받아들여지도록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했음을 믿는 거다.
예수가 마리아에게는 나는 붙들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도마에게는 자신을 만지도록 허락한다. 마태복음 끝 부분에서는 여인들에게 자신을 만지도록 허락한다. 이는 마리야야 내가 하늘로 아버지의 오른편으로 올라가더라도 너를 전혀 떠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영을 보낼 것이고 그 영을 통해 너는 나의임재와 평화와 사랑을 언제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는 길은 각각 다르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함이다.
제 6장 막강한 적(마 3:1-4:11)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를 만날 수 있는가? 우리 삶이 영원히 변화되길 원한다면 우리 역시 예수를 구원자로 만나야 한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제외하면 예수의 세례는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유일한 사건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려 광야로 가셨다. 엄청난 축복과 성공 뒤에 시험과 유혹이 왔던 것이다.
사실 시험과 고난은 하나님이 매우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일어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그건 우리를 무언가 위대한 존재로 변화시키고자 신비한 하나님의 계획에 속하기 때문이다.
제 7장 두 분의 대언자(요 14:16-20, 25-27)
예수는 성령이 단순히 어떤 힘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은 떠날 것이고 이 인격적인 존재가 올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대언자라고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목제물이고 첫 번째이고, 성령이 두 번째 인 것이다.
첫 번째 대언자는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두 번째 대언자는 당신을 위해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사도들이 마침내 예수의 구원 사역에 관해 예수께서 생각나게 하며 사도들이 마침내 구원 사역에 관해 가르쳤던 모든 것을 이해할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성령의 일이다.
제 8장 순종하시는 주님(마 26:36-38)
죽음을 앞둔 예수의 고통과 공포가 그토록 엄청난 이유가 무엇일까? 성경에서 잔은 하나님 자신의 불의와 악행에 대한 법적인 진노를 가리킨다. 그는 모든 인류의 악과 죄 위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진노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아버지를 위해 사는 자인 예수가 자신이 떠맡은 죄에 대한 심판에 수반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라는 전망에 대해 느끼는 공포이다. 사
랑의 관계가 더 길고, 더 깊고 더 친밀할수록 그 관계가 끊어졌을 때의 고통은 더 극심한 것이다. 보통 수동적인 순종을 통해 예수는 우리가 마땅한 형벌을 받고 우리가 죽어 마땅한 죽음을 죽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능동적인 순종을 통해 예수는 우 리가 살았어야만 하는 삶을 살았다. 기도의 기본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굽혀 내 뜻 쪽으로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녹여 그의 뜻으로 만드는 것이다.
제 9장 하나님의 오른편(행 1:9-11)
첫째, 승천이란 무엇인가?
승천은 예수가 하늘로 가는 사건이라기보다는 천국으로 가는 사건이다. 승천을 통해 예수는 시공 연속체를 떠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간다. 예수는 지금 전 세계에 걸쳐 그의 지속적인 중보의 사역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승천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승천한 그리스도는 사랑의 소통과 교제를 위해 만날 수 있는 예수다.
둘째,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지극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비할 데 없이 파워플 하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에게 속해 있다면,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당신을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천국에서 그는 계속해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일하신다.
마지막으로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당신이 용서받았고, 받아들여졌고, 성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걸 당신이 알도록 보증한다.
신
약 성경에 따르면 예수의 승천은 그가 우리의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즉 그가 하나님의 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대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히 7:26-27, 25, 요일 2:1-2).
제10장 마리아의 용기(눅 1:26-45)
무엇이 마리아를 위대하게 만드는가? 그녀가 하나님과 그분의 메시지에 반응하는 방식이 바로 그거다.
그녀는 네 가지를 행한다.
마리아는 맨 먼저 생각한다.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찜인가 생각하매(눅 1:29).
두 번째 마리아가 한 일은 자신의 의심을 숨김없이 표현한 것이다. 나는 처녀인데 어찌 그런 일이 생긴단 말이요?
세 번째로 마리아가 한 일은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마리아의 마지막 행동은 엘리사벳에게 간 것이다.
마리아는 진신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기 시작한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다(눅 1:46-47).
따라서 네 번째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다. 마리아는 다른 믿음의 자매를 찾아가서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예배하고 나서야 비로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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