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권위를 행사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당신을 대적하는데 사용할 것입니다.
죄가 우리 삶에 스며들면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치며 훈계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 심령은 점점 냉담해지고 둔감해진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하시기 위해 잘못을 지적할 사람을 보내주신다. 우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경고하시고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듣지 않으면 징계가 임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고 주의 징계를 면할 충분한 시간을 주시기 위해 우리 죄에 대하여 오래 참으신다(고전 11:31-32).
나는 찬양대원들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거기 앉아 계신 분들 가운데 죄를 지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죄를 드러내실 것이고, 그는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찬양대원들은 목사님이 자기들을 너무 심하게 대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적으로 말씀하셔야 할 일을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면서 유감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위협이 나의 초점을 흐리게 하였다. 위협의 근원은 두려움이며, 두려움은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이에 반해 사랑은 하나님과 타인에게 초점을 맞추게 한다(요일 4:18).
사단은 예수님에게 빼앗긴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의 영적 지위를 노리고 있습니다.
원수가 성도들의 영적 권위를 빼앗아가는 전형적인 방법은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 과거에 그는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켜 그들이 다스리던 모든 것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담이 상실한 귄위를 되찾아주셨고, 순종과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주셨다(마 28:18-20).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자녀들에겐 마귀보다 높은 영적 지위가 주어졌다(눅10:19).
사단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에게 빼앗긴 권세를 되찾기 위하여 현재 우리의 영적지위를 노리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부모가 영적 권위를 상실한 탓에 그 자녀들이 원수의 손아귀에 놀아나기 때문이다.
지혜와 계시 받은 대로 행하는 인품이 없다면 그 계시는 아무 가치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인품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청렴한 인품을 무시한 채 성령의 능력과 가름부음을 추구하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크리스찬으로 부름받은 자들의 목표는 하나님의 능력을 추구하거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보다 그분과의 바른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디모데야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가 잠자고 있는 까닭은 네가 겁내고 있기 때문이다(딤후 1:6-7).
위협은 열등감과 두려움을 일으켜 당신을 압도한다. 그 결과 당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와 영적 재능이 발휘되지 않는다.
위협의 근원은 두려움이며, 두려움의 근원은 우리 원수인 마귀다.
위협은 낙심과 좌절을 야기한다.
우리가 위협에 굴복할 때 자기 권위를 상실한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까닭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대상을 더 존중하기 마련이다(삼상 2:29-31).
사단은 예수님에게 빼앗긴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의 영적지위를 노리고 있습니다.
위협을 해결하려면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첫째 두려움이나 위협은 영이라는 사실이며, 둘째,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딤후 1:7).
아무리 긍정적인 마음 자세를 갖고 있어도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 우리는 두려움을 영적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
먼저 지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종종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두려워하는 까닭을 유의하라.
다음으로 항상 기세등등해 보이는 사람들을 유의하라.
두려움은 위협에 굴복하는 성도를 통해 은밀히 역사하는 영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면한 모든 문제를 마귀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예수님이 아닌 마귀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시선을 마귀가 아니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에게 집중하라고 가르친다(히 12:2).
때로는 예배 분위기를 방해하는 그 사람과 대결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두려움에 맞서기 위한 우리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두려움의 목표는 우리의 영적 권위를 포기하도록 하여 우리가 받은 은사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은사가 두려움으로 인해 잠들었다면 무엇으로 일깨워야 하는가? 담대함이다. 그렇다면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들을 어떻게 담대할 수 있는가?
담대함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과 같은 자질에서 비롯된다(딤후1:7).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윗은 세 번이나 위협에 직면했다.
첫째, 다윗의 형들과 그 동료들은 다윗을 무시하고 비방하며 낙심시키려고 안간 힘을 썼다.
둘째, 다윗은 사울 왕으로부터 자신을 무시하는 실망스러운 말을 들었다.
셋째, 다윗은 골리압의 위협에 직면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목숨까지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담대히 나아갔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나는 믿는 사람을 찾고 있다. 나는 믿는 사람을 찾고 있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영적 권위를 주셨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믿고 우리의 능력과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시는 동안에는 확신하기 쉽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의 강한 성격은 두려움을 물리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두려움과 위협에 대한 근원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좇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며, 용기는 위협을 물리치는 사랑을 낳는다. 이에 반해 불완전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사랑은 위협에 굴복하도록 만든다(요일 4:17-18).
두려움과 위협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할 때 더욱 커지게 된다. 그 결과 나는 어떻게 되겠는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라고 비명을 지르면서 심적인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체포하러온 무리에게 말고의 귀를 베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용기는 다른 제자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는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는 모습을 목격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앗다. 그들은 주님이 메시야 왕국을 유대 땅에 세우실 것이라고 믿었다(행 1:6, 마 16:21). 하나님이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시는 동안에는 우리는 그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 그분이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시지 않으면 넘어지고 만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일이 발생하더라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다. 사랑은 낙심하거나 용기를 잃지 않으므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딤후 1:7).
두려움을 정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목숨을 포기하는 것이다.
네가 전에는 감정적으로 사랑하다가 실패하였지만 훗날 큰 위협에 직면하여 완전한 사랑의 힘으로 승리할 날이 올 것이다.
바울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은 어떠한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는 담대함을 만들어 냈다(빌 1:20). 바울이 늘 담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행 20:24).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반절을 꺼린다. 하지만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버리려는 마음이 없는 한 두려움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
당신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대상을 섬길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어간다(시 25:12).
신약 기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화평과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뵐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고후 7:1, 히 12:14). 인간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람은 두려워하는 대상을 섬기며 그에게 복종하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섬기게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우리는 교회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자들을 존중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죄악을 멀리하게 하는 가장 큰 동기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죄을 이기는 힘을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라(잠 16:6).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8-29).
모세는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은 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꼈다.
우리는 민수기 14:3절에서 두려움의 원인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낫지 아니하랴”라는 이기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만 생각했기 때문에 두려워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원인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확신과 용기를 불러 일으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이 어려움이나 환난을 허용하실 때 자신을 보호하기에 급급하므로 하나님 뜻을 추구하는 대신 자기 뜻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그분을 경외하는 가운데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만 위협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곤경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다(삼상 13:8). 즉 하나님이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리품을 위한 백성과 행동을 같이했다(삼상 15:24). 그 다음 말은 사울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보다 자기 자신의 위신에 더 신경 쓰고 있음을 보여 준다(삼상 15:24).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평가를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다윗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비로소 조치를 취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려움을 극복하는 세 가지 주요 요소로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언급했다(딤후1:6-7).
다윗은 자기가 직면하는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이 더 위대하시며 능력이 뛰어난 분임을 알았다
다윗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다.
다윗은 어떠한 곤경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거나 그분의 뜻을 알기 전에는 경솔히 행동하지 않았다.
근신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과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압니다.
근신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는 데서 비롯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 머릿 속이 아닌 마음 속에서 생명력을 발휘한다.
시므온은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메시야가 오셨음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한 것과 성경 지식만을 소유한 것의 차이점이다.
성경을 읽을 때 항상 기도하며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해 달라고 기도하라.
근신하는 마음은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과 그 분이 행하시는 일을 계시할 수 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계시해 줄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권위를 사용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당신을 대적하는 데 사용할 것입니다.
분노는 위협의 또 다른 무기다. 상대방을 화나게 하지 않으려고 반드시 해야 하는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뒤로 물러서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잘못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불의와 타협하는 자들이다.
소명에는 고귀한 소명과 평범한 소명 두 가지가 있다. 고귀한 소명은 이 당에서 하늘의 기준을 좇아 사는 삶이다. 이것은 개개인의 삶을 통해 명백히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소명에 만족하며 사는 크리스천들이 많다. 하나님의 고귀한 소명을 좇아 살 때 만나는 어려움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담대히 맞서 주위 환경을 변화시키기보다 환경에 순응하는 삶을 선호한다.
용기라는 단어는 어렵거나 위험하거나 고통스러운 것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해결하는 태도 내지 반응.
용기(courage)의 반대는 낙심하다(discourage).
하나님의 고귀한 소명을 추구할 때에는 저항이 뒤따른다.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딤후 4:18).
지난 날의 실패에 연연하지 말라. 과거에 실패했다고 미래까지 속단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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