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빛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게 하는 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그렇게 축복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 한 사람만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크고 작은 문제로 인해 걱정하며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호흡을 하고 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들이 주어지게 마련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인생이 아니라 사명에 초점을 맞추는 인생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빛을 비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빛은 어두운 가운데 비쳐지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 때문에 좌절하거나 낙망하는 인생이 아니라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는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편 112편 4절입니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흑암은 천천히 찾아오지만 빛은 한 순간에 일어납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의 빛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빛”이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장 4-5절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타락한 인류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입니다. 우리가 흑암 중에 있을 때 빛 되신 주님 앞에 나오면 됩니다. 그러면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빛, 위로의 빛, 소망을 빛을 우리가 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비추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사람 앞에 비추어야 할 빛은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에게 있어서 착한 행실이란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19장 8절입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기로 예비된 신부들에게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착한 행실은 성도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옳은 행실을 말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의 옳은 행실, 착한 행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요한복음 15장 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택하여 주셨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복음 15장 17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즉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 성도의 옳은 행실이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착한 행실입니다. 우리가 처음 은혜를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교회를 사랑하고, 주의 종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고, 용서하지 못했던 형제들을 용서하여사랑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로마서 5장 5절에 보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실을 알고 믿게 됩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성경은 그 사랑과 열매를 가리켜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 계2:4)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가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나에게서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찾고 계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음란하고 부도덕한 세상에 물들지 않고 깨끗함을 잘 지켰던 교회입니다. 성경 말씀을 정말 제대로 해석하고 있는지를 상고하고 연구하는 교회였습니다. 더구나 교회를 위해 주를 위해 게으르지 아니하고 열심을 다했던 교회였습니다(계2:1-3). 그러나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던 교회입니다(계 2:4-5).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 흘리고 사랑의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은 행실, 탐심, 음란, 자기 영광과 같은 세상의 구습을 끊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히9:14). 그런데 지금은 그 사랑과 그 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은 처음 사랑이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여 회개하지 아니하면, 즉 처음 행위를 다시 갖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겨 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촛대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요한계시록 1장 20절에 보면 촛대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절에 보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다니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교회 사이를 예수님이 다니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옮긴다는 말은 주님이 교회를 떠나신다는 말입니다. 즉 아무리 교회에 충성한다 하더라도,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안다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깨끗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갖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 곧 사랑의 행동은 누구에게 먼저 나타내어야 할까요? 마태복음 5장 15절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사랑의 행동은 먼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집안 사람에게부터 나타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 이외로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 믿지 않는 부모나 형제에게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외부 사람들에게 더 치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집안의 부모와 형제와 남편과 아내와 자녀에게 소홀하면 불신자 보다 악한 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들에게 먼저 사랑의 행동을 보이고, 외부 사람들에게도 사랑의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외부 사람에게 먼저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집안 사람에게 착한 행실로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기와 자기 집안 식구들만 위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사랑의 행동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멀리 확산되어 나가야 합니다.
신명기 30장 6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누가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자손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사 여호와를 사랑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한 사랑하게 하사 무엇을 얻게 하신다고 하십니까?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것은 곧 생명입니다. 따라서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그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일까요?
신명기 30장 2절입니다.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사랑의 열매를 항상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처음 사랑이 우리에게 여전히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요한일서 4장 6-7절에 보면 우리가 사랑하면 하나님의 영 곧 진리에 속한 자입니다. 만약 우리가 미워하면 , 미혹의 영 곧 마귀에 영에 속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사랑의 힘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 안에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의 힘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말씀을 찾아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을 감행하는데 커다란 난제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인민군 수중에 들어 가있고, 팔미도 등대의 불을 완전히 꺼버렸기 때문에 켜지지 않으면, 상륙 작전은 밤에 감행 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미국과 영국,캐나다, 호주의 7만5천명의 연합군과 261척의 함정이 상륙하기에는 등대 하나가 결정을 해 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맥아더 장군은7월에 Blue Hearts 작전을 세웠습니다. 미군이 적의 남하를 저지 하지 못해 취소되었지만,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고, Chromite라는 이름 아래 한국인 세 명, 미국인 세 명을 특공대로 그 섬에 보내게 됩니다.
KLO 켈로 부대라고 하는 이 특수 부대가 최규봉씨를 대장으로 해서 이 조그만 섬을 탈환, 등대를 장악 하게 됩니다. 9월10일에 등대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9월15일 00:00시에 등대를 밝히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등대까지 올라가 적과 싸워 등대를 점령하고 보니, 등대에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불을 켜는 반사경의 전선이 나사가 풀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261척의 배와 7만5천의 군인이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 불이 켜져야만 항로를 찾아서 상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생존하고 계신 당시의 부대장 최 규봉 옹은 당시에 청년이었는데, 나사를 찾는데 3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3시간 만에 등대를 다시 고쳐서 불을 밝히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 철조망에 성조기를 게양했습니다. 팔미도를 애타게 바라보던 연합군 함대가 등대의 불빛을 본 것은 1시간 40분 늦은 2시20분 이었다고 합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맥아더 장군은 등대의 불빛과 성조기를 확인하자, 인천 앞바다로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7개국 연합군의 함대는 서슴없이 등대의 불빛을 받아가면서 위치를 확인하고,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하게 됩니다. 9월28일에 서울이 다시 수복이 되고, 한국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 등대의 빛이 없었다면 상륙 작전은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세상은 빛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빛, 사랑의 빛, 생명의 빛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가운데서 신자가 착한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절박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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