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교육

히브리서 강해 모음집

by liefd 2024. 4. 22.
반응형

 

 

히브리서, 리처드 필립스

 

성경의 자랑 거리 가운데 하나는 성경이 특정한 그룹의 사람을 포함한 특정한 상황을 사용하여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사람에게 가장 적절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런 원리의 탁월한 실례입니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매진해야 할 이유-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한 우월성 때문에-와 메진할 방법-선진들의 믿음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을 말해줍니다.

히브리서는 예루살렘과 성전이 로마인에게 파괴된 때인 AD.70년 이전에 기록되었습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련 가운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후퇴하지 말 것을 경고하면서 오히려 온전한 성숙을 향해 매진 할 것을 권면합니다.

독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저자의 간청은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움직이지 말고”(10:23).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1: 1-2)

칼빈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신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과 지고한 통치, 유일한 제사장직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담고 있으며, 또한 이런 점들을 설명하되 그리스도의 완전한 능력과 사역을 가장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으므로 교회 안에서 매우 귀중한 보화라는 지위와 영에를 차지함이 마땅하다고 설명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1:1). 이것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을 인용할 때마다 저자는 인용한 성경을 결코 인간 저자가 아니라 신적 저자의 말로 간주합니다. 히브리서 212절에서 저자는 시편 222절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히브리서 37-11절은 시편 95편을 인용하고 있지만 다윗이 말한 바와 같이가 아니랴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라고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13;8) 그리스도인의 행실에 대한 기준도 그대로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37절에서 저자는 천 년 전에 기록된 시편을 인용하면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현재시제를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다윗이 시편을 기록했을 때 성령이 말씀하셨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성령이 지금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11-2절에서 세 가지 대조되는 표현을 통해 이 점을 강조합니다.

 

첫째는 계시의 시기로서 옛적에와  이 모든 마지막 날에가 대조됩니다.

둘째는 계시의 대상으로서 우리 조상들에게우리에게로 대조된다. 셋째는 계시의 방법으로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아들을 통하여가 대조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마지막 계시가 주어졌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충분하고도 궁극적으로 계시하셨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가져오신 것은 말씀이 일부분이 아니라 최후의 종결짓는 말씀이었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2. 선지자, 제사장, (1: 2-4)

 

진정한 왕이신 그리스도 : 그리스도는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최후의 선지자이신 그리스도 :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본체의 형상이라(1;3)

완전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 예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신 참되고 완전한 제사장. 예수님은 우리 죄를 없애기 위해 한번의 진정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제사장 직분을 이루십니다.

 

3. 천사보다 뛰어나심(1: 4-9)

히브리서 저자가 그리스도가 천사보다 뛰어난 것을 강조해야 했던 중요한 이유는 시내산에서 주어진 옛 언약이 천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행전 7:35절도 율법을 천사가 전한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천사보다 높으신 근본이유가 4절에서 진술되는데 첫째, 그리스도가 뛰어난 이름,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상속받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하는 시편 27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3:32-33절에 여기서 '낳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절에서 이 점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아들로 선포되었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당시 아들이 된다는 것은 인정과 상속, 아버지의 일을 맡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부활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합당한 상속자이며 참 아들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6절은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한 두 번째 논거를 제시하는데, 바로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라는 명령이 천사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97:7, 32:43).

예수님이 맏아들로 불리시는 것은 모든 창조물보다 앞서 존재하시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창조물이 예수님의 유업이기 때문이다(브루스).

히브리서 저자는 세 번째로 그리스도가 신적인 주권 때문에 뛰어나다고 지적합니다(1:7; 104:4). 천사는 힘이 있고 영광스럽기는 하지만, 천사는 보좌에 계신 그리스도를 섬깁니다.

 

4. 통치하시는 주(1: 10-14)

요한복음 1장과 골로새서 1장과 같은 다른 장들도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묘사로 유명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첫 번째 장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철저하게 열렬하게 공포하는 장은 신약 전체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세 가지 신적인 속성, 즉 영원과 전능과 불변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구주는 세상이 탄생하던 영원한 때부터 계신 분이십니다(1:10). 나아가 우리의 통치자이신 주님은 전능한 힘을 행사하여 주님의 통치를 대적하는 모든 원수를 물리치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구주는 불변하십니다(1:12, 13:8).

 

5. 유념하라(2: 1-4)

우리가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히브리서에 나오는 다섯 가지 경고 가운데 첫 번째 것인데,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떠남으로 구원에서 떠나는 위험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흘러내려간다는 그리스어 파랄레오는 경로를 이탈한 배나 정박 중에 계류 장치를 벗어난 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사라진 어떤 것이나 손가락에서 벗겨진 반지를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대체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영적인 자원들에 착념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탐욕과 교만, 허욕, 호색, 악의로 되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구원을 확고하게 하는 닻이며, 우리 영혼이라는 배의 키를 안전하게 조종하게 해 주는 방향타입니다.

옛 언약에서도 불순종하여 중한 벌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새 언약이라는 더 큰 구원을 등한이 여길 경우 그 보응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6. 역사는 예수님의 이야기(2: 5-9)

낙원의 상실, 그와 더불어 하나님이 주신 통치권 및 축복을 잃어버린 것, 이것이 인류의 문제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본다고 합니다.

 

7. 완전하고 철저한 고난(2:10-13)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거듭난 것은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을 얻게 하심이며, 또한 하나님과 그 자녀를 구별 짓는 거룩함을 얻기 위함입니다. 시련은 우리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고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촉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시편 22편은 중요한 신학적 요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은 단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한 우리로 그분의 아버지를 예배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오늘날 교회에서 성취됩니다. 실제로 히브리서 212절은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이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8. 능히 도우실 수 있음(2: 14-18)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야 했던 세 가지 이유는 첫째, 우리를 사망의 노예에서 해방하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정당한 진노를 가라앉히는 것이며, 셋째는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18).

 

9. 위대한 사도(3;1-6)

예수님은 옛 언약의 가장 위대한 위인, 즉 옛 언약을 전달한 모세보다 우월하시며, 따라서 예수님의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 더 뛰어나십니다. 옛 언약은 국가적인 이스라엘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내다보며, 새 언약은 초국가적인 교회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되돌아본다는 것입니다.

 

10. 불신앙에 대한 경고(3:7-12)

성령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으며 지금은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적용함으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히브리서 37-8절은 성경의 변함없는 적절성과 권위를 설명합니다. “오늘 너희가 그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아서 핑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위기는 사람을 만들지도 훼손하지도 않으며 다만 그 사람을 드러냅니다.”

우리 믿음의 고백은 시련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따라 인정을 받거나 받지 못하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시련은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분하며 그 차이점을 명백하게 드러나게 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더글라스 윌슨은 불평은 배은망덕의 깃발로서 불신하는 마음 한 가운데 펄럭인다고 했습니다.

불평은 영적인 문제가 심각해지는 전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을까요? 요점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는 누리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해 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도널느 그레이 반하우스는 눈물이 앞을 가릴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눈물은 수정같은 렌즈가 되어 하나님을 확대시켜 보여줍니다. 따라서 고난의 한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과 그분의 사랑의 따스함을 실감합니다.

 

11. 잃어버린 구원(3:12-19)

과거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얻은 세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시작이 좋다고 끝도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16). 듣고 격노하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둘째, 하나님을 향해 완고한 마음을 품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가를 배웁니다(15).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7-18).

 

셋째, 히브리서 저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실상을 직시하라고 요구합니다.

불신앙의 개선책은 두 가지 권면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너희는 삼가라(12), 매일 피차 권면하라(13).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며, 또한 교회 안의 다른 사람들 곁에서 그렇게 하도록 권면해야 합니다.

 

존 칼빈은 이 일이 왜 그렇게 필요한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악에 빠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우리를 도와 줄 다양한 수단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믿음은 되풀이 하여 격려를 받지 않으면 휴면하게 되며, 데워지지 않으면 냉담해지고 자극을 받지 않으면 무감각해진다. 그러므로 사탄이 그들의 마음속에 몰래 들어가 거짓으로 그들을 꾀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지 않도록 그들이 상호 격려를 통해 서로를 자극하기를 바라고 있다.

 

12. 영원한 안식(4;1-5)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그런 하나님과의 구원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과 그분이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의지하십시오. 주 예수를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커다란 변화를 일으킵니다.

 

13. 하나님이 안식에 들어감(4: 6-11)

남아있는 안식은 궁극적으로 천국을 말합니다. 남아있는 안식은 실현된 종말론, 우리가 현재 소유하고 있음을 저자가 강조하고 있다. 즉 하늘의 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미래의 일이 믿음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실현되고,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일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믿음으로 말미맘은 여러분의 노력은 허사가 아닙니다.

 

14.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4:12-13)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친히 우리를 가르치시며, 책망하시고 바로 잡으며, 의로 교육함으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십니다. 성경이 시간을 초월하여 생명이 있는 엄밀한 이유는 그것이 영원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이며, 성경의 목적은 그 메시지를 믿고 받아들이는 개인에게 그 구원을 실제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여러분을 찾고, 여러분의 생각과 태도를 칼로 쪼개며, 여러분을 심판합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구원에 충족하신 하나님, 기꺼이 여러분을 구원하고 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8:32).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행하는 일은 어떤 것이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며, 나아가 구원의 능력을 가져옴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15. 은혜의 보좌(4: 14-16)

히브리서 4장의 끝은 3장에서 시작된 긴 권면의 종결부인데, 그 권면에서 저자는 고난에 직면하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믿음 안에서 힘써 전진하라고 독자에게 명령합니다. 이 요구의 충족을 위해 지금까지 저자는 두 가지 중요한 자원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첫째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교제와 격려를 언급했습니다(3:13).

 

또 하나의 중요한 자원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말씀니다.

 

세 번째 자원은 기도인데, 기도를 통해 우리는 힘써 전진하는데 필요한 자비와 은혜를 얻기 위해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의 삶이 항해중인 배와 같다면 히브리서가 담고 있는 요구는 우리의 삶을 지시하고 지도하는 키와 같습니다.

저자는 이 편지가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요구, 즉 기독교 신앙을 견지하라는 명령을 반복함으로 이 단락을 시작합니다(14). 이것은 필수적인 요구일 뿐만 아니라, 또한 대단히 실천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계속해서 우리의 인내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는데, 우리의 인내 뒤에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입니다(1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에 앞서서 우리의 구원을 확보하셨습니다.

 

필립 휴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죄인들은 더 이상 두려움과 떨림으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지 않는다. 특히 여기서는 구원의 두 가지 측면이 눈에 뜨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하늘의 장막에서 속죄를 행하셨으며, 지금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여 하늘에서 섬기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한편으로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행하신 일과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수행했던 의식상의 직무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지금 주님이 우리와 동질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의 보좌 앞에서 탁월하게 여러분을 대표하실 수 있고, 여러분을 위해 간구하며, 여러분의 처소를 마련하고,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영적자원을 조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 즉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 및 현재 행하시는 중보에 근거하여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또한 왕중 왕의 보좌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찰스 해돈 스펄존은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겸손한 외경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친밀히 대할 수 있지만,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담대함이 있어야 하지만, 무례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큰 기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대단한 특전으로 베풀어진 호의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나아갈 대상인 왕의 능력과 선하심에 어울리는 넓은 기대를 포함해야 합니다. 이것과 아울러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뜻에 대한 복종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주석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과거의 실패에 대해서는 자비를, 현재와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은혜를 필요로 한다.

 

16.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심(5: 1-6)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한결같이 주목한다는 점에서 신약의 다른 서신들 가운데 두드러집니다. 로마서에는 죄에 빠진 인간의 상태로 시작합니다. 다른 서신에서는 발생한 문제나 염두에 두고 있는 관심사로 시작합니다. 베드로의 편지는 둘 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하고, 요한일서는 자신의 사도로서의 사명과 메시지에 대한 진술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장은 예수님의 신분과 행하신 일에 대한 장대한 진술로 시작합니다.

 

히브리서 51-10절은 먼저 대제사장의 자격을, 이어서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야 한다는 요건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는 다음과 같이 요점을 정리하여 말합니다. “성도가 오래 참는 이유는 예수님이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이미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17. 우리 구원의 근원(5:7-10)

구원의 근거는 의로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의로우려면 말로나 행동으로나 손으로나 마음으로나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고 하나님의 규범을 지지해야 합니다.

 

의가 구원의 요건, 즉 하나님과의 교제의 근거라면, 우리의 의는 어디에서 옵니까? 로마 카톨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의롭지 못한다는 것을 즉각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하늘에 들어가는 근거는 여러분 자신의 의라고 카톨릭은 주장합니다.

죄인들은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주입하신 의에 근거하여, 교회 및 교회의 극히 중요한 사제직 및 성례전을 통해, 또한 마리아와 성인들의 도움으로 연옥에서 완전한 거룩에 도달한 후에 하늘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고통과 굶주림과 유혹이 있는 광야에서 예수님은 우리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위해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순종의 정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사역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의 부단한 경외와 완전한 순종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가?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이 되십니다(5:9).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분이 만일 그리스도가 구원하시는 역사를 믿는다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구주가 되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고백해야 할 것들이 있고 내버려야 할 것들도 있습니다.

 

18. 젖에서 고기로(5: 11-6:3)

저자는 영적인 유아의 특징이 의의 말씀에 미숙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NIV는 이를 의에 대한 교훈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젖먹이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특징은 첫째로 유아신자는 이해가 천박합니다. 둘째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일에서 다른 이에게 별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유아신자의 세 번째 특징은 건전한 것과 불건전한 것을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이며, 또한 믿음에 대한 다른 모든 문제들의 터가 되는 것입니다(6:1).

첫 번째 쌍은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불신앙에서 기독교로의 이동은 죽음에 이르는 행위에 대한 자각과 가책과 회개로 시작합니다. 죽은 행실은 하나님이 정죄하시는 죄악된 행동일 뿐만 아니라(6:19-21), 헛된 종교행위입니다. 회개와 짝을 이루는 것은 용서와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참된 회개는 언제나 구원하는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회개와 신앙은 함께 가장 기초가 되는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 칭의교리에 상응합니다.

 

다음 쌍은 씻는 것과 안수. 씻음과 안수는 함께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능력을 얻는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씻음과 안수는 성화를 가리킵니다.

 

기독교의 근본진리에 대한 이 목록을 끝맺는 마지막 쌍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입니다. 이 목록은 영화의 문제, 즉 신자의 사후 운명을 다루는 쌍으로 끝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한결같은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가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 한번 빛을 받고(6:4-8)

히브리서 저자는 시종일간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진을 주장해왔습니다. 우리가 전진하기를 원하는데, 이는 그것이 구원을 확고히 하고 끝까지 인내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독자의 믿음이 성정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이유, 즉 참으로 무서운 배교의 위험을 제시합니다. “정지는 후퇴다. 노력의 중단은 퇴각이다. 결승점에 도달하기 전에 속도를 늦추는 것은 경기에 짐는 것이다.”(엔드류 머리).

 

한번 빛을 받고’, 누구인가, 무엇인가? 첫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자신의 독자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줄곧 1인칭과 2인칭을 사용하던 저자가 여기서 3인칭으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구절이 가상의 상황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타락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설명이 실제의 구원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회심은 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참되고 구원 얻는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개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이것에 근거하여 나는 성도가 타락할 수 있다고, 즉 하나님이 친히 판단하시기에 거룩하거나 의로운 사람도 영원히 멸망할 정도로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해석은 사람이 거듭나서 참 구원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의 영원한 안전을 가르치는 본문과 직접적으로 상충된다는 것입니다(10:28-29, 8:38-39, 1:6). 또한 히 6:17에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변하지 아니함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딤후1:12).

 

둘째는 한번 빛을 받고는 세례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후 2세기 초에 그렇게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주의 만찬을 말하고, 성령에 참여한 바가 된다는 것은 안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셋째는 출애굽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한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당했을 때 타락하여 배반하였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타락할 수 있으며 그들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습니다(6:6, 6:4). 사람들은 어째서 타락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행했던 일을 행함으로 타락합니다. 즉 주님을 신뢰하기를 포기하고, 주님의 권위 및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부인하며, 주님을 예배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의 확신은 기차표나 은행지폐처럼 필요에 따라 휴대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구원의 확신은 사랑과 순종 가운데서 살아계신 예수님과 나누는 교제에서만 발견됩니다(앤드루 머리).

 

20. 끝까지 부지런하라(6: 9-12)

그리스도인이 구원에 대한 기쁨 및 소망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서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구원의 확신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배교의 위험을 호되게 경고하면서 구원에 확신에 이르도록 열망하고 있습니다(6:9).

 

히브리서 저자들은 당시의 성도들이 듣는 것이 둔하다는 것, 영적인 어린아이라는 것, 그 결과 선과 악을 분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5:11-12). 자기 양떼의 형편을 매우 염려한 이 목회자는 만일 회중이 나태하면 실제로 타락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합니다(6:4-6).

 

저자의 확신의 첫 번째 표지는 구원의 이유가 아니라 구원에 수반되는 특성을 설명합니다. 구원이 있는 곳에는 이런 특징들이 반드시 발견됩니다(6:10). 제일 먼저 행위, 그들의 열매 맺음을 언급합니다. 또한 독자가 과거에 보였고 미래에 행할 특정한 일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10:32-34). 히브리서 저자는 참된 생명에 대한 훌륭한 표지로서 교회 안에서 서로에 대해 보여준 섬김에 초점을 맞춥니다. 회중 가운에 나타난 실천적인 사랑은 그 회중의 영성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25:34-40).

 

저자의 확신의 두 번째 근거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습니다(6: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십니다(6:10).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주목하시며, 모든 간구와 모든 사랑의 행위, 모든 충성된 행동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상을 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친히 우리 안에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입니다(아더 핑크).

 

우리의 모든 죄는 잊어버리실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이제껏 하나님에게 나타내 보인 모든 사랑의 행위는 기억하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이 구원에 대해 온전히 확신하고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기쁨과 평안을 온전히 누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1:18-19).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6:12).

 

21. 영혼의 닻(6:13-20)

두 가지 유형의 격려가 나옵니다. 첫째는 용기를 북돋우는 모범으로서 오래 참음이 어떻게 소망과 복에 이르는가를 보여 줍니다. 우리 앞서 걸어가며 성공한 사람을 주목하는 것은 언제나 같은 길을 걸어가도록 우리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격려의 두 번째 방식은 아마도 최상의 방법일 텐데, 궁극적인 성공의 보장입니다.

 

대략 4 천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모범이자 선례입니다(4:11, 3:29). 아브라함은 엄청난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또한 의심과 불신앙을 일으키는 많은 원인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믿음을 견지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생애 전체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일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일에 대해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맹세가 그 약속을 엄중하게 어길 수 없는 것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약속의 확실성을 알리심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맹세로 보증하신 이 어길 수 없는 약속, 즉 거짓말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이 우리 자신의 확신과 소망의 토대입니다. 우리의 고정된 닻을 묵는 강력한 밧줄인 케이블은 영원힌 진리이신 하나님의 맹세와 약속이다.

 

22. 멜기세덱(7: 1-10)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예표로 되어 있으며, 예표는 장차 올 사람을 상징하고 예기하는 다른 어떤 사람입니다. 멜기세덱은 불경건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따르고 공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에 대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네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멜기세덱이 왕이자 제사장이었다는 것입니다(7:1). 구약 이스라엘에서 왕과 제사장 직분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둘째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이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아브라함을 만나 축복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가져왔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축복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아브라함의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셋째로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의 아름 및 직함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나 곧 평강의 왕이요. 멜기세덱이란 이름은 의로운 왕이라는 뜻입니다. 멜기세덱의 직함은 살렘 왕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살렘의 성을 의미합니다.

 

넷째로 멜기세덱의 등장은 특별히 주목할 만한 특징 하나는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3). F.F 브루스는 멜기세덱은 현존하는 인물로서 살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등장한다고 합니다.

 

23. 더 좋은 소망(7: 11-19)

히브리서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모세의 엣 언약과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왜 구원의 새 경륜, 혹은 새 방식이 있어야 합니까? 히브리서 711-19절은 그리스도가 새로운 제사장이시므로 그리스도가 새로운 법이나 새로운 언약적 경륜을 대표한다고 주장합니다(7:11).

 

옛 언약은 외적인 계명을 통해 구원을 베풀었지만, 새 언약은 변화시키는 생명의 능력을 통해 구원을 베풉니다(10:10).

이제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대제사장으로 우리가 구원얻는 데 필요한 생명과 능력을 주시며, 또한 우리가 계속 믿음 안에서 달려가도록 도우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내면에서부터 새롭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생명을 보내십니다.

 

24. 이는 그가 살아 계셔서(7: 20-25)

하나님이 다윗 왕을 통해 에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맹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아주 완전하게 보증하고 보장합니다.

우리의 죄를 제거하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단번에 행하신 일, 모든 것을 충족하는 구속입니다.

 

25. 완전히 합당하심(7: 26-28)

예수님은 자기를 힘입어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7:25). 우리가 이러한 대제사장을 갖는 것은 참으로 합당한 일이었다.

중세의 학자인 헤르베우스는 제사에 대하여 논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네 가지 사항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무엇을 드리는가? 누구에게 드리는가? 누가 드리는가? 누구를 위해 드리는가?

 

7:26절에 거룩하다(하나님에 대한 것), 다른 사람에 대한 것(악이 없음), 자신에 대한 것(깨끗함)으로 분류합니다(필립 휴즈).

이에 대해 윌리엄 레인은 거룩하다-신앙적인 자격,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보이는가?,

악이 없음-제사장의 도덕적인 자격, 예수님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범하지 않으신 흠이 없는 분이시며 행동과 동기 모두에 있어 악이 없으십니다.

깨끗함-제사장의 의식상, 직무상의 자격, 예수님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정결하십니다.

제사장 사역에 있어,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연약이라는 우리의 곤경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완전히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합당하십니다.

 

진정한 예배는 어디서 시작됩니까? 우리의 필요를 인식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시며 우리가 그 필요-죄의 용서, 하나님과의 화해, 영생-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예배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셨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6. 우월한 직분(8:1-6)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에 있어 그 우월성을 실증하는 다섯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생애의 처음부터 끝까지 인격에 있어 완전하셨음에도 그분의 사역에 있어 완전하게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직분이 우월하다는 것을 실증하는 두 번째 특징은 그리스도가 제사장이자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우월성을 주목하게 하는 세 번째 항목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그는 앉으셨으니(8:1)라는 말에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가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단번에 제사를 완결하신 후 모든 것이 완료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우월한 네 번째 증거는 그리스도가 지금 능력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우월성의 다섯 번째 증거는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침 성소는 지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으며 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거기서 우리를 위해 섬기고 계시다는 점을 확언합니다.

예수님의 직분이 우월한 이유는 예수님의 언약이 우월하며 더 좋은 약속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언약이 우월한 이유는 예수님이 우월하시며 예수님의 사역이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27. 새 언약(8: 6-13)

깨어진 언약의 책임은 분명히 불충한 백성에게 있습니다. 옛 언약의 주된 문제점은 은혜의 결여가 아니라 그것이 구원의 외적인 경륜이었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첫 번째 약속은 성령의 변화시키는 역사입니다(8:3).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연약함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셨습니다. 율법을 주실 분 아니라 또한 그 법을 실제로 우리 안에 있게 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보내시는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8:10은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생각에서 시작해서 마음으로 이동하는 하나의 과정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 언약을 사람들의 마음에 적용하십니다. 먼저 우리는 진리를 이해해야 하고, 그 다음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헌신하며 우리의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하는 믿음이 역사하는 방법입니다. 마음은 영혼의 성소입니다. 생각은 마음의 현관입니다. 빛은 생각을 통해 들어와 마음을 데웁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시고, 성령의 역사로써 우리의 마음을 밝히고 의지를 새롭게 하심으로 그 말씀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새 언약의 두 번째 약속은 죄의 용서입니다(8:12).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으며, 따라서 우리의 죄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습니다.

 

새 언약의 마지막 약속은 정점을 이루는 약속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리라. 첫 부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교제, 이것은 새 언약의 최고의 복입니다"(앤드류 머리).” 이런 교제의 조건은 거룩인데, 이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응답의 서원으로 하나님은 역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8:10-11).

 

28. 지상의 성소(9:1-10)

제사장은 매일 외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며 등불과 향단 앞에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과 교제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에게 직접 나아가는 일은 거부되었습니다. 히브리서 9장은 옛 제도가 할 수 없었던 일, 양심을 완전하게 해 주는 일을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루셨다고 말합니다.

 

29. 그리스도의 피(9:11-14)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필요할 뿐 아니라 큰 기쁨과 능력의 원천이 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세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1. 그리스도 피의 우월성

그리스도의 피가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룰 수 있는 이유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가 더 나은 제사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보배로운 피, 즉 하나님의 독생자의 피 값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순종을 드렸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 죄가 응당 치러야 할 형벌을 스스로 감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월한 두 번째 이유는 그 피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정하신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월한 세 번째 이유는 예수님은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제사를 드렸습니다(9:4). 다시 말해 예수님은 단지 육체로만 아니라 또한 영으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에 하기 위해 드려졌습니다(9:14).

 

2.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킬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양심을 정결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하십니다.

 

찰스 헤돈 스펄존은 우리의 양심 때문에 드러나는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과거의 죄악된 행위를 아는 것, 우리의 본성과 더불어 사고 및 욕망이 약함을 아는 것, 우리가 이 세상 악을 계속 접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정결케 되지 않는 한 서로 협력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마음에서 과거의 죄악된 행위로 인한 커다란 두려움, 우리 양심에서 나오는 이 심각한 정죄를 씻어낼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죄악된 사고와 욕망에 대한 인식, 단순히 우리의 행위만 아니라 본성까지도 악함을 아는 것 역시 어린 양의 피로 깨끗해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온갖 죄와 악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우리의 양심은 움찔거립니다. 이스라엘 제사장이 황소와 염소의 피를 피부에 뿌렸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즉각적인 정화를 얻습니다.

 

3. 그리스도의 피의 목적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음 받고 구속받았습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행복에 필수적입니다. 일단 깨끗하게 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30. 마지막 유언(9:15-22)

죽음은 언약 위반에 대한 형벌입니다. 언약의 피는 언약 위반에 대한 형벌을 보여 주었지만 또한 그리스도 및 그 분 안에 있는 새로운 연약을 가리켜 보였습니다(9:22).

우리는 구원을 선물로, 값없이 주어진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 언약은 얼마나 놀라운 선물-하나님과의 교제-을 우리에게 줍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최대의 선물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31. 단번에(9:23-28)

아우구스티누스는 먼저 역사 가운데 반복될 수 없는 한 가지 사건이 있다는 것을 주목했습니다. 그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죽으신 일이었습니다. 본질상 이 사건은 단 한번만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의 피를 드리시고 하늘에 들어가신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정결하게 하는 피는 이생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하늘에서는 우리에게 처소를 보장해 줍니다.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하늘을 정결케 한 이 일은 역사의 전환점입니다.

 

복음의 좋은 소식은 여러분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단번이 아닌 것이 그리스도에게는 단번입니다. 그러나 영구적인 평화, 단번에 주어지는 평화는 우리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헤야 하지만, 구원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32. 그리스도의 몸(10:1-10)

존 칼빈은 율법의 일들은 생생한 그림의 전조가 되는 개략적인 윤곽 같은 것이었다. 물감으로 진짜 색을 칠하기에 앞서, 미술가는 보통 그리고자 하는 회화의 윤곽을 연필로 그린다고 설명합니다. 옛언약의 율법은 바로 그런 그림자였습니다.

 

첫째로 신약과 구약 사이에 근본적인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확언합니다.

 

둘째로 구약의 주제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다양한 모형과 전형을 통해 그림자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선별된 구약 본문에서만 아니라 모든 성경에서 발견됩니다(24:47).

 

칼빈은 시편 40편을 율법을 이루러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고 봅니다.

히브리서 105-7절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것과 원하시는 것을 대조시킵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적인 생명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제사가 가치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 피의 가치는 하나님 아들의 피의 가치였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가 죄로 말미암은 결점이나 결함이 없는 흠 없는 어린 양이라는 점에서 그 제사가 가치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치를 더해 주는 점은 그리스도의 제사가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보시는 일,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함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10:5).

 

33. 중대한 결론(10:11-18)

14절에 나오는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는 히브리서에서 아홉 번 나오는 가운데 일곱 번째입니다(2:10, 5:8-9, 예수님에 관해서, 10:1, 14, 12:18-24, 신자에 관해서).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한 구주와 대제사장의 역할에 있어 온전하게 되신 것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기 위함이며-이것이 전반부의 내용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예배하는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역할을 위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후반부의 내용입니다.

 

3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10:19-25)

1976년에 프란시스 쉐퍼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서 사람들의 사고체계 속에 있는 것이 사람들의 행동방식을 결정한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믿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쉐퍼는 그의 책에서 우리의 생활방식이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과 일치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연결고리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때문에 우리가 두 가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첫 번째 소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나아감과 관계가 있습니다(19-20).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얻은 담력입니다.

우리의 두 번째 중요한 소유는 위대한 대제사장이 계신다는 것입니다(10:21).

 

그리스도가 행하신 구원 사역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보일 응답으로서 삼중의 생활방식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 권면은 예배의 삶으로 우리를 부릅니다(10:22).

 

예배를 위한 네 가지 지침은 다음과 같다. 진심, 온전한 믿음, 뿌림, 영적인 갱신.

공적인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자하는 온전한 애정과 의도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용납하심에 대한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행한 일에서 비롯되는 죄책감 및 성소에 갖고 가는 죄악을 해결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고 의지하며 나가야 합니다.

 

두 번째 권면은 진리의 삶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10:23)

 

우리가 믿지 않는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복음의 소망을 꽉 붙잡고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2:11, 3:14, 4:13).

 

세 번째 권면은 사랑의 공동체의 삶으로의 소환입니다(10:24-25).

 

윌리엄 레인은 사랑과 선행 그리고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상호격려로 표현되는 서로 간의 지속적인 돌봄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도바울이 제시한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삶의 요소, 믿음, 소망, 사랑(고전 13:13)은 히브리서 10:22-25의 세 가지 권면과 일치합니다.

 

제일 먼저 믿음이 나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소망입니다. 인생의 험난한 바다 가운데서 소망의 닻을 통해 힘과 안정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특색을 부여하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소망입니다(게할더스 보스).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사랑인데, 이것을 바울은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에게 데려갑니다. 이 믿음의 결과는 소망으로, 이생의 풍파 가운데서 우리 마음을 지켜줍니다.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더 이상 자신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격려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소망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35. 무서운 형벌(10:26-31)

히브리서에는 네 가지 중요한 경고가 나옵니다.

 

첫째는 복음을 굳게 잡지 못함으로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입니다(2).

 

둘째는 불신앙의 마음으로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합니다(3).

 

셋째, 배교의 비참한 결과를 경고합니다(6).

 

넷째, 불신앙으로 돌아서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10:27).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심판과 지옥을 단지 멸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에 대한 영원한 형벌과 고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20:11-15).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10:26). 짐짓 죄를 범한다는 것은 고의적으로 계속 죄를 범하는 것을 말합니다(15:30).

 

배교에 대한 이 진술은 세 가지에 대한 극악한 거부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것이요(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둘째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구원사역에 대한 것이요(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셋째는 복음을 가져다주신 성령에 대한 것입니다(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12:32).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이분은 단지 육체적인 죽음을 겁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죄를 쓰시고 우리 대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되는 진노를 당하는 일을 경험하신 거룩하고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 당하신 공포였습니다.“

 

36. 잠시 잠깐 후면(10:32-39)

히브리서 저자는 과거가 현재를 위한 중요한 자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에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10:32).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단지 세 종류 뿐 입니다.

 

첫째로 여러분은 복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은 당연히 좋은 거지요.

 

둘째는 여러분은 죽을 수 있는데, 죽음은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존전에 데려갑니다.

 

셋째로 여러분은 고난을 당할 수 있는데, 주님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더욱 닮게 하기 위하여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그것도 매우 좋은 일입니다.

 

이 본문이 구성하는 중요한 동사 셋이 있는데,

그 가운데 첫째는 과거와 관련이 있습니다. “기억하라.”

 

둘째는 히브리서 10:36절에 나타나며 미래와 관련이 있습니다. “너희가 받기 위함이라.” 즉 현재가 고난을 수반한다면 미래는 믿음을 수반합니다. “세상이 지금 사고 나중에 지불하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인은 지금 희생하고 나중에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우리는 미래의 복을 현재의 고난 가운데 가져와 인내의 능력으로 삼습니다(7:16-17).

 

세 번째 동사는 인내하라입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36).

주권적인 은혜와 오래 참음의 필요성이라는 두 개념을 연결시켜 주는 가장 명백한 진술은 아마도 베드로후서 110-11절일 것입니다.

과거는 십자가와 빈 무덤에서 이르신 그리스도의 승리로 규정됩니다. 미래는 영광스러운 재림과 영원한 통치를 통한 그리스도의 승리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온갖 시험이 있는 현재는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지금 우리를 부양하는 때입니다.

 

37. 믿음이란 무엇인가?(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있지만 그 바라는 것의 소유나 실현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발생합니다.

 

필립 휴즈는 믿음이란 단어, ‘휘포스타시스를 네 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첫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입니다. 휴즈에 따르면 믿음은 그것을 실제적이고 확고한 것으로 굳게 붙잡다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바라는 것이 존재하는 기초(근거)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의 끝을 확실하게 내포하고 있는 시작으로 본 것입니다.

 

셋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태도입니다. 믿음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나 신뢰입니다(3:14).

 

넷째, 믿음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확실한 소유를 제공하는 보증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결국은 완전하게 알게 될 영적인 복을 미리 맛보게 해주는 우리의 보증입니다.

 

믿음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 질문은 믿음이 어떤 일을 하는가(does)와 관련이 있고, 둘째 질문은 믿음이 무엇인가(is)를 다룹니다.

 

노아는 하나님 말씀 외에 다른 증거가 없는데 홍수가 있을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산을 마주 대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증거의 산, 실제적인 사실의 영역에 있어서 명백한 모순의 산을 마주 대하고 있다...믿음과 산 둘 가운데 하나가 없어져야 한다. 그 둘은 양립할 수 없다. ”(워치만 니).

 

이 세상과 세상이 제시하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이들입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그 말씀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1:3).

 

믿음의 중심성

첫째로, 믿음은 우리가 복을 얻는 방법입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이루신 유익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믿음은 시험과 고난 가운데서 우리를 지탱해 줍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이생에 맞설 힘과 용기를 발견합니다.

 

셋째로. 믿음은 이생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에 있어, 사람은 그가 믿는 만큼만 가며, 더 이상 가지 못합니다. 그의 삶은 언제나 믿음에 비례합니다. 그의 평화, 그의 인내, 그의 용기, 그의 열심, 그의 행위, 그의 모든 것은 믿음과 일치합니다“(J.C 라일). 믿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의 뿌리입니다.

 

38. 의롭게 하는 믿음(11:4)

믿음의 첫 번째 모델은 아벨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아벨의 믿음이 그 제물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악된 인류를 용납하실 방편으로 정하신 제물을 아벨이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마련하신 제물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죄악된 인간을 의롭다하시거나 용납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9:28, 7:27).

 

가인의 문제점은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조건을 자기가 결정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데는 오직 두 가지 제물, 두 가지 길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우리 자신의 공로와 미덕, 우리 자신의 의를 가리켜 보이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대신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이는 길입니다.

 

39.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11:5-6)

엔드루 머리는 아벨은 믿음의 제사로, 에녹은 믿음의 걸음으로, 노아는 믿음의 행위로 설명합니다.

핑크의 개요는 아벨에게서는 믿음의 예배를, 에녹에게서는 믿음의 걸음을, 노아에게서는 믿음의 증언을 찾아냅니다.

 

에녹이 가졌던 직업이나 삶의 성취보다 훨씬 중요했던 것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생생한 관계 및 교제를 말합니다(3:3). 함께 걷는 두 사람 사이에는 친밀감과 친교, 사귐의 기쁨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5-6절은 하나님과의 동행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적합성, 즉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찾아야 할 필요성은 부인합니다.

아벨에게서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회복시키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을 보았던 것처럼, 우리는 에녹에게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의 능력,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도 또한 누리게 될 새 생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호의룰 구하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을 위한 최고의 목적, 우리의 창조목적,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0. 일하는 믿음(11:7) 

노아는 홍수를 통해 우리에게 심판의 중요한 상징을 제공합니다. 또 노아의 방주는 구원의 상징을 제공합니다(벧전3:20).

노아가 믿었던 보이지 않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홍수와 방주라는 방편을 통해 임할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노아의 믿음의 원천이었으며, 또한 믿음은 노아의 행하거나 이룬 모든 일의 작동 원리였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얻는다. 그러나 구원하는 믿음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구원하는 진정한 믿음은 샘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처럼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순종을 항상 수반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물입니다. 무엇이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만들게 하였습니까? 노아의 믿음이었습니다. 노아는 믿었기 때문에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알렉산더 맥클라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단 믿음이 우리 안에 실재하게 되면, 믿음은 일을 합니다. 만일 아무런 결과가 없다면,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노아의 증언이 세상을 정죄했지만, 또한 노아의 믿음이 세상을 정죄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노아의 믿음은 세상을 정죄하는 믿음입니다노아의 믿음은 의를 상속하는 믿음입니다(11:7). 노아는 자기 자신의 유한하고 불완전한 의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오는 완전한 의를 추구하였습니다. 본문은 이 의가 상속을 통해 노아에게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41. 고대하는 믿음(11:8-10) :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믿음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으셨기 때문입니다(24:2-3).

아더 핑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과 순종은 해와 달처럼, 불과 열처럼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해와 달처럼, 불과 열처럼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순종은 믿음의 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시작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인내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천상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소유가 아닌 땅에서 오랜 세월동안 믿음으로 살았던 방법은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42. 약속을 믿는 믿음(11:11-12)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모범인 아브라함의 삶을 계속 다루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삶의 큰 슬픔을 치유하신 일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킵니다(11). 아브람은 놀라운 은혜의 수혜자였지만 소중한 하나를 갖지 못한 것 때문에(자녀) 마음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와 대체로 약속을 통해 관계를 가지십니다. 첫번째 이유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눈을 높이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하셨듯이, 우리로 하여금 눈을 들어 우리의 상황 너머를 바라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 움직이게 하시며, 우리가 여행을 위해 걸음을 떼게 하십니다.

 

그러나 사래의 제안과 아브람의 행동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의 힘으로 이루려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람이 믿음에 없어 실족했었지만, 하나님은 더 큰 복의 표징을 주시고 신뢰를 새롭게 할 것을 요구하심으로 아브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며 종종 아주 오랜 기간 하나님을 기다립니다(27:14,37:7, 34, 130:5-6). 여호와를 기다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전능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지혜롭고 믿음 있는 심령에 대한 증거입니다. 여호와를 기다리는 것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며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사라를 통해 태어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주장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징표입니다.

 

불신앙으로 기우는 자신들의 자연적인 성향과 싸우면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여호와를 신뢰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앙의 웃음과 불평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억하신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만 말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으며 마리아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믿는 구원은 시종일관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하나님의 이름에만 영광이 돌아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할 때 우리가 받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요구하시면서 이 길고 때로는 힘겨운 삶을 통해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43. 본향을 찾는 믿음(11:13-16)

히브리서 1113-16절은 믿음을 긴 여정으로 간주합니다. 아브라함과 및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었지만 그 약속을 받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이며, 우리의 본향과 안식처, 우리의 보배는 무덤 너머의 땅에 놓여 있습니다.

본문은 믿음의 삶을 이방 땅에서의 나그네 삶, 즉 무덤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본향을 향해 가는 평생의 여정으로 묘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갈수록 옛 범주, 옛 본향의 관점에서 자신을 생각하지 말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및 하늘애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게 될 사람들에 대한 관점에서 자신을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은 다른 본향을 찾기 위해 이전의 본향을 떠납니다(11:16).

 

44. 시험을 받은 믿음(11:17-19)

창세기 22장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섯 번째 나타나신 일입니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입니다.

 

15장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하늘의 별과 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17장은 하나님은 하갈과의 결합으로 믿음의 길을 벗어났던 아브라함을 되돌리기 위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18장에서는 여호와가 약속의 자녀를 고지하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 문제를 다르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에로 부르셨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만남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화하셨습니다. 네 번째 만남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상을 주셨습니다.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에서 가장 어려운 명령을 통해 믿음의 시험을 받게 됩니다.

 

첫째, 이 시험은 여호와에 대한 아브라함의 애정을 시험한 것이었습니다(22:2). 하나님에 대한 애정은 율법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에게 무언가를 드림으로 손해를 본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아서 핑크)

 

둘째로, 이 시험은 아브라함의 영적인 이해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17-18).

 

셋째로, 이 시험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지식 및 신뢰를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어떻게 이런 시험을 통과합니까?

 

첫 번째 대답은 믿음은 겸손히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습니다.

 

두 번째 설명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은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설명은 믿음은 답이 없다 하더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마지막 설명은 하나님을 알고 신뢰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비결은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행복보다 고귀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45.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믿음(11:20-22)

본문은 아브라함에게서 이어지는 세 세대의 상속자들, 즉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믿음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이삭에 대한 성경 기록 대부분은 그 복을 자기 아들인 야곱과 에서에게 전달하는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11:20).

 

이 사람들의 믿음은 첫째로는 영적이었지만, 이 복의 전달이 보여주듯이, 둘째로는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믿음이 죽음의 가망을 어떻게 다루는지 강조합니다. 이 사람들은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세 족장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고정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계획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이 죄인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피터 루이스에 의하면 히브리서 11장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세 가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째로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이 조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조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이야기하신 것 말고는 우리가 그 뜻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55:8, 11:33-34).

 

둘째로, 하나님의 계획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당연히 알 수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교차된 팔은 하나님의 계획이 인간의 기준과 관례에 종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필립 휴즈는 다음과 같이 바르게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방식과 선입견에 강제로 순응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서 드러난다. 약속의 혈통은 육체의 혈통이 아니라 믿음의 혈통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생명으로 인도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은 정죄를 통해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21:6-7).

 

46. 하나님을 선택하는 믿음(11:23-26)

믿음은 언제나 선택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는 데, 여기서 모세는 그가 했던 선택 때문에 칭찬을 받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일어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로 모세는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뒤로 했습니다(24). 둘째로 모세는 죄악의 즐거움에 등을 돌렸습니다. 셋째로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에 등을 돌렸습니다. 그 보화는 포기하기엔 너무나 엄청난 것입니다.

 

모세는 두 가지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특권이요, 둘째는 그리스도의 수욕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십자가를 받아들이기 위해 세상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현재 잃어버리는 것은 반드시 보상을 받습니다. 지금은 영적인 평안을 얻고, 나중에는 말할 수 없는 부요함을 얻습니다.

 

특별히 모세는 부모의 믿음의 모범을 통해 믿음을 얻었습니다. 부모의 믿음 때문에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 및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자라갔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은혜의 자녀를 영광에 어울리도록 훈련하십니다. 고난은 우리의 타락한 의지를 정화하는데 꼭 필요한 악이요, 우리의 찌끼를 반드시 태워 없애는 용광로요, 우리를 세상에 묶어 놓은 끈을 반드시 잘라 버리는 칼입니다(J.C 라일).

모세는 고난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당하는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47. 통과하는 믿음(11:27-29)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숨긴 것은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23). 모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애굽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이 두렵게 하는 상황을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입니다(삼상 17:45, 3:25, 고후 5:7).

 

모세의 믿음을 몇 가지 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재앙은 애굽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경쟁하게 했습니다. 28절이 위대한 믿음에 대해 말하는 또 한 가지는 어린 양의 피와 관계가 있습니다. 믿음의 가장 중요한 행위는 우리 죄를 제거하시며 거룩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진노의 임함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지도자로서의 모세를 고찰해야 합니다. 모세의 리더시의 중요한 측면은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경건한 지도자로서의 모세의 성공은 그 자신이 구원을 얻은 것만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 데 있었습니다.

 

둘째로,  믿음이 두려움과 위험에 대해 어떻게 해독제 역할을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기 부모와 마찬가지로 모세는 세상 권력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셋째로, 모세의 모범은 믿음과 불신앙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보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바로보다 훨씬 더 강하신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보시는 방법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48. 승리하는 믿음(11:30-40)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을 주의 깊게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여호수아의 위업과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은 가나안 인 기생인 라합의 믿음입니다.

두 사람은 여호와를 믿었으며 여호와의 구원의 능력을 신뢰하였습니다.

32-35절은 장애를 극복한 성공을 통해, 35절 하반부에서 38절에서는 큰 고난 가운데 인내함을 통해 승리하는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명단을 쭉 열거한 히브리서 저자는 이들 및 다른 사람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할 수 있었던 위대한 업적들로 넘어갑니다. 이 목록은 세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위업의 두 번째 목록은 33절과 34절에 나타납니다.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다니엘),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다니엘의 세 친구), 칼날을 피하기도 하였습니다.

 

34절은 믿음을 통해 다른 이들은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었다고 덧붙입니다. 이 구절은 삼손을 생각나게 합니다.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친 여호사밧이 있습니다(11:34, 대하 20:12-1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며(11:35),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왕상 17),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의 생명을 되찾아 주었습니다(왕하 4).

 

35-38절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도 최대의 시련을 겪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합니다. 신실한 자들 가운데 일부는 죽음의 고통을 겪었으나 믿음을 부인함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했습니다(마카비 시대의 순교자들).

히브리서 1136절은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투옥을 당한 사람들에 대해 말합니다. 돌에 많은 사람들은(많은 신실한 자, 스데반, 선지자의 경우), 톱에 두 동강이 난 사람(므낫세가 이사야를 이렇게 죽였다고 함), 칼에 죽은 사람들(사도 야고보).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나...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11:37-38). 이것은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해당하지만, 특별히 마카비 시대에 사람들을 염두에 둔 것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우리는 믿음에 대한 결론 네 가지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이는 고통에서 구해주시지만, 어떤 이는 고통에 처하게 하십니다. 신실한 엘리야는 아합의 진노를 면했지만, 수많은 선지자는 아합의 칼에 죽임을 당헸습니다(왕19:10). 예레미야는 여호야김 왕의 증오를 피했지만, 예레미야의 동료선지자인 우리야는 피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베드로의 쇠사슬을 끊어주셨지만, 또한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 야고보는 헤롯의 명령에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록의 양편에 우리를 두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는 성공을 통해 승리한 편의 사람들 편에 있을 수도 있고, 패배를 통해 승리한 사람들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이 아닙니다. 이생의 복을 누리고 있는가, 시련을 당하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믿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것을 받기에 적합해지는 것은 육신 가운데서가 아니라 영광 가운데서입니다(고전 2:9,11:39). 종종 큰 고난을 당하면서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으로 충분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자각하며 실재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시험의 때는 특별히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히브리서는 박해 때문에 뒷걸음치려는 유혹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쓰였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구원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들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굳게 섰던 사람들뿐입니다.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검사하고 제련합니다. 불순물을 태워 없앰으로 하나님에 대해 순전하고 영광스러운 것만을 남게 합니다. 시험 당할 때에 우리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앎으로, 또한 우리의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끊을 수 없는 유대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앎으로 격려를 얻습니다(8:35-37).

 

넷째로, 결국 모든 것이 사라져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 복된 명단에 무엇이 이 사람들의 이름을 올라가게 했습니까? 오직 한 가지 믿음입니다.

20세기의 순교자인 짐 엘리어트는 자기가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자기가 지킬 수 없는 것을 주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 때문에 칭찬을 받았다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11:39).

 

49. 예수님에게 고정된 믿음(12:1-3)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사랑하고 이끌며 영향과 감화를 미쳤던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비로소 완료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황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삶의 정황이나 배경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데 극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히브리서는 전혀 다른 삶의 정황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은 주님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 가운데 자신이 있다고 여겨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신자라면 이런 정황에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름 같은 증인들은 당연히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 11장에 계시된 믿음의 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소명

1절은 하나님이 우리가 경주를 하도록 계획하셨다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우를 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앞에 놓인 일을 알려고 지나치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이 어디로 우리를 이끄시든지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미덕은 속도가 아니라 인내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있게 하신 다양한 환경 속에서 인내하는 것이며, 삶의 여러 가지 환경과 시기에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확신을 굳게 유지하는 것이고, 삶의 목적을 형한 모든 길에서 믿음을 통해 은혜 가운데 자라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격려

예수를 바라보라는 어떤 상황과 어려움, 유혹에 대해서는 의지할 만한 지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삶의 비결이며, 우리의 믿음에 격려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자. 이 구절은 세 가지 면에서 우리를 격려합니다.

 

첫째로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믿음에 대한 최고의 모범이심을 보여 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모범이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 믿음의 대상이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을 위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고 인내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연합하며, 예수님의 구원의 복에 참여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선을 예수님에게 고정시킬 때, 예수님은 시험 당하시는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을 보내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훨씬 강력하고 신뢰할만한 방법으로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한 사람은 예수님의 모범대로 변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피곤한 마음을 위한 치료제

3절은 그리스도인이 때때로 피곤해지고 낙담하게 된다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이것은 예상해야 할 일입니다. 특히 장기간 고난이나 시험에 직면하는 경우에는 가장 강한 그리스도인조차 영적 침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세상의 반대와 싸우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이에 대한 치료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위를 끄는 것에서부터 시선을 돌이켜 예수님께 눈을 고정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너머에 면류관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8). 이것이 긴 경주에서 우리가 지치는 때에 우리 마음의 치료제입니다.

 

50. 아들에 대한 징계(12:4-13)

위대한 설교자인 알렉산더 맥클라렌은 본문을 등대에 비유합니다. 등대에서 비치는 빛처럼, 그 교훈은 한낮에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밤이 닥치고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하면, 갑자기 우리가 길을 찾는데 필수적인 빛을 밝게 비쳐줍니다. 즉 하나님이 삶의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 자기 자녀를 징계하고 연단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상황이 우리를 거스를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가 너무 쉽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잊어버리거나 배반했다고 결론짓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징계하지 않는 것은 애정의 표시가 아니라 무관심이나 거부의 표시였습니다.

 

앤드류 머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크든 작든 모든 시험에 있어, 무엇보다 먼저 그리고 즉시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손을 인식하라. 즉시 이렇게 말하라. 나의 아버지가 이 일을 닥치도록 허용하셨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그 시험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의 첫 번째 관심사는 그 시험 가운데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 시험이 복이 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를 확신할 수 있다. 믿음으로 시험 가운데 기뻐하자. ”

 

저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 행하시는 두 가지를 말하는데, 먼저 부성적인 징계(파이데이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악의에서가 아니라 부성적인 사랑에서 우리에게 시련과 고난을 주십니다. 시험은 우리를 더 강하게 하기 위해, 우리 믿음의 근육에 힘을 가해, 우리가 자신의 영적인 잠재력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 삶의 죄를 벌하기 위해 징계의 고난을 주십니다. 그리고 징계와 더불어 부성적인 교정을 행하십니다. ‘마스티고이는 채찍질이나 매질같은 심한 정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채찍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라는 것입니다(J.C 라일).

 

J.I. 패커의 말은 획실히 옳은 것입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여러 가지 고통과 난처한 일로 채우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굳게 붙잡는 법을 확실히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의 상황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징계에 반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피할 수 없는 일을 굴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극기주의자의 반응입니다.

 

이런 사람은 대답하게 감수하려는 반응을 보이는데 틀림없이 감사하는 마음 없이 그저 싸워 이겨내려고 애를 씁니다. 5절에서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라.”

 

또 다른 사람은 시험에 대해 자기 연민과 분노의 반응을 보입니다.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런 일을 당하는가?”“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

 

세 번째 반응은 시험에 따른 목적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우리가 받고 있는 징계는 생산적인 것입니다(벧전 1:6-7, 1:2-3, 12).

윌리엄 레인은 하나님은 가장 충만한 생명을 누리도록 자기 자녀를 훈육시킨다. ”고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징계를 하시며, 그 유익은 우리가 거룩함에 있어 성장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미식축구 코치인 톰 랜드라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선수들이 늘 원한 모습대로 되도록 하기 위해 선수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하게 만드는 것이 코치의 직무다.”

 

51. 거룩에의 부르심(12:14-17)

히브리서 12장은 그리스도인이 달려야 할 경주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시선을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고 끝까지 인내하기 위해 모든 장애물을 떨쳐 버리고 죄를 피해야 합니다. 4-13절은 자기 자녀를 훈육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14절은 그리스도인이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합니다. 두 가지 구체적인 목표를 추구하라는 권면이 들어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첫 번째 목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두 번째 목표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내세우기보다 먼저 이웃과 화목하고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라는 것입니다(벧전2:21-23).

 

성화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이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능동적으로 거기에 참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거룩은 구별을 의미합니다. 죄악된 세상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섬기기 위해 하나님에게로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8:29)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거룩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한 조건으로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아들여지는 결과로 꼭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을 위협하는 세 가지 위험

첫째, 누군가 경주에서 뒤처지거나 낙오하지 않을까 하는 것은 저자가 무엇보다 염려하는 바입니다(15).

 

둘째, 비성경적인 교훈과 행실을 조장하는 집단이 교회 안에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쓴뿌리는 영적죽음을 가져오는 치명적인 독입니다. 그것은 고통과 오염을 일으킵니다.

 

셋째, 사람들을 영원한 것에서 떠나 세속적인 것으로 향하게 하는 육욕적이고 불경건한 경향을 경고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히브리서 1214절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보게 할 수 있는 그 거룩함을 현재 추구할 것을 세 가지 면에서 권면합니다.

 

첫째로 거룩을 우리에게 권하는 이유는 거룩이 하늘을 위한 우리의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만일 우리가 구원받기 원하는데 거룩함이 없이는 오래 참음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믿음을 견지해야만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거룩를 힘써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현재 행위가 영원한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52. 은혜의 산(12:18-24)

히브리서 12장은 이번에는 성경세계 여행의 또 다른 지점인 시내 산, 즉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킬 대 만났던 장소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목적, 교회의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임을 상기시켜 주는 훌륭한 예입니다.

 

모세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시내 산을 향해 나아갔던 중보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를 통한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고 분노의 구름을 제하시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모든 자를 위해 낙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십니다.

 

53. 흔들리지 않는 나라(12: 25-29)

히브리서 저자는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하나님의 일에는 중립지대가 없습니다. 조지 거스리는 말씀은 반드시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를 당한다. 말씀을 거부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탈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종말에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시민으로 살거나 나머지 세상과 함께 멸망한다.

 

28절에는 진정한 영성의 두 가지 근본 요소, 즉 감사와 경외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토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값없이 주어지지만 그 토지는 우리에게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대가로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득이 되는 거래입니까?(13:44).

 

54.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13:1-8)

히브리서에서 중요하게 반복되는 내용은 배교, 즉 믿음에서 떠나는 것에 대한 경고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라는 권면입니다. 마지막 경고는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12:25).

 

마지막 장은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삶, 9-14절에 불신 세상 가운데서 교회의 신앙, 15절부터는 주님께 제사 드리는 삶에 대한 요청, 20-21절에서 신약의 위대한 축도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 사랑하라. 그리스도인은 계속 이 원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프란시스 쉐퍼,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까지 모든 세대의 교회를 통해 지속되어야 할 보편적인 표지다. 그 표식은 그리스도인 사이의 사랑이다(13:35). 교회를 세우는 것은 소명이지만, 으뜸가는 소명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으뜸가는 소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사랑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흘러나오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사하는 방법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구체적인 행위로 표현됩니다. 손님대접하기를 잊지 말라(환대), 감옥에 갇힌 자를 생각하고,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다른 사람이 당하는 시험에 대한 동정).

 

프란시스 쉐퍼, 그리스도인은 사실상 이중의 임무를 지닌다.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하나님의 거룩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 그것은 타협일 뿐이다.

거룩의 첫 번째 사례는 그리스도인의 정결, 두 번째 사례는 탐욕의 반대인 만족과 관계가 있습니다.

바울은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말했는데, 만족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의 가장 순수한 표시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레마이어 버로스는 그의 걸작 그리스도인과 만족의 진귀한 보배에서, “당신은 설교를 들으러 오셨거나 30분이나 한 시간을 기도로 보내거나 성찬을 받으러 나오는 때보다 만족을 통해 하나님을 더 예배한다. 이런 것들은 단지 외적인 예배의 행위일 뿐이다. 그러나 만족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기뻐함으로 영혼 자체를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영혼의 예배다.

 

아더 핑크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만족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의 선물입니다...만족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훌륭히 행하시며, 지금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에게 선이 되도록 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복된 확신입니다.“

우리에게 행하라고 권면하는 또 다른 사항은 본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13:7절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주예수 그리스도가 동일하시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우리가 확신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동일하시므로 그리스도의 사역과 부르심은 이전과 동일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동일하며 모든 세대에 변함이 없습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도 변함없이 동일하시므로 우리는 세대 앞에 예수님을 나타내고 드러냅니다.

 

55. 영문 밖으로(13:9-14)

영적인 성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여러 가지 이상한 교리에 직면하면서도 견고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4:14).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20:29-30, 딤전 1:13-14).

이런 거짓 교훈의 위험이 끊이지 않는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인에게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원수, 즉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거나 전복시키려고 끊임없이 획책하는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두 가지 전략을 갖고 있는데 첫째는 박해로서, 이는 교회에 대한 사탄의 외부공격입니다. 사탄의 또 다른 전략은 교회 내부에서 활동하는 거짓과 오류를 조장하는 일입니다(고후 11:13-14).

 

영문 밖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 위하여 가야 할 곳입니다. 영문 밖은 십자가가 세워진 곳이며, 그곳이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그리고 세상이 멸시한 아들의 의로우심 안에서 우리를 용납하기 위해 우리를 만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56. 찬송의 제사(13:15-19)

만일 히브리서를 종합하는 한 구절을 뽑아야 한다면 13장의 이 단락 첫 구절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1장은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확증,

 

2장은 예수님에게서 주요 호칭, 우리의 선구자 혹은 개척자라는 호칭. 예수님이 우리 앞서 가시면서 하나님의 존전까지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시며,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예수님이 구원하는 모든 자를 하늘 아버지 앞에 예배자로 데려가심(2:12-13)

 

3장과 4장의 주된 권면은 우리가 약속의 땅에서 돌아섰던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행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늘의 목적지를 향해 믿음 안에서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6장은 하나님의 언약의 맹세가 우리의 큰 소망으로서 하늘의 닻을 내리고 있으며 앞서 가신 예수님이 그것을 보장하신다고 말합니다(19-20).

 

9장은 휘장으로 외소와 단절된 내소를 가진 성막을 예로 들고 있는데 요점은 예수님이 자신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심으로 단번에 그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9:14).

 

10:19-22절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러 놓으신 새로운 산 길이요...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3:15)

이 구절은 예수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나아감, 하나님을 향한 제사의 삶, 그리고 찬양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139절은 유대인들이 비웃은 이유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절기에 참여하지 않고 음식에 대한 꼼꼼한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임을 보여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즉 우리의 삶 전체라는 영적인 제물, 사죄를 위한 제사가 아니라 감사와 찬양의 제사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강조하고 있는 칭의는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섬김의 삶에 이르는 수단입니다.

칭의는 흔히 복음이라는 문의 돌쩌귀로 불리는데, 그 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가 이 세상에서 존귀한 자녀로서 기쁨과 경외심을 갖고 살며 우리 삶을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찬송의 제사로 드릴 수 있도록 열리게 되어 있는 문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어떤 외적인 신앙 표현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은 우리의 언어로 주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에게 기쁨의 근원이 되도록 거룩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16절은 사랑과 자비의 실제행위, 특별히 우리의 물질적인 소유를 가지고 베푸는 관대함으로 넘어갑니다.

본문은 교회에 세워진 영적 지도자에게 복종하라는 권면으로 끝맺습니다. 성경에서 모든 복종은 주님에게 행하는 것입니다. 복종은 예배와 신뢰의 제사행위입니다.

 

순종과 복종에 대한 여섯 가지 이유

첫째로 인도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영적 지도자는 양떼보다 앞서 하나님 말씀에, 기도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 말씀 안으로 이끌어가는 안내자입니다.

 

둘째로 지도자의 권위가 그리스도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4:11-12).

 

특히 장로와 집사들은 교회를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지도자를 예수님이 세우신 권위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셋째와 넷째로 이 지도자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같이 합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다스림과 기독교의 가르침을 위해 하나님에게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도자는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우리 유익을 위해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응답은 순종과 믿음을 통해 지도자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우리의 순종은 영적인 지도자를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지도자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안의 분열과 갈등과 불신으로 사역자를 괴롭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결론짓습니다.

 

지도자에 대한 순종이 우리의 의무라면, 기도는 어떤 사람이 목사나 장로나 집사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섬김임에 틀림없습니다.

 

57. 평강을 비는 축도(13:20-25)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으며, 그곳에 있는 모든 하나님이 백성에게 문안할 정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자는 형제들인 독자에게 편지를 쓰고 있으며 19절에서는 자기가 속히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25절의 마지막 축도는 바울의 모든 축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이야기하며, 바울이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행과 똑 같습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터키나 로마에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가운데 회심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디모데에 대한 언급은 특별히 이 독자가 로마에 있었을 것이라는 설을 뒷받침해 줍니다.

 

히브리서는 아마 모든 서신 가운데 가장 그리스도 중심적인 책일 것입니다. 우리는 마감하는 축도의 중심에게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새롭고 경건한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큰 목자로 따를 때, 그리고 그리스도가 위로부터 영적인 능력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 실현됩니다.

20절은 이런 모든 일을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은 언약의 결과로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영원한 언약의 피를 통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선언하시는 것

 

첫째로,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피는 또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3:18).

 

셋째로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이 우리의 세상에 모든 차원에서 완전히 관여하신다고 선언합니다.

 

20절은 예수님의 피를 우리 구원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허나님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얻습니다.

 

21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의 큰 목자이시며 구원의 인도자이신 에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할 능력을 얻으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축도의 마지막 말은 또한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예배와 찬양을 받으시는 성육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모든 구원과 모든 예배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교훈, 게할더스 보스

 

히브리서의 특징

 

히브리서 23절에 보면 수신인지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에 의하여 개종하였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원수신인들은 제2세대의 기독교인들이었다.

히브리서는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히브리서 6:19:14에서 죽은 행실은 옛 언약의 율법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였다.

히브리서가 제시하는 기본 원리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죽은 행실로부터 회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심각한 난제를 안고 있는데, 그것은 죽은 행실의 반대개념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말씀으로써 이교도의 우상들과 대조가 되기 때문이다. 죽은 행실 대 참 하나님에 대한 예배라는 형식의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죽은 행실이란 율법 준수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된 행실, 더럽히는 행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견해를 가장 뒷받침하는 구절이 히브리서 13:9-13인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서 61절은 수신인이 유대인으로 보는 견해가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저자는 수신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배운 바 있는 도의 초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것은 회개와 신앙, 세례와 안수, 부활, 그리고 영원한 심판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히브리서 312절에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 등 이런 표현은 유대인 기독교인이 유대교로 돌아가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3:13의 죄의 유혹, 10:26, 짐짓 죄를 범한즉, 10:29 하나님 아들을 밟고 등은 배도하여 이교도로 되돌아가는 경우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저자가 구약과 신약을 비교할 때 그는 수신인을 경고하여 구약과 관계를 끊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신약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비교할 뿐이다. 그 예로 2:2에는 천사들과 그리스도를 대조하고 있다. 히브리서 3장에서는 모세와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있다.

 

원수신인이 이방인 기독교인이었다는 견해는 다른 견해들보다 최근에 주장된 견해들이다.

히브리서의 사작 부분을 보라. 서론도 인사말도 없다. 저자는 곧바로 그리스도의 두 가지 직, 즉 제사장 직과 왕직과 관련된 기독론으로 시작된다.

 

히브리서 3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세와 비교되고 있다. 이 비교는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주제에 대한 긴 논설 중에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논설은 수신인들이 당면한 종말론적 난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소개되고 있다. 모세 시대의 불신앙의 근원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대한 의심이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원수신인들은 열렬한 종말론적 기대 때문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말론에 대한 관심이 지나쳐서 불신앙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히브리서가 그 다음에 취급하는 주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다(2:17). 이어서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제사라는 주제를 취급하고 있다(9:14). 히브리서9:14에서 그리스도의 제사가 황소와 염소로 드리는 제사와 비교되고 있다. 후자의 피가 외부적으로 정결케 하였듯이 그리스도의 피는 내적으로 정결케 하여 양심을 정결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저자가 믿음에 대해 말하는 내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바울은 보통 신자의 믿음을 하나의 외형적 수단, 즉 칭의의 수단으로 묘사한다. 따라서 그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을 구별하고 있다. 믿음은 영적으로 변화시키는 대 원리이다. 그 이유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더 높은 차원의 세계와 접촉하게 하는 심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한다(11:1). 이처럼 믿음과 바라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약속에게로 곧바로 이르는 소망도 있다(벧전 1:21). 믿음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저자는 환난 중에 인내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믿음의 영화 원리와 관련되어 있다. 스토아 철학에서 인내는 단순히 견디는 의지력을 뜻한다. 기독교의 인내는 어떤 힘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 힘의 평형을 뜻한다. 또 다른 종류의 힘이 신자의 삶 속에 들어와 핍박의 세력을 상쇄하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언약개념

히브리서는 신약서신들 가운데 언약이라는 단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유일한 서신이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가운데 단 한번(26:28, 14:24, 22:20). 갈라디아서 3:4, 고린도후서 3, 에베소서 2, 로마서 9-10장에서 모두 9회 사용하고 있다. 누가의 기록은 세 번, 누가복음 1:72, 사도행전 3:25, 7:8), 요한계시록 11:19에서 116회 나타나는 반면, 히브리서에는 17회 사용되고 있다.

 

왜 구약에서 그처럼 두드러진 언약개념이 신약에서는 그처럼 빛을 잃게 되었는가? 메시야의 오심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체계를 대신하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 히브리서에서는 언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가? 그는 옛 질서와 새 질서를 비교하고 있다. 언약개념이 가장 적합한 공통분모였다.

히브리서 저자의 신앙개념의 특이한 점은 신앙이 거의 전적으로 의식적 영역에 속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바울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연합의 신비한 면을 내세우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오히려 신앙의 현상적인 면만을 생각하고 있다.

신약에서 디아데케를 언약으로 번역한 것이 21, 유언으로 번역한 것이 12회이다.

 

히브리서에 나타난 계시와 구속철학

히브리서는 두 개의 디아데케, 즉 첫 디아데케(8:9-9:1-22)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두 번째 디아데케(8:8, 13:20)를 구별한다. 옛 언약이란 용어는 히브리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새 언약이란 단어는 히브리서 12:24에 나타난다.

옛 언약은 모세와 더불어 시작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끝이 난다. 옛 디아데케와 새 디아데케의 분기점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언약에서 예 언약은 끝이 나고 새 언약은 시작된다(7:11).

 

히브리서에서 옛 세대는 구약을 의미한다. 이처럼 히브리서는 일반역사를 이분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구속과 계시철학이 그 결과로서 생겨난다. 히브리서 저자는 옛 디아데케를 악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림자의 세계(레위적, 즉 의식적 세계)로 생각한다.

바울은 사르크스라는 말을 윤리적 악의 개념으로 사용한다. 히브리서에서 사르크스는 단순히 물질적인 것, 외형적인 것을 뜻한다.

 

히브리서 12:8에는 산에 대한 비교가 나타난다. 구약의 산은 만질 수 있는 물질적인 산이었다. 이에 반하여 신약의 시온산은 하늘에 있는 산이다.

효력이란 면에 있어서 대조적이다. 히브리서 7:16이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율법에 의한 제사장직이요 계명이라는 근원에서 생겨난 것이며 따라서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이와 반대로 그 동력적 성격을 생명 탄생이란 근원에서 끌어내고 있다. 더 나아가서 전자가 육체를 따라 일시적인 것인데 반해 후자는 생명이며 영원한 것이다.

 

히브리서 신학, 조병수

 

하나님의 언어 사건을 언급하면서 종말을 강조하는 데 히브리서의 신비가 있다. 첫 문장은 구약성경을 한 줄로 요약해 버리는 히브리서의 놀라운 기량을 보여준다.

 

히브리서의 구조

1. 하나님의 아들(1:1-4:13)

1) 하나님의 아들의 본질(1:1-4)

2) 하나님의 아들과 천사(1:5-2:18)

3) 하나님의 아들과 모세(3:1-4:13)

 

2. 대제사장 예수(5:1-7:28)

1) 대제사장 되심의 원인(5:1-10)

2) 수신자에 대한 책망(5:11-6:20)

3) 멜기세덱 제사장 신학(7:1-28)

 

3. 보좌-성소의 예수(8:1-10:18)

1) 하늘 성소와 땅 성소의 유래(8:1-6)

2) 두 언약(8:7-13)

3) 대제사장들의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 비교(9:1-10:18)

 

4. 담대함-믿음의 예수(10:19-13:19)

1)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19-39)

2) 믿음의 시작자이시며 종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11:1-12:3)

3) 믿음을 가진 신자들의 삶(12:4-13:19)

 

5. 결문(13:20-25)

소원(13:20-21), 권면(13:22-23), 문안(13:24), 기원(13:25)

 

1-2: 11개의 구약 성구들에 대한 해설(하나님의 아들)

 

천사 : 1:5a(2:7 인용), 1:5b(삼하 7:14, 대상 17:13 참조)

아들: 1:6(32:43, 70인경 인용, 96:7 참조)

천사 : 1:7(103:4 인용)

아들 : 1:8(44:7f), 1:10-12(101:26-28 인용)

천사 : 1:13(109:1 인용), 2:6-8(8:5-7 인용), 2:12(21:23 인용), 2:13(8:17 인용, 참조12:2, 삼하 22:3), 2:13b(8:18 인용)

 

3-4: 영원한 안식 : 시편  95:7-11(3:7-11)에 대한 해석(영원한 안식)

1. 오늘에 대한 해석(3:12-14) : 95:7-11에서 오늘은 출애굽 시대의 현실을 전제로 하여(모세, 3:16), 시편의 현실을 가리키며(다윗, 4:7), 히브리서의 현실에 적용된다(형제들, 3:12).

 

2. 격노에 대한 해석(3:15-17) :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신 대상이 누구인지 두 번 묻는다(3:15,

95:7-8 인용). 분노의 대상은 애굽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한 사람들이었다. 구원의 은혜를 받았지만 믿음을 저버리고 마음을 강팍하게 하여 범죄한 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된다.

 

3. 안식에 들어가다의 해석(3:8-4:11) : 안식과 관련하여 히브리서는 세 가지를 염두에 둔다. 창조의 안식(4:3-4), 가나안의 안식(4:8), 영원한 안식(4:1, 3, 6, 9, 11)이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복음을 받고 말씀을 들은 자들이었지만 순종하지 않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안식마저도 진정한 안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아직 남아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은 아직 남아있다.

 

5-7: 시편 110:4(5:6)에 대한 해설(영원한 대제사장)

 

대제사장 기독론은 히 2:17에서부터 시작하여 줄곧 히브리서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2:17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자비와 충성이라는 두 가지 큰 특성을 지니고 있다.

 

1.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래( 5:1-10) : 예수께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하나님에게 기원을 두고 있다(5:5, 10)

 

2. 수신자들의 미성숙(5:11-6:12) :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미성숙 때문에 멜기세덱에 대하여 설명하는데 무척 큰 어려움을 느낀다고 말한다(5:1-6:12).

 

3. 맹세의 의미(6:13-20) : 히브리서 5;6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여기서 말씀하신다는 의미는 맹세를 의미한다(7:21).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된 것이라.

 

4.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7:1-25) : 첫째로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의 의미를 분석한다(히  7:1-10).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레위보다 훨씬 먼저 제사장으로 묘사되고 있다. 히브리서는 그런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별다른 제사장이시다( 7:11, 15). 멜기세덱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율법은 종국에 도달하게 되었다. 셋째로,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국에 도달하게 할 수 있는 까닭이 영원한 제사장이기 때문임을 밝힌다(7:17-25).

 

8-10(예레미야 31:31-34(8;8-12)에 대한 해설(새 언약)

 

히브리서는 새 언약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레미야가 31:31-34(8:8-12)을 인용한다.

 

도입(8:1-5)

 

히브리서는 땅에 대제사장이 있듯이, 하늘에도 대제사장이 있다는 상응성을 제시한다. 그래서 예물과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사실로 발전한다(8:3-4). 결국 땅의 성소와 하늘의 성소 사이에 상응성에 기인시킨다(8:5).

 

새 언약에 대한 약속(8:6-13)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다. 더 좋은 언약이란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새 언약이다(31:31/8:8). 새 언약을 주신 동기는 첫 언약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언약의 내용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문제가 발생하였다(16:59). 새 언약을 주신 동기는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의 허물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내용이 아니라 언약의 당사자인 백성을 고친다.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8:10). 언약의 당사자인 백성의 변화는 하나님의 용서로부터 시작되었다(8:12). 하나님께서 언약의 당사자인 백성을 용서하신 것이 새 언약이다(8:12). 첫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란 단지 시간성에 있을 뿐이다.

 

첫 언약의 제도와 새 언약의 제도(9:1-10:18)

 

첫 언약의 제도(9:1-10)는 예배의 법도와 성소의 구조입니다. 성소에는 제사장이 항상 들어가지만,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혼자서 자기와 백성의 허물의 죄를 가지고 일 년에 한번 들어간다(9:7). 이것은 성소의 길이 닫혀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사장도 백성도 반복적으로 죄를 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죄의 인간은 예배의 법도를 가지고 있어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9:9).

 

그래서 히브리서는 반복적으로 범죄하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깨끗하게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진다. 범죄한 인간의 근본적인 성결은 새 언약의 제도에서 가능하다. 히브리서는 사람의 범죄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예배의 법도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준다(9:11-17).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은 자주 반복될 필요가 없는 단회적인 사건이다(9:25, 26, 28). 히브리서는 영원한 속죄가 오직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고 알려준다(10:5-18).

 

10: 19-13장(하박국 2:3-4(10:37-38)에 대한 해설(믿음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하여 영원한 속죄를 얻은 신자들에게 권면한다(10:19-13:25)

 

실천을 위한 권면(10:19-25) :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신자들에게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과 사랑으로 서로 돌볼 것을 요구한다(10:21-25).

 

범죄 방지를 위한 권면(10:26-31) : 히브리서는 신자들에게 의도적인 범죄를 피할 것을 권면한다(10:26). 왜냐하면 죄를 위한 제사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며(10:26), 무서운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10:27-31).

 

믿음에 대한 권면(10:32-12:13) : 믿음을 권면하는 이유는 신자들이 고난의 큰 싸움 가운데서도 더 나은 영구한 산업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이다(10:32-34). 히브리서는 신자들에게 담대함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10:35-36). 하박국 선지자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가 말했던 것처럼 신자들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인 것을 확신해야 한다(10:35-39).

 

먼저 히브리서는 믿음에 관해 간단한 정의를 내린다(11:1-3). 그후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살았던 의인들을 소개한다(11:4-40). 히브리서는 믿음의 의인들을 소개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신앙은 연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이스라엘인들(11:29), 라합, 기드온/바락/삼손/입다/다윗/사무엘/선지자들(11:32-34),무명의 신자들로 이루어진다(11:35-40).

 

둘째, 히브리서는 신앙의 연속성이 족장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출생적 계보가 아니라 대체적으로 신앙적 계보를 따른다고 말한다(아벨-에녹-노아-아브라함-요셉-모세-라합 등).

 

셋째로 히브리서는 신앙의 연속성에 발전성이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신앙의 발전은 특히 족장들에게서 발견된다. 신앙이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계승되면서 신앙을 그저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시킨다.

 

넷째로, 히브리서는 구약시대의 신앙의 인물들이 신약시대의 신앙의 인물들과 연속선상에 있다고 말한다(11:40). 후자는 전자를 위한 완성이 되고(11:40), 전자는 후자를 위한 증인이 된다(12:1).

 

다섯째로, 히브리서는 구약인물들의 정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둔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시작자이며 종결자이시다(12:2).

 

그 외의 권면(12:13-13:9)

 

먼저 신자들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화평함과 거룩함을 가져야 한다(12:14-17). 또한 신자들은 진동하지 않을 나라를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겨야 한다(12:18-29). 더 나아가서 히브리서는 형제 사랑, 혼인, , 음식 등에 관한 생활의 권면을 한다(13:1-9). 히브리서는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아가야 할 것을 말하면서 진정한 제사는 찬미와 선행인 것을 알려주고 인도자에게 순종할 것을 권면한다(13:10-17). 마지막으로 히브리서는 발신자를 위한 기도를 권면한다(13:18-19).

 

기원과 인사(13:20-25) : 히브리서는 기원과 인사로 대단원의 막의 내린다.

 

히브리서의 기독론

고난의 길에서 신자들은 타락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히브리서 신자들은 이미 고난의 큰 싸움을 통과했다(10:32). 그들은 뒤로 물러가거나(10:39), 흘러 떠내려가거나(2:1), 심지어 안식에 이르지 못할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위험 앞에서 어떤 신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드러내놓고 욕되게 하는 타락에 빠졌고(6:6),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며 은혜의 성 령을 욕되게 하는 방식으로 짐짓 범죄하였다(10:26, 29). 히브리서는 이런 타락자들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다룬다(6:3-6, 10:26-31).

 

히브리서는 은혜 후 타락의 가능성과 타락 후 은혜의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문제점을 다룬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에 들어온 신자가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타락한 신자가 다시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타락은 매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10:26-31). 의도적인 타락에는 죄를 위한 제사가 없고, 심판과 불이 기다리며, 형벌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든다. 그러므로 사람은 결코 타락자들을 다시 새롭게 만들 수 없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먼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고 전제한다(6:3). 이것은 이어지는 타락한 자들을 새롭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타락한 자들을 새롭게 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이다.

 

히브리서에서 관통하고 있는 기독론은 섬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섬기는 분이다. 그분은 심지어 승천하신 이후에 하늘에 있는 성소까지도 섬기는 분이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을 섬기는 이라(8:1-2).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은 자기를 제물로 드린 섬김이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켜 더 아름다운 섬김이라고 부른다(8:6).

 

우리는 오직 우리를 섬기는 하나님의 아들, 대제사장,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영원한 기업(9:15)과 영구한 산업(10:34)을 얻는다. 그것은 시간적으로는 장차 올 세상/도성(2:5, 13:14)이며, 공간적으로는 하늘에 있는 성이다(11:16).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대제사장,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적인 안식에 참여하는 영원한 복을 누린다.

 

히브리서, 권성수

 

히브리서의 헬라어는 신약 성경의 모든 책들 중에서 가장 세련된 헬라어이다. 히브리서의 헬라어는 바울 서신의 언어보다 더 세련된 헬라어로서 구두점이 더 세련되어 있고, 논증이 더 선명하다.

표제가 히브리인들에게로 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없지만 2세기 말엽부터 신약사본들과 기독교 저자들에게서 으레 나오는 표제이다.

 

그리스도의 우위(1:1-3)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말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직접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인류 역사상 최고 최상의 커뮤니케이션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구약 계시의 연속성에서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구약계시를 완성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우주 창조 선지자-최종 계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우주 소유 제사장- 죄의 정결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 우주 보존 왕- 우편 재위

 

그리스도의 7중 우위성

1. 그리스도가 만유의 후사 : 시편2:8의 메아리이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만유란 이 땅뿐만 아니라 장래의 땅까지 포괄한다(2:5-9, 11:9-10, 14-16).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유의 후사로 창조하셔서 우주의 모든 좋은 것들을 소유하고 누리게 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함으로 이것을 상실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가 아담 안에서 상실한 모든 것을 회복해 주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우주 유산에 동참하는 것이다.

 

2. 우주의 창조자 : 그리스도는 만유의 상속자이실 뿐 아니라 우주의 창조주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지혜자로서 우주를 창조하셨다(8:22, 3:14)

 

3. 하나님의 영광과 광채 : 여기서 광채란 능동적으로 발광의 의미와 수동적으로 반영의 의미를 포괄한다. 즉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말세에 그리스도 예수라는 인물을 통하여 나타났다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다.

 

4. 본체의 형상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라고 한 것은 그가 본질상 참 하나님을 찍어 놓은 자라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부가 계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시는 말을 하시고 행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5. 만유의 보존자 : 그리스도가 미래에 만유의 상속자로 나타날 것이고, 과거에 만유에 창조주시라면 현재에는 말씀으로 창조하신 우주전체를 말씀으로 붙잡고 계신다. 최종 계시자인 그리스도의 말씀은 보통 말씀이 아니라 우주를 보존하시는 능력의 말씀이다.

 

6. 죄 정결자 : 그리스도는 창조 뿐 아니라 구속을 이루신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시간의 한 시점에서 단번에 영속적인 효력을 가진 구속을 이루신 것이다.

 

7. 우편 재위자 :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죄 정결 사건을 완성하셨을 때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써 구속사역을 승리로 종결하셨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가 완성하신 구속사역을 하나님께서 인정 확인하시고 왕권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2:10). 그리스도는 승귀하셔서 우편재위하신 대제사장이시다.

 

대 천사 우위(1:4-2:18)

 

1. 성경적 증명(1:4-14)

 

(1)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1:5-7), 천사들은 그의 종(32:43; 1:6)

(2) 그리스도는 왕(1:8-9)

(3)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창조자(1:10-12)

(4) 그리스도는 우편 재위자(1:13-14)

 

2. 결과적 권면(2:1-4)

 

일반적인 권면은 들은 말씀에 세심하게 주의하라. 특별한 권면은 천사들과 그리스도를 말씀중심으로 대조하면서 주는 권면이다

 

말씀청취-주의 간수-믿음화합-실천존중-많은 열매

말씀청취-간수 태만-믿음무관-불순종-영혼홍수

 

저자는 구약의 일곱 구절(2:7/1:5, 삼하 7:14/1:5, 32:43,/1:6, 104:4/1:7, 41:65/, 102:25-27, 110:1)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가 천사들보다 우월한 이름을 상속받은 자이심을 증명한다(1:4).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천사들은 그를 경배하는 그의 종들이라는 점을 시 2:7, 삼하7:14, 32:43, 104:4을 인용하여 입증한다.

 

그리스도의 우편재위는 천사들에 대한 탁월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오래 믿다가 보면 말씀을 듣고 그냥 흘러 보내기 쉽다. 그러나 말씀을 흘러 보내는 자는 영혼의 홍수를 만나 자신이 떠내려가는 위기를 만나게 된다.

 

워어스비는 히브리서의 5대 권면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1권면(2:1-4) : 말씀으로부터 표류하지 말라(drifting from the Word)

 

2권면(3:7-4:13) :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doubt the Word)

 

3권면(5:11-6:20) : 말씀에 게으르지(둔하지) 말라(dull toward the Word)

 

4권면(10:26-39) : 말씀을 멸시하지 말라(despise the Word)

 

5권면(12:14-29) : 말씀에 도전하지 말라(defy the Word)

 

히브리서 저자가 그리스도가 천사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거론하되 그가 잠시 천사보다 못하게 된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마 히브리서 독자들이 쿰란 공동체의 천사론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쿰란 공동체는 천사들의 역할을 많이 다루었다. 그들을 앞으로 두 명의 메시야적 인물이 등장할 것인데, 하나는 왕적 메시야이고, 다른 하나는 제사장적 메시야이다. 그들은 이런 두 메시야적 인물이 천사장 미가엘의 휘하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결국 장차 올 세상은 천사들의 권세에 굴복하게 되리라고 믿은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히브리서 저자가 왜 그리스도가 천사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굴복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못박듯이 밝혔다(2:5).히브리서 저자가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잠시 낮게 되신 것은 그분이 자기 백성들과 동일시되셔서 고난과 사망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공감과 긍휼을 가지고 진정으로 붙들어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리스도가 왜 잠깐 천사보다 낮게 되시고 인간이 되셔야 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구도로 답변하고 있다.

 

1. 인간이 상실한 통치권을 회복하시기 위함이다(2:5-9).

2.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2:10-13).

3. 그가 사단의 무장을 해제해서 우리를 사망에서 구하시기 위함이다(2:14-16)

4. 자기 백성을 위한 동정적인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함이다(2:17-18).

 

1. 인간의 상실한 통치권 회복(2:5-9)

히브리서 저자는 온 세상의 통치자는 천사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지만 그리스도가 잠간 낮아지신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시8;4-6을 인용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본래 인간에게 해당된 시편 8편을 그리스도에게 관련시켜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표 인간으로서 인간의 만유의 통치권 상실의 근인을 처리하심으로써 만유 통치권을 장악하시고, 만유통치권을 상실한 인간들의 대제사장으로서 그들을 붙들어주셔서 마침내 인간의 만유통치권을 회복하게 하신 것이다(20:6, 22:5).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심으로 우리 인간들이 만유 통치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는 갈아 열렸는데, 그렇기 되기 전에 먼저 잠간 천사보다 못하게 되는 것이 필요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셔야 했다. 이것이 천사들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가 잠간 천사들보다 낮아지신 이유다.

 

2. 많은 아들을 영광으로 인도(2:10-13)

그리스도는 많은 아들들을 위한 구원의 창시자, 혹은 개척자로서 영광에 이르는 길을 내시고 우리로 그 길로 가도록 하신 것이다.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필요했다. 여기서 온전이란 고난을 통해 구원의 길이 열리기 때문에 그가 구원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완전히 통과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3. 사단의 무장해제(2:14-16)

인간의 상실한 만유통치권과 영광을 회복해주시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 때문에 사망의 세력을 잡고 인간들을 공포로 다스리는 사단을 무장해제 하셔야 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인간의 혈육에 함께 사망을 당하셔야 했다.

 

4. 붙잡아 주시는 대제사장(2:17-18)

천사들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께서 왜 잠깐 천사보다 낮은 자리에 처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한 네 번째 답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자비롭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함이라는 데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대제사장이라고 할 때 단순히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는 것까지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시험과 고통을 당해보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

 

대 모세 우위(3:1-4:13)

히브리서 저자는 위에서 그리스도가 천사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지적할 때는 복종의 주제를 끄집어내었다. 이제 그리스도가 모세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지적할 때는 충성의 주제를 들고 나온다.

그리스도가 모세보다 우월하신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집은 만물이고, 집지은 자는 하나님이시다.

 

불신앙의 악심과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감은 동전의 양면이다. 불신앙의 악심이란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가리킨다.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이 이스라엘 광야 세대의 배교의 근본원인이었고 그것이 결국 그들의 파멸을 초래하였다. 떨어져 나감은 변절과 배교를 뜻한다. 이스라엘이 가데스에서 지도자 모세와 아론에게 반역한 것은 결국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을 반역한 것이다.

 

신자들이 박해의 상황에서 계속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헌신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현대인들에게 묵상이 없으니 영적인 진리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가 있을 뿐이다. 초월명상은 그 목표가 평안이고 그 결과는 포기와 체념이다. 초월명상을 하면 타인들을 등한히 하게 되고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하게 되고 도덕적으로 무관심해진다. 그러나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은 타인들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깊은 관심,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용한 하나님의 영광, 도덕적인 무관심이 아니라 도덕적인 경성을 가져오고, 그 결과로 체념을 통한 편안이 아니라 올바른 관심을 통한 평안을 가져온다.

 

히브리서 독자들은 박해와 배교의 상황에서 그들 앞에 있는 천국 안식의 소망을 두고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을 담대히 신뢰하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것을 자랑해야 한다.

과거의 안식은 하나님 창조 후 안식과 이스라엘의 가나안 안식이고, 현재의 안식은 믿고 순종하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맛보는 안식이고 미래의 안식은 앞으로 완성될 하늘의 안식이다.

 

시편 95편은 1세기 회당예배에서 안식일마다 찬송으로 사용된 본문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실한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안식, 즉 영원한 안식이라는 주제를 도입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편이다. 1부와 2부로 나눌 수 있는데 제1(1-7)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자는 호소문이고, 2(7-11)는 선조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하여 당했던 불행을 거울로 삼아 불순종을 경고하며 순종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예배의 두 요소를 찾을 수 있다. 예배언행, 순종생활. 경배와 충성은 예배의 두 요소이다.

 

3:7-11이 히브리 원문의 므리바 대신에 노하심을 격동, 즉 다툼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멋사 대신에 시험하던 때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시편 원문의 70인경을 따른 것이다.

히브리 독자의 경우, 그들이 기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복귀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한 악심과 같다(7:39, 14:3). 배교는 먼저 악심에서 비롯된다.

 

피차 권면에 소홀할 경우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될 가능성이 많다. 피차 권면하면 점점 더 타오르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공동체의 삶이 개인 타락의 방파제인 것이다.

18절에서는 그들이 가나안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유가 불순종이라고 지적되었는데, 19절에서는 그것이 불신앙으로 지적되었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영적 가나안이란 목표는 자동적으로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사역 후에 안식하시고 그리스도는 구속 사역 완성 후에 안식하신다. 창조안식은 구속안식의 원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현재 그리스도의 안식에 동참한다.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믿음으로이고(4:3), 안식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함으로써 이다.

죽어서 들어가는 천국은 신자들이 그냥 편히 쉬어도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믿음과 순종을 통해 애써서 들어가는 곳이다. 이는 행위구원 사상이 아니다. 히브리서 전체가 우리 죄 때문에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고 연약한 우리들을 도우셔서 최종 안식에 이르게 하시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대주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대아론 우위(4:14-7:28)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가 아론보다 우월한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밝힐 때 이렇게 대제사장의 자격부터 거론한 다음, 대제사장의 원초모델을 멜기세덱에서 찾았다. 저자는 멜기세덱이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었던 점을 지적하고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지적했다(7:1-10). 아론계 대제사장직은 불완전하지만, 그리스도는 멜기세덱계 대제사장으로 완전한 분이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론계 대제사장은 하늘 성전의 모형인 지상성전의 지성소에 1년에 1차씩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음에 비해, 그리스도는 지상성전의 원형인 하늘성전의 지성소에 자기 피를 가지시고 단번에 영원히 들어가셔서 거기 영원히 계시면서 자기 백성을 위해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지니시고 속죄사역을 완성, 승리하시고 하늘로 올라 가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대제사장 일을 영원히 계속하시는 최고의 대제사장이시다.

 

첫째, 대제사장의 체휼성(4:15-16) :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을 체험하시고 유혹을 당하시면서도 온갖 유혹을 기셨기 때문에 유혹 당하는 인간들을 진정으로 도우실 수 있다. “죄는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든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남들의 상처를 보지 못하게 한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굳어지게 해서 동정적이기보다 정죄적이 되게 할 수 있다(Wiersbe).

 

둘째, 대제사장의 대표성(5:1-3) : 예수 그리스도는 탁월한 명칭(4:16),탁월한 임명(5:1, 4-6), 탁월한 동정(5:2, 7-8), 탁월한 제사(5:3, 9-10)에 합당한 자격을 구비하셨다(Wiersbe)

 

셋째, 대제사장의 소명성(5:4-6) : 대제사장의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기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신 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명으로 되신 분이다.

 

넷째, 대제사장의 고난 통과성(5:7-10) : 그리스도는 체휼성과 대표성과 소명성을 지닌 대제사장으로서 완벽한 제물을 드리고 완전한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고난 중에 경외와 순종을 체득해야 했다. 우리는 구원을 위한 공로의 차원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 구원을 누리기 위해서 순종해야 한다.

 

죽은 행실을 회개한다는 것은 양심을 더럽히는 행실들로서 깨끗이 씻어 버려야 할 행실들입니다(9:14). 살인, 간통, 색욕, 간음, 도적질, 우상숭배, 마술, 마법, 강탈, 위증, 외식, 표리부종, 사기, 교만, 악의, 거만, 자랑, 이런 죄악들은 죽음을 낳는 죄악들로서(6:21) 회개해야 할 죄악들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하나님의 메신저들에게 대한 신앙, 복음에 대한 신앙, 즉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포함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참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베푸시는 것을 믿는 신앙이다.

 

세례들은 유대인의 의식법상 씻음을 가리킨다.

 

안수는 구약에서 공직 직무를 위임할 때(27:18), 제사 지낼 때(1:4),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저주한 자를 돌로 처형하기 전에 안수했다(24:14).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축복하실 때, 환자 치료시(19:15), 직무위임시(딤전 5:22), 성령 강림시(8:17) 안수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아브라함의 신앙이었고(11:19), 구약의 명백한 교훈이었다(26:19). 유대인의 부활신앙은 다가올 심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심판이 영원하다는 것은 심판 과정이 영원하다거나 심판 일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이 아니고 심판의 결과가 영원하다는 뜻이다.

 

배교에 대한 심각한 경고 : 실제적인 배교상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가상적인 배교상황을 다룬다. 저자는 엄숙한 경고의 말씀에 이어 독자들을 격려한다.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것은 자신의 약속을 최후 확정하신 것이다. 약속의 확고성을 더 이상 보장하실 분이 없도록 하고 최고 최종의 방법으로 그것을 확정하신 것이다.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한 맹세이다. 우리는 휘장 안에서 은혜를 받아 영문 밖으로 나가 세상에 대한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아론계 대제사장 멜기세덱계 대제사장

레위 지파 유다지파(7:13-15)

연약한 계명의 법 생명의 능력의 법(7:16-19)

하나님의 맹세 없음 하나님의 맹세 있음(7:20-22)

다수(죽음 때문) 한 분 (영존자)7:23-25)

죄인 무죄(7:26-28)

 

그리스도의 우월한 사역(8:1-10:18)

대제사장 그리스도=새 언약의 중보(8) : 그리스도가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하셔야 할 속죄사역을 완성하셨다는 것, 또 그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여 받아주셨다는 것을 말한다.

 

새 언약은 네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마음 판에 하나님의 법을 심으신다는 것(고후 3:1-3) : 옛 언약의 율법은 그들에게 선과 악의 길을 보여주었으나 그들의 마음에 악을 이기고 선을 행하는 능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새기고 그것을 행할 인격자의 능력, 즉 성령의 능력을 준다(8:2-3). 죄인이 예수를 믿으면 마음에 신의 성품을 받는다(벧후 1:1-4). 신의 성품을 받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싶은 소원을 가지게 된다(

2:12-13).

둘째,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됨 : 새 언약은 옛 언약이 예언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보호의 대상, 하나님의 보배 같은 백성이 되었다(1:14, 벧전 1:18, 2:9).

 

셋째, 모두가 하나님을 알게 됨 :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요일 2:27). 진리의 성령께서 신자들을 구원의 필수적인 모든 진리에로 인도하신다(16:13).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옛 언약 하에서처럼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심 :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그들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새 언약의 중보 예수 그리스도의 피 제사 때문이다. 옛 언약은 죄를 기억나게 하는 것이지만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기억하시지만 그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옛 언약이 폐지된다고 하는 것은 율법 전체가 폐지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만 바라보면 행복해집니다, 하용조

 

히브리서는 주후 69년에서 70년을 전후해서 쓰인 책으로, 히브리인에게 보내는 서신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주후 70년은 예루살렘이 파괴된 해인데, 그 전후로 초대교회에서는 굉장한 핍박과 고난, 그리고 여러 가지 압력이 많았습니다. 고난과 핍박이 심해질수록 점차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변절과 배도의 위험이 있었는데, 특히 유대주의로 인한 복음의 변질이 많았습니다. 히브리서는 이에 대한 경고와 격려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만이 고난과 위험, 모든 환난을 이기고 신앙을 지키는 유일한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그 순간 베드로는 자기 전공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당시 그에게는 예수님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전공을 잊어버려야 예수님을 잘 믿습니다. 자기의 지식, 자기의 경험, 자기의 방법, 자기의 사고방식을 예수님 앞에 완전히 복종시켜야만 주님을 신실하게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본체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본질에 계속 가까이 들어가며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는 하나님이요, 땅에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으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는 그 어떤 천사보다 뛰어난 존재다라는 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천사 중의 하나로, 혹은 천사 중에 가장 높은 대장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부류를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첫째,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2;8-9)

둘째, 믿음은 구원을 얻는 열쇠입니다.

 

믿음에 대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믿는다는 사실보다 믿음의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입니다.

 

신념과 믿음은 다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신 말씀과 행하신 모든 일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0장이 바로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의 내용입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가 하신 모든 일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즉각적으로 응답받는 경우에만 집중해서 믿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보는 능력이 생깁니다. 여기서 바라는 것은 내가 소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부터 온 것을 소원하고 바라보는 것이 참된 바람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주님이 주신 영원한 진리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진리란 하나님이 주신 천국과 내세, 능력, 사랑, 용서, 평안, 기쁨, 자유 등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는 믿음의 세계 속에 사는 믿음의 사람, 둘째는 이성과 경험, 상식 속에 사는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후자의 세계에서 얻는 결론은 절망, 허무, 좌절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이란 말 못지않게 증거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1-2, 4-5, 13, 39). 믿음은 증거를 갖는 일입니다. 믿음은 이성, 합리성, 과학, 철학, 역사의 세계를 초월합니다. 11:3절에 보면 믿음으로 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성경은 믿으면 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할 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새로운 영적질서가 그 생애 속에 들어옵니다.

 

믿음으로 알 수 있는 것

첫째, 하나님이 우주 만물뿐 아니라, 모든 세대도 지으셨음을 알게 됩니다(11:3).

둘째, 이 세상은 스스로나 우연히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것임을 알게 됩니다(11:3).

셋째, 하나님이 친히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33:6-9).

넷째, 우리는 믿음으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즉 창조는 유에서 유가 생긴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가 생긴 것임을 알게 됩니다.

 

믿음을 가장 잘 설명하는 방법은 믿음으로 살았던 실제 인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믿음은 죽어서도 말한다(4)

 

참된 제사를 드린 믿음, 믿음으로 드린 제사, 하나님은 제물과 함께 그 사람을 받으십니다. 제사의 제물도 중요합니다. 아벨이 받은 복, 의로운 자, 죽은 후에도 영향력을 미치는 복

 

2. 주님과 함께 한 한평생, 행복했습니다(5-6)

 

1)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

 

믿음이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에녹이 가졌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 하나님이 반드시 계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말입니다(3:3). 하나님 수준에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의지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분을 닮아갔다는 말입니다.

 

3.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도 좋았다(7)

 

노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 6장을 보면 노아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일에 대한 경고입니다.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 짓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양과 용도가 이상합니다.

 

1)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믿음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경외함으로 순종했습니다(7). 믿음은 순종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절망하지 않는 용기와 끝까지 견디는 인내입니다.

 

2) 의를 설교하는 믿음

 

노아는 세상을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7, 벧후2:5)

 

3) 의의 후사가 되는 믿음(7)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 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4. 신앙은 떠남에서 시작됩니다(8-10)

 

1)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믿음(8)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부름에 마음으로 순종하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던 믿음입니다. 말씀을 행동으로 옮길 때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자신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여건을 보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믿고 나가십시오.

 

아브라함의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8:28). 초청하시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은 떠남에서 시작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떠나기보다는 안주하려고 합니다. 교회에 오는 분들의 요구를 살펴보면, 자신의 현재를 인정해 주고, 자신과 직장, 가족을 보호해 주며, 자신이 돔 더 발전하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2) 믿음은 만들어지는 것

 

아브라함의 믿음은 태어날 때부터 있던 믿음이 아니라, 후천적인 믿음입니다. 점진적이며 만들어진 믿음입니다.

 

3) 미래를 향한 믿음

 

아브라함의 믿음은 종말론적인 믿음입니다. 천국이 분명하고 하나님 나라가 분명하면 현실과 이 세상이 고달프지 않습니다. 이것이 종말신앙입니다.

 

5. 고향을 그리듯 하늘나라를 그리다(11-16)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처음에는 아브라함에게 이끌려 수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창세기 16장에 사라가 자기 몸종인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게 한 후에 하갈을 학대하고 내좇아 냅니다. 이런 모습을 볼 대 사라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사라의 몸으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게속 말씀해주셨지만 사라는 믿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낳기 전 90세가 되어서도 사라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웃어 넘겼습니다.

 

사라를 통해 본 믿음의 모습

 

첫째, 믿음은 불가능에서 시작됩니다(11:11, 9:23)

둘째, 믿음에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합니다(11:11)

 하나님은 사라에게 약속을 주실 때 25년에 걸쳐 한꺼번에 주시지 않고 25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주셨습니다.

첫 번째 약속(12:2), 두 번째 약속(13:16), 세 번째 약속(15:4), 네 번째 약속(17:16), 다섯 번째 약속(18:10).

셋째, 믿음은 미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넷째, 믿음은 결국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의 사람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습관과 본능에 따라 반복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면서 예수님 중심으로 나그네와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셋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11장에 나오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처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말입니다.

 

11장을 통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의 사람은 믿음을 따라 죽습니다(11:13).

둘째,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떠날 준바를 합니다(11:13).

셋째, 믿음의 사람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합니다(11:14-16).

믿음은 뒤가 아닌 앞을 보게 하고, 땅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세상이 아닌 천국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렇게 믿으라, 이동원 목사, 히브리서 11장 강해설교

 

히브리서 1:1-10:18은 교리부분입니다. 그 교리의 주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19-마지막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온 백성들의 믿음의 생활이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는 실천적인 부분입니다.

히브리서의 첫 번째 부분과 두 번째 부분을 나누는 중요한 분수령이 1019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다시 20절에는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도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믿음의 주관적 성격

 

첫째,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둘째,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

셋째, 믿음이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으니”.

 

선진들이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를 가져왔습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더나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아주셨습니다. 그것이 증거입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너는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더니 그 홍수 심판 속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을 때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으니 이것이 아브라함이 받은 증거입니다.

 

믿음의 객관적 성격

신념과 신앙은 어떻게 다릅니까? 신념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는 것은 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믿음(11:4)

아벨은 가인보다 훨씬 더 좋은 제물을 드렸습니다. 아벨은 가장 귀하고 소중한 양의 첫 새끼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그냥 드렸습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 악한 삶을 살았습니다(요일 3:12). 아벨은 의인이었습니다(23:35). 삶의 회개가 없이 아무리 종교적 모습으로 찬송하며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기도와 찬양을 받지 않습니다(1:10-11).

 

아벨은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예배의 정신은 드림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받으십니다(11;6).

아벨은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를 가르쳐 줍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가르칩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요성을 가르쳐 줍니다.

 

에녹의 믿음(11:5-6)

예배와 동행과 증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반드시 있어야 할 세 가지 덕목입니다.

유다서 14-15절을 보면 에녹은 하나님이 뭇 사람을 심판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강렬한 심판의 대상은 일과 말입니다. 에녹은 그 시대 그 사람들의 부패성을 일의 행위와 언어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심각한 부도덕 속에 빠지는 이유를 현대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므두셀라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부언해서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라는 의미입니다. 에녹은 아들 므두셀라가 바라볼 때마다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였습니다.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이 없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삼백 년을 동행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습니까?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동행함에는 세 가지 삶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동행함의 세 가지 삶의 내용

첫째로, 그것은 뜻의 조화입니다(3:3). 뜻이 조화되지 않고서는 동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26:39). 하나님의 뜻은 좋고, 아름답고 선한 것입니다.

 

둘째로, 도덕적 성질의 일치입니다. 도덕적 부조화는 모든 것의 끝장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는 끊어집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통을 요구합니다. 함께 동행하는 것은 서로 말하며, 듣기도 하고, 상호 의사를 교환하는 것입니다. 동행할 때 가져오는 결과는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고 동행해야 합니다.

 

에녹은 믿음의 증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중거를 받았습니다.

 

노아의 믿음(11:7)

노아의 믿음의 근거는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즉 심판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에 노아는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즉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지만 이 믿음이 얼마나 진지한가는 말씀에 응답하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습니다.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2:12, 고후 7:1).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믿음으로 방주를 짓는 엄청난 행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믿음은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방주를 만들면 산다는 자식이 노아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방주 속에 들어가는 결단이 그를 구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11:8-10)

아브라함은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집에서(24:2) 태어나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선택받을만한 위대한 일을 행한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구원은 적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언제나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전혀 미지의 땅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행동, 이것은 순종의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불신자들의 삶과 달라야 한다는 것은 영원의 빛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아브라함을 장막에 거하도록 하였습니다(11:9).

 

사라의 믿음(11:11-12)

성경은 사라가 믿음의 회의를 어떻게 극복하고 위대한 믿음에 도달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사라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부딪히면서 믿음으로 희의를 넘을 수 있었습니다. 사라의 믿음의 대상은 약속하신 하나님이시며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맹목적인 미신과 구별됩니다. 미신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착각하고 믿는 것이며, 불신앙은 사실이 분명한데도 믿지 않는 것이고, 신앙은 사실을 사실대로 믿는 것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더 강조하는 것은 말씀보다도 그 말씀을 말씀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부활신앙(11:17)

내가 아이와 함께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22:5)는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아삭의 부활을 확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를 믿는 사람은 부활을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손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시련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입니다.

 

부활신앙은 미래적인 차원에서 소망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측면은 지금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용기있는 결단과 능력을 격려하는 원천과 영감이 된디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거룩한 순종과 헌신을 하도록 아브라함을 도왔습니다.

 

이삭의 믿음(히  11:20)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믿음으로 자녀를 축복하였다고 말합니다. 장차 올 일은 창26:2절 이하에 나오는 땅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26:2-3), 둘째로 그의 자손에 관한 약속입니다(28:3). 셋째로 장차 올 일은 무엇보다 그 자손의 혈통을 통하여 메시야의 축복을 기대하는 일이었습니다(12:1-4, 22:16-18).

 

이삭이 처음부터 야곱을 축복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장남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이삭은 자기가 축복한 사람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라는 사실을 알자 심히 크게 떨었습니다. 아터 핑크는 이때가 이삭의 육신의 자아가 깨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충격적인 각성의 순간이라고 지적합니다(16:9).

 

야곱의 믿음(11:21)

야곱의 믿음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죽음, 믿음으로 축복함, 믿음으로 경배함.

 

아더 핑크는 야곱의 생애를 가리켜 안개 낀 아침에 안개를 헤치고 떠오르는 태양과 같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믿음으로 죽을 수 있다.“ 레오나르 다빈치, ”잘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가져다 주듯이 잘 보낸 인생이 편안한 안식의 죽음을 선물한다.“

 

야곱이 보여준 믿음의 중요한 교훈은 사람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입니다(48:19). “인간으로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고, 인간으로서 또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야곱의 생애의 전환점은 베냐민을 보내는 순간입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라(43:14).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맡기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믿음(11:22)

요셉은 역경 중에서나 순경 중에서나 한결같이 주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애굽에 묻히지 않고 가나안을 향하여가는 그의 장례행렬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의 말씀대로 살다가 그가 누렸던 모든 영광중에서도 하나님이 약속한 말씀을 잊지 않고 그 말씀을 믿고 떠난다는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11:23)

바로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모세의 부모에게 이 용기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의 믿음은 모세를 석달 동안 감추어 기르는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참된 믿음은 언제나 행위를 가져 옵니다.

모세의 부모들이 아이를 하수에 던지고 그 누이를 보내면서 네가 가 보아라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봅니다.

유태교육 중 훌륭한 공부방법의 하나는 아이가 한 살 두 살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꾸 이야기를 읽어주는 것입니다.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아이의 무의식의 심층 깊은 곳에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1(11:24-26)

믿음은 마땅히 거절할 것을 거절한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24). 믿음은 선택해야 할 것을 선택한다. 거절한다는 것은 소극적 차원이고, 선택한다는 것은 적극적인 차원입니다. 모세는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을 세상의 가장 큰 재산으로 여겼습니다. 믿음은 분명한 가치관에 의하여 확신을 갖게 한다.

 

모세의 믿음 2(11:27-28)

참 믿음은 애굽을 온전히 떠나는 것이다. 참 믿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움을 도피를 낳지만 믿음은 어떤 상황에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기도하고 싶을 때 기도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기만 하면 기도원에 뛰어가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세가 배운 놀라운 신앙의 훈련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시각화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성경에서는 피 흘림과 피 뿌림이 다릅니다. 피 흘림의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지를 못합니다. 피 흘림이란 속죄의 근거입니다. 흘려진 피를 자기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뿌려야 합니다. 십자가 구속의 사건을 받아들이고 우리 마음의 문설주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뿌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믿음1(11:29)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근거는 모세를 통해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믿음의 결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이스라엘의 믿음2(11:30)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순간 실망은 사라지고 믿음으로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여리고를 도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훈련을 잘 감수하였습니다. 훈련은 믿음을 강조합니다. 서양 속담에 기다린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을 많은 받은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합의 믿음(11:31)

라합은 두려움의 날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라합은 보이는 현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는 것 자체는 행함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언제나 행함이 따릅니다(2:11).

 

정복자와 순교자(11:32-38)

정복자들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며, 순교자들의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를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복자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여호수아), 의를 행하기도 하며(다윗), 약속을 받기도 하며(기드온),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다니엘), 불의 세력을 막기도 하며(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다윗), 연약한 기운데서 강하기도 하며(아브라함, 이삭, 야곱), 전쟁에 용맹하여(아브라함, 여호수아), 이방인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삼하7:1-8:1-2),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왕상 17:22-24),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왕하 4:35-37).

 

순교자들의 믿음 : 믿음은 기적과 같은 사건을 연출시킬 뿐 아니라 숨막히는 상황 속에서 버티고 견디어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부여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은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하고 신뢰하였기 때문에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희롱과 채찍질을 당했습니다(다윗, 삼하 16:11-12). 결박을 당하여 줄과 사슬에 꽁꽁 묶이기도 하였습니다(미가야, 예레미야, 스데반). 톱으로 켜는 것은 이방인의 야만적인 사형방법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목회와 신학

 

1. 수신자의 정체와 상황-양용의

본 서신의 수신자들이 히브리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초대교회의 이해는 그 타당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첫째, 히브리서의 논점 전개에서 구약성경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본 서신의 수신자들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특히 제사장 제도, 제사의식, 성막의 구조, 모세의 언약 등과 관련된 구체적이고 상세한 논점 전개는 본 서신의 수신자들이 구약 성경에 매우 익숙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둘째, 수신자들이 직면해 있던 위험은 유대교의 핍박으로 말미암은 유대교와의 타협 혹은 유대교에로의 복귀 가능성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점들은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가정함으로써 가장 잘 설명될 수 잇다.

 

한편 몇몇 학자들은 히브리서가 이방인 그리스도들에게 보내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주장의 근거들 중 중요한 것들 다음과 같다.

 

첫째, 3:12(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은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은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자들에 대한 경고라기보다는 이방 종교로 돌아가는 자들에 대한 경고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성취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고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시도는 히브리서 저자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6:1, 9:14의 죽은 행실은 유대교보다는 이방종교에 대한 묘사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저자에게도 유대교도 죽은 행실로 규정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히브리서의 고급헬라어 문체와 70인역 으로부터의 인용은 유대인보다 이방인 수신자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때 당시 유대인들이 흩어져 사는 상황에서 헬라화 사용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사실과 이러한 주장 역시 유대인의 수신자 가능성을 부인할만한 근거는 될 수 없다.

 

2. 수신자들이 처한 상황

아마도 수신자들은 한 도시의 여러 구역들에 흩어져 존재하던 큰 공동체에 속해 있던 한 작은 교회였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13:24, 너희의 모든 인도자들과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복음을 예수께 직접 들었던 자들로부터 전해 들음으로써 믿음에 이른 자들이었다(2:3). 그런데 그들은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복음에 대한 헌신이 약화되어 가는 위험에 빠져들고 있었다(2:1-4). 심지어 그들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구원의 길에서 떨어져 나갈 위기에 봉착해 있었던 것이다(2:1, 3:12-13, 4;1, 11, 6:11, 12:15).

 

사실 그들은 성도들을 섬김으로써 형제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을 증명해 보였던 자들이었다(6:9-10). 고난을 잘 견뎌냈을 뿐 아니라 더 큰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동정하였고, 또한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기는 것까지도 기꺼이 감수했다(10:32-35).

하지만 그들은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정도의 신앙경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영적 유아기를 넘어서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 상태로 돌아갔던 것이다(5:12). 신앙적 삶의 실천에 있어서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6:1-2).

 

그들이 이러한 상태에 머물게 된 이유는 그들의 지적 능력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난에 대한 두려움(10:32-34)과 유대교에 대한 미련(4:14-10:39, 13:9-10)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인내와 헌신이 약화되어 가는 위기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10:35-36, 12;3, 13:13).

 

아마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와 충족성과 영원성을 위협하는 유대교 행습들(구약의 제사제도, 음식법)을 수용하는 경향을 보였던 것 같다(13;7-9, 9:10). 이와 같은 복합적인 상황에서 그들은 중앙공동체에서 거리를 두게 되었을 뿐 아니라, 가정 교회 모임까지도 그만두고자 하는 경향이 생겨나는 위기에 봉착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10:25, 13:24).

 

히브리서에 나타난 신학적 중심주제(한천설)

 

1. 기독론적 접근

 

첫째 대제사장직의 우월성을 강조, 히브리서에는 1장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우월성, 그리스도 제사장직의 우월성, 그리고 희생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우월성이라는 세 가지의 중심주제가 전개되고 있다(1:1-10:18). 즉 히브리서 기자는 당시 성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다시 되돌아가려고 했던 유대교에 대하여 기독교의 우월성이라는 주제는 전개시키고 있는데, 그 주안점을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가?에 두어 성도들을 권면하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세분하며, 선지자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1:1-3),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1:4-2:18),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3:1-4:13), 그리고 아론보다 우월하신 대제사장 그리스도(4:14-10:18)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0:19-12:29의 권면도, 새롭고 산 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하여 전개하고 있다.

 

둘째, 대속죄일의 예식과 예수님의 희생의 죽음을 연관시켜 기독론을 전개시키는 것 역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전 15:3-4)는 초대교회 케리그마의 수준을 넘고 있다.

 

2. 종말론적 접근

히브리서의 종말론을 강조하는 자들은 히브리서 안에는 실현된 종말론뿐만 아니라 미래적 종말론이 존재한다고 한다.

 

첫째, 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라는 구절과 4:3,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하며, 이때의 안식은 미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3에서는 현재는 성취의 때이기 때문에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다고 이미 실현된 종말론을 말하고 있다.

 

둘째, 실현된 종말론의 또 다른 예는 하늘의 은사와 내세의 능력을 맛본다는 표현에서 나타난다(6:4-5). 하늘의 은사라는 말은 하늘의 부르심(3:1)이나 하늘의 도성(12:22)과 같이 종말론적인 용어이다. 13:14에 영구한 도성이란 하늘의 예루살렘(12:22)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성도들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을 때에 이미 이 도성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12:22). 우리는 미래가 아닌 지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고(4;16),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7:19). 이처럼 우리는 이미 하늘의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고 있지만(실현된 종말론), 그러나 아직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미래 종말론).

 

배교자가 생겨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올바른 믿음 : 분명한 믿음을 갖도록 인도한다. 당시의 공동체 안에는 배교의 움직임이 있었다(2:1).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복음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4:2).

 

성숙한 믿음을 갖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6:1-6) : 일부 교인들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떠나려고 했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이 믿음이 계속 초보상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5:12-14).

 

모임에 빠지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특별한 관심으로 돌보는 것이 필요하다 : 신앙적인 회의가 생기면 나타나는 뚜렷한 현상 가운데 하나가 각종 모임과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0:25). 이런 현상이 나타날 때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굳게 잡도록 돕는 것이다.

 

잘못된 가르침에 유혹받지 않도록 가르치고 경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불행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지도자 즉 오늘날로 말하면 목회자들에게 순종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것이다(13:17).

 

고난에 굴복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 저자는 전에 고난을 잘 견뎌냈던 것을 회상하게 하고 있다(12:5-13). 예수를 생명의 주로 믿는다면 이유로 비방을 받고 고난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도록 창피를 당했지만 잘 견디어 냈지 않았느냐? 현재의 환난도 담대하게 버티어 나가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 더욱 그렇게 해야 할 것은 고난이 클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 권면한다(10:34-35). 사람들이 배교하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흔히 고난에 압도되어 그러한 최악의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의 긍정적인 의미에서 배교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고 있다. 고난의 목적이 보다 단련된 정금 같은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징계라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 배교할 수 없는 것은 잠시 잠깐 후면 오시기 때문이다. 즉 지체하지 않고 종말이 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10:36-37). 히브리서 저자는 전에 당한 고난은 심한 육체적 고난이었지만 앞으로의 고난은 그보다 훨씬 심한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는 순교의 고난이라는 점이 암시되고 있다(12:4).

 

고난 중에서도 찬양의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히브리서를 받는 교인들이 배교라는 최악의 카드를 생각하고 있던 이유 중에 하나는 현재의 고난에 압도되어 찬양하는 기쁨이 과거보다 덜 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찬양하면서 위로받고 찬양하면서 기쁨을 누리는 생활을 만끽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믿음

믿음, 무엇이 문제인가?

 

바울의 관심은 구원의 주인 그리스도에 관한 기독론적인 문제였으며, 야고보의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적인 삶과 관계된 인간론적 문제였다. 전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문제이며, 후자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문제다.

 

한국교회에서 이신칭의의 교리가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가?

 

첫째,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대가없이 공짜로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둘째,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표현이 인간을 모든 책임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므로 게으르고 나태하며 부도덕한 삶을 살아도 된다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셋째,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신칭의의 신학에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란 표현에 근거하여 믿음을 마치 영지주의적인 지식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믿음의 개념을 매우 포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첫째, 기독론적 믿음 : 구원의 주 예수(2:10, 5:9)

 

믿음을 표현하는 단어는 명사형으로 피스티스나 형용사 피스토스로 사용되고 있는데, 먼저 소극적인 의미로는 신뢰할만한, 믿을만한 뜻이며, 이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며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설명한다. 반면에 적극적인 의미로는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나 그에게 충성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믿음 혹은 신실함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이런 측면에서 로마서의 믿음은 주로 기독론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반면, 야고보서의 믿음은 인간론적인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들이 신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분으로서 그가 우리의 신앙 고백의 대상자임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둘째, 인간론적인 믿음

 

인간론적인 믿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선포한 구원의 복음에 신실하게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를 가리킨다.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신실하게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우리에게 참된 믿음의 모델을 보여주셨다. 예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 그리스도인들도 고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신실하게 복음에 순종함으로 종말론적인 천상의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광야의 백성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히브리서 319절에 가서는 요약하기를 그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즉 히브리서 저자는 믿지 않는 것과 순종하지 않는 것, 믿지 않는 것과 불신하는 것, 믿지 않는 것과 악한 마음을 갖는 것은 모두 동일한 것이며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셋째, 믿음의 종말론적인 성격

 

히브리서의 신학적 토론부의 내용이 주로 과거에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우월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직설법적인 진술이며, 구원은 이미 성취된 것이라는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의 기초가 된다. 반면에 권면부의 내용은 안식이 아직 미래적인 것이므로 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복음에 지속적으로 신실하게 반응할 것을 요구하는 명령법적인 진술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믿음에는 현재적 측면과 미래적 측면이 항상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믿음의 특징은 히브리서 11장에도 반영되어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이 증거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라는 것들과 보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미래에 속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래에 속한 것들은 믿음에 의해서 현재적인 실상과 동일한 것이 된다.

 

히브리서 11장은 전체적으로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과 핍박을 극복하고 승리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따라서 구약의 위인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바라보고 살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에게 믿음의 주인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12:1-3).

 

예수께서는 그의 앞에 놓여있는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경주를 달려감에 있어서 때로는 피 흘리는 투쟁까지도 감당해야 한다. 이 경주에는 고난이 따르므로 인내가 필요하며 경주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 한다. 저자는 134-5절에서 음행하는 죄와 돈을 사랑하는 욕심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히브리서 11장의 주해와 적용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여정에 성공한 위인들은 순례자적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다. 순례자적 믿음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미래지향적이다, 소망이 있다. 목표를 위해서 부름받은 자들로서 그들을 부른 하나님께 신실하게 충성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믿음의 본질(1-2)

 

믿음은 실상과 증거이다. 믿음은 주관적인 확신이 아니라 우리거 소망하는 것이나 보지 못하는 것들을 사실적인 형태나 증거로 드러나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히브리서에서 소망은 항상 안식에 들어갈 약속과 직, 간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서 현실적인 실재가 되도록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믿음이라는 뜻이다.

 

1-2절에서 믿음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세 가지 개념은 바라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증거를 받는 것

 

6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철학적으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역사를 주관하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서 그분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찾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된 삶을 가리킨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3-7)

 

아벨은 믿음으로 고난 받은 자인 반면에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극복한 위대한 승리자로 묘사되고 있다. 11장에 열거된 믿음의 선조들 중에는 믿음의 승리자들도 있지만 믿음의 고난을 받고 순교한 자들도 있다(32-35/35-38).

 

아벨과 에녹과 노아의 믿음을 통해서

 

첫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의롭게 살아가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불의한 자들로부터 고난과 핍박을 받을 수 있다.

 

둘째, 그러나 믿음으로 받게 되는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상으로 주어질 영원한 기업을 바라보고 기뻐할 수 있다(벧전 1:6-8). 때로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기도 하고 세상 가운데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받을 수 있다.

 

셋째, 불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약속을 바라보는 미래지향적인 믿음(8-22)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자이며 그의 후손인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약속을 바라보는 미래지향적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아브라함이 고향인 메소포타미아를 떠나서 하나님이 인도하심에 따라 타국에서 유리방황하는 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음을 잘 증거한다.

 

9절은 믿음의 현재적인 삶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약속을 바라보는 미래지향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아간다. 10절에서 아브라함이 소망했던 것은 가나안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지으시는 도시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가진 영적 통찰력과 종말론적인 안목을 설명하는 것이다.

 

11절에서 사라의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능력과 관계되어 있다고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는 사실을 사라의 믿음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즉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믿음은 인간이 심리적으로 창조해내는 내적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신실함이다.

 

13-16절에서 저자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설명을 잠시 중단하면서 굳이 이 부분을 삽입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종말론적인 특징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믿음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도로 살리실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라의 믿음이 죽은 자와 같은 아브라함에게서 생명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진 믿음이라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 다시 이삭을 부활을 통해서 받을 수 있을 것임을 믿었다. 35절에 보면 과거의 선진들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미래지향적인 믿음의 현재적인 특징(23-28)

믿음의 순종(23-38) : 모세의 부모들이 바로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믿음의 표현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위였다. 24절부터는 모세의 믿음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는 애굽의 공주로 살아가는 부귀와 안락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했다(25). 믿음의 삶이란 미래의 소망을 위해서 기꺼이 현실적인 고난을 선택하는 것이며 그것을 또한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이다.

 

믿음의 승리(32-35) : 의를 행하고 약속을 받은 자에 대한 언급은 다윗에 관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자들이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은 경우는 엘리야가 죽은 아들을 살려준 사렙다 과부(왕상1 7:17-24), 엘리사가 살려준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4:17-37).

 

믿음의 고난(35-38) :돌로 치는 것은 스데반의 순교, 톰에 잘려 죽은 것은 이사야기 므낫세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칼에 죽고 가죽옷을 입고 방황하는 것은 세례요한

 

믿음의 백성이 가야 할 길, 정훈택

믿음의 정체 : 믿음은 바라는 것들, 즉 기대하는 것들을 확신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거하는 것이다.

 

아벨과 에녹 : 하나님을 찾음(11:4-6)

 

노아, 아브라함, 사라 :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11:7-16)

 

아브라함부터 모세를 거쳐 선지자들 : 하나님을 의지함(11:17-32)

 

승리하면서 살라, 위렌 W. 워어스비, 히브리서 11장 강해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경주자들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나? 그것은 행동하는 믿음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었다. 참 믿음이란 감정, 주위, 상황, 결과 등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냐 아니냐가 바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인 것이다.

 

믿음은 신자의 영혼으로 하여금 미래를 현재처럼 느끼게 해주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오스왈드 샌더스).

참 믿음이란 외적인 주위환경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속사람과 관계가 있다.

 

성경적 믿음이 발휘되는 최소한 4단계

1. 계시 : 하나님의 말씀(1:1-2)

 

2. 관계 : 하나님과 동행(11:6) : 하나님과의 교제, 예배와 친교에 비중

 

3. 응답 : 하나님의 뜻에 순종(11:8)

 

4. 보상 : 하나님의 증거(11:6)

 

아벨 : 순교하는 믿음(4:1-10/11:4)

 

에녹 : 험난한 시대를 사는 믿음(5:21-24/11:5-6, 14-15)

 

노아 : 완전한 믿음(6-9/11:7)

 

아브라함 : 갈 바를 알지 못함(11:8-10, 13-16)

 

아브라함과 사라 : 부활(11:11, 12, 17-19)

 

이삭, 야곱, 요셉 : 장래 일을 바라보는 믿음(11:20-22)

 

믿음이 아니오라고 할 때(11:23-29)

 

여호수아, 라합 : 믿음은 승리이다(11:30-31, 1-6)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 11:32-35

믿음의 또 다른 면(11:35-40)

 

가장 위대한 승리자(12:1-13)

 

승리자들을 생각하라(12:1)

 

자신을 생각하라(12:1)

 

경주 자체를 생각하라(12:1)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12:2-3)

 

 

 

히브리서 강해, 레이먼드 브라운

 

서신의 목적

위험하고 어려운 시기에 처한 사람들을 어떻게 격려할 수 있겠는가? 기자는 굳게 붙잡고, 들어가기를 힘쓰며, 완전한데 나아가고, 자기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라(3:6, 4:11, 14, 6:1, 18).

이 서신의 우선적인 권면은 인내하라는 것이다. 모세는 아브람에게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오래 참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6:15).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봄으로 인내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오래 참았다(12:2-3).

 

힘든 시기를 맞을 때, 신자들에게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11:1-40)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도전이 필요하다(12:22-29).

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은 충분히, 결정적으로,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이다. 필립 휴즈,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는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됨을 나타내고, 그 본체의 형상은 아들이 아버지와 구별됨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온전케 되심

첫째, 그분은 자신의 소명에서 온전케 되셨다. 둘째 그분은 순종에서 온전케 되셨다. 셋째, 그분은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하는 일에서 온전케 되셨다.

고난은 새로운 온전함, 즉 시험을 거쳐 온전함을 가져온다.

 

세 가지 원수가 있다.

 

첫 번째 원수는 죄다. 죄는 우리가 진정 되고 싶어하는 존재가 되지 못하도록 언제나 우리를 방해하는 적대적이고 파괴하는 내부적 힘이다(1:3, 2;17).

 

두 번째 원수는 사망이다. 사망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요 필연적인 열매다(2:15).

 

세 번째 원수는 사단이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죽음을 이용하는 자를 패배시킴으로써 그 고뇌에서 죽음을 빼앗아 버렸다.

 

, 죽음, 사단이라는 세 원수에게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성육신 되신 삶과 도덕적 완전하심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다. 인간의 온전한 해방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혈육에 공통적으로 찾아오는 과정인 죽음을 경험하셔야 했다.

 

예수님은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는 분이다(2:18)

첫째, 그분은 두려움을 제거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신다.

 

두려움에 빠지는 것보다 더 우리를 마비시키고 제지하는 것은 없다.

 

둘째, 그분은 자비를 나타내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신다.

 

그분은 자비하신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필요를 적절하게 돕기 위해 우리처럼 되셨다. 죽음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죄책은 과거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분이 자신이 큰 구원을 통해 사람들의 죄를 속하고 화목을 이루셨다.

 

셋째, 그분은 성실하심을 증명함으로써 우리를 도우신다.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의 사역을 담당하실 때 인간에 대해서는 자비로우시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충성스러우셨다는 것이 사람과 하나님을 향한 그분의 제사장의 사역의 양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넷째, 그분은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신다. 예수님은 역경과 분리된 삶을 살지 않으셨다.

 

다섯째, 그분은 우리에게 힘을 공급하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신다(7:16, 25).

 

탁월성, 인성, 신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사역을 이루시는 필수적인 면이다.

 

좋은 선생이 되려면 배우는 자들을 낙담시키기보다는 언제나 격려하는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 같은 회중에게 계속 설교하는 목사라면 하나님의 뜻을 다 선포하는데 신경을 써야 한다.’ 목사가 아무리 따뜻하고 격려를 잘 한다 하더라도, 설교가 아무리 균형이 잘 잡혀있다 해도 그의 일관된 행동이 더욱 중요하다.

 

예레미야 새 언약의 다섯 가지 특징

첫째, 새 언약은 화해적이다(8:8). 더 좋은 언약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더불어 맺어질 것이다.

 

둘째 새 언약은 내적이다. 생각과 마음에 기록

 

셋째, 새 언약은 보편적이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나를 다 앎이니라

 

넷째, 새 언약은 관대하다. 내가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마지막으로 새 언약은 보증된 것이다. 능력에서 제한이 없고, 기간이 영원하며, 효력이 완전하다.

내가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확신이 약하고 의심에 찬 사람들의 소심함, 주저함, 두려움을 제거해 준다. 하나님은 내가 나의 언약을 세우겠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마음에 새기겠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 내가 나를 그들 모두에게 나타내겠다. 내가 나를 큰 자들뿐 아니라 작은 자들에게도 알리겠다, 내가 긍휼히 여기겠다. 내가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새 언약은 우리의 구속을 획득한다. 새 언약은 우리의 양심을 정결케 한다(10:22). 새 언약은 우리의 봉사를 거룩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단번에 드려지는 희생의 죽음을 가리키고, 뿌림은 그 죽음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익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반복될 수 없는 죄의 성격

죄의 세력이 우리를 위해 폐기되었다(9;26). 죄의 형벌이 우리로부터 옮겨졌다(9:28).

하나님은 단지 과거에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신1.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쓰여진 내주하는 말씀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신다(10:15).

 

믿음의 의미와 그 영웅들(11:1-16)

1.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11:1).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된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2. 믿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11:2).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사람의 인정을 받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현재의 순간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마지막에 하나님이 그렇다고 말씀해 주실 것을 고대한다.

 

3. 믿음은 하나님이 능력을 인정한다(11;3). 창조의 질서가 하나님의 장엄하신 능력을 파악하는 믿음의 능력을 강조한다.

 

세 의인(11:4-7)

1. 아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인정했다(11:4)

 

2.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11:5-6)

 

3. 노아는 하나님께 순종했다(11:7)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11:8-12)

1. 반응하는 믿음

 

2. 희생적인 믿음

 

3. 용감한 믿음

 

4. 끈질긴 믿음

 

5. 의존적인 믿음

 

믿음의 특성들(11:13-16)

1. 그들의 확신 : 믿음을 따라 죽었다

 

2. 그들의 증거 :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

 

3. 그들의 추구 : 본향을 찾았다

 

4. 그들의 분별 : 하늘을 고대했을 뿐 아니라 지상의 것들을 평가했다.

 

5. 그들의 안전 : 신체적인 고난, 사회적 냉대, 정서적 김장감, 경제적 손실 들을 경험. 그러나 고향을 향하여 행진

 

어려운 시기의 믿음(11:17-32)

1. 약속을 고대함(11:17-32)

 

아브라함의 복종(11:17-19) : 유대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열 번에 걸쳐 하나님께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 본문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경우를 다룬다.

 

이삭의 지각(11:20) : 이삭은 야곱의 속임수에 의해 그를 축복하면서 지혜로우시고 주권적이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행동을 지각하게 되었다.

 

야곱의 예상(11:21) : 그는 후손들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인도 하에서 땅을 상속받고 번영하게 될 때가 올 것을 예상했다.

 

요셉의 확신(11:22) :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조상의 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대로 믿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의 시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기라고 조심스럽게 지시했던 것이다.

 

2. 모세와 믿는 무리(11:23-29)

 

믿음은 우리의 두려움을 물리친다(11:23)

믿음은 우리의 선택 사항을 결정한다(11:24-26)

믿음은 우리의 시야를 예리하게 한다(11:27)

믿음은 우리의 의존성을 인정한다(11:28)

믿음은 우리의 어려움을 극복한다(11:29)

 

3. 약속의 땅에서의 삶(11:30-32)

 

담대한 믿음(11:30)

모험적인 믿음(11:31)

다각적인 믿음(11:32)

 

무명의 정복자들과 충분한 힘(11:33-40)

영웅적 자질을 고취하는 믿음(11:33-35)

꿋꿋함을 장려하는 믿음(11:35-38)

성취를 기다리는 믿음(11:39-40)

 

그분을 생각하라(12:1-3)

우리는 무엇을 물리쳐야 하는가?(12:1) :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

우리는 어떻게 달려가야 하는가? (12:1) : 신자들은 인내와 믿음으로 경주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는가?(12:2-3) : 신자는 경중 중에 예수님만을 확고하고 지속적으로 바라보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징계(12:4-11)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12:5-6) : 징계에 무관심한 자들이 있다. 징계에 눌리는 자들이 있다. 성경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억하라(12:7-9)

하나님의 족적을 기억하라(12:10-11) : 시련의 즉각적인 유익에 대해 생각하라(12:10). 시련의 궁극적인 결과에 대해 생각하라(12:11). 시련의 영원한 효과에 대해 생각하라(12:11)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12:12-17)

우리는 의기소침한 태도를 극복해야 한다(12:12-13)

우리는 조화를 유지해야 한다(12:14)

우리는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12:14)

우리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12:15)

우리는 더러움을 피해야 한다(12:15-17).

 

그때와 지금(12:18-29)

우리는 영적인 나라에 속했다(12:18-22)

우리는 영원한 나라에 속했다(12:22-24)

우리는 진동치 못할 나라에 속했다(12:25-29) :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12:25). 우리는 확신해야 한다(12:26-27). 우리는 경외해야 한다(12:28-29)

 

목회적 권면(13:1-16)

사랑을 베풀라(13:1-3) : 사랑은 반드시 지속되어야 한다(13:1). 사랑은 관대하게 표현되어야 한다(13:2). 사랑은 실제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13:3).

순결하라(13:4)

자족하라(13:5-6)

충성하라(13:7-12)

담대하라(13:13-14)

하나님을 예배하라(13:15-16)

교회의 지도자들을 존중하라(13:17-21)

 

목회적 리더십(13:17) : 순종의 믿음, 공손한 복종, 사랑의 협조

책임 있는 리더십

의존적인 리더십(13:18-21)

저자를 위한 그들의 기도(13:18-19)

그들을 위한 저자의 기도(13:20-21)

 

 

믿음의 사람들, 홍정길 목사

믿음을 가진 사람의 세 가지 복

1.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확실히 누리는 삶을 삽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실제)은 유가증서, 믿음은 유가증서보다 더 확실합니다(11:1).

 

2. 이 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11:2).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타락할 때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3.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삽니다, 삶의 참다운 목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11:3)

 

에녹(11:5-6)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1. 하나님과 뜻이 같다(3:3)

 

2. 하나님의 임재를 삶 속에 누리며 사는 인생을 가리킨다.

 

3. 우리 하나님과 교제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찰스 스원돌, 히브리서

 

떠내려감으로 등한히 하게 되는 확실한 길

1. 압력을 받을 때는 성경의 노련한 진리에 의지하기 보다는 당신 자신의 본능에 의지하라

2.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하나님의 진리보다 인간의 재주와 의견을 더 존중하라

3. 선택을 해야 할 때 고통스러운 것 대신에 편안한 것을 선택하라

 

고난의 주체

1. 동일화의 고통(11-14)

2. 종노릇함의 고통(14-15)

3. 실패의 고통(17)

4. 시험의 고통(18)

 

마음이 강팍해지는 것을 막아주는 몇 가지 지침(히  3:17-19)

 

시험은 우리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안식이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안식에 시험이 따를 때는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이 인간의 노력을 대신한다.

 

보다 밝은 측면(6:9-12)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되는 길

 

1. 다른 사람의 약점에 대한 언급만 하는 일을 중단하자

2. 다른 사람의 강점에 더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자

3. 다른 사람의 어두운 면은 잊어버리자

4. 다른 사람의 밝은 면을 기억하자

 

회의자의 소망(6:13-20)

회의가 늘어날 때

 

1. 내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일이 일어날 때

2. 내가 일어나야민 된다고 생각하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때

3. 내가 지금 일어나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일이 나중에 일어날 때

 

 

회의를 다룰 때는 기억하라(6:13-20)

1.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으시다

2. 우리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3. 그리스도는 떠나지 않으신다

 

소망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7:1-19)

1. 예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아실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아신다.

2. 예수께서는 우리의 머리가 어디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실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신다.

3.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연약하고 아무 것도 없다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강하고 완전하다고 말씀하신다.

 

새 언약이 더 나은 점들(8:10-12)

1. 외적 목록들 대신에 내적 동기와 힘을 제공한다(10)

2. 두려움 또는 냉담한 관계 대신 친밀한 관계에 근거하고 있다(10)

3. 불안정과 불확실함 대신에 확신과 신뢰를 준다(11)

4. 실패와 잘못 대신에 용서와 자비를 강조한다(12)

반응형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한 한국인은 뭐가 다를까  (0) 2024.04.25
현대인의 우상(사사기 6: 28- 32)  (1) 2024.04.24
직분자 훈련 교재  (1) 2024.04.20
회의 진행 방법  (1) 2024.04.19
기독교 장례예식  (0) 2024.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