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당시에는 최고의 석학이었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련을 받은 위대한 학자였음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서 깊은 정열과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해서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미가 넘치는 바울, 목회자로서의 바울, 열성적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바울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먼저 본문 12절을 읽어보십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호소를 봅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 사도 바울은 왜,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쓰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과 생활면에서 바울 자신과 같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도하여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이제 와서는 거짓 선생들에게 영향을 받아 과거의 생활로 되돌아가려 하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부터, 율법에서부터 해방시켜 주셔서 얻은 자유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그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과 같이 갈라디아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8∼2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바울더러 말하기를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라고 말할 때 바울은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당신이 나와 같이 죄수의 몸이 되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나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다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그의 해방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시자들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 믿어 죄에서 자유함 얻고 구원의 반열에 들어가는 일만은 다 같아지기를 원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힘들어 하는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갔을 때 그는 사도라고 해서 거리감을 가지거나 자신의 위엄만을 내세우지 아니하고 그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갈라디아 사람 들의 입장에 서서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갈라디아 사람, 이방인처럼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0∼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 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 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 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이것이 바울의 원칙입니다. 그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이 원칙은 목회자나 선교사나 그밖에 그리스도의 일꾼들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려고 할 때 그 사람들을 우리와 같게 만드는 것이 우리 의 목표라면, 먼저 우리가 그들과 같이 되는 것이 그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더불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신과 경험의 일치를 보게 되려면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동정으로써 그들과 더불어 하나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으니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 이 얼마나 귀한 말씀 입니까? 누구나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목회자, 전도자로서의 훌륭한 바울의 모습을 엿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목회자와 교인, 목사와 그의 성도 사이에 정립되어야 할 올바른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12절 하반에서 16절까지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를 대하는 갈라디아 사람들의 태도를 봅니다. 1 2절 하반절에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을 대하던 그들의 자세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평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때
그들의 행동은 모범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울이 처음에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때는 육체의 연약함을 인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 바울이 갈라디아를 방문하게 된 원인이 무슨 질병이인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떤 만성병에 걸려 있었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가 갈라디아로 가는 도중에 전염병에 걸려서 그를 그곳에 머물게 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게 됩니다. 하여간 그 병명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바울 자신이 말한 대로 가시 와 같은 것으로서 그의 몸 안의 허약함이 틀림없습니다.
밤빌리아 연안의 늪지대에는 모기가 창궐하기 때문에 바울이 말라리아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 요한이 그만 용기를 잃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사도행전 13장 13절을 풀이합니다. 그러나 만일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북쪽으로 올라가 산이 많고 공기 맑은 갈라디아 고원 지대로 가려 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열병에 사로잡힌 것은 오히려 그가 갈라디아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글쎄 그 병이 무엇이었는지 누구도 병명을 확실히 모르지만 그 병은 보기에 딱한 증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 15절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면 바울의 병은 그의 시력을 상하게 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갈라디아 사람들이 할 수만 있었다면 그들 자신의 눈이라도 뽑아내어 그에게 주려고 했습니다. 사실 신약 성경을 통해 볼 때 바울은 일종의 안과 계통의 질환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여간 사도 바울의 신체적인 허약이나 외모상의 보기에 거북함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커다란 걱정거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사실 목회자가 몸이 약하면 온 교회의 걱정거리입니다.
그러나 14절에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되 하였는데 영어개역 표준판에는 나의 상태가 너희 에게 걱정거리가 되었다 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라이트훗이 말한 것처럼 그를 경멸하거나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의 몸의 연약함을 멸시하거나 혐오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나를 영접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본문 14절에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오직 하나! 사랑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육체적인 약점이 있는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이처럼 아름답고 이처럼 귀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가리웁니다. 사랑 없는 눈으로 교역자를 보면 어떻습니까? 몸이 튼튼하고 좋으면 저 목사는 그저 돼지처럼 먹기만 하는 모양이야 라고 말합니다. 몸이 약하면 저 목사는 얼마나 은혜가 없으면 저렇게 빼 빼 말랐나?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목사의 몸이 좋으면 우리 목사님은 은혜가 풍성해서 저렇게 몸이 좋으셔. 보기만 해도 은혜가 돼. 몸이 약하면 우리 목사님은 우리 양떼를 위해 애쓰셔서 살도 오르지 못해. 우리가 속 썩여 드려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사랑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 그를 하나님의 천사처럼,예수님처럼 대했습니다. 이렇게 갈라디아 사람이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본 문 15절에 보세요. 그런데 그때의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그때에 그들은 바울이 자신들과 함께 있게 된 것이 그렇게 즐겁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들이 얼마나 바울 사도를 사랑했었습니까? 바울 사도가 눈이 불편해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가슴아파 했습니까? 내 눈이라도 뽑아 저 어른에게 줄 수 있다면 더 힘있게 일하실 수 있을 텐데 라면서 얼마나 안타까워했었습니까? 이것이 참 성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완전히 역전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울 사도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영접했었는데 바로 그 사람들이 지금은 바울 사도를 원수처럼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사실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단지 갈라디아 사람들이 은혜의 복음을 버리고 다시 속박 가운데로 되돌아간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이것을 지적했더니 그것이 역겹게 받아들여졌습니다. 16절에 뭐랬어요?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너희와 원수가 되었느냐? 했습니다. 여기에 중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을 때에는 그를 천사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대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버리고 난 후에는 그와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가 어떤 종의 가르침이 마음에 들 때는 그를 천사같이 존경하고, 그의 교훈하는 바가 싫어 질 때는 자기 마음에 드는 말만 받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그를 원수같이 미워하고 배반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제 갈라디아 사람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바울은 여기서 거짓 선생들의 태도와 자신의 태도를 대조해서 말합니다.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17절).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의 변질된 복음에 그들을 끌어넣기 위해 그들 앞에서 아양을 떨거나 열심을 냈습니다. 거짓 선생들의 갈라디아 사람들에 대한 헌신은 순수한 의미의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오직 그들을 이간 붙이는 것 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을 그리스도로 부터,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자신들 곧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거짓 선생들의 태도와는 너무 다릅니다. 19절 말씀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하여 나의 자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그들 을 자신의 휘하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위한 바울 자신의 해산의 고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해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머무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그들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되는 것을, 다시 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되는 것을, 그들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보기 원했습니다.
바울은 자 신의 그러한 아픔을 해산의 고통과 비교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과 거짓 선생들의 차이는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갈라디아 사람들 속에 형성되기를 원했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그들 스스로의 권위와 지위를 노리는 이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습 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산고를 겪을 각오, 자신을 그들 을 위하여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말해서 교역자와 교인들의 관계를 배웠습니다. 먼저 성경이 가르치는, 교역자에 대한 교인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교인은 교역자의 인간적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전에 의하면 바울은 못생긴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교역자는 그처럼 못생길 수도 있고 잘생길 수도 있습니다. 건강할 수도 있고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때의 바울처럼 병에 걸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인격이 호감을 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재간이 많을 수도 있고 재간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외모를 통해 오는 시험을 이겼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신학의 주장에 따라 교역자를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원수가 된 것은 단지 그들이 바울이 가르치는 참다운 진리를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교리에 준하여 교역자를 평가하는 것은 퍽 위험한 일입니다. 흔히 현대 교인을 사로잡는 대부분의 설교자는 그 기교, 태도, 음성, 지식 같은 것으로 비판하고 분석합니다. 사실 설교자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려고 힘쓰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교인들에 대한 교역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칼빈은 만일 훌륭한 목사가 되기를 원하면 그 목회자는 자기 교인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유대주의자들을 닮을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을 닮아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돌보는 것보다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역자는 성도들을 자기의 이익을 위한 어떤 도구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존 브라운은 그런 목회자들이 많아지면 교회는 번성할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문제삼을 것은 목사의 외모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그를 통해 말씀하고 계시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또한 목회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교인들의 호감이나 인기가 아니라 얼마나 성도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설교자의 말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성도가 필요하고, 성도 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수고하는 목회자가 필요합니다. 목회자와 성도가 다 함께 그리스도를 향해 그 시선을 집중하고 있을 때 그들 서로의 관계는 건전하고 유익하게, 그리고 전능 하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관계로 지속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교회, 목회 자, 성도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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