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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기독교의 재물관

by liefd 2024.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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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분당샘물교회의 파키스탄 피랍 사건으로 인해 한국교회 선교전략에 대한 문제점과 한국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제 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BBK 사건이 전체 선거의 메가톤급의 파장을 미친다는 기사가 연일 보도된다. 연이어 MBC에서 대형교회의 세금 문제를 다르면서 목회자의 화려한 생활을 부각시키면서 교회의 부정적인 시각을 부추기고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크고 작은 사건이 기독교와 관련되어 일어나는 원인은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 커다란 힘을 발휘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교회가 부러운 존재, 실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체로 비쳐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교회가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담당하지 못할 때 사람에게 버리어 밟히게 된다. “현대 이스라엘에서 맛을 잃은 소금은 편편한 지붕 위에 흙으로 덮는 데 사용된다고 한다. 토양을 딱딱하게 하고 물이 새는 것을 막아준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붕을 운동장으로 사용하거나 공공집회를 위한 장소를 사용될 때 소금을 뿌려 여전히 발로 밟는다고 한다.” 

 

필자가 그리스도인의 재물관에 관한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고, 본 논문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은 다음과 같다. 필자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상대를 목표로 준비해 오던 중에 생각지 않은 부친의 사업의 부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진로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재물이 한 개인과 가정에 주는 충격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재물로 인해 마음에 찔림을 받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돈을 사모하기 때문에 미혹을 받게 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부자가 자신을 고문하는 것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돈을 잘못 생각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돈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믿지 말아야 한다. 사실 돈을 신뢰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또한 그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설사 당신이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베풀어 주신 돈이라고 하면서 그 돈에서 어떤 안전감을 취하려 한다 할지라도 역시 그것은 우상 숭배이다. 

 

또한 필자가 교회생활을 통해서 학생의 신분으로, 부교역자 위치에서 그리고 담임목사의 위치에서 볼 때 재물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커다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에 나가서 헌금을 드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불신자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 재물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이 세워져 있지 않다. 신앙이 재물을 지배하기 보다는, 아직도 재물이 신앙을 지배하는 그리스도인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교회가 수많은 성장과 축복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재물에 있어서 만큼은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전통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더구나 한국교회는 물질적인 축복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올바른 재물관에 대한 가치관이 결여되어 있다. 그동안 성경적으로 축복을 받는 원리에 대한 강조가 지나치게 많은데 반해, 재물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가치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어야 하며, 그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지에 대한 성경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근간에는 그리스도인의 재물관에 관한 책이 많이 발간되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전 세계적으로 재물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한국에서 또한 그리스도인의 재무관리에 대한 세미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성경적인 올바른 재물관의 정립을 통해서 가정과 직장과 교회, 그리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어려운 과제들을 풀어감에 있어서 구체적인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축복을 받는 것 못지않게 재물을 어떻게 모아야 하는지, 그리고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사회 구석구석에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영혼들을 위해 많은 사랑을 실천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좀 더 적극적으로 재물을 가지고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한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 백성을 삼는데 사용되어지는 모범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필자는 먼저 성공과 축복에 대한 일반인의 견해와 성경적인 견해의 차이를 지적하고자 한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을 원한다. 그러나 성공의 기준은 모두가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기에다 전심전력을 다 기울인다. 자나 깨나 이런 사람들의 머리에는 ‘돈’이라는 것이 떠나지를 않는다. 돈이 없으면 죽고 돈만 있으면 행복한 줄 알고 그들은 돈 벌기를 위해서는 도덕도, 종교도, 윤리도, 국가도, 민족도 모르고 돈 벌기에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결코 부를 소유하는 그 자체가 성공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랜드 박성수 회장은 돈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돈은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의 편이다. 좇아가면 돈은 내게 오지 않는다. 돈이 일의 목적이기보다는 일의 ‘결과’여야 한다. 세상적으로 보면 돈은 일의 목적이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돈은 일의 결과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이끌려 살아간다. 무언가를 획득하고자 하는 욕구가 삶의 목표가 된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이 욕구는 더 많이 가지면 더 행복해지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며, 더 안전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온다. 하지만 이 세 가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소유물은 일시적인 행복을 준다. 사물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그것에 싫증을 느끼고, 보다 새롭고 더 크고 나은 것을 원하게 된다. 

 

더 많은 것을 가지면 더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도 잘못된 믿음이다. 하지만 자아 가치(self-worth)와 소유 가치(net-worth)는 동일하지 않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은 물건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이 모든 것을 소유하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너의 모든 것을 주라’고 말한다. 세상은 ‘최상의 것을 바라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다른 것들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세상은 ‘이기기를 힘쓰고 법과 도덕을 염두에 두지 말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리고 부도덕한 것을 미워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재물관과 세상의 재물관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의 재물관은 인간의 노력과 행운에 의해서 얻어지고, 자신의 만족과 사용을 위한 것이며,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재물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이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돈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책임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성공은 교회 안에 번영의 신학으로 접목되면서 한국교회 안에 적잖은 피해와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했다. 2차 대전의 비극과 동서간의 냉전 및 국제전쟁의 비극을 경험한 현대인들은 무엇보다 생활의 안정과 물질의 번영을 추구하게 되었다. 번영의 신학은 평신도들과 목회자들로 하여금 더 큰 사업과 더 큰 교회를 추구하는 허영심을 가지도록 조장하고, 결국 대형화와 대량화를 추구하는 현대에 대교회주의와 물량주의를 초래했다. 

 

번영의 신학과 교회의 대형화가 교회발전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개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기도와 전도와 봉사의 각종 사업이 보다 열성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번영신학과 물량주의가 교회에 미친 피해 역시 적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목회 사역에 인위성과 허영성을 조장했고, 일반신자에게는 신앙생활의 초점을 하나님의 뜻에 두기보다 현세적 및 물질적 축복에 두게 만들었다. 

 

성공의 개념 못지않게 축복의 개념 역시 많은 오해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온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여기서 한국인의 기복사상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성경적인 축복의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재물관을 정립하고자 한다.

 

한국인의 기복사상은 소극적으로는 3재, 8고를 면하고 적극적으로는 5복을 성취하는 것이다. 3재는 화재(火災), 수재(水災), 풍재(風災), 8고는 생(生), 노(老), 병(病), 사(死),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중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은성고(五蘊盛苦)이다. 5복이라면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다. 다분히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이다. 

 

복을 받으려는 열망으로 교회에 나오고, 복을 달라고 기도하고, 복받는 비결을 설교하고, 복을 얻기 위해 헌금을 하고, 결국 신앙생활이 궁극적인 목표에서 이탈하는 현상을 보이게 되었다. 예수를 믿는 지향점이 현세적 축복과 출세가 됨으로써 개인주의적 이기심을 부추기고 세속적 가치관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구약에서는 복받는 전제조건을 이렇게 제시한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신 28:1).”

 

신약에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와 같이 성경은 신앙생활의 우선순위와 목적을 명기하고 있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성경이 가르치는 복의 성격, 신앙의 지향점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I   . 재물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

 

A.   재물의 역사적 배경

 

역사적으로 돈의 출처와 배경은 우리에게 알려진 바는 없다. 손경구는 “돈은 의식적인 발명의 소산이 아니라 물물교환이라는 역사적인 과정 중에 발생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돈과의 바른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돈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돈이란 단순히 쇠로 만든 동그란 모양이나 색깔을 입힌 종이가 아닌 그 이상이다. 그것은 거래를 손쉽게 만드는 도구이다. 돈은 이러한 거래를 신속하게 일어나게 하는 도구이고, 여러 사람들을 참여하게 하여 거래의 범위를 넓게 만든다. 

 

직접적인 물물교환보다 화폐는 융통성이 훨씬 많다. 돈이란 상대방의 물건이나 서비스에 대해 자신의 물건이나 서비스에 대한 약속을 말한다. 그런 면에서 돈이란 널리 통용되는 차용증서와 같다. 돈의 편리함을 깨닫게 된 사람들은 돈을 가지고 주고받을 수 있는 경제체계에 동참하게 되었다. 

 

엘빈 토플러는 지식혁명과 부 창출 시스템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는 단순히 돈이나 자산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유, 무형의 소유로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즉 효용을 가진 모든 것을 일컫는다. 이런 측면에서 엘빈 토플러는 인류가 3번의 혁명적인 패러다임 변화를 통하여 부를 창출하는 시스템을 발전시켜 왔으며, 그 결과 65억 명의 인구가 충분히 소비하고도 남을 정도의 엄청난 부를 창출해 왔다고 주장한다. 농업혁명, 산업혁명이라는 두 번의 혁명적 변화를 거쳐 현재 세 번째 혁명인 지식혁명이 진행 중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탄생이 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지식혁명의 물결 하에서 나타나게 될 새로운 부 창출 시스템은 어떤 모습일까? 농업혁명은 수렵과 채집이라는 시스템에서 경작과 교환이라는 새로운 부 창출 시스템을 가져왔다. 산업혁명은 대량생산, 대량유통, 대량소비라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초래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나 경영인, 언론 등이 매일 같이 급변하는 경제의 펀더멘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새롭게 부상하게 될 부 창출 시스템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아직 지식혁명의 패러다임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식혁명과 더불어 부의 창출 시스템이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이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방식이 가게에 직접 찾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서 가격을 비교하고 자신의 기호에 맞는 물건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또한 폴 케네디는 21세기에 통신, 금융혁명과 다국적 기업의 대두를 예고한다. 오늘의 새로운 기술들이 우리들에게 닥쳐오는 인구위기를 해결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냉철한 시각에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문제의 관건은 어느 집단 또는 개인이 새로운 발명을 성취, 지배, 이용하는가 하는 점과 그와 같은 과학적 돌파구가 전반적으로 어떠한 경제여건 속에서 조성되는가 하는 점이다.

 

오늘의 추세가 지난날의 경우와 비교하여 차이가 나는 것은 경제가 팽창하여 세계적으로 통합되면서 다국적기업들이 양과 규모에서 엄청나게 커진 데 기인한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러한 팽창은 보호주의를 후퇴시키고 세계무역의 부흥을 권장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 경제 질서 속에서 이루어졌고, 1970년대에는 금본위제(gold standard)를 폐지하기로 한 미국의 결정과 뒤이어 불과 몇 개국에서만 시행되다가 차츰 여러 나라들로 확산된 외환관리의 전반적인 자유화에 의해 더욱 조장되었다. 이 같은 변화는 세계무역을 위한 유동성의 증대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기업체들이 중앙은행의 규제를 받지 않고 해외에 투자하게 되면서 국제적 투자가 증가하는 사태를 가져왔다.

 

비록 금융의 자유화가 세계교역의 증가에 기여하기는 했지만 그로 인한 다른 효과도 나타났다. 상품 및 서비스의 교역과는 별도의 금융유통이 증가하게 된 것이다. 기업체들이 외국 물자에 대한 대금을 지불하거나 외국 조립공장에 투자하기 때문이 아니라 투자자들이 어떤 특정 통화나 다른 금융증서로 투자하기 때문에 외환거래가 이루어지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세계의 산업과 상업의 호황을 뒷받침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의 자금이 세계시장에 크게 나돌게 된 사실은 또 다른 두 가지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세계금융시장의 규제가 풀리고 새로운 기술의 결과로 세계적인 통신혁명이 나타난 사실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글로벌 시대에 통신, 금융혁명으로 말미암아 다국적 기업이 대두하게 되고 결국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B. 재물의 성경적 배경

 

1.   구약에 나타난 재물의 배경

 

화폐주조는 BC 8세기에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 상업 거래는 변형된 물물교환으로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주요한 식품 및 모직, 나무와 같은 다른 생활필수품들이 교환의 대상이었다, 부는 종종 소 떼나 보석들에 의해 평가되었다(창 13:2). 은은 고대 근동에서 가장 흔한 보석이었으며, 돈으로 사용되면서(창 17:13, ‘돈’, RSV), 무게로 평가되었다(왕상 10:29). 은은 부동산 교환(렘 32:9)이나 결혼 지참금으로 평가되었으며, 특히 권력 소유에 대한 공세로(왕하 18:14), 국가 간의 국경선 협정(왕상 9:10이하)에 이용되었다. 무게의 기준이 지역적으로 시행되었다(창 23:16). 보석은 장신구나 매일 사용하는 물건의 형태로, 혹은 특별히 만들어진 주괴로 사용되었다.

 

최초로 알려진 화폐-그 무게나 명칭을 확증하기 위해 인이 찍힌 금속이었는데-는 BC 6세기에 리디아에서 호박금(금과 은의 합금)으로 주조되었다. 그러나 화폐 주조에 대한 언급은 BC 710년경 앗수르에서 발견된다. 바사에는 금 화폐가 다리우스 1세(BC 521-486년)에 의해 소개되었는데, 그는 이 화폐를 자신의 이름을 따라 다릭스(darics)라고 불렀다. 학 1:6(BC 520년)은 화폐에 대한 성경의 최초의 언급이다. 후기의 유대 통치자들은 BC 400년경부터 작은 은 화폐를 발행했으며, 그 화폐에는 ‘유다’라는 이름이 나타나 있는데, 그는 알렉산더 대제 치세의 대제사장인듯하다. 

 

2.   신약에 나타난 재물의 배경 

 

팔레스타인에는 세 가지 다른 출처의 돈이 통용되었다. 공인된 로마 화폐, 주로 고대 헬라 표준에 기초한 안디옥과 두로에서 주조된 지방 화폐, 가이사랴에서 주조된 유대 지방의 돈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돈을 교환하는 자가 필요했다. 유대 화폐는 대부분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최초의 유대 화폐는 제2계명으로 인해 원예학적으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헤롯 가문에 주조된 화폐는 그들의 황제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신약에서 언급된 유일한 이런 종류의 화폐는 막 12:42의 과부의 얼마 안 되는 돈이었던 렙돈으로, 이는 로마의 반 쿠야드란스에 해당한다. AD 66-70년에, 유대인들은 최초로 그들 자신의 돈인 세겔(반 세겔, 1/4세겔 등을 포함하여)을 주조했다.

 

헬라의 화폐에는 은 드라크마가 있었는데, 므나는 100드라크마, 달란트는 6,000드라크마로, 이 달란트는 계산 단위일 뿐 화폐는 아니었다. BC 300년경에 양 한 마리는 한 드라크마 값에 해당했으며, 이 화폐는 눅 15:8, 9에서만 언급되어 있다. 2드라크마(디드라크몬)는 반 세겔의 유대 성전세를 내는데 사용되었으며(마 17:24), 이 성전세는 출 30:11이하에서 일정한 인두세로 발전되었다. 스테넬(4드라크마)은 베드로가 물고기 입에서 발견한 것이 ‘세겔’인데(마 17:27), 이는 2 드라크마보다 더 흔한 화폐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쌍으로 세금을 지불했던 것 같으며, 유다가 받은 것도 이 화폐인 듯하다(마 26:15).

 

기본적인 로마 화폐는 은 데나리온으로, 금 아우레우스는 그 25배에 해당하며, BC 49년에는 그 무게가 126.3g이었고 네로시대(AD 60년)에는 115g까지 값이 떨어졌다(마 10:9의 금은 이를 가리킨 듯하다). 쿠아드란스(구리 아스의 1/4)는 마 5:26의 ‘페니’(최소 단위의 화폐)였다. 아스(마10:19의 ‘페니’)는 세스데르티우스의 1/4이었으며, 은 데나리온의 1/16이었다. 데나리우스는 10 구리 아스에서 그 명칭이 유래했지만, BC 217년에 16 아스로 정해졌다. 그 후 한 데나리온은 하루의 임금(마 20:1이하) 및 여인숙 비용(눅 10:35)으로 확정되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사용한 데나리온은 디베리우스 황제의 두상을 그려놓고, 그 뒷면에는 평화의 역할을 상징하는 디베리우스 황제의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 놓았다.

 

B.   재물의 의미와 반응

 

1. 재물의 의미

 

경제학자들은 돈을 한 사회에서 (1) 교환의 수단으로서, (2) 계산의 단위로서, (3) 가치의 축척으로서 가능할 수 있으며 그렇게 사용될 수 있는 물건으로 정의한다. 

 

1) 교환의 수단

 

교환의 수단(매개물)으로서 돈은 물물 교환의 필요성을 제거함으로써 매매를 용이하게 해 준다. 교환의 매개로서의 돈은, 거래가 물물 교환자의 직접적인 만남이 없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거래를 촉진하며 사람들의 필요와 부족을 채워주는 일도 촉진한다. 

 

2) 계산의 단위

 

계산의 단위로서 돈(화폐)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시장(사고파는 사회, 거기에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 전역에 걸쳐 정확한 사정(査定) 가격에 교역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준다.

 

3) 가치축적

 

가치 축적의 수단으로서의 돈은, 사람들이 그 돈이 쉽게 썩어버릴 것에 대해 염려할 필요도 없이 ‘궂은 날에 대비하여 무엇인가를 비축할 수 있도록’ 해준다. 

 

4) 돈은 신비적인 것이 아니다

 

경제가 돌아가는데 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돈의 사용은 시간과 노동과 여타의 자원들을 절약하게 해주며, 한 사회가 비능률적인 물물교환에서 더욱 효과적인 생산 활동으로 자원들을 재조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와 같이 한 사회가 돈을 이용할 때 그 잠재적 생산성이 크게 향상된다.

 

5) 돈의 본질적인 성격

 

어떤 물건이 교환의 매개로서, 계산의 단위로서, 가치 축척의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이행할 수 있으려면, 가분성(可分性), 휴대 가능성, 내구성(耐久性), 식별 가능성, 희소성, 이상 다섯 가지의 본질적 성격을 구비해야 한다(부피와 무게에 비하여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가분성이 없으면 돈은 교환되는 재화나 용역의 정체(Identity)와 수량과 질에 따라 결정되는 가치의 미세한 차이를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휴대 가능성이 없이는 상호 교환의 매개물로서 가능할 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물건을 서로 직접 교환하는 물물교환이 손쉬울 것이다. 내구성이 없다면 쉽게 부패하여 곧 무가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가치축척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식별 가능성이 없이는 구매자가 거래 시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상호 교환의 수단으로서나 가치 축척의 수단으로서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희소성이 없어도 그것은 교환 수단이나 가치 축척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6) 가장 시장성 있는 상품

 

다른 시각에서 보면 돈은 일정한 인구 내에서 가장 시장성 있는 상품이다. 다시 말해서 돈은 그 세 가지 용도(상호 교환, 셈의 단위, 가치 축척) 중 어느 용도를 위해 서든지 모든 사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또 받아주는 품목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른 물건들을 기꺼이 돈으로 바꾸려고 한다.

 

만약 어떤 상품에서 이상의 다섯 가지 본질적인 특성 중에서 하나나 둘, 그 이상이 사라지거나 몹시 취약하게 된다면, 돈의 중요한 임무들을 이행하는 면에서 그 상품의 효율성도 마찬가지로 약해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품의 가분성, 운반 가능성, 내구성, 식별 가능성 또는 희소성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떨어진다면 그 상품은 교환의 매체나 셈의 단위나 가치 축척의 단위로서의 효과를 그만큼 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시장에서의 돈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된다. 

 

2. 재물에 대한 반응

 

재물에 대한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재물에 대해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부류의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중세의 수도원 제도와 같이 재물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다. 둘째는 재물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소위 번영신학을 강조하는 사람들로서 재물을 얻는 것과 축복을 받는 것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다. 셋째는 자크 엘룰과 같이 재물을 중립적인 대상으로 간주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현대에 와서 재물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근간에 재물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분위기가 대세이다. 그래서 깨끗한 부자, 청부론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인의 재물 관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문제는 재물에 대한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반해, 그것이 과연 성경적인 축복인가? 에 대한 검증이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재물이 중립적인 것이라는 자크 엘률의 주장에 대해 비판도 없이 수용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자크 엘룰은 ‘성경은 돈에 대해 자주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것에 대해 말할 때는 자율과 자체 행위가 없는 중립적인 대상으로 다루고 있으므로 화폐의 관점에서 돈을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재물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같이 재물도 영적인 실체로 바뀌게 되고 우리의 영안을 어둡게 하는 세력이다. 

 

우리가 돈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들을 확실히 알면, 부를 믿는 실수에 빠지는 대신,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재정적 안정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

 

1) 돈은 힘이 될 수 있다

 

금이나 다이아몬드, 보석 또는 종이로 된 증서와 같은 것들은 돈을 의미할 뿐 돈 그 자체는 아니다. 돈은 그런 물건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종의 신념이다. 그래서 돈은 거의 살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마치 전기나 물처럼 돈은 지속적으로 흘러가며 거의 정체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돈은 어떤 일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낸다. 그 이동이 창조적인지 파괴적인지 여부는 대부분 돈이 어떻게 쓰이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2) 돈 그 자체에는 선악이 없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가 아니라 돈에 대한 사랑이 일만 악의 뿌리인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돈은 선한 도구일 수도 있고 악한 도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돈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암브로스(Ambrose)는 “돈이 악한 면에서는 미덕이 장애물이지만 또한 선한 면에서는 미덕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라고 말했다. 즉 우리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돈은 우리 안의 ‘악함’을 증폭시킬 것입니다. 

 

3) 돈은 어떤 사람 또는 조직의 온전성과 안정성을 드러낸다.

 

돈이 있다고 해서 사람에게 탐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탐욕스럽다. 뭔가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돈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 탐욕이 단지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바울이 ‘부자들이 돈이 일만 악의 뿌리’ 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다. 그리고 돈을 갈구하는 자는 ‘미혹을 받아’ 넘어지게 된다.

 

돈을 가졌기 때문에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21세기에 일만 악의 근본이 되는 죄는 과연 무엇일까? 타인이 갖고 있는 것을 원하거나 또는 더 소유하기 위해 안달한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살려고 하는 욕구나 시기하는 마음이 문제가 된다. 만일 당신이 일상 생활에서 이런 욕구와 동기가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모든 형태의 악이 올라온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듯이 돈이 있다고 해서 불행으로부터 보호받는 것도 아니다. 돈은 사람을 이기적이거나 탐욕스럽게 바꾸는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단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 또는 시스템의 실체를 드러내는 역할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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