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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헛된 세상, 헛되지 않은 삶, 필립 G 라이콘

by liefd 2024.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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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가 시도하지 않는 게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모든 것에 답하려는 시도다. 어떤 책들도 그렇다. 한계를 인정한다. 18세기의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박사는 기념비적인 사전을 편찬했다. 천재로 일컬어진 그는 사전류의 최고 걸작을 완성하며 영어 안에 있는 거의 모든 단어의 뜻을 규정했지만 단 한 순간도 자기가 모든 답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사전의 서문에는 전도서의 메아리가 울렸다. "나는 하나의 질문이 또 하나의 질문을 유발하고 책이 책을 인용하는 것을 보았다. 탐색이 늘 발견으로, 발견이 늘 정보 제공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보았다. 이렇듯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 태양을 좇는 것임을 알았다. '

 

존슨 박사는 넌지시 전도서를 언급하고 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바람을 좇는 것과 같음을 발견했다. 이 절망적인 이미지가 전도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전도서는 마치 추리소설처럼 결말에 도달하고 해답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읽어 가는 부류의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인생의 문제들과 씨름해 가는 책이다. 그렇게 몸부림치다 보면 모든 답을 갖지 않을 때조차 그 질문을 가진 채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

 

 

1. 왜 전도서인가?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1:2-3)

 

이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다면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왜 처참한 약을 하락하시는지 이해하기 힘들거나 인생의 수많은 모순을 해결하느라 씨름하고 있다면 전도서를 읽으라. 이 책 안에 전부 들어 있다.

 

전도서를 공부해야 할 이유는 무척 많다. 타락한 세상을 사는 인생의 한복판에 그 질문들이 놓인다.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그토록 많은 고통과 불의가 존재할까? 하나님은 과연 신경이나 쓰실까? 삶은 정녕 가치가 있을까?

 

저자는 사람들이 늘 품고 있는 거친 질문들, 지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그리고 보통 아이들이 주일학교에서 얻는 손쉬운 대답에 만족하지 않는다. 사실 저자의 영적 씨름 중 일부는 그에게 늘 주어져 온 대답들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당신이 만약 "그래요.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부류의 사람이라면 전도서야말로 당신을 위한 책이다.

 

전도서를 공부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전도서 덕분에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모든 의심과 불만족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하나님에 관해 수많은 위대한 진리를 가르쳐 준다.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창조주, 최고의 주권자, 온 우주의 전능한 통치자, 유일한 지혜의 신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자라날 것이다. 또한 전도서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다. 저자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많은 돈을 가졌고, 쾌락을 즐겼고, 지혜를 소유했지만, 모든 것이 눈물로 끝났다. 동일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물론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다.

 

저자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왜 당신이 직접 실수를 겪으려는 거요? 나 같은 전문가에게 배울 수 있는데 말이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매우 실제적인 돈, 섹스, 권력, 죽음과 같은 일상의 쟁점들로 우리를 돕는다. 구약학자 산드라 리히터(Sandra Richter)는 전도서 저자를 가리켜 모든 것을 가졌으나 '모든 것을 가진 것'이 자신을 망쳤음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뿐만 아니라 전도서 덕분에 우리는 인생의 고난에 대해 솔직할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미국의 위대한 소설가 허먼 멜빌이 전도서를 가리켜 "모든 책 중 가장 진실한 책이라고 한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도 전도서는 타락한 세상의 부질없음과 좌절을 포착한다. 노동의 고됨, 어리석은 쾌락의 공허함, 지성을 마비시킬 만큼 단조로운 일상이 그것이다. 전도서가 어느 철학자가 월요일 아침에 집필한, 우리가 아는 유일한 성경이라고 생각해 보라. 그 책을 읽은 덕분에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이들조차) 우리 문제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진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전도서를 가리켜 신자가 믿음의 앞문으로는 결코 허락하지 않을 슬프고 회의적인 생각을 갖도록 허락하는 일종의 뒷문이라고 묘사했다.

 

전도서는 유명한 반복구로 시작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이 반복구는 전도서의 첫 구절일 뿐 아니라 마지막 구절이기도 하다(12:8 참조). 저자는 우리의 존재를 측정한 뒤 응축된 최상급 표현으로 정녕 헛되다고 선포한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헛되다'라는 단어(전도서 메시지의 중심이다')를 정의해야 한다. 문자적으로 히브리어 헤벨(hevel)은 캠프파이어에서 올라오는 연기나 추운 아침 뜨거운 날숨에서 나오는 입김과 같은 숨, 혹은 물거품을 가리킨다. 인생도 그렇다. 손에 잡히지 않고, 덧없으며, 불가사의하다. 갑자기 온 것처럼 갑자기 사라진다. 오늘은 여기있지만 내일은 가고 없다. 이렇듯 성경은 우리의 유한한 존재를 한뼘 길이”(39:5)"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4:14)에 빗댄다. 숨을 들이쉬어 보라. 그리고 내쉬라. 인생이 그처럼 순식간에 당신을 지나간다. 오늘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날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다. 말 그대로 여전하다. 프랑스 속담으로 표현하면 "많은 것이 변할수록 더욱 여전하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런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피곤해한다.

 

CEV(Contermporary English Version) 성경은 전도서 18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인생만사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지루하다."

 

그런데도 왜 성가시게 신경 쓰는가? 그것이 정녕 문제다. '존재의 쳇바퀴 위를 계속해서 달리는가?' 전도서 18-11 절을 보면 저자는 자연 세계에서 인간의 경험으로 넘어와 자연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것을 본다. 진정한 이득이나 진보가 없는데도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해와 바람과 강물이 자기의 끊임없는 움직임을 증명하기 위해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렇다면 인생에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어떤 소망을 품겠는가?

 

만물을 새롭게 하는 분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런데도 왜 계속해서 신경 쓰는가? 이것은 전도서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전도서의 철학에 공감하기 시작했다면 이제 이 책의 목적을 이해해야 한다.

 

전도서 13절과 9절 및 전도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 어구는 이 책을 이해하는 열쇠 중 하나다. '해 아래'는 우리 문제의 경계를 표현한다. 인생의 부질없음과 좌절을 어디에서 경험하는가? 해가 빛나는 모든 곳에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어구가 다른 관점의 가능성을 열어 주기도 한다. 상황을 '해 아래'에서 본다는 것은 땅의 눈높이로 본다는 것이다. 세속의 관점을 취하는 반면 하나님을 그림 밖에 두는 것이다. 해 위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구에 제한되지 않는다. 태양계를 벗어날 수 있고 우주적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전도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간청한다. 세상에 속한 것들이 아닌 오직 위에 계신 하나님 안에서만 의미와 만족을 발견하도록 우리의 경험이 얼마나 지루한 것인지 보여 준다. , 섹스, 권력, 성취,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해 아래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반드시 느낀다. 하지만 전도서는 우리에게 인생의 기쁨과 의미를 가져다 주는 해 위의 관점'이 필요함을 보여 준다. 어거스틴(Augustine)에 의하면 저자는 적절하다고 판단한 수준만큼 강하게 인생의 공허함을 제시하고자전도서를 썼다. "확신컨대 그 궁극의 목적은 해 아래의 비본질적인 그림자가 아니라 해의 창조주 아래의 본질적인 실체로서의 인생을 갈망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이런 하늘의 관점을 얻는 한 가지 방법은 인생을 그토록 지루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치우고 하나님을 그림 안에 올려놓았을 때 무슨 변화가 생기는지 보는 것이다. 전도서는 자연 세계에서 아무런 진보를 발견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동일한 옛 태양을 보며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19:5)라고 말한다. 해가 진보를 만들어 내든 그렇지 않든, 해는 창조주의 기쁨과 힘을 여실히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심이 마땅하다(113:3 참조).

 

자연에서 발견하는 그 반복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언하고 창조주의 한결같으심을 보여 준다. 바람이 그분의 말씀 따라 불고 강물이 그분의 명령대로 흐르면서 온 피조물을 축복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104:3)라고 말한다. "그가 물방울을 가늘게 하시며 빗방울이 증발하여 안개가 되게 하시도다. 그것이 구름에서 내려 많은 사람에게 쏟아지느니라”(36:27-28).

 

허구한 나날의 반복을 우리는 전도서의 관점대로 보는 대신 미국의 흑인 과학자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처럼 증언할 수 있다. "나는 자연을 제한 없는 방송국으로 생각하길 좋아한다. 우리가 주파수를 맞추고 그것을 계속 유지하면 자연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매일, 매시간, 매 순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수단이 된다."

 

태양 위를 바라보는 것 역시 인간의 경험에 다른 관점을 준다. 새 것이 있는가? 아마도 해 아래에는 없겠지만 해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통치하시되 통치받지 않으시는 분이다.) 안에서 언제나 새 일을 행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다(22:20). 그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혈이다.

 

왜 성가시게 신경 쓰는가?” 묻는다면 그 답은 우리에게 구주가 계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이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부질없음과 좌절을 보셨고, 이에 대해 실제적인 조치를 취하시고자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기로 선택하셨다.

 

그리고 새 생명이 있다. 예수님이 영원한 구원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빈 무덤에서 나타난 새 생명이다. 새 마음도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새 마음을 주신다(36:26). 새로운 피조물도 있다. 성령님이 우리의 지성과 감정에 들어오실 때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후 5:17).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면 다시는 똑같은 과거, 똑같은 현재가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주의 왕좌에 좌정하시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21:5).

 

 

2. 궁극적인 탐색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1:12~13)

 

모든 사람이 마음속 깊이 인생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올바른 답을 얻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인생과 우주와 만사에 대한 참되고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전도서에서 해야 할 우리의 탐색이다.

 

구도자의 질문

 

저자 소개(1:1)와 주제 진술(1:2)이 끝난 후, 전도서는 세상이 분주하기가 한이 없고 절망스럽게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자연과 인간 경험에서 일련의 사례(1:3-11)를 제시한다.

 

전도서 112절부터 코헬렛은 자기 의견을 피력하면서 우리를 영적이고 지적인 탐색으로 초대한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1:12-13).

 

전도서는 "사색하는 자의 책'이다. 저자는 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구도자였다. 그리고 나아가 경험에서 유리한 입장이었다.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평생을 탐색하며 배운 바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솔로몬의 탐색은 신실했다. 그는 진리를 알아가는 일에 마음과 영혼을 바쳤다.

 

또한 그의 탐색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전도서 113절에 사용된 '연구하다' '살피다' 라는 단어는 그가 얼마나 진지했는지 보여 준다. 솔로몬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를 받아들이기 원했다. 그 결과 그의 인생론은 무엇보다도 확실하다. 그는 인간의 열정이 들어가는 모든 영역(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1:13)을 조사하기 원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탐색은 훌륭했다. 전도자는 쾌락을 추구하거나 인기를 구하거나 개인적 업적에서 의미를 찾기보다 지성적인 삶을 추구했다. 솔로몬에게 만일 학문의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인문과학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추구했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생각했거나 말한 것 중 최고의 지혜였다. 이 지혜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의 특별계시 없이 세상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이것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추구다.

 

모든 진리는 그것이 어디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진리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그 안의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발견하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2:6).

 

하지만 '인간의 지혜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갈 것인가?' '정보가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그것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은 여전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나쁜 일들

 

그런 질문에 답하는 한 가지 방법은 코헬렛이 탐색한 결과물을 보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발견했는가? 현실은 그가 빈손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에게 인생의 의미는 '42'라는 결론을 얻는 것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었다.

 

전도서 113-15절은 우주를 이해하려는 저자의 괴로운 노력을 요약한다. 그의 기분은 분명 우울하다.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1:13). 조만간 사람들은 똑같이 느끼게 될 것이다. 인생의 많은 일들이 우리를 괴롭게 만든다. 부모의 틀어진 관계, 우리에 관한 냉혹한 평가, 갖지 못했지만 갖고 싶은 물건 받아 마땅함에도 결코 못 받는 인정, 심지어 일상의 평범한 좌절까지도 우리에게 괴로움을 줄 수 있다.

 

바람을 잡으려는 허망함

 

코헬렛도 동일한 공허를 경험했다. 안 가본 데 없이 모든 것을 다 돌아본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14).

 

우리는 다시 전도자가 즐겨 쓰는 어구를 만난다. 그는 "해 아래" 를 살피고, 세속의 관점으로 사람들이 행하는 일을 보고 있다. “헛되다.” '물거품'이라는 단어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의 인생철학을 요약하는 또 다른 은유를 소개한다. 해 아래의 인생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고 말이다.

 

전도자는 자신의 괴로운 탐색 1단계를 잠언으로 마무리했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1:15).

 

삶의 어떤 것은 구부러져 있다. 범죄를 저지른다거나 부도덕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양이 구부러졌다는 거다. 그래서 똑바로 만들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에 저항한다.

 

인생에는 고치고 싶은데 고칠 수 없는 것이 많다. 구겨진 덮개를 맨손으로 수리할 수 있을 뿐이다.

 

가족 간의 오래된 갈등, 친구들 사이의 반목, 권력자에 의한 부당행위, 질병이나 장애, 도덕적 실패, 우리가 일으킨 사고 등 우리가 겪는 고통의 목록은 끝이 없다. 인생에는 늘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그런 노력은 사실상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만다.

 

슬프게도 코헬렛 역시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애쓴다 해도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구부릴 수 없다. 우리가 다룰 수 없는 사람들, 풀 수 없는 문제들, 벗어날 수 없는 압박들이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인생의 합이 맞아떨어지게 만들 수도 없다. 그것이 이 잠언의 두 번째 요점이다. 굿 뉴스 바이블(Good News Bible)은 전도서 115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셀 수 없다.” 터키의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Orhan Pamuk)도 비슷한 말을 했다. "미완성. 세상은 어쨌든 결여되어 있다."

 

인생이란 마치 수입 지출의 균형 맞추기를 거부하는 통장 잔고와 같다. 적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게 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을 정확하게 맞추려고 조정할 때조차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우리가 그 수치들을 날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의 끝없는 탐구

 

결국 코헬렛의 첫 번째 탐색은 실패했다. 인간의 지혜는 인생의 의미에 답을 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포기했다는 건 아니다. 전도서 116-18절에서도 그의 탐색은 계속된다.

 

첫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그는 자기 자신과 허심탄회한 대화, 즉 자기가 깨달은 바에 대한 내적 대화를 계속했다. 그는 자기 영혼에 "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만나 보았음이르다”(1:16) 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전도서의 솔로몬은 도덕성이라는 주제를 다루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탐색은 미완성이었다.

 

여기서 전도자는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구약의 일반적 용례(하나님께 불슨증하는 것을 미치도록 어리석은 일로 언급하는 것)대로 사용하는 것 같다. 그는 옳고 그름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그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취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코헬렛의 새로운 탐색 결과는 어땠을까? 옳고 그름의 차이를 아는 것이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 그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전혀 아니다. 틀에 박힌 도덕성도 그의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라고 말했다.

 

희망찬 결론

 

다음을 기억하지 않고 전도서 1장을 떠나면 안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보여 주시기 위해 해 아래 인생의 덧없음과 성가심 속으로 들어오셨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과 그분의 지혜를 따른다면, 굽어 는 것을 자기의 목적대로 또다시 구부리려 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에 순종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굴곡진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말이다(벧전 2:21, 24 참조).

 

3. 참된 즐거움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2:1)

 

쾌락 테스트

 

전도서의 솔로몬도 페기 리와 똑같은 의문을 품었다. 인생이 이게 다일까? 아니면 뭔가 더 있을까?

 

우선 그는 존재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지성을 사용하는 해결 방법을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결국 인간의 지성을 통해 지식을 탐색하는 일은 짜증과 슬픔으로 끝났다. '자율적 인식론'은 부질없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전도자는 다른 접근법을 취하기로 했다. 하나님의 은혜와 아름다움처럼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생에서 더 많이 뽑아낼 수 있는 것에 대해 다시 혼잣말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자기 영혼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2:1)

 

'시험'이라는 말을 뒤따르는 것은 실험, 곧 개인의 경험에서 뭔가를 배우려는 고의적 시도다. 그리고 '쾌락'이라는 단어는 그가 경험하기 원하는 것(즐거운 인생)을 보여 준다.

 

그래서 코헬렛은 실험적인 쾌락주의자가 되었고, 개인의 행복을 인생의 주된 목적으로 삼기로 선택했다. 웨스트민스터 1 문답과 상반되지만 그의 주된 목적은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할 수 있는 한 자기 자신을 누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즐거워하는 것,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유혹거리다. 이런 실수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대신 나 자신을 위해 누리고 싶은 쾌락은 무엇인가?

 

거침없는 쾌락주의

 

곧이어 전도자는 이 새로운 탐색이 첫 번째처럼 장대하게 실패했다고 말해준다. 쾌락은 그의 영혼을 지혜보다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2:1)라고 말한다.

 

전도자는 쾌락주의에 공평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여겨지지 않도록 전도서 22-8절에 자신이 시도했던 온갖 쾌락을 나열하고, 9-11 절에는 그 경험에서 배운 소감을 기록한다.

 

첫째, 그는 코미디를 시도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불안을 무언가에 대해 농담하는 것으로 해소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싫어질 때 다른 사람들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지루해질 때 유튜브의 재미있는 동영상같이 자기를 웃게 해 줄 무언가를 찾는다. 한바탕 웃게 해 주는 것이라면 뭐든 말이다.

 

우리의 앞날은 하나님 손에 있다

 

예수님은 지금도 어느 때인지를 아신다. 믿어지는가? 예수님은 사랑할 때를 아시기에 구주가 되어 달라고 간구하는 불쌍한 죄인들에게 자비를 보이신다. 미워할 때를 아시기에 악과 불의에 대항하신다. 전쟁할 때를 아시기에 주님의 교회는 사탄과 하나님의 원수들에 맞서싸운다. 이윽고 평화의 때가 올 것이다. 그때는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실 때이고(46:9),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8:20-21) 다시는 해 아래에서 인생의 공허함을 겪지 않게 될 것이다.

 

한편 예수님은 우리에게 매 순간을 최대한 활용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이 시간의 주인 되심은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경험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인생의 덧없음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아는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곧 우리가 인생을 보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아야 한다. ()와 일()로 시간을 측정하는 게 아니라 모든 시간을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로 보아야 한다.

 

시간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첫째,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우리 구주께 완벽한 타이밍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분께서 모든 일에 딱 맞는 때가 있음을 아신다고 신뢰해야 한다. 다윗 왕이 "항상 주를 찬양 (34:1)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이 어느 때이든 여전히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자기 일을 자기 스스로 다루고 싶어 하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성급하게 하나님의 타이밍을 비난하게 만든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표를 고집하지 말고 다윗이 "여호와여, ... 나는 주께 의지하고 ...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31:14-15)라고 말하면서 보여 준 것처럼 서두르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4세기경에 쓰인 작품에서 디두모(Didymus the Blind)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설명하기 위해 생생한 예화를 사용했다. 그는 우리를 큰 배를 탄 승객에 비유했다. 승객들은 선장을 만난 적이 없어도 선장이 배를 조종하고 있음을 믿는다. 디두모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은 우주를 경영하고 돌보신다. 항로를 잘 유지하며 조종되고 있는 배를 볼 때,당신은 조타수를 보지 못할지라도 그의 생각을 읽어 낸다. 마찬가지로 창조주는 그분의 작품과 섭리의 질서로 알려진다.””

 

둘째, 죽을 때가 있음을 기억하며 살라.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라고 말한다. 그때가 올 때 당신은 준비되어 있을까?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하다.

 

사람은 사실상 누구나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당신은 영원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체할 시간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이라는 선물을 값없이 받는 것에 관한 한 바로 이 순간만 한 때가 없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마지막으로 얼마의 시간이 있든 그 시간을 선용하라.

사도 바울의 인상적인 구절을 사용하면 언제나 "세월을 아껴야 한다“(5:16), 전도자로서 세월을 아끼는 최선책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바쁘게 지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를 낭송한 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3:12-13).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시간에 매인 우주 안에서, 시간과 영원 사이에 갇힌 우주 안에서 우리의 매 순간이 우리의 가장 소중한 원자재다. 시간이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하라고 주신,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통화다. 스티븐 올포드(Stephen olford)는 시간을 가리켜 "엄숙한 청지기 정신에 따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영원의 한 조각이라고 했다." 또한 시간은 어쩌다 보면 우리가 다루기에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된다.

 

시간을 선용하는 최선책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설령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측량할 수 없을지라도"(3:11).

 

여전히 우리는 하루하루를 만들어가는 결정을 내린다. 나중에 코헬렛은 "지혜자의 마음"이란 "때와 판단을 분변하는 마음이라고 이야기한다(8:5). 인생에는 무언가를 시작해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프로젝트, 인간관계, 사역 등 무언가를 끝내야 할 때도 있다. 그 차이를 분변하려면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어렵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기 원한다면 "우는 자들과 함께 울 때가 언제이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할 때가 언제인지 알아야 한다(12:15; 16:20 참조). 인간관계의 타이밍을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누군가를 포용할 때가 언제인지, 계획과 우선순위에서 제외시킬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야 한다. 때에 맞는 말을 하거나(15:23, 25:11 참조)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대답하는 것(벧전 3:15) 등 목소리를내는 것이 중요한 때가 있다. 하지만 입을 다물어야 할 때도 있다. 침묵이 금인 순간, 즉 혀를 자제시키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141:3; 27:14; 1:26 참조).

 

세월을 아끼는 일은 우리의 소유물을 사용함에 있어서 지혜를 요구한다. 모을 때가 있고 흩을 때가 있다. 나중에 필요할지 모르니 보관할 때가 있고 다른 이가 사용하도록 내어줄 때가 있다.

 

6. 죽음과 불의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3:20, 4:1)

 

세상의 모든 불의에 대해 그저 분노하고 비통해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바로잡으실 것을 신뢰할 수 있다.

 

이 말은 결코 우리가 정의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사회에서의 위치(특권적 지위, 영향력 있는 자리, 하나님께 받은 권위)에 따라 교회 안과 더 넓은 세상에서 학대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물론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한다 해도 모든 학대에 종말을 가져오지는 못할 것이다. 여전히 여성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폭력이 존재할 것이고, 비즈니스, 정부, 심지어 법 집행의 부패 구조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해결할 권력도, 권위도, 지혜도 없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반드시 정의를 이루실 것이다.

 

우리의 확신은 사법제도가 아니라 최고의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실 날을 약속하셨다 (417:30-31). 징벌을 위해 예정된 최후 심판 날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최후 판결문을 주실 것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까"(18:25). 진실로 악인은 영벌에 들어갈 것이고(25:41-46) 의인은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는 (21:4) 하나님의 영에 의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솔로몬이 전도서 맨 마지막에도 말하듯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이다”(12:14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인 정의를 가져오실 것이다.

 

 

7. 불확실한 만족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5:10)

 

경제적 불의

 

전도서의 솔로몬은 우리가 물질주의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돕고 싶어 한다.

 

많은 사람이 죄악된 사회 구조로부터 경제적으로 불의를 당하는 것을 보고, 그는 이 경제적 불의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의 경험은 말단에서부터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부에 부정부패가 있다고 예상하게 만든다. 설령 일부 지도자들이 사회를 섬기려는 순수한 열망에서 비롯된 동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다른 많은 지도자들은 악명 높은 어느 필라델피아 정치인과 똑같다. 그는 공공 자금을 사치스런 생활 방식을 유지하는 데 사용한 뒤 친구들에게 '타인의 돈을 쓰고 있다고 자랑했다.

 

최고의 정부는 아예 시작부터 사람들은 죄인이고, 그래서 부당함을 억제하려면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최고의 정부조차 완벽하지 않다. 이 푸른 지구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사람들이 권력에 이르는 길을 돈으로 사고, 공적 지위를 사적 이익에 사용하고, 개인의 유익을 위해 제도를 조작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부자병과 영적 파산

 

지금까지 코헬렛은 국가적 규모에서 풍요와 빈곤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전도서 510절에서는 상황을 개인적 차원으로 가져온다.

 

돈을 더 많이 가지려 하는 사람들은 공무원들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닥치는 유혹거리다. 그래서 전도자는 번영의 덧없음에 대해 경고한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5:10, 6:7 참조).

 

얼마나 많은 돈이 있든, 돈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전형적으로 그들은 랍비 해럴드 쿠쉬너(Harold Kushner)의 전도서에 관한 책 지금까지 당신이 바랐던 모든 것이 충분하지 않을 때,(When All You've Ever Wanted Isn't Enough)의 제목과 상관있는 자들이다."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돈이 있어야 충분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매우 유명한 대답을 했다. “아주 조금 더요."좀 더 최근의 예를 들면, TV 속 캐릭터인 호머 심슨(Homer Simpson)이 사장인 번즈 씨(Mr Burns)에게 "사장님은 제가 아는 최고의 부자세요.”라고 말하자 그 부유한 사업가는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하지만 더 많이를 위해서라면 내 전부를 주고 바꾸겠네."

 

동시대 작가인 제시 오닐(Jessie O'Neill)은 이 영적인 문제를 올바르게 진단했다. 그녀는 이것을 '부자병'(affluenza, 부유하다는 뜻의 'affluent'와 유행성 독감 influenza'의 합성어-역주), 돈과의 건강하지 못한 관계인 부의 추구라고 부른다.

 

돈의 한 가지 문제점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돈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전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5:11).

 

어떤 면에서 이 구절은 우리의 부를 먹어 치우는 사람들을 언급한다. 그것이 전도서 58절과 9절에 묘사된 포학한 정부일 수 있다. 그들은 높은 세금으로 우리의 돈을 착취해 간다. 아니면 우리의 자녀일 수도 있다. 그들은 저녁 식탁을 에워싼 굶주린 녀석들이다. 얻어먹는 자들일 수 있다. 그들은 공짜로 뭔가를 달라고 구걸하러 온다. 그들이 누구이든, 우리가 더 많이 가질수록 그들도 더 많이 가져가려 한다.

 

솔로몬 왕보다 이에 대해 더 잘 아는 이가 있을까?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그가 먹여 살려야 할 사람이 수천 명이었으니(왕상 4:22-28 참조) 그는 부유해야만 했다!

 

여기서 그는 우리가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것을 원한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서 그것을 빼앗는다면 우리가 직접 그것을 즐길 수는 없을 것이다.

더 많은 돈을 갖는 것의 또 다른 문제점은 돈이 밤잠을 못 이루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도자인 왕은 대조를 통해 이렇게 주장한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5:12).

 

일반적으로 하루종일 고되게 일한 사람들은 특히 자기 손으로 일한다면, 밤에 잘 자기 마련이다. 게으름뱅이 부자들은 이런 사치를 누리지 못하고 밤새 깨어 있다. 이런 경우 그들의 불면증은 소화불량에 의한 것이다. 기름진 음식을 탐욕스럽게 먹는 식생활은 복통을 선사한다.

 

또한 많은 돈을 갖는 것은 건강을 매우 해칠 수 있다. 영적인 측면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그렇다.

 

데릭 키드너는 현대의 운동기구들과 헬스클럽을 보라며 돈과 편안함에 입혀진 손실을 원상 복구하기 위해 돈과 노력을 쏟아붓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 중 하나"라고 결론짓는다.

 

일시적 부요

 

지금까지 코헬렛은 많은 돈을 소유하는 것의 덧 없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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