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원리에 의해서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로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4번에 걸쳐 엑설런스(탁월함)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탁월함에 대해서 정리를 하고 탁월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마지막 설교를 듣기 전에 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나는 탁월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것과 ‘우리 교회는 탁월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라는 목표와 꿈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탁월한 사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렸고 탁월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할 때 과연 탁월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탁월한 교회는 무엇을 추구하는 교회인가? 탁월한 교회를 어떻게 세울 수 있는가하고 질문하게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 충만하고 전도 잘하고 열심히 예배드리고 좋고 넓은 교회 건물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탁월한 교회인가? 아니면 탁월한 교회의 모델은 어느 교회인가하고 정의를 내리는 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유형은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형태로 화려함을 드러내는 교회와 서신서의 형태로 진지함을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가장 탁월한 교회의 유형은 바로 이 둘의 형태를 다 포함하고 있는 교회일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힘 있고 능력 있으며 기적이 나타나고 3천명, 5천명 수가 폭발하는 강력한 어떤 힘에 이끌리는 교회였습니다.
탁월한 교회가 되려면 이런 능력들이 있어야 합니다. 탁월하다는 것은 지식적인 교회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엘리트가 모여 있는 교회라고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 능력이 있고 옥터가 흔들리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며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고 광풍이 잔잔해 지는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휘감는 교회일 수 있습니다. 탁월한 교회는 그러한 역사도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형태의 교회인 서신서 교회가 있습니다.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갈라디아교회, 고린도교회 등은 사도행전 교회와는 다른 유형의 교회입니다. 서신서 교회의 특징은 사도행전의 화려함이나 어떤 눈에 보이는 초자연적인 역사,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특별한 형상보다는 내부적인 교회로 교회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교회가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교회입니다. 예를 들러 오늘 본문은 에베소 교회를 세운 바울의 의도(intention)와 교회의 에센스(essence본질)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에베소교회가 세워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요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겸손, 눈물, 시험, 결박, 환란이라는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는데 필요한 요소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세워지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능력을 나타내는 교회이거나 표적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라는 것보다는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다른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이고 눈물이고 시험이고 결박이고 환란입니다. 교회는 겸손으로 세워진다고 할 때 왜 겸손이 그렇게 중요하기에 바울의 고별설교 내용이어야 하고 교회는 꼭 겸손으로만 세워져야 하는 것일까? 그러면 겸손이(humility)란 무엇인가하고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입니다.
교회는 겸손으로 세워집니다. 겸손이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곳이어야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바울은 겸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탁월한 교회는 겸손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높여주기 위하여 자신은 낮은 자리에 서는 것을 행동으로 보이는 교회가 탁월한 교회입니다. 모두가 높아지려는 교회에서 낮은 자리에 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라면 그 교회는 폭풍을 잔잔케 하는 능력의 교회보다 강한 교회일 것입니다.
눈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눈물을 흘리고 있어야 합니까? 사람들이 교회 오면 우는 것보다 웃는 것을 선호하는데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처량하고 초라한 교회이고 문제가 많은 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를 세우기 위한 바울의 눈물은 거룩한 눈물이며 다른 사람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 있어야 교회입니다. 웃는 교회보다 우는 교회를 가르친 것입니다. 시험도 결박도 환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당하는 것이라면 큰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하여 당하는 것이라면 가치 있는 것이며 고귀한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28절을 보시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자기 자신과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는 것입니다. ‘삼가하라’는 것은 지키라(watch over)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자기를 잃고 양 떼를 잃는 행위이기에 조심하라는 것을 더 강하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이 <자신과 양떼> <개인과 공동체>라는 투톱(two top)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개인의 중요성 못지않게 공동체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나 한사람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성도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나는 공동체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나 자신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말씀을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라고 했습니다(Be shepherds of the church of God). 교회론을 세우는데 아주 중요한 배경입니다. 교회를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이시며 그 교회를 치도록 사람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친다’라는 것은 다스리는 것이나 권력주의나 계급성의 차원이 아니라 돌보고 나누고 먹이고 섬기고 이끌고 치유하고 보살피고 보호하고 사랑하는 목양(shepherding)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교회에서 일어나는 비난, 비판, 비방, 분열과 같은 논쟁의 교회(controversial church)에서 서로에게 상처 주고 상처 받는 교회가 아닙니다. 서로 대립하고 찢고 나누고 갈라지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 교회는 특별한 사랑이 있는 교회이고 서로가 깊은 돌봄이 있으며 서로가 애정 깊게 감싸주는 보호가 있는 서로를 지켜주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탁월한 교회는 목양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만이 목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목양하는 교회입니다. 흔히 목양하면 푸른 초장이 있고 양떼들이 먹이를 뜯는 초원의 목장을 상상하는데 하나님이 값을 지불하시고 세우신 교회는 그런 동물적 목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구원 받은 백성들이 모여 있는 영혼의 목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영혼의 목장에는 서로가 목자로서 돌보는 곳입니다. 다만 가장 목장의 우두머리는 목자장입니다. 그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때문에 교회에서 모든 직분자들은 서로를 돌보고 보호하고 먹이고 보호하며 사랑하는 관계에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곳은 개인 한사람이 교회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신서 교회는 연합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흩어지고 갈라지고 쪼개지고 찢어진 모습을 경고하며 하나 된 교회를 세우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연합이라는 것을 원칙으로 받아들이는 교회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연합이란 우리 모두가 하나이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설계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5). 우리 모두가 산돌들로 서로 모여 건설된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탁월한 교회가 되는 비결입니다. 탁월한 교회란 하나 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기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엡 2:21). 연결되어 있는 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것은 연합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하셨습니다. 유언의 기도입니다. 최후의 기도입니다. 더 이상 기도할 기회는 없습니다. 이제 무엇을 예수님은 구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21-23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의 기도 내용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합을 마지막 기도 제목으로 삼으셨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려면 무엇이 필수적이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소원이기도 하고 유언인 그 기도가 아직도 오늘의 교회에서 응답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도 가운데 아직 응답되지 않은 유일한 기도가 하나되는 것이라고 영적 부흥사인 토미 테니(Tommy Tenney)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의 교회에 바라시는 것이 부흥이거나 봉사이거나 성경 공부가 아니라 먼저 하나 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꿈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소원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첫째,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 되는 연합이란 섬김입니다. 종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기 의지를 내세우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는 것이며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의지를 내세우면 팀도 깨어지고 사람들도 흩어집니다. 자기 의지는 자기주장이 앞서는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앞세워서 사람들에게 칼을 휘두르면 그 사람의 주변에는 피 묻은 사람만이 모여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사람이 탁월한 사람입니다.
둘째, 자신의 통제력을 강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 되는 연합은 조화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자신이 이끄는 대로 사람들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은 강한 반감이나 분리를 가져옵니다. 교회는 자기의 뜻을 내세우는 제단이 될 때 교회의 제단은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만이 하나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통제력으로 교회를 다스리려는 것은 교회를 장악하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섬기고 돌보는 곳이지 자기 발 앞에 엎드리게 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기가 깨어지는 곳이 되어야 하나가 됩니다. 가기부정과 자기 통제가 필요한 것이지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태도로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셋째, 자신의 권리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 되는 연합은 서로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만일 권리 주장을 통하여 타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자기 이득만을 추구한다면 사람들은 흩어집니다. 연합은 권리 주장이 아니라 서로 책임 분담이며 분배입니다. 교회는 목사의 권리, 장로의 권리, 집사의 권리를 주장하는 곳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책임만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밀레도 항에서 에베소 교회들에게 했던 마지막 충고가 책임만을 다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 권리 주장은 자기 과시에서 비롯됩니다. 이기적 명성이나 야망이나 자아 집착은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훈련이 있어야 하나 됩니다.
교회의 하나 됨과 연합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것이 분열과 불화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조직체에 동일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연합을 통해 세상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불화와 분열을 통해서 사람들을 교회에서 몰아냅니다. 헌신을 파괴시키는 것이 분열입니다. 교회의 고질적인 죄악이 하나 됨을 방해하는 분열입니다. 교회를 악성으로 만드는 것이 불화입니다.
교회는 혀에 의한 범죄가 행동으로 인한 범죄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체적으로 교회의 문제들은 모두가 하나가 되면 다 해결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다툼은 분열의 시작입니다. 싸움은 파괴의 씨앗입니다. 만일 교회가 계속해서 시끄러운 다툼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면 그 교회에 사람들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분열은 교회를 시들게 합니다. 교회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분열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면서 분열의 위험성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1-3을 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육신에 속한 자란 세속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자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을 유아라고 했습니다. 유아의 특징이 시기와 분쟁입니다. 다른아이가 나보다 더 갖고 있으면 견디지 못하는 아이를 유아라고 합니다. 바로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밥을 먹지 못하고 항상 우유로 배를 채웁니다. 나이는 먹었어도 먹는 것은 우유뿐입니다. 젖 먹는 아이 신자들이 고린도 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자라지 않았습니다. 성숙함이 없었습니다. 시기하고 분쟁하는 것은 어린아이 짓입니다.
어른이 되면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힘든 것도 먼저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신자는 두 종류입니다. 세속에 속한(in worldly) 육신적인 신자와 영에 속한(in spiritual) 신령한 신자입니다. 이들이 교회에 같이 존재하지만 육신적인 유아들보다 신령한 장성한 사람들이 많아야 교회도 어른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볼로이든 게바이든 바울이든 모두가 일반이라고 하면서 마지막에 중요한 자신들의 위치를 “우리는 동역자”(고전3:9)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같은 일을 같은 마음으로 같이 하는 사람을 동역자라고 합니다. 공동체나 동역자의 모임입니다.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같이 뛰는 사람이 동역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세울 때에도 강조했던 것이 똑같습니다.
빌립보서 2:1-4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다시 14절을 보시길 바랍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세우는데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이 하나 되고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뜻과 남을 낫게 여기고 돌아보고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래야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분열로는 교회를 세우지 못합니다. 허영으로는 교회를 잘 지을 수 없습니다. 원망으로는 사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동역자로 세워진다는 것은 교회를 위하여 같이 수고하고 땀을 흘리고 힘을 쏟는다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분열은 교회를 무너지게 하는 질병입니다. 분열은 죽음의 교회로 가도록 이끄는 유혹입니다. 분열은 교회를 출혈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연합은 교회를 하나 되게 만듭니다. 연합은 서로를 세워줍니다. 연합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제공합니다. 연합은 사람들을 교회에 머물도록 합니다. 하나가 되어 한 뜻으로 움직이는 것은 어떤 일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성경에는 각 주제에 따른 중요성과 가치를 주면서 성도들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동일한 언어를 반복해서 기록했습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라는 말은 24회, 제사라는 말은 265회, 기도라는 말은 100회 나오지만 함께라는 말은 무려 484회나 나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19-20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것은 분명히 개인주의를 버리라는 것이고 고립된 교회로 만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서로 의존적 교회이며 서로가 하나 된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모였는데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다르고 자기주장만을 편다면 그 교회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세 사람이 모였어도 그들의 생각이 일치하고 합심되었다면 그들은 어떤 일들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많이 모인 사람들의 수로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모인 사람들의 하나 됨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 교회가 기도 하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하나 되어 서로 함께 하는 연합 공동체를 만들고 몸으로 세워진 지체 공동체, 가족 공동체, 동역 공동체가 되도록 소원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꿈입니다. 우리가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 되고 연합되기 위해서 최소한의 우리의 일은 무엇입니까?
수건을 두르는 것입니다.
지금은 검을 뽑을 때가 아니라 수건을 두를 때라고 테니 목사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닮은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이 형편없었고 문제투성이이고 어린아이 같고 잠시 후면 도망가고 배반할 것도 아시지만 그들을 향해 비난이나 통제를 하면서 분열을 조장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건을 두르고 발을 씻겨주며 사랑하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발 씻김의 의식을 행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이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
친히 본(example)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 되고 연합하는 유일한 비결이 이것입니다.
나는 이그잼플이 되어야합니다.
수건을 두르는데 본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이 말씀한 오늘 본문을 상기하시길 바랍니다.
겸손, 눈물, 시험, 결박, 환란으로 세운 에베소 교회이고 그 교회를 치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탁월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탁월한 하나님의 종들로 쓰임을 받아야 하고 탁월한 교회로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의 어떤 일을 할 때라도 탁월한 모습, 탁월한 태도, 탁월한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하고 눈물로 하고 시험을 이기며 결박을 풀고 환란에서 승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수건을 두른 탁월한 성도들이 모인 우리 교회를 크게 쓰실 것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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