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 가운데도 한 때는 믿음이 좋았는데 시험에 들어서 지금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아예 처음부터 믿음이 생기지 않은 채 교회만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 가운데도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있고,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렇게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소통이 막힐 수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세대간에 갈등이 있습니다. 요즘 SNS(Social Network Service)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곳이 자기 생각을 말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고 그 권리를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은 권위를 가진 사람과 소통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견해가 맞다면 그것을 반영해 주길 바랍니다. 만약 자신들의 견해가 틀렸다면 왜 틀렸는지, 합당한 이유를 설명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과정이 잘 진행 될 때, 비로소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양한 지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소통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내가 상대방 앞에서 자신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또한 소통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상대방을 높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 또 배우려는 마음, 공감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소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1. 자신의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도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두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우상 숭배로 인하여 오염된 음식을 먹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7절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반면에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당시의 고린도 교회 안에 생기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을까요? 사도 바울은 믿음이 약한 자들의 지식의 부족을 책망하기보다는 믿음의 강한 자들의 배려가 부족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9절입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어떠한 경우에도 나의 어떤 행동이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떠한 사람에게도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2절입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실족케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전서 8장 12절입니다. “이같이 너희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니라.”우리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죄를 짓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힙니다(13절).
고린도전서 8장 1절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교회 안에서 믿음의 올바른 지식을 가지는 것이 개개인에게 너무나 소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지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교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랑으로 서로 세워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2.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3절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나니.” 교회 안에서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나만 괜찮으면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무엇보다 서로 세워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4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은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의 자유를 위해 제한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타인의 유익을 위하여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죄를 짓는 일이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자기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 보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빌립보서 2장 4절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우리 자신의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그 자제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폐를 끼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 자신의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쓰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자신이 예수 믿으면서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이 아무 꺼리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서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술을 마시라고 권유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어떤 선교사님이 영화 구경하는 것을 굉장히 꺼려하는 분이 있다면 우리는 그 한 사람의 영혼 때문에 그 시간 다른 곳에 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 안에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안내위원들이 교회에 일찍 나와서 성도들을 향하여 밝은 미소를 짓고 새 가족을 따뜻하게 환영한다면 그것이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모임의 시간을 정하는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의 스케쥴을 조정해서 양보하는 것이 때로는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를 가든지 자기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3. 가능한 사람을 얻어 그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3절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와 같이 모든 일에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에 쓰임 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그 영혼이 구원을 받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때로는 돈을 잃어버려도 사람은 얻는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다가 그 사람은 상대할 사람이 못된다는 인식을 준다면 크게 잘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1-22절입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사도 바울은 자신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대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능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서 결국은 그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과도 소통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상대방 앞에서 존중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입장이 분명히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높이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게 되고 서로의 마음을 열게 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감정에 싫더라도 그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은 노력하지 않고 상대방이 잘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의 감정까지도 조절하고 표정까지도 덕스러운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특별히 성공하는 것을 보고 도전받기보다 힘든 상황 가운데서 인내하며 희생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디를 가든지 ‘자기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먼저’ 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사람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그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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