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창 1:26).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 최고의 걸작품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통치를 위임했다(창 1:28). 만물을 다스리기 위해 인간도 하나님 못지 않은 지혜와 능력을 소유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탁월한 설계도에 따라 인간은 창조되었다. 인간의 몸은 문화 사명(창 1:28)을 훌륭히 수행하도록 인체 공학적 구조와 기능을 가졌다. 인간의 인격(人格)은 물론 인체(人體)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반영한다. 아울러 하나님의 의지와 뜻과 목적도 인간 창조에 최대한 반영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는 의미가 여기 설명된다. 자연 계시는 성경의 특별 계시를 간접적으로 해석해 준다(시 8:1).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이젠 인체공학(technology of human body)을 살핌으로 하나님이 인류에게 바라는 지혜와 지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가. 영과 몸
사람은 흙으로 빚어졌다(창 2:7, 사 64:8). 짐승들도 흙으로 만들어졌다. 이 점에서 인간도 미천한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생기(生氣)를 코를 통해 불어넣음으로 인간은 생령(生靈: living soul), 즉 사람이 되었다. 성경에서 짐승들도 ‘살아있는 혼’이라고 지칭된다(창 2:19). 그러나 짐승들과 달리 인간은 영(靈: spirit)을 소유한 혼(魂: soul)이다. 여기서 혼은 육체를 가진 인간 자체를 뜻한다.
영이 인간 안에서 존재하고 활동하자 즉시 지정의(知情意)를 가진 마음이 생겼고 그리고 흙인 몸 안에 동물적인 생명력도 나타났다. 성경의 창조론에 따르면 영은 속 사람이고 혼은 겉 사람이다. 이 결과 혼(魂)인 인간에게 영적(靈的), 사회적(社會的), 동물적(動物的) 그리고 물질적(物質的) 실존 양식이 나타났다.
이런 인간을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고 이들을 부부로 세워 가정을 이루게 했다. 여기 가정은 앞으로 형성될 인류 사회의 최소 단위이다. 이 점에서 가정은 최초의 인류 사회였다. 이렇게 성경의 창조 기사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설명한다. 한자의 사람 인(人)은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을 그린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합해야 그리고 인류 사회가 서로 협력할 때 문화 사명(창1:28절)의 수행은 상승 효과(synergy)가 있다.
창조 기사도 인간은 서로 협력하며 살아야 함을 처음부터 가르친다. 이는 당연하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일원론의 세계로 그 안에서 모든 것들은 어느 하나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이들은 맞불려 있는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창조 기사는 처음부터 ‘부분들의 합’이 가정이며 인류 사회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영적’이란 종교적 존재를, ‘사회적’이란 정치적, 윤리적 존재를, ‘동물적’이란 본능적, 성적(性的) 존재를 그리고 ‘물질적’이란 경제적 존재임을 각각 뜻한다. 창조된 인간에게 영이 가장 근본적이다. 영이 떠나면 정신도, 생명도 함께 사라지며 물질인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이들은 서로 유기적(有機的)으로 긴밀히 연결된다.
그렇다면 성경이 주장하는 ‘영’이란 단어는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원론(二元論) 자체를 부인한다. 인간의 구조를 설명하는 이분설이나 삼분설은 성경의 인간론을 부분적으로 설명할 뿐이다. 영과 정신 그리고 몸이 각각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이들은 주장하기 때문이다.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도 4 가지의 인간 실존 양식 중 어느 하나에 치우쳐 인간을 논했다. 공산주의를 창설한 마르크스는 인간을 유물론(唯物論: materialism)에서 보았다. 많은 사상가들은 인간을 관념론(觀念論: idealism)에서 분석했다. 프로이드는 성적 (性的: sexual) 본능에서 인간을 설명했다. 그리고 헬라 철학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학자들은 인간을 영적(靈的: spiritual) 차원에서만 논했다.
부분적으로 이들은 옳았다. 그러나 인간을 유기적 존재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틀렸다. 인간도 부분들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부분들의 합’이다. 이 때 부분들의 합은 전체보다 크다. 부분들의 합은 단순히 기계가 아니라 합목적적인 구조와 조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신학자들과 많은 학자들은 이 점에서 실수했다.
이제 신학자들은 영적 존재 양식을 다른 존재 양식들과의 관계 아래 놓고 인간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런 관계 아래 신학은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존재 양식들 사이 유기적 관계를 고려하여 인간을 전체적으로 논해야 한다. 왜 그런가? 4 가지 존재 양식은 인류의 문화 사명(창 1:28) 수행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화 사명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인간의 생육,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땅과 그 가운데 만물에 대한 통치와 관련된다. 앞엣 것은 의학(醫學)을 비롯한 인문사회과학 분야에 속한다. 인문학은 문학, 역사와 철학으로 구성된다면 사회학은 정치, 경제, 문화와 예술로 구성된다. 뒤엣 것은 자연과학 분야에 속한다. 자연과학은 물론 수학, 생물, 물리와 화학이라는 기초과학과 이에서 나온 응용과학과 기술을 뜻한다.
문화 사명은 이들 사이를 절대로 분리시키지 않는다. 문화 사명 수행은 모든 과학들 사이 협력과 협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문과(文科)와 이과(理科)같이 과학을 나누는 것은 큰 잘못이다. 학문들 사이 경계선은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경계선을 넘을 때 비로소 문화 사명은 효과적으로 수행된다.
그러나 과학의 한계는 현상 세계만 본다는 것이다. 이들 과학은 신학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신학은 현상계 이면을 알려줌으로 이들 과학이 나아갈 방향과 성취해야 할 목표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설명해 준다. 이런 도움이 없으면 과학은 방향과 목표를 상실하며 인류 사회를 파멸의 길로 몰고 간다. 바벨탑 사건(창11장)이 이를 상징적으로 잘 설명한다.
겉사람 인간에게 속사람인 영이 근본이듯이 신학도 이들 과학에게 근본이다. 기초가 무너지면 집이 무너진다. 헬라 철학의 이원론은 이 근본을 무너트렸다. 그 결과 영은 사람 몸 안에만 머물렀다. 마찬 가지로 과학들과 분리되면 신학은 교회 안에만 머문다. 그렇게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 과학과 대립하는 신학은 비성경적이다. 기독교는 신학의 관점에서 모든 과학들을 재해석해줄 수 있어야 한다.
유럽의 중세 시대 기독교는 과학을 무시했다. 그 결과 일천 년 동안 암흑기가 계속되었다. 이런 실수와 잘못을 오늘날의 기독교가 반복하면 안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도 기독교는 창조적 인간론에 근거를 두고 문화사명(창 1:28)의 신학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여야 한다.
나. 머리와 몸
몸은 머리란 중심 아래 많은 지체(肢體)들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체(有機體)이다. 몸은 다음의 특성을 보인다. 머리와 지체들은 모두 몸에 속한다. 몸의 지체들은 역할과 기능에서 아무리 작아도 절대로 무시되지 않는다. 머리는 지체이면서 동시에 지체들의 중심이다. 그리고 몸의 지체는 다양하지만 머리를 중심으로 통일된다.
그렇다면 몸은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의 세계에 속한다. 머리와 지체들 사이 그리고 지체와 지체 사이 절대로 대립하는 법이 없다. 물론 지체들의 기능과 역할 또는 은사를 논리적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들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 몸과 머리 사이 관계는 대립적 이분법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논리적 이분법에 속한다. 지체들의 크기, 무게, 생김 그리고 역할의 경중(輕重)에 따라 서로 비교하며 어느 하나를 무시하게 만드는 상대적 이분법도 절대로 불가하다.
사람의 인체공학은 몸의 존재 목적과 이 목적 수행을 위한 지체들 사이 유기적 관계를 잘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어떻게 몸이 경영되고 통치되는지에 대해 잘 알려준다. 이런 인체공학의 도움으로 이상적인 리더십, 통치학, 제왕학, 조직론, 정치학 그리고 경영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인체공학은 머리를 위해 지체들이 늘 희생되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머리는 지체들이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지시함으로 돕는다. 이런 인체공학을 잘 이해한 사도 바울은 지체이론(고전 12:12-26)으로 교회론과 성령의 은사론을 설명했다. 몸의 머리는 부활주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교회라는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이다. 성도들은 받은 달란트에 따라 다른 은사, 역할 그리고 직분을 소유한다. 이 점에서 교회는 다양하다. 그러나 머리인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라 교회는 통일성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지체이론으로 교회가 무엇이며 그리고 어떻게 교회가 통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잘 설명한다. 결국 사도 바울도 사람의 인체공학을 이용하여 교회를 설명했다. 인체공학은 목회학이 무엇인지도 가르친다. 부활한 예수님은 하늘에서 성령으로 교회를 치리 한다. 이를 위해 제직들이 세워졌다. 겉으로 보아 목회자가 교회의 주인처럼 보이지만 목회자도 교회란 몸의 지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도 머리의 지시를 받고 목회해야 한다. 목회자가 다른 지체들보다 더 탁월하다는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서도 없다.
한 지체가 아프면 몸 전체도 아프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그렇다. 성도들은 서로를 사랑해야 하며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몸에서도 특정 지체가 과장될 수도 없듯이 교회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어떤 지체든지 무시 당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체이론에 근거를 둔 그리스도의 교회는 목회자의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절대로 지지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목회자를 유모로 비유한 이유이다(살전 2:7). 유모는 주인의 여종이다. 그녀는 주인의 자녀들을 자신의 젖으로 잘 양육해야 한다. 유모는 유교의 가부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만유의 머리로 소개된다는 것이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 29:11).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는 그 머리가 속한 몸과 같다.
성경은 우주를 포함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인체공학 즉 지체이론을 이용하여 설명한다. 하나님의 통치와 그 원리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우주와 세상도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의 세계에 속한다. 그 안에 존재하고 활동하는 사단도 우주란 몸을 구성하는 하는 하나의 지체로서 하나님의 종에 지나지 않는다. 악의 존재나 기원에 관한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이 여기서 나온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은 아무리 작아도 그리고 아무리 악해도 의미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은 지금도 우주의 머리인 하나님의 주권 아래 운행한다(롬 11:36). 신약 시대부터 창조주 하나님 대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主)로 소개된다(빌 2:9-11).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10).
부활주가 교회의 머리이며 만물의 머리라면 그는 교회 안팎에서 모두 주인이다. 즉 구속사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세속사의 주인이기도 하다. 결국 하나님의 통치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 안팎 모두 미친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실현되었다. 예수님을 만유의 주인으로 세운 목적에 대해 사도 바울이 설명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고 모든 것들을 연결시키려 함이라는 뜻이다(러시아 번역본 참조).
이렇게 머리와 몸이 말하는 인체공학은 교회, 하나님 나라, 인류 사회와 우주에 대해 잘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그 통치 원리나 방법 그리고 리더십도 잘 설명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 몸의 인체공학을 통해 통치자는 누구와 같으며 인류 사회가 어떻게 다스려져야 하는지에 대해 모두 말해 주었다.
결국 교회 안팎의 모든 지도자들은 지체이론의 원리에 따라 처신하는지 여부에 대한 시험을 받고 있다. 모든 인류도 지체이론에 따라 자신이 속한 다양한 조직을 위해 충성 했는지 여부에 대한 시험을 받고 있다. 물론 신자라면 믿음으로 지체이론에 따라 살았느냐 여부로 시험을 받는다. 여기에 승리와 패배의 갈림길이 있다.
다윗은 하나님이 만유와 이스라엘의 머리임을 믿고 처신했다. 그는 성공한 통치자였다. 이스라엘 열왕기의 왕들도 이런 기준에 의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다윗과 비슷한 통치자들이 인류 역사에도 많았다. 이들은 지금도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사울 왕은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 나라를 자기 개인의 왕국으로 생각하며 행동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그 동안 유다라는 포도원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겼다. 포도원의 참 주인인 아들이 왔을 때 이들은 포도원을 그에게 넘기지 않고 영원히 소유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것을 빼앗겼다. 이런 류의 통치자와 지도자들은 인류 역사에 수없이 존재했다. 이들은 모두 실패자였다.
오늘날도 목회자들도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시험에 늘 노출된다. 유감스럽지만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를 자기 포도원으로 생각한다. 이들도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처럼 결국 멸망 당할 것이다. 인체공학 또는 지체이론에 근거를 두고 성경적인 교회론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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