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이야기.
"무디지만 뜨겁게 달구어진 쇠톱은 날카롭지만 차가운 것보다 훨씬 빨리 구멍을 뚫는다." -존 플라벨
설교자를 생각할 때마다, 저는 커다란 저수지를 생각합니다. 산기슭을 여러 개 돌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으면 드넓은 들판, 그 많은 물길들이 가뭄으로 인하여 염려하지 않습니다.
저는 설교 사역을 계속할수록, 설교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수는 설교자 자신의 영적인 변화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설교자의 영적 변화와 거룩한 인격의 성숙, 모든 생활에 있어서 성화의 진전이야말로 더 높은 수준의 설교를 하는비결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 1부 설교자가 되는 길
제 1장 주 앞에 큰사람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눅 1:15 상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은 바로 이렇게 처음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선택되었습니다. 그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율법 아래 거짓된 유대교의 가르침 속에 잠들어 있는 이스라엘을 깨웠고, 역사의 새벽을 열었습니다. 그의 생애는 오직 이 일을 이루는 도구로서 남김없이 드려졌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면,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교회 안의 많은 형식적인 신자들을 어떻게 주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설교자들을 부르신 것은 당신을 떠난 교회 안의 형식적인 신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불신앙의 어두움 속에 잠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워서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다"고 증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그 일을 위하여 요한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 1:15). 위대한 일을 위한 사역자의 준비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는 이 짧은 한 구절은 이 말씀은 세 문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주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다.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할 것이다.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것이다.
성경은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 많이 돌아오게 하기 전에 그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희랍어 원문은 이 부분을 이렇게 읽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의 눈에 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 말씀 사역을 시작해야 했던 시대였습니다. 그의 시대는 아무 희망이 없으리만치 정치적으로 암울하였고, 백성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빛으로 오신 메시아를 거절하기에 적합한 어두움과 불신앙으로 가득하였습니다. 불의와 타락에 눌려 하나님의 의로움이 숨도 쉬지 못하는 것 같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그는 큰 자가 되었습니다. 불신앙으로 타락의 길을 가던 그 시대에 진리의 말씀으로 회개를 선포하였을 때, 우리는 그가 과연 큰 자가 되었음을 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다 나아와서 자기의 죄를 자복할 때에 우리는 그가 과연 “큰 자”가 되었음을 봅니다. 당대의 종교와 정치의 지도층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도전하는 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거대한 불신앙의 강물을 홀로 막아선 "큰 자"를 봅니다."
그가 평범한 사람에서 특별한 말씀의 사람으로 세워지기까지 그에게는 최소한 두 가지의 남다른 준비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이 그에게 임한 것이었고, 둘째는 그러한 위대한 경험이 있기 전까지 긴 세월을 광야에서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입증해 주듯이 그의 말씀 사역의 시작을 소개하는 부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눅 3:2).
그가 광야에서 회개와 천국을 외치는 “큰 자”가 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일이 먼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하나님 눈 앞에 큰 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려서부터 율법으로 교육받았고, 광야에서의 시간 대부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연구하는 일에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의 지식을 가진 자들은 예루살렘 거리에도 많았습니다. 율법의 조항을 외우며 경문을 차고 백성들에게 구약의 지식을 가르쳐 주고 사람의 유전을 교습해 주던 자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그것도 광야에서 선포 사역을 하기 직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독서와 학습을 통하여 알게 된 신앙에 관한 잡다한 지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백성들이 깨닫고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열망하셨던 메시지입니다. 주님은 그 메시지를 먼저 한 사람 사가랴의 아들 요한의 마음에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세례 요한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회개하라" 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율법에 매인 차가운 문자로서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강한 능력을 동반한 가운데 요한에게 임하였고, 그 이후로 그는 말씀에 사로잡힌 자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흥보다 시급한 것은 강단의 부흥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거룩한 진리로 말미암은 참된 부흥이 경험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예배의 순서를 채우기 위하여 설교하는 사람이 될 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깨어나지 않는 한, 죄인들은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을 것이고 형식적인 신자들은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경험한 하나님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큰 자로 만들어 준 것은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입니다. 성경은 그곳이 "빈 들”이었다고 가르쳐 줍니다(눅 3:2).
선지자 세례 요한에게 말씀이 임한 곳이 빈 들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빈 들이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광야입니다. 그곳은 풍요로운 숲이나 아름다운 개울로 이어지는 낭만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낮에는 햇볕이 뜨겁지만, 해가 지면 모닥불을 지펴 추위를 피해야 하는 곳이고 맹수들의 습격이 있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이 빈 들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거룩한 말씀의 종으로 빚어지기 위해서는 거룩한 고독의 시기가 필요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선지자에게 있어서 "빈 들은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세속으로부터 분리된 고독한 장소이며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한 외로움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한 외로움의 시기는 비단 요한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꼭 필요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거룩한 말씀의 종들은 단지 세상 사람에 의해 빚어진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 빚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진리를 선포하는 그들의 영혼 속에는 하나님을 만나고 온 흔적이 있었으며, 그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은 언제나 거룩한 고독 속에서 이루어지곤 하였습니다.
제 2장 포도주를 멀리한 사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눅 1:15 중)
“한 교회의 강단에 작열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만 바쳐진 설교자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땅에 전하실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의 마음에 신령한 변화가 있어야 했습니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하여 세례 요한을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출생에서부터 그 인생의 목적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이 오시도록 메시아의 앞길을 예비하는 크고 놀라운 일을 위하여 부름받았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할 것이라고 예고된 것은 그가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가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할 것이라는 예언은 그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구별되고 헌신될 것인지를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지는 제물과 같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 율법에서 말하는 나실인의 특징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자기의 인생을 드리기 위하여 몸을 구별하였기에 부모가 죽어도 시신을 만질 수 없었습니다(민 6:6-7). 세례 요한의 인생이 그러할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의 인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온전히 구별되고 헌신될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이 하나님께만 드려지기 위해서는 마땅히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설교자 세례 요한은 경건에 있어서 그 시대의 모든 풍조와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세속과 구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안일한 그 시대의 교계의 풍조와도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한 시대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의 경건함과 거룩함이 그를 특별히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적인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를 불신앙의 시대로부터 구별해 주었으며, 회칠한 무덤과 같은 종교인들과 지식인들이 많던 시대 속에서 그의 삶과 마음과 심령이 모두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나님께만 바쳐진 삶을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제 3장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 1:15 하)
그러면 성경은 왜 세례 요한의 소명을 말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왜 특별히 사역의 시작에서부터가 아니라 어머니 엘리사벳의 뱃속에 수태될 때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것을 예고하고 있을까요?(눅 1:41-42).
성경의 증언대로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었다 했으니 복중에 있는 세례 요한도 또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엘리사벳의 복중에서 뛰놀았던 것도 이러한 신령한 충만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세례 요한을 소개하는 데에는 항상 이러한 능력에 대한 묘사가 따라다닙니다. 세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는 가운데도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7).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형식적인 신자들로 가득 찬 교회당에서 말씀으로 섬겨야 하는 오늘날 우리 설교자들에게도 이러한 자질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질은 구별된 경건함 속에서 함양되는데, 이는 구별된 경건과 거룩한 능력은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단지 기교로 설교하는 것과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오늘날 조국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조국교회 안에는 단지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신앙 생활을 대치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늘어가는 현상은 그들의 영혼에 참된 변화가 부족함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정직한 복음 진리를 통해 그들의 영혼을 본질적으로 고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 속에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의 직무는 단지 인간을 종교적으로 만들고 교회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로 길러 내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설교자라는 직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는 목회 사역은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 섬김이 되지 못합니다.
목회자는 설교라는 섬김을 통해서 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돕기 위하여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서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설교 사역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사람들을 참회시키는 도구로서의 기능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설교를 통해서 자신들의 죄를 지적받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거짓과 위선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진실한 삶을 살도록 회개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위하여 설교를 사용하시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사모함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설교 사역 속에 함께하는 성령의 역사가 없거나 매우 약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설교 사역에서 참회의 역사가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설교자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능력의 부재에 있습니다. 참된 회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주권적으로 주어지지만, 그렇다고 성령이 아무런 법칙없이 역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지만, 설교를 할 때에 특별히 더 성령의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성령이 함께하셔서 역사해 주시지 않는다면 어떠한 설교도 결코 회개를 불러일으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이러한 성령의 능력이 따라다니는 설교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후에, 성령의 충만함을 그의 존재 가득 누리며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설교자가 진리를 설교하고 교인들의 죄를 정확히 지적한다 할지라도 성령의 능력 없이는 그들의 영혼은 물론 삶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면도날이 아무리 예리할지라도 그것으로 잠긴 문의 빗장을 부술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회개케 하사 당신에게로 돌아오게 하실 때에 설교를 사용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도 성령의 능력이 부어질 때에 더 더욱 실효성 있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설교자의 영향력
세례 요한이 충만한 성령의 능력 속에서 설교한 가장 뚜렷한 증거는 풍부한 회개의 역사였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거룩한 하나님을 보여 주고 그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를 고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제 2부 설교자로 사는 길
제 4장 하늘로부터 온 사람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힌이라(요 1:6)
세례 요한의 이러한 성령의 능력과 함께하는 사역은 죽은 후에도 입증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권세 있는 말씀을 선포하시고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을 행하시자 헤롯은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헤롯의 마음속에 세례 요한은 능력의 설교자로 남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영향력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는 설교 사역은 단지 예배 시간을 위한 순서로서 그 일에 구색을 맞추는 것에 다름없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아무리 자주 설교해도 교인들의 삶은 언제나 동일하고 교회의 영적인 상황은 다람쥐쳇바퀴 돌듯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던 틀을 깨트리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영적인 진취성이 결여되고 있는 것도 바로 성령의 능력이 사라진 설교 사역 때문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참석하여 설교에 귀를 기울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선포될 때 진정한 참회의 역사가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교인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형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언제나 제사가 있었고 절기가 있었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종교적인 형식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 곧 당신을 향한 신앙심이나 경외심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언제나 설교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멀리 떠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며, 언제나 말씀 앞에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점들은 오늘날 설교에서 매우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가 참된 신앙부흥을 경험하고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이 생명과 능력으로 충만하였을 때 하나님은 구원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교회로 보내셨습니다.
교인들의 설교자에 대한 인식입니다.
첫째로,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자기 인식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언제나 자기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미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순간부터 자기의 삶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을 하나님이 주관하시지만 설교자의 인생은 더욱더 특별합니다. 더욱더 분명하고 명백한 방식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인도를 받으며 그가 요구하는 바를 따라 살도록 촉구받으며 오직 하나님께만 철저히 복종하고 매이며 진리를 증거하는 일에 생사를 걸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면 설교자는 마땅히 하나님 곁에 있다 온 사람임이 드러나야 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일깨워 줄 필요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설교자 자신이 자신의 입으로 아무리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말할지라도 설교하는 진리의 내용이나 말씀 사역이 하나님 곁에 있다 온 사람의 진정한 표징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교인들이 그를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인정해 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만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삶의 이유를 오직 하나님께 걸고 자기의 모든 설교 사역의 결과를 하나님 앞에서만 계산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설교자들은 그들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섬기고 사랑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하나님께 구별되고 헌신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향해서만 특별히 구별되고 헌신된 나실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했지만 나실인은일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특별히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야 했던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설교자, 그 사람은 이 세상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지 아니하는 것을 인하여 심령의 고통을 안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증거할 기회를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언제나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기를”고대하며 그 모든 열망을 말씀 선포에 담는 사람입니다(합 2:14) .
그는 단지 남에게 전해 들어서 알게 된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만난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경험하지 못할 때 설교자를 대하는 교인들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설교 없이도 살아가는 교회 생활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목양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제아무리 교만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설교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 앞에 거꾸러지는 거룩한 회개를 경험한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설교 속에 깃들인 영적 권세가 파도처럼 밀려와서 자신의 패역한 죄악과 어리석은 불신앙들을 쓸어 가 버리는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면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 5장 증거하러 온 사람(요 1:7상)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기에 적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체험했느냐고 의아해 하며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성경 어느 곳을 살펴보아도 세례 요한이 공생애에 등장하기 전에 그리스도와 교분을 나눈 기록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중인 마리아가 세례 요한을 이미 복중에 가지고 있었던 엘리사벳을 만난 것 이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리스도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하여 나오시던 그 때에 요단강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례 요한이 설교 사역 이전에 그리스도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선 우리는 이 문제에 답하기 전에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의 소명 기사가 가지는 깊은 뜻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세례 요한이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장면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의 소명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의 임재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영은 단지 신령한 영향력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사건과 함께 임하였습니다. 즉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그 뜻을 선지자들에게 미리 보이시는 것으로 그들을 소명하셨는데, 그 때에는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동반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소명을 받음에 있어 하나님의 영에 의한 묵시가 임하거나(암 1:1, 미 1:1, 나 1:1, 합 1:1, 습 1:1, 학 1:1, 즉 1:1),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거나 말씀이 임하거나(렘 11:2, 호 1:2, 습 1:1, 욘 1:1), 이상을 보여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거나(호 1:1),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권능이 임하시는(겔 1:3), 영적인 임재 아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선지자로 부름을 받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하나님 자신을경험하는 것이었고 그 경험 속에서 그 시대에 설교하도록 특별히 위탁하신 말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선지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회개의 메시지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권면의 내용과 관련됩니다. 그 메시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를 통해 그분을 향한 경외심을 회복하고 헌신된 언약 관계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게 임한 회개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사 40:1~3).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설교자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세계가 공존합니다. 하나는 자기를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자로 이 세상에 보내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충성스러운 섬김의 세계이고, 또 하나는 자신들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백성들에 대한 치밀어 오르는 연민의 세계입니다.
생사를 건 선포의 부재
이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들이 갖게 되는 의문은 이것입니다. 왜 오늘날에는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에 생명을 걸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조국교회는 설교에 생명을 건 신앙의 선배들의 헌신적인 수고위에 성장하였습니다. 일제 시대에 그 많은 말씀의 종들이 왜 핍박을 받았습니까? 왜 그들이 투옥당하고 순교의 길을 가야 했습니까?
설교자의 영적 생활
설교자가 설교하는 내용에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먼저 그 설교가 다루는 성경 본문 속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지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목격이 될 수 있도록 깊은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한 영적인 이해의 과정을 거쳐서 설교될 때 비로소 그가 행하는 한 편의 설교가 그리스도에 대한 한 번의 증언이 될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하고자 하는 성경 본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단지 설교하기 위해서 성경을 펴는 사람들은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설교를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설교자는 그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결단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바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고쳐진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설교자는 그 말씀을 설교할 때 강력한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권위는 바로 증언에 깃들이는 권위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아니면 그의 설교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으며, 결코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헌신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설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는 수많은 방법 가운데, 말로써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증언함으로 사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고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 풍성케 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유능하여야 합니다. 증인의 임무는 정직한 증언입니다. 자기가 목격하고 경험한 바를진실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강단은 설교자의 말솜씨를 뽐내고 학식을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설교자가 마음을 기울여야 할 점은 설교하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교인들의 태도입니다.
제 6장 그 빛에 매인 사람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요 1: 7중)
설교자는 "그 빛을 증거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고 그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4-5.9-12).
이것은 세례 요한이 증거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무엇을 증거해야 할지 증거의 내용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부름을 받아 증거한 것은 그리스도이신 "그 빛이었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무엇을 증언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나는 성경을 설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규칙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나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내가 베푸는 가르침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나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자라 가도록 하지 못한다면 나는 신성모독 행위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이 청빙 받은 교회에서 부임 설교를 하던 날, 스펄전은 아들이 설교하는 강단 바로 아래 앉아서 주먹을 불끈 쥐고 강단에선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제 외치거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거라. 주 예수를 증거하거라."
"그 빛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닙니다. 한 편의 설교를 듣고 나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설교자의 소명은 "빛들”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설교 시간 내내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지 않을 수 없는 내적인 열망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설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뛰어나야 하고, 언제나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 속에서 살아서 설교의 영으로 기도하고 기도의 영으로 설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 7장 그 빛을 믿게 하려는 사람
모든 사람으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 1:7 하)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단지 타락한 시대를 향하여 외치다가 죽어간 외치는 자로서가 아니라 그런 타락의 원인이 되고 있는 불신앙을 일깨워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데로 불러들이는 설교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어두운 시대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리는 것 이상의 사역인 “그 빛이신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증거하는 "그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사람들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눅 1:16).
이 문제와 관련해서 오스왈드 스미스(Oswald Smith) 목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구령이 없는 설교보다는 차라리 설교가 없는 구령이 가능하다면 그것을 택하겠다.”
설교자는 진리를 증거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데려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설교자가 단지 학문에 능하고 말 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신령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괄목할 만한 설교 사역으로 예수 그리스도 오시기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서는 볼 수 없는 신령한 힘이 그의 설교 속에 깃들여 있었습니다. 그의 말씀 속에 있었던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나게 하는 특이함은 설교자의 창의성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신령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자는 강의실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는 비상하리만치 신령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설교자는 자기가 만난 그 이상의 하나님을 청중들에게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설교자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설교자의 양심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이 말씀을 증거할 때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충분히 받았는가? 혹시 나의 삶과 마음 안에 이런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있지는 않았는가? 나의 설교의 동기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순수한 것이었는가? 이 설교에서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여시기를 기대할 수 있으리만치 말씀에 붙들렸는가?" 그는 이렇게 끊임없이 되물어야 합니다.
18세기에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위한 선교에 헌신하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는 설교에 대한 자신의 간증을 말하는 가운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설교를 준비하는 것과 동일하게, 설교가 끝난 후에 나 자신이 내가 설교한 말씀대로 믿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데 마음을 기울였다."
제 8장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람
모든 사람으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 1:7 하)
따라서 설교자는 설교 시간에 “모든 사람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로부터 시작해서 연로한 어른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마음이 설교 시간에 설교자의 수중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설교자는 설교 가운데 교인들과 완전한 일치의 분위기를 가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연마하여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함이라." 이것이야말로 설교자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설교의 목표입니다.
제 9장 구원의 도구로 온 사람
자기를 인하여(요 1:7)
“설교자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최상의 도구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설교 사역을 위하여 목숨을 걸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핍박과 장애가 앞에 나타날 때마다 그들은 설교 사역에 더 큰 은혜와 능력이 깃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제 10장 빛이기를 거절한 사람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요 1: 8).
신앙적으로 깊은 감화를 경험하게 될 때, 특별히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설교 앞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어리석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새로운 신앙에 대한 견해와 인생에 대한 관점을 갖게 될 때,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렇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설교자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하고 관심받기를 원하며 나아가서는 인격적으로 그에게 예속되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은 속박보다는 오히려 평안함을 느끼고 설교자를 의지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깨달은 결과들을 자신의 삶의 문제에 적용시키는 수고로운 일을 하는 대신 설교자에게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물어 옵니다. 이런 종교 심리가 교인들에게는 있다는 것이다
자기는 빛이 아니며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사람일 뿐이고 자신이 증거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던 그 증거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명백한 말로 밝혔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요 1:29-31).
세례 요한에게는 자기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사역은 시종일관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결심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마치는 이야기
비를 부르는 구름들이어라
“설교자는 설교의 성공에 대해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설교 사역의 신실함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설교자들은 증거의 구름들입니다. 그 구름으로 천둥을 일으키시고 번개 속에 낙뢰를 발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증거의 구름들
어거스틴(Augustine)은 “설교자들은 증거의 구름들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설교자들은 소낙비처럼 하나님의 진리가 내리는 위대한 일의 징표인 구름들일 따름입니다. 그 구름으로 천둥을 일으키시고 번개 속에 낙뢰를 발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들을 모아 진리의 빗줄기가 되게 하시고 갈라지는 대지 위에 물이 되어 흐르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바벨탑처럼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허무한 사상에 벼락을 내려서 부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책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생 한 명 전도법 , 류익태 (0) | 2024.02.20 |
---|---|
친근하게 다가온 낯선 사람-사랑의 직물짜기 (0) | 2024.02.20 |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팀 페리스 (0) | 2024.02.20 |
열정적 영성 (0) | 2024.02.19 |
메리골드 마음 사진관 (1) | 2024.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