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펜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만 교회를 찾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 중 한명도 빠짐없이 그 다음 주에 돌아오게 만들고 싶다. 무슨 말을 해야 그들의 관심을 끌까? 예수님은 많은 무리 앞에서 무엇을 가르치셨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예수님은 오히려 대중이 듣기 싫어하는 메시지를 주로 전하셨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사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하루 종일 집회가 진행되자 슬슬 군중들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안드레의 현장조사를 통해서 한 소년의 떡 다섯 덩이와 작은 생선 두 마리를 통해 오천 명을 먹이고 음식에 풍족하게 남았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다음 날에도 설교를 듣기 위해 그 자리에서 캠프를 친다. 이튿날 잠에서 깬 제자들은 또 다시 주린 배를 움켜 쥐고 두리번 거리며 예수님을 찾는다. 하지만 아무리 들어보아도 주님은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미 호수 건너편으로 떠난 뒤다.
팬들이 겨우 예수님 일행을 따라 잡았을 때는 배가 고플 대로 고픈 상태다. 요한복음 6장 26절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겨우 굷주인 배나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예수님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예수님의 덕을 조금 보려는 것이었을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그분 자신을 주겠노라고 하신다. 그렇게 열광적이었던 팬들이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요 6:66).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성도의 숫자가 아니라 헌신의 깊이다. 이 책에서 나는 용서보다는 회개를, 구원보다는 항복을, 행복보다는 실패를, 삶 보다는 죽음을 더 많이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당신은 펜인가, 제자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말하면서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에 관해 말씀하셨다. 그 날 자칭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앞에 섰다가 나는 너를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아연실색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인가? 라는 질문이 당신과는 상관이 없는 질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질문은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 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라.
당신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른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널려 있지만 예수님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나서도 자신잇게 제자라고 말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냥 펜이다. 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전적인 정의는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펜은 일이 잘 풀릴 떼는 예수님을 응원하지만 반대상황에 이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을 돌려 다른 선수들에게 들러붙는다. 펜은 안전한 관람석에 안자 응원할 할 줄 알지 경기장에서 필요한 희생과 고통은 조금도 모른다. 예수님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어도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젯 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리스도를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는 펜이다. 온갖 혜택을 바라며 예수님의주위로 몰려드는 펜들은 있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할 할 만큼 그분과 가깝지는 않다.
펜과 제자를 구분하는 기준
남과의 비교를 통해 스스로 제자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펜에 불과한 사람이 많다.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스스로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펜이 사용하는 다른 기준은 종교적 법이다. 펜은 자신이 종교적 법과 의식을 잘 지키기 때문에 진정한 제자라고 말한다,
이외에도 펜은 교파와 가문과 성경지식을 들먹이며 자신이 진정한 제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펜은 단순한 열광을 진정한 헌신으로 착각한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친밀함으로 오해한다. 행동하지 않고 말로만 때우려고 한다.
2. 말뿐인가? 행동인가? 말로만 하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
우리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요 3:2)와 같이 자기 삶을 조금도 희생하지 않은 채 예수님을 따르기 원한다.
당신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손해를 보았는가?
진짜 믿음은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다.
펜인가 제자인가 진단하기 1 :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로만 고백하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실제로 따르고 있는가?
예수님을 믿기는 하되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대개 우리는 뭔가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 받아 들이거나 감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대상을 실제로 따라야 진짜 믿음이다. 따르는 것은 고개만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손발로 움직이는 것이다.
교회가 펜을 양산하는 공장으로 전략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믿음’의 메시지와 ‘따름’의 메시지를 분리하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는 말씀은 네 번 정도 하셨다. 그러나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20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 둘은 심장과 폐다. 둘 중에 하나만 없어도 살아갈 수가 없다.
펜으로 활동하면 잃을 게 없지만 제자의 길에는 비싼 가격표가 붙어 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따르면 무지막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무시무시한 바로 왕 앞에 서야 했다. 노아는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뭇ㅎ사람의 조롱을 견뎌가며 방주를 지어야 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따른 죄로 사자굴에 던져져야 했다.
펜들은 아무런 대가없이 모든 것을 주는 복음을 주문했다.
그러나 회개 없이는 용서도 없다. 죽음 없이는 생명도 없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진자 믿음이 아니다.
카일 목사님의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제 삶을 뒤흔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만난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7장에서 제자로 거듭났습니다. 51절에 보면 니고데모는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옹호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변호하자 산헤드린 공회의 다른 일원들은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고 말한다. 예수님의 출신을 비웃었던 산헤드린 공회가 니고데모에게 같은 공격을 퍼붓는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19장에서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거나 두려워하여 숨었을 때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향한 놀라운 사랑과 헌신을 드러냈다. 니고데모는 더 이상 숨은 펜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제자로 거듭난 것이다.
3. 지식인가? 친밀함인가? 반쪽짜리 믿음으로는 어림도 없다.
마태복음 15장 8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가혹한 평가를 하셨다. 바리새인처럼 펜도 머리로는 하나님을 열심히 연구하지만 그분께 마음을 드리지 않는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넘쳐 나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지식과 친밀함, 이것이 펜과 제자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 중 하나다.
펜인가 제자인가 진단하기 2 : 예수님에 관해서 아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전정으로 아는가?
성경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알다”이다. 창4:1에 보면 이담이 그 아내 이브를 알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히브리어 ‘아다’는 서로를 완전히 아는 것, 남편과 아내가 지극히 친밀한 관계를 나누는 것, 모든 차원에서 깊은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연합을 지칭하는 표현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앎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이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앎을 표현하고 있다(1-4절).
누가복은 7장의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에 관해 알았지만 그분을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께 친밀한 애정을 표현했던 창녀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었다.
4. 많은 애인 중 한명? 단 하나뿐인 애인? 대가를 제대로 알고 시작하라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의 관심사는 무리의 숫자가 아니라 헌신의 깊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셨다(25-26절). 이 말씀은 수많은 무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요건을 명시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을 따르려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려면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씀일까요?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다. 기족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누가복음 14장 26절을 NLT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내 제자가 되려면 너희 아비와 어미, 아내와 자식, 형제 자매보다 나를 더 사랑해야 한다.
펜은 예수님을 여러 애인 중 한명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관계를 원하시는지 분명히 못을 박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단 하나뿐인 애인이 되고자 하신다.
펜인가 제자인가 진단하기 3 : 예수님은 여러 애인 중 한명인가? 아니면 하나뿐인 애인인가?
1. 당신은 무엇을 위해 돈을 쓰는가?
성경은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만족을 줄 것 같은 물건에 시간과 돈을 쏟아 붓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갈증을 영원히 해소해 줄 수 있는 것은 생명수라고 말씀하셨다. 돈과 예수님은 둘 다 좇을 수는 없다(마 6:24.
수입의 얼마까지 집에 투자해도 좋을까요? 하지만 헌금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태도가 달라진다. 십일조는 순수입에서 계산해야 하나뇨? 총소득에서 십분의 일을 들려야 한나요?
계좌입출금 내역은 그 사람이 펜인지 제자인지를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다.
2. 힘들 때는 어디에서 위로를 얻는가?
사람이 고달플 때 누구 혹은 무엇에 의지하는가? 사람이 다급한 처지에 놓이면 진정으로 믿는 대상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3. 어느 때 가장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는가?
언제 불같이 화를 내는지를 보면 무엇을 가장 중시하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실망스러운 일을 겪으면 화가 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과도하게 화를 낸다면 그 화의 대상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증거다.
4. 어느 때 가장 신이 나는가?
우리를 실망시키는 대상 못지않게 우리를 흥분시키는 대상도 예수님의 경쟁 상대일 수가 있다. 스포츠, 미술, 음악, 일, 외모, 이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훔쳐가는 주범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른다 함은 그분만을 따른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다른 모든 대상을 미워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예수님은 돈이나 직업, 심지어 가족과도 우리를 공유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누구와도 우리의 사랑을 나누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단순히 전적인 사랑을 받기만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절대적인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주시겠다는 뜻이다.
반쪽자리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오직 전심으로 쏟는 관계만을 원하신다.
예수님은 대가를 정확히 알고서도 기꺼이 따라오는 사람들을 찾으신다(눅 14:28-30).
5. 율법인가? 은혜인가? 종교활동을 잘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메튜 에먼스는 2004년 올림픽 50미터 소총 3자세 경기에서 금메달을 단 한발만 남겨 두고 있었다. 그냥 표적만 맞추기만 해도 금메달이었다. 평소처럼 8.1점만 맞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메튜는 결승에서 극도로 드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엉뚱한 표적을 쏜 것이다. 2번 레인에 서서 3번 레인의 표적을 쏘고 말았다. 표적을 제대로 맞추었지만 엉뚱한 표적인 까닭에 점수는 0 점이었다.
펜들은 열심히 따르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닌 종교적 규칙과 의식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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