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육자들과 대회를 나누면서 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책을 써야 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두 측면 중 하나는 가르침의 실천에 중점을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헌신적인 교사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열려있는
내적 삶에의 접근을 알려주자는 것이었다.
교사들은 세 가지의 근본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첫째, 우리가 가르치는 학과가 실제보다 더 크고 복잡하여 우리의 지식이 늘 모자라고 부분적이라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실제보다 더 크고 복잡하다는 것이다.
셋째, 교직의 어려움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가르친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가르침은 자신의 영혼에 거울을 들이대는 행위이다. 훌륭한 가르침은 자기 지식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흔하게 묻는 것은 무엇이라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떤 내용을 가르칠 것인가?
논의가 약간 깊어지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라는 질문이 나온다. 잘 가르치려면 어떤 방법과 기술이 동원되어야 하는가?
논의의 단계가 더 깊어지면 왜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는 어떤 목적,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르치는가?
하지만 우리는 누구라는 질문은 거의 하지 않는다.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의 자아는? 그의 자아의식은 그가 학생, 학과, 세상에 연결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교육제도는 어떻게 하면 훌륭한 가르침의 원천인 자아의식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가?
가르치는 내면의 풍경의 지도를 잘 작성하려면 지성, 감성, 영성의 3대 노선을 취해야 하며, 그 중 어느 것도 소홀해서는
안된다.
지성은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우리의 사고 방식을 뜻한다. 사람들이 알고 배우는 방법에 대한 개념, 학생과 학과의 본질에 대한 개념의 구체적인 내용과 형태를 뜻한다.
감성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와 학생이 느끼는 방식을 뜻한다. 교사와 학생 간의 교감을 증징시키기도 하고 위축시키기도 하는 그런 느낌을 뜻한다.
영성은 삶의 장엄함에 연결되려면 가슴속 동경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방식을 뜻한다.
많은 교사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이때에 교사의 내면 풍경을 파고드는 나의 시도는 앙뚱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방법론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작업은, 가르치는 행위 중에 교사의 내면의 지형을 더 잘 알면 알수록, 우리이 가르침과 생활은 더 굳건해진다.
기술은 진짜 치료사가 도착할 때까지만 사용하는 것이다. 좋은 기술은 치료사가 고객의 문제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진짜 치료는 고객의 실제상황을 거론하는 실제적인 치료사가 등장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교사의 자아의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이 책의 핵심 주제이다.
제 1장 교사의 마음, 교사의 자아 정체성과 성실성
훌륭한 가르침은 하나의 테크닉으로 격하되지 않는다. 훌륭한 가르침은 교사의 정체성과 성실성에서 나온다.
얼마나 나의 자아의식을 발휘했느냐 혹은 위축시켰느냐에 따라 수업의 질이 결정되었다.
훌륭한 교사들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강렬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 수업에 배어들어 있다는 것이다.
A 교수님은 정말 혼심의 힘을 다하는 것 같아. B 교수님은 자신의 학과를 정말 사랑하거든. C 교수님께는 이 과목이 자신의 목숨이나 다름없어.
훌륭한 교사는 유대감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 학과 학생들을 촘촘한 거미줄처럼 엮어서 학생들이
스스로 하나의 세계를 엮어내는 방법을 가르친다.
휼륭한 교사가 만들어 내는 유대감은 그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다.
훌륭한 교사가 학생과 학과를 연결시키는 그물망을 짤 때 그의 마음은 하나의 베틀이 된다. 그 위에서 온갖 실이 엮이고, 팽팽하게 긴장이 조성되며, 북이 좌우로 움직이면서 짜여진 옷감이 튼튼하게 당겨진다. 이러게 하면 가르침은 마음에 감동을 주고, 마음을 열게 하며, 심지어 마음을 깨뜨리기까지 한다.
진정한 가르침은 교사의 정체성과 성실성에서 온다. 정체성은 내 삶을 형성하는 여러 가지 힘들의 교차면에 존재한다.
성실성은 나의 온전성을 끄집어내고 파편화하여 죽음 대신 생명을 가져오는 힘들과 연결시켜 준다.
내적으로 통합된 자아는 좋은 가르침에 필수적인 외적 연결 관계를 만들어낸다. 반면 분열된 자아는 언제나 남들과 자신을 격리시키고, 남들을 피괴시키려 하며, 자신의 취약한 정체성을 보호하는데 급급하게 된다.
간디는 자신의 생애를 ‘진리와의 실험’이라고 불렀다, 그는 우리의 생활과 관련되는 복잡한 역장(力場)에서 그런 실험을
벌림으로써 우리의 성실성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된다고 말했다.
마틴 부버는 ‘모든 실제적인 삶은 만남이다“라고 말했다. 정말로 가르침은 끝없는 만남인 것이다.
교사가 가르치는 마음을 잃는 때가 있다. 많은 교사들이 학과에 대한 정열, 학생들을 돕겠다는 열심 등 여러 가지 심리적인 이유로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교직에 근무하는 연수가 늘어갈수록 그들은 용기를 잃게 된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다시 한번 가르침의 용기를 회복할 수 있을까?
다른 많은 직업들과는 달리, 교직은 개인생활과 공직생활이 교차하는 위험한 지역에서 이루어진다.
훌륭한 치료사는 개인적인 방식으로 치료하지만 그것은 결코 공개되지 않는다.
그러나 훌륭한 교사는 공과 사가 만나는 교차 지역에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 학생, 학과를 서로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교사들은 학과는 물로 자기 자신을 무관심, 비판, 조롱에 내어 맡기게 된다.
마음의 상처를 줄이기 위하여 우리 교사들은 학생, 학과, 심지어 우리 자신으로부터 도망친다. 마음이 깃들지 않은 우리의 말은 만화의 말풍선 속 대화가 되어버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만화로 만들어 버린다.
스승의 힘은 학생의 내면에 진리를 일깨워주는 능력에 있다. 만약 우리가 훌륭한 선생을 만남으로써 우리 내부의 교사를
발견했다면, 후일 그 만남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한번 가르침의 용기를 회복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훌륭한 선생을 만남으로써 우리 내부의 교사를 발견했다면, 후일 그 만남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한 번 가르침의 용기를 회복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그 스승은 당신에게 커다란 감화를 주었습니까?
훌륭한 가르침이 이루어지려면 훌륭한 교사 못지않게 좋은 학생이 있어야 한다.
라이트 밀스의 사회학적 상상력이란 ‘저지 저 바깥에 있는 사물들을 그냥 보기만 해서는 제대로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모든 사물이 어떤 렌즈를 끼고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새로운 렌즈를 끄게 되면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사물들을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제인 톰킨스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교육학에서 그녀는 자신이 학생들이 알아야 하고 알고 싶어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의 세 가지에 더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첫째, 학생들에게 내가 얼마나 똑똑한 교사인지를 보여 주는 것,
둘째 내가 얼마나 지식이 많은 지를 보여주는 것,
셋째, 학생들에게 내가 얼마나 수업 준비를 충실히 하는 자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진정한 소명의식은 내면의 교사의 목소리에서 나온다. 프레드릭 뷔호너, 직업은 당신의 진정한 기쁨과 세상의 허기가
만나는 곳이다. 나의 정체성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어떤 것에 나 자신을 바칠 때, 그것은 나의 본성을 위반하는 것이 되고, 이 세상의 허기를 달래 주는커녕 더욱 심화시키는 꼴이 되고 만다.
권력은 외부에서 내부로 작용하지만, 권위는 내부에서 와부로 뻗어 니간다.
2장 공포의 문화, 교육과 단절된 삶
우리는 학점제도, 학과제도, 지나친 경쟁의식, 관료적인 교육 제도 등으로 인해 학생들과 멀어지게 된 것이다.
교육제도는 분명 분열을 조장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그들 쪽으로 다가서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이 아무리 넓고 위험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메워 볼 생각이다. 너희들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의 도움이 필요할 뿐 아니라 나 자신도 내 삶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너희들의 통찰과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관게를 추구하는 인간적인 방식이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만남과 교류를 경험하게 되는
방식이다. 가장 깊이 있는 수준에서 볼 대, 지식은 언제나 상호연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한 명인 매클린 톡은 지식의 핵심에 대해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자, 관계, 연결, 일체감이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단절은 우리의 공포를 이해하는 자기 지식의 힘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이처럼 생생한 만남을 두려워하는 것은
다양성을 두려워하는 공포에서 비롯된다.
만약 다양성을 수용한다면 다음 순서인 갈등의 공포에 다가서게 된다. 다양한 진리를 만날 때 갈등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갈등의 공포를 극복하면 정체성 상실의 공포를 만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타자와의 생생한 만남이 우리의 생활을 아예 바꾸어 놓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대면하게 된다.
타자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서 타자에 대한 존경, 혹은 사랑으로 옮겨간 지식의 방법과 삶의 방법에 바탕을 둘 때 비로서
훌륭한 교육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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