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10. 예람주일오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삶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성경에는 이런 경험을 “교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교제라는 단어가 요즈음 의미를 거의 상실했습니다. 그저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함께 어울리며, 음식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말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교제는 삶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기적이지 않은 사랑, 진실한 나눔, 실제적인 섬김, 희생적으로 서로 베풀고 서로에게 위로를 주는 것을 포함합니다. 교제의 크기는 인원이 적을수록 좋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열두 명 이상을 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서 모이는 기관에 다 참여해야 합니다.
적은 소그룹의 모임에서 진정한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교회가 배라고 한다면 소그룹은 배에 붙어있는 구명 보트입니다. 하지만 소그룹에 참여했다고 해서 꼭 진정한 공동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1. 진정한 교제에서는 사람들이 진실함을 기대합니다(요일 1:7-8)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의 삶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교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나누고, 감정을 표현하며, 실패를 고백하고, 의심을 보이며, 두려움을 시인하고, 약점을 깨달으며 기도를 부탁해야 합니다.
물론 진실해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용기가 필요하며, 겸손해야 할 수 있습니다. 노출, 거부, 그리고 또 다시 상처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 직면해야 합니다. 누가 이런 위험을 감수하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2. 진정한 교제를 통해 상호의존하게 됩니다.
상호의존이란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5절에 보면 “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1장 12절에 보면 ”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서로 돕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12장 10절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로마서 14장 19절에 보면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통해 그들을 돕기 원하십니다.
3. 진정한 교제를 통해 사람은 공감합니다.
공감하는 것은 고통에 함께 참여하고 그 고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겪고 있는 것을 안다.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이상한 것도 잘못된 생각도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을 옷입고”. 우리가 상대방의 감정을 확인해 주고 이해해줄 때마다 우리는 교제를 쌓아갑니다.
교제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단계는 나눔의 교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공부하는 교제, 더 깊은 단계는 섬김의 교제이고, 이것은 우리가 선교여행이나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가장 깊고 친밀한 단계는 함께 고통을 나누는 교제인데(빌 3:10, 히 10:33-34), 이것은 서로의 고통과 슬픔에 참여하고 짐을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갈 6:2).
4. 진정한 교제를 통해 자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교제는 자비가 정의보다 강할 때 일어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비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흔들리고 넘어지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도움이 필요합니다. 고린도후서 2장 7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용서없이는 교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죄인들이게 때문에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면 때로는 의식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에 보면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보여 주신 자비의 모습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동기가 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나의 에너지를 복수할 때 사용할 것인가? 이 두 가지를 모두 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와 신뢰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비를 베푸는 것을 주저합니다. 용서는 과거를 잊는 것입니다. 신뢰는 미래의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용서는 상대방이 그것을 구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바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상처를 준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용서하시기를 바라지만, 그들을 바로 신뢰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으십니다. 또한 그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상처를 주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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