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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조정민의 답답답

by liefd 2024.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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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는 고난이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한테 마이크를 대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병에서 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병에 붙들려 사는 삶에서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맹인을 치유하고 나서 다시 죄짓지 말라고 하신 것도 병에서 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죄에서 풀려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 믿음을 칭찬받은 수로보니게 여인도 로마 백부장도 모두 이방인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들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신 걸까요? 지금으로 치면, 교회도 안 나가고 말씀도 안 보는 사람에게 네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겨자씨만 한 믿음이란 이방인의 믿음을 의미하며, 그렇게 진심으로 믿는 믿음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 내가 원하는 방법, 내가 원하는 형태로 응답받아야 한다는 믿음은 믿음일 뿐입니다. 그래서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믿음이라면 반드시 응답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잘못된 태도 중 하나가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역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할 일까지 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때 맡겼다는 무엇을 맡긴 걸까요? 비행기 탈 때 짐을 맡기죠. 그 짐을 무사히 되찾기까지는 내 책임이 아닙니다. 항공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은 내가 최선을 다해 일한 결과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해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어떤 결과든 상관없이 염려하지 않는 겁니다.

 

고난당한 사람에게, 몸이 아픈 사람에게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 하나님이 더 기도하라고 그러시나 봐 같은 말로 설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판단하는 그 말들이 지금 고난을 넘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수를 꽂는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곁에서 함께 염려해 주고 아파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밖에는 허락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고전 10:13). 큰 고난은 큰 그릇을 만드는 과정 중에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이 해석되지 않아서 괴롭습니다. 이해할 수 없어서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묵묵히 견디다 보면 고난이 해석되고 그 고난을 견딘 것이 능력이 되는 때가 옵니다.그래서 신앙은 나중에 해석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는 이유는 물질에 붙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더 우선순위로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에는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와 나눔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런 교회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믿습니다.

 

사람은 10년은 두고 봐야 믿을 만한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아니 10년으로도 부족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을 만한 관계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스스로 성령의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그 말을 덜컥 믿을 수 있습니까?

 

바울이 성령 인덱스를 주었습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이가 성령인지, 악한 영인지, 깨끗한 영인지, 더러운 영인지 알 수 있는 인덱스를 아홉 가지 주었습니다. 정말 사랑하나? 진짜 진정한 기쁨이 있나? ‘화평케 하는 사람인가?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싸움이 일어나고 갈등이 일어난다면 성령의 사람일 리 없습니다. 진짜 오래 참는가’? ‘자비로운가? ‘선함이 있는가? ‘충성하는가? ‘온유한가? ‘절제할 수 있는가? 이 아홉 가지를 한순간에 검증할 수는 없습니다. 오랜 시간 지켜봐야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 가운데는 분명히 병이 낫고 방언을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이 반드시 성령의 능력은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은 무엇보다 관계적인 능력입니다. 성품이 바뀌는 능력이에요. 그래서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능력입니다.

 

우리 교회는 제직 직분을 따로 두지 않습니다. 직분의 역할이 필요 없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신앙이 연륜에 비례하지 않으므로 그냥 형제요 자매이면 충분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듯이(18:17), 처음 믿음이 중요하고 그 처음 믿음을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운동선수가 경기 중에 꽈당 넘어지면 굉장히 아플 것 같은데 실제로는 통증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상처에서 통각 시그널이 올라와도 중요한 경기를 마쳐야 하니까 스스로 차단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경기를 마친 뒤에야 비로소 통증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처럼 목표와 열정이 있는 사람은 웬만한 상처에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과거지향적이라는 것입니다. 왜 과거지향적일까요?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평생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70여 년간 받은 상처를 지금까지 갖고 있었다면 거기에 짓눌려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제겐 비전이 있고 꿈이 있기 때문에 상처 따위에 감정을 소모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 시험을 면제해 주지 마시고 이길 힘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면 끝나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완성될 비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미래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11:4).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제물은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데 제물만 믿음으로 드릴 순 없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무엇인가요?

 

예배란 하나님이 내 인생의 중심에 있다는 태도를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내 안에 좌정하신 주님을 모시고 살 때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고 믿음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삶도 예배이고 주일예배도 예배입니다. 삶이 예배와 상관없다면 주일에 드리는 예배는 세리머니이거나 이벤트일 뿐입니다. 우리가 드리고 싶은 대로 드리는 것을 예배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고자 하는 것을 받는 것이 예배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이 말씀은 사무엘이 사울왕에게 이렇게 되묻는 것입니다. “당신은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그 제사를 기뻐할까요?” 하나님은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에 청종하는 우리의 태도를 좋아하십니다.

 

세상 한가운데 있지만 온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세상의 한가운데 거기가 예배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게 중요하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

 

율법은 중요합니다.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보다 율법이 더 중요하다면, 하나님의 뜻보다 율법이 더 중요하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율법입니다.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오만입니다.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계속 죄를 짓게 돼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성숙한 신앙이란 죄를 짓지 않는 게 아니라 죄를 짓더라도 예민하게 자각하는 것이며, 죄로부터 돌이키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죄를 지었을 때 죄를 묵상할 게 아니라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자꾸 죄를 곱씹고 묵상하면 하나님과 멀어질 뿐입니다. 죄를 범했다 싶으면 하나님께 먼저 엎드리십시오. 죄를 곧바로 시인하는 것이 가장 빨리 회복되는 길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한테 거짓말 한번 했다가 그 거짓말을 숨기려고 또 다른 거짓말을 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죄는 숨기면 숨길수록 또 다른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자꾸 죄를 짓다 보면 부모와도 관계가 나빠집니다. 우리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죄를 지었으면 숨기지 말고 주님께 털어놓으십시오. 내 죄를 시인하십시오. 하나님은 어떤 죄든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어떤 죄보다도 큽니다.

 

회개란,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인생관, 세상의 세계관을 따라가다가 거기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어디로 돌이킵니까? 예수님께로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향해서 돌아서면 그게 회개입니다

 

이렇게 회개는 삶에서 구체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 살던 삶에서 돌이켜 그분의 부르심과 음성을 기준으로 살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죄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나니까 더 이상 그 길로 가지 않게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 앞에서 눈물, 콧물 흘리며 하나님, 저 그 사람 용서했습니다라고 결정했는데도 막상 그 사람 얼굴을 보면 다시 원망스럽고 화나는 일이 생각난다고 합니다. 저도 이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씨름을 했습니다. 그러다 신학교에서 교수님이 하나님께 용서는 사건이지만, 사람에게 용서는 과정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18:22)고 하신 말씀이 그제야 이해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번에 용서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기로 결단해야 하는 거죠. 그러다 어느 순간 내 마음이 변하게 된 걸 깨닫게 됩니다. 용서가 된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삶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그 시간 동안 여전히 죄를 짓고 회개하고, 다시 죄를 짓고 회개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러나 속도가 달라져요. 점점 더 죄를 돌이키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5:22-23)라고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모두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관계적 열매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란 궁극적으로 인격적인 변화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예언하고 방언하고 치유하는 은사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인격적인 변화입니다.

 

육신의 타락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정신이 타락하지 않은 채 육신만 타락하는 법은 없습니다. 정신은 영혼이 병들지 않고는 타락하지 않습니다. 타락은 결국 영혼에 병이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병은 그냥 치유되지 않습니다. 때려서도 안 되고 감옥에 보내서도 안 되고 수행해서도 안 됩니다.

 

빈 컵에는 공기가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공기를 빼내려면 물에 담가야 합니다. 컵이 물속에 잠기는 순간 그 안에 있던 공기가 물속으로 빠져나옵니다. 음욕은 사랑에 잠길 때만 빠져나갑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사랑에 잠길 때만 빠져나갑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머니 품에 푹 잠기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무 부족함이 없고 온전한 평온을 누리게 됩니다.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족감에 시달리고, 불안감에 시달리고, 불쾌감에 시달리는 것은 모두 내 안이 비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안의 부족에 시달린다는 것은 내 영혼이 가난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이 가난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흔히 서로 뺏고 빼앗기는 이전투구를 하게 되고 사랑을 갈구하게 되고 심지어 결혼으로 그 허전함을 채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부족감은 사람으로도 물질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이 부족감을 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만일 지금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하나님과 접속되어 있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connected가 아니라 disconnected 상태인 거죠. 이 상태를 빨리 바로잡지 않으면 우리 인생 전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버립니다. 어쩐지 불안하다, 뭔가 부족하다 느낄 때 민감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접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

 

저는 저의 장례식에서 부를 찬송가를 미리 정해 놨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죽기 전에 장례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 보고 싶은 사람들 만나 오해가 있다면 해명하고 잘못이 있다고 용서를 구하고 마지막으로 서로를 축복하는 기도로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노후대책이 아니라 사후대책을 마련해 놓고 살아야 합니다 -

 

영적으로 무기력감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겁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지?’ 하지 마십시오. 누구한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 어떤 터널이든 끝이 있다는 걸 아는 겁니다. 영원한 무기력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건 내가 묶인 것들로부터 자유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이란 묶인 것들로부터 풀려나는 것입니다. 특히 죄책감만큼 우리를 무겁게 하는 게 없습니다. 그 죄책감으로부터 풀려나면 다시는 죄짓고 싶지 않게 됩니다. 자유함, 놀라운 기쁨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국 해러즈백화점의 회장이 돈으로 해결하지 못할 게 없다고 믿고 살았는데 말년에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는 걸 알았다고 합니다. 그건 바로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원하는 건 다 가졌지만,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했을 때 돈이 만능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는 겁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새로운 차원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실은 절제에 실패한 게 아니라 관계에 실패한 게 아닐까요? 이것은 더 나아가 목적에 실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내와 소망은 마치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트랜스 퓨전과 같습니다. 인내로 견디면 소망이 흘러 들어오고 이 소망이 다시 우리의 면역력과도 같은 인내력을 부스팅하는 거죠.

 

찬송가를 8천 곡 이상이나 쓴 패니 크로스비는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의사의 실수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이 불운을 딛고 일어섰으나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는 고통을 겪는 등 그의 불운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한 기자가 당신이 눈을 뜨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물었을 때 크로스비는 나는 눈을 뜨지 않겠어요. 내가 눈을 잃었기 때문에 눈을 뜬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볼 수 있거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느 아프리카 부족은 누군가 잘못을 하면 그를 중간에 앉혀 놓고 빙 둘러앉아 그가 이전에 어떤 선한 일을 했는지를 열거한다고 합니다. 법으로 재판을 하는 게 아니라 그의 선함을 부각시켜 그가 잘못에서 돌이켜 회복되도록 돕는 겁니다.

 

불운은 불운한 사건이 2% 영향을 미치고 그것에 반응하는 내 태도가 나머지 98%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내가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거지요. 내가 그렇게 반응하기로 결정한 겁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돌아온 빅터 프랭클은 사람이 망가지는 것은 고통 때문이 아니라 의미 없는 고통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인생의 격을 만들게 됩니다. 바로 인격입니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냥 더불어 살아야 해요. 다만 상처를 계속 바라보며 묵상해선 안 됩니다. 그럴수록 상처에 붙들려 살게 됩니다. 대신에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전신이 찢기는 고통을 당한 예수님은 내 고통을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우리가 상처를 이기는 길이 됩니다.

 

인생의 행불행을 결정짓는 건 삶의 환경과 조건이 아닙니다. 관점이고 태도입니다. - <

 

저는 힘든 상황이야말로 주님이 인도해 주시는 상황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다가 더 잘되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비교할 수 없이 잘되는 길이라 믿고 신앙생활 하십시오. ‘세상을 이겼다는 것은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아니라 최후 승리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그 마음에 살아 계신 사람입니다. 성령님이 살아 움직이는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 안에는 우주가 들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온다는 건 우주가 오는 것이다라는 표현도 있지요.

 

인간은 누구나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죄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조건 없이 잘해 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플랜A’라고 불러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원래 이 플랜A를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를 이뤄 가시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플랜A를 폐기 처분해야 할 상황이 생긴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도리어 하나님을 버린 겁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게 그 삶의 목적이던 이스라엘 백성이 도리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으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득이하게 플랜B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플랜B는 무엇입니까? 듣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겠지만, 플랜B는 불신자들을 이용해 배신자가 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시 돌이키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앗시리아를 돌이키기 위해 그곳으로 가기 싫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앗시리아가 요나의 말을 듣고 죄를 돌이키면 그들이 종국에는 이스라엘을 치러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앗시리아의 침략은 그야말로 이스라엘 땅을 황폐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 플랜B는 이스라엘로서는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계획은 양보가 없으십니다. 우리는 그런 고통이 없는 신앙을 원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더 큰 악을 이용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를 내려놓는 겁니다. 하나님은 내 것 아닌 것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가 쥐고 있는 것들이 내 것 아닌 것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에서 아홉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습니다. 거룩하라, 돌이키라, 나를 알라, 사랑하라, 하나 되라,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증인 되라가 그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으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겁니다.

 

짐 월리스의 말에 따르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나누는 것이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소명은 부담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에 마음이 아픈 지점, 거기가 소명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꾸 마음이 가고 부담이 느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이고 둘째는 성령님, 셋째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 세 가지로 크로스 체크하면서 검증하면,

 

첫째, 말씀에 비춰 보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으니 원수를 미워하는 건 내 뜻입니다.

 

둘째, 성령의 내적 증거로 알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자꾸 불편하게 만드십니다. 기도해도 불편함이 사라지지 않아요. 내 뜻을 구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도할수록 편안해집니다. 기도할수록 마음이 불편하다면 사표 내지 말라는 뜻이죠.

 

셋째,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일에 설교를 듣다가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지는가 하면, 누군가 선물로 준 책을 읽다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전심을 다해 그 뜻을 물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대답해 주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요셉은 상황에 지배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지배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디테일과 스케일이 다 있는 사랑입니다.

 

내가 그 사람한테 필요해서 결혼해야지 내가 그 사람이 필요해서 결혼을 결심하면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의 부족을 채워 주고 싶다는 동기로 결혼을 하면 은혜로운 결혼 생활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나의 부족을 채우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그의 부족을 채우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은혜를 공급받는 사람은 남한테 공급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부족은 절대 사람을 통해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충족시킬 수 있어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형성한 사람은 수평적인 관계인 배우자, 자녀, 사람들과도 건강한 관계를 맺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 공허함이 채워져야 합니다.

 

결혼에 대해서는 제가 늘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첫째는 좋은 배우자를 찾기 전에 내가 좋은 배우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좋은 배우자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내가 좋은 배우자가 되지 않으면 백마 탄 왕자를 만나도 관계를 망치고 맙니다. 왕자도 거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내가 진짜 훌륭한 배우자라면 거지를 왕자로 만들게 됩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냐에 달려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내 욕망, 내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서 결혼을 허락하시지 않았다는 겁니다. 어쩌면 오히려 우리의 모난 부분을 다듬기 위해 결혼을 허락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허물어지지 않고서는 새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나를 세워 가기 위해 하나님은 나를 허물만한 능력이 있는 배우자를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게로 들어올 때 성적인 충동이 사랑이 아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을 닮아 가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더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게로 들어올 때 성적인 충동이 사랑이 아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을 닮아 가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더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2:25). 이는 모든 허물과 단점을 다 드러냈음에도 서로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런 사랑을 했다는 겁니다. 성숙한 인격에 이르지 않고는 이런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설사 성적인 이끌림에 의해 사랑해서 결혼했다 하더라도 거기에 머물러선 안 됩니다. 서로 벌거벗었지만 부끄럽지 않은 관계,그 허물까지도 같이 책임져 주는 관계, 서로 보호하고 지켜 주는 관계, 함께 인격이 성숙해 가는 그런 인격적인 사랑을 지향해야 합니다.

 

‘Fall in love with someone’, 성경적으로는 이런 표현이 틀렸다고 봅니다. 사랑은 빠지는 게 아니라 건져 내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였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요한은 가룟 유다에 대해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12:6)라고 표현합니다. 가룟 유다는 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던 겁니다. 사랑이 없으면 계산부터 합니다. 내가 이 시간을 들이면, 내가 이 재능을 기부하면, 내가 돈을 들이면 내게 얼마나 돌아올까, 얼마나 보답을 받을까를 계산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걸 잔머리 굴린다고 말하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안 따집니다. 사랑은 허비할 줄 아는 겁니다. 기꺼이 허비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내 시간을 드리는 것, 내 재능을 드리는 것, 내 모든 걸 드리는 게 아깝지 않습니다. 가성비나 효율성을 따지지 않기로 작정한 겁니다. -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삭개오 집에 가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을 때 예수님은 굳이 삭개오 집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십니다. 구원은 어디에 임합니까? 그런 간절한 마음, 가난한 마음, 하나님을 어떻게든지 알고자 하는 마음, 그 마음에 구원이 임합니다.

 

마음에 안 맞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꾸 미운 마음이 생기십니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습니다. 나도 내가 마음에 안 들 때가 많잖아요. 내 힘으로는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 오셔야 비로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사랑하면 어른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기준이 아니고 당신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기준이 아니고 당신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소중한 당신을 배려하니까 내 감정, 내 느낌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성숙해집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구원으로 인해 죄로부터 벗어났기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쁨이 샘솟듯 해서 남을 기쁘게 하고 세상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 낙심하는 까닭은 그 행위의 주체가 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뭔가 행하다 어떤 가시적인 결과가 없으니까 낙심하는 겁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지쳤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 게 아니라 내 일을 한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일을 했다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 3:13)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는 낙심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그 기쁨이 고갈되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목회자인데, 사역자인데 지쳤다면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 일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한 일이었던 겁니다.

 

주일을 안식으로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 중심이라는 독소를 주일 하루만이라도 해독하라고 주일에 안식하라 하신 것입니다. 독소를 빼는 시간, 쉼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의미 있는 쉼은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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