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천번이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책이 눈에 뜨여 읽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삶의 갖가지 고민들은 여전히 해결된 것이 없는데, 어른이 되었다는 이유로 누구에게도 털어 놓지 못하고 가슴 속에서 삭여야만 합니다. 아픔 중에 가장 큰 아픔은, 아픔데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회생활의 타성에 젖어 분주하게 살다보면 그 아픔을 당연시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좌절의 상처에 시간의 딱지가 내려앉으면서 이제는 그것이 아픔일 느끼지 못합니다. 아프다는 순간 어리광이 될까봐 입을 꾹 다문체 홀로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이 어른이 아니라 천번이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그래 조금 흔들려도 괜찮다. 나와 당신의 흔들림은 지극히 당연한 어른 되기의 과정이기에.”
예수님은 믿으면 우리의 죄가 사함 받기 때문애 죄의 형벌이 없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신자는 죄를 지어도 괜찮은 것일까요? 아무런 문제도 없이 지나가는 것일까요? 그러나 신자에게 죄의 형벌은 없지만 죄의 징계는 있습니다. 죄의 형벌과 죄의 징계는 같은 것 아닌가요? 벌을 받는 것은 비슷한 것 같은데 차원이 다릅니다. 형벌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고 죄의 징계는 죄를 깨닫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죄의 형벌은 심판의 성격이 있는 강한 반면, 죄의 징계는 사랑의 성격이 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예레미야 30장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1-11절은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에 대한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12-17절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주는 의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8-24절은 이스라엘 회복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상처로 도저히 회복될 수 없다고 시작하여 내가 당신의 상처를 고쳐 주리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물어야 할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1.당신의 상처는 형벌입니까, 징계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은 형벌일까요, 아니면 징계일까요? 11절 하반절에 의하면 “그럴지라도 너만은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법에 따라 너를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만 여기지는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해서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악행이 많고 네 죄가 많기 때문에 나는 네 원수가 당할 고난을 네가 받게 하며 잔인한 징계를 내렸도다.”.
악행이 많고 죄가 많을 때는 징계 수위가 높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잔인한 징계”란 그동안 나를 사랑하고 잘 주었던 분들조차 등을 돌리고 외면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당한 이러한 고통을 하나님께서는 네 상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받은 상처는 어느 정도인가 하면 고칠 수 없고 상태가 중증입니다. 억울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그것을 시원하게 처리할 재판관이 없습니다. 네 상처에는 약도 없고 처방도 없다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고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이러한 비극이 사실상 그들이 끊임없이 지은 죄로 인해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습니다(13:22).
우리 가운데 생명이 위독하여 고통을 당하는 분, 정서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고, 영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처한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간에 깨달아가는 기회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것이 죄의 형벌인지, 하나님의 징계인지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죄의 형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벌인데 반해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으로 자녀를 바로잡고 훈련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형벌은 진노의 표현이지만 징계는 회복을 목적으로 합니다. 징계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고 훈련받는 기회를 얻습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그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잠언 3장 12절입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과 같이 하시니라.”
형벌과 징계의 차이에 대해 요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형벌을 위한 심판은 재판관의 행동이요, 징계를 위한 심판은 아버지의 행동입니다. 재판관이 악행을 범하는 자를 처벌할 때에는 그 범죄의 경중을 따져서 범죄 그 자체에 형벌을 적용시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 아들의 잘못을 교정하는 경우에는 그에게 보복을 한다든가 그를 해치려는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가르치고 그리하여 더욱 조심하도록 하기 위하여 벌을 주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도 형벌과 징계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들도 채찍으로 맞고 노예도 채찍으로 맞습니다. 그러나 노예의 경우는 자기의 과실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요, 아들의 경우는 자유인이요 아들로서 징계가 필요해서 맞는 것입니다. 아들에게는 매를 맞는 것이 시련을 통한 교정의 계기가 되지만, 노예에게는 그저 징벌과 형벌 뿐인 것입니다.”
미국의 제4대 대통령으로 연방헌법의 기초에도 참여하여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매디슨(Madison, James)의 기도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저는 저의 가시에 대하여 결코 감사하지를 못했습니다. 저의 장미꽃에 대해서는 수천 수만 번 감사하면서도 주님이 제게 지워주신 십자가에 대해서는 한번도 감사 할 줄 몰랐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저의 인생 항로를 완성하신 사랑의 주님이시여, 이제 저에게 이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저의 눈물이 무지개 됨을 알겠나이다. 그리고 나서 저에게 고난 당하는 것이 제게 유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우리는 자신이 당한 징계가 분명 유익한 것이었다고 언젠가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어찌하여 치료되지 않는 네 상처와 고통 때문에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이 치료되지 않으니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네 상처 때문에 부르짖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십니까? 섭섭해 하기 전에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허다하므로 내가 이 일을 너에게 행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나서 해결책을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가 잘못한 것을 징계하시기 위해 주변의 나라들이나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를 괴롭히는 상대를 향해 불만을 터트립니다. 하나님께서 왜 저런 사람은 그렇게 두시고 왜 그 사람을 통해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이런 것 때문에 마음 상해하지 마십시오.
하박국 1장 13절에서 선지자는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 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자와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나 그 나라는 때가 되면 하나님이 처리하십니다. 다만 도구로 사용하실 뿐이지 잘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떤 분은 어떤 징계라도 달게 받겠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2장 5, 6절입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나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징계는 나만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면 다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기 5장 17, 18절입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이스라엘은 치료할 수 없는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상처를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시켜 주시기 전에 불행한 시기가 있다는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 때에 평화의 소리 대신에 두려움과 공포의 소리가 포로들 사이에서 들려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고통 가운데서 완벽한 구원을 실행하실 것입니다.이처럼 일체의 희망이 차단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전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의와 평강을 회복하도록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처는 시간이 약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상처를 치유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3. 내가 너의 상처를 치유하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상황은 심각한 상태입니다.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상처에는 약도 없고 처방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깊은 상처로 인하여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세상의 열방들도 외면해 버렸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상처 때문에 기도해서 고쳐진 일까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여호와의 밀씀이니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매 시온을 찾는 자가 없은즉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들의 상처가 치유되기 전에 하나님이 고쳐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속은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로 시작하여 '네 상처로부터 너를 고쳐주리라는 말로 끝맺습니다. 이스라엘의 상처와 고통이 스스로 지은 죄악 때문이기에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회복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상처가 치유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24절입니다. 여호와의 진노는 그의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돌이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를 행하실 때에는 뜻하신 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죄와 허물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궁극적으로는 성도의 유익과 거룩함을 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징계의 특징으로는 죄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 성도들을 훈련하여 더 나은 신앙으로 인도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긴혹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허락하신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죄 사이의 상호 관계성을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징계를 당할 때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바로잡아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징계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의 대안입니다.
상처를 치료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서로의 문제를 털어놓고 상대방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풀어줄 것은 풀어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목에 걸어놓은 멍에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하나님이 아닌 것, 즉 나 자신의 철저한 무능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나를 회복시킬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있으므로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아무도 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하나님은 '내가 너를 위로하기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상처 입었을 때 하나님은 '내가 너를 치료하기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낄 때 하나님은 '내가 네게 힘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풀어주고 인정하고 희망을 품을 때 상처가 치료되는 것입니다./권성수 목사(대구동신교회)
알프레드 디 수자의 한편의 시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차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지 않고 있는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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