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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마 5:3),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4.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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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겸손한 자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팔복에서 복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희망에 찬, 기뻐하는 뜻을 가진 헬라어 마카리오이에서 유래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참여하는 기쁨을 뜻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 말은 보통 극심한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미래의 위로를 약속합니다. 3절과 10절은 직접적인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다른 팔복의 내용들은 또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팔복과 관련된 세 가지 요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여기 묘사된 사람들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둘째, 여기서 권면하는 것들은 영적인 자질들을 말합니다.

셋째, 여기 약속된 축복은 하나님의 통치라는 영광스럽고 포괄적인 축복입니다.

 

팔복의 처음 네 가지는 그리스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 다른 네 가지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관계와 의무를 각각 다루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자가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 마이어는 심령이 가난한 품성을 천국 문을 여는 첫째 열쇠라고 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간절히 갈망하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철처히 깨닫는 겸손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겸손한 자에게 기쁨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난하고 겸손해지는 것이 우리를 고결하게 만들어서 마침내 우리가 고결한 사람들을 위한 상을 받게 되는 것을 기대하시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며, 가난하고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일까요? 물론 후자입니다.

 

팔복은 제자들의 완성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서 경험된,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것입니다(13:31, 17:20, 4:31, 13:19, 4:8).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사야 611절을 예수님이 인용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어 아나웜은 가난한 자, 부유하고 권세있는 자들로부터 압제 당하는 자, 힘없는 자, 겸손한 자, 천한 자, 경건한 자를 뜻합니다.

 

유대교에서 가난한 자란 절망적인 필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종교적 상황에서 모욕과 거절로 고난을 당하면서 빈손으로 자신들의 희망과 구원이신 하나님 밖에 섬길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자들을 말합니다.

 

수많은 구약 성경의 본문들은 하나님이 가난한 다들을 깊이 염려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22:25-27, 23:10-11, 19:9-10, 삼하 22:28, 26:6, 3:12). 겸손해지는 것은 내가 얼마나 낮은 자인가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관심을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66:2).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심으로, 이사야 61:1-2을 성취하십니다(4:16-21, 7;22, 5:3 이하, 11:5). 팔복이 전하는 복음은 가난한 자, 압제 당하는 자, 겸손한 자, 궁핍한 자, 약한 자, 낮은 자를 구원하시는 이사야의 예언이 메시야이신 예수님 안에서, 제자들의 공동체적 실천 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처음에 가난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물질적으로 궁핍하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궁핍한 사람들은 하나님 외에는 피난처가 없기 때문에(3:12), 가난함은 영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난하다는 말이 겸손하게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궁핍함에 처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신의 상태를 곤고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가난한 자는 괴롭힘을 당하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주장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는 사람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또한 심령에 통회하며 떠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시며 그들과 함께 거하기를 기뻐하십니다(57:15, 66:1-2).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는 그런 사람들에게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61:1, 4:18, 11:5). 시편 34:18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편51:17은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고 선언합니다.

 

세상은 자기를 주장하라, 자기를 자랑하라, 좋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 네가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할 때, 저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그 때 일하십니다. 어거스틴은 회심하기 전에는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한 자긍심이 너무 강해서 이것이 그의 믿음을 가로막았다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3:17). 이 교회는 사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때에 부족한 것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적 가난함, 실로 영적 파산 상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 아래 있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말했듯이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낮아지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는 사람들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의 절망적 상황에 대립해서 하나님 나라의 희망적 자신이 주어진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면 자신이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첫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젖 뗀 상태에 있습니다.

내 중심이 젖뗀 아이와 같도다(131:2). 포도 가지는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가까이에 있는 아무 것이나 휘어 감습니다.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둘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깁니다.

그는 늘 영적인 결핍과 기근을 느끼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것을 해결합니다.

셋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늘 갈급해 합니다.

넷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늘 구합니다. 빈 손들고 앞에거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 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갈보리 십자가 앞으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리와 같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8:13).  

 

사람의 심령을 가난하게 만드신 다음 성령의 은혜로 채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이 보통 쓰시는 방법입니다. 천국은 누구의 것일까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형 동사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미래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와 영광입니다. 은혜는 현재이며, 영광은 나중이다. 우리는 지금 그 나라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 속에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가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그는 우리 마음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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