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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소통(갈 5:24-6:5),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4.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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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소통에서의 본질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삶의 자세와 태도가 바뀌지 않고는 참된 소통은 쉽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16절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비로소 가능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인간과의 소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13-14절입니다. “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원수 관계였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서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즉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종을 초월하고 국적을 초월하여,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십자가의 소통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신자가 소통을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

 

신자는 이전에 살아왔던 삶의 방식대로, 즉 육체의 욕심대로 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육체의 욕심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에베소서 23절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육체의 욕심이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하는 삶의 패턴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1절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런데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육체를 따라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대목입니다. 즉 육체를 따라 행하는 자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체를 따라 행하는 삶의 특징 가운데 과거에 이러한 것들 가운데 하나도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지금 우리의 삶의 특징 가운데 그 중에 몇 개가 아직도 걸려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69-10절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느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여기서도 육체를 따라 이러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즉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지옥에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611절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가 과거에 행한 모든 죄악들이 깨끗하게 사함 받았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행한 죄악들이 말씀에 비추어서 생각난다 하더라도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고 난 이후에도 고의적으로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이런 죄를 짓는 것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연약해서 죄의 유혹에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죄에 대해 철저하게 자복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도 없이 계속 그런 죄를 짓는다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히브리서 1029절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헤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신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6절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신자가 직장에 다니는 것은 단순히 돈 때문에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위해서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헛된 영광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신자는 어디에서나 서로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의 약점을 건드리거나 감정을 건드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자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서로 섬기고 사랑하고 세워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서로 경쟁심을 가지고 시기 질투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특징입니다.

 

신자가 소통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것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24절에 보면 신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욕심이 잉태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4-15절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모든 죄는 욕심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나의 정욕과 탐심도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습니다. 신자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어지게 됩니다.

 

오히려 신자는 다른 사람의 짐을 지는 역할을 자발적으로 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62절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여기서 짐을 서로 지라는 것은 영적으로 연약하여 잘못하고 있는 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서로 충고하고 권면함으로써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못하신 사건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신 것입니다. 이사야 536절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모든 죄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1127-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예수님은 세상의 수고로 지친 사람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교회 생활의 무거운 짐으로 부담감을 느끼는 자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으로 우리의 무거운 짐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렇게 할 때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좋은 의도에서 서로에게 충고하고 권면하다가 서로에게 시험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상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온유한 마음으로 섬기고 세우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신자는 자기 일을 돌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 관리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서로 이것을 잘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분위기에서 가능한데 그 자체를 싫어하는 분위기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일에 있어서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2-4절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때에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서로 구분시키지 말고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같이하려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서로의 좋은 부분을 칭찬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못마땅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서로 마음이 상하게 되고 나중에는 다투게 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법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경에도 사랑의 빚은 서로가 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8절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여기서 사랑의 빚을 지라는 것은 남을 사랑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범죄한 일이 드러나면 그러한 것을 바로 잡아 주는 역할을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절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다른 사람에게 충고나 권면을 할 때 두 가지 유의 사항이 있습니다. 하나는 온유한 심령으로 잘못한 사람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옳고 정당하다 하더라도 거칠게 대하면 역효과를 내기가 쉽습니다. 부드럽고 온유한 심령으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상대방의 충고와 권면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마태복음 1127-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예수님은 세상의 수고로 지친 사람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교회 생활의 무거운 짐으로 부담감을 느끼는 자들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으로 우리의 무거운 짐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렇게 할 때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좋은 의도에서 서로에게 충고하고 권면하다가 서로에게 시험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상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온유한 마음으로 섬기고 세우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충고나 권면을 할 때 언제나 자기 자신도 그러한 잘못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늘 자기 자신을 살펴서 너도 시험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3절입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고치려고 하다가 마치 자신은 스스로 된 줄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로마서 21절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누구나 넘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세우려고 애쓰다 보면 본의 아니게 마음이 상하고 실망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기회를 타고 마귀는 언제나 우리를 유혹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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