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배경은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를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마태는 이 장소를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가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쯤 되면 과연 이 장소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장소는 갈릴리로부터 약 40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곳으로서, 경관이 너무 좋아 일찍부터 개발된 곳이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곳에 휴양하러 온 가이사가 자신의 이름을 붙일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이사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그곳의 규모가 일정 이상으로 커야 했으며, 황제의 신전이 도시의 중심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헤롯은 유명한 기술자를 불러 도시의 중심에 황제의 신전을 세웠습니다. 이 도시는 로마의 황제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도시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의 힘을 상징하던 가이사랴 빌립보로 가셨던 것입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기가 질렸을지도 모릅니다. 갈릴리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이 이 화려한 성읍에 왔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게다가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주님은 그 성의 주변도 아니고 그 주변의 최중심부에서 황제의 신상 앞에서, 혹은 그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을 것입니다.
"이 화려한 도시를 보아라. 그리고 대답해 보아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비록 세례요한이나 예레미아나 엘리야와 같은 사람들이 대단한 선지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 말은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이 대단한 선생이요 선지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저 황제와는 달리 경배 받을 대상은 되지 못합니다. 라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존경하고 존중할지는 몰라도 경배하고 신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가 그들과 동일한 한 인간이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냐 하느냐?"
세상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본다면, 과연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고 묻고 있으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으신 것 같습니다.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들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지에만 관심을 쏟는 것 같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수제자 베드로가 멋진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이 베드로의 대답은 이 이야기의 배경을 생각할 때에 더욱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휘황찬란한 모습을 보면서도 겉보기에는 초라해보이던 예수님을 높였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님만을 의지하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로마에 가면 거인국에 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건축물들이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한지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기고 만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했던 질문을 오늘날에도 똑같이 하십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주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이라고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고백이 우리들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자는 스승의 삶을 배우고 그 삶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는 것은 첫째, 그 시대정신을 부인하라는 말입니다.
로마의 정신을 부인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너무나도 힘든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시대의 아들, 딸들입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시대의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로마시대를 살던 제자들도 역시 그 시대정신에 오염을 받았을 것입니다. 로마가 주는 물질적인 이기와 편의는 로마의 문화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 로마 정신을 부인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는 경제의 논리,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을 효율성으로 판단합니다. 돈이 되느냐, 돈이 되지 않느냐, 돈이 되면 얼마나 되느냐가 우리가 사는 현대의 사상입니다. 심지어는 사람의 가치까지도 돈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다보니 스파르타에서 능력 없는 자, 연약한 자, 장애인들을 죽였던 것처럼, 나치와 일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은연중에 그런 일을 자행하고는 합니다. 돈을 벌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옳은 일이 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진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숯을 가까이 하다보면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자신의 몸에 숯검정이 묻게 됩니다. 이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세상의 논리에 물들게 됩니다. 교회도 거기서는 자유롭지가 못합니다. 신앙생활 잘 하면 부자가 된다고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신앙생활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교회는 신앙생활 잘 한 교회라고 생각하고, 작은 교회는 신앙생활을 잘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시대정신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세상적인 사람이 됩니다. 시대정신을 거부한다는 것은 이 시대의 획일적인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버림이 공을 위한 버림이 아니라 얻음을 위한 버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버림으로서 주님의 것을 얻기 위한 버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생명을 소유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생명을 버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기 버림의 의미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며,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삶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은 성경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성경을 묵상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깨닫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능력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도상에서 자의든 타의든 그리스도와 한번은 대면하게됩니다. 예수님 시대에서나, 오늘 우리 시대에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 간에 언제나 문제시되는 것은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것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서로 상반되는 이해와 기대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야적 사명과 성격과 그 의미가 숨겨져 있을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부인 없이 그를 따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생의 행복, 평안, 생의성취를 위해서 그를 따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이기적 관심과 지상에서의 안전을 부정하십니다.
본문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부정과 긍정이 있습니다. 부정으로는 자신을 결정적으로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부인은 자신의 인격을 부인하거나 순교자로서 죽는다거나 회의주의자들처럼 모든 것을 부인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깊은 뜻은 "오히려 자기중심성의 우상과 이기주의 적 동기에서 자신의 삶을 규정짓고 방향지으려는 모든 시도에서 벗어나는 것, 즉 자아 부정을 의미 합니다. 자아 부정이라는 말은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모순이 있는 것처럼 이해됩니다. 심리학에서 상한 인격의 치유는 상실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상처입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아 상실'로인한 정서적 혼란으로 고통받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상실한 참 자아를 발견한 후 그 자아가 억압되거나 체면과 허세에 의해 위장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서 엄연한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숨기거나 포기할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 어린시절부터 역기능 가정에서 자라서 진정한 자기자신을 억압하고 숨기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의 눈치와 다른사람의 평가에 얽매어 그들의 비위에 맞추어 가면서 살아가는 자기부인의 삶이 있습니다.
두 번째 경제적 이해 득실에서 일시적으로 이득과 처세를 위해 자기자신과 주장을 숨기고 상대방의 뜻을 따르는 경우입니다.
세 번째 분명히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당당히 자기 주장을 표현하며 살아가다 인생의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의 주장과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부인은 세 번째 경우에 속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의 계획, 자신의 생의 성취를 위한 분명한 신념, 생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실 때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신의 신념, 인생관을 절대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원래 유대인들의 상징이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로마시대 형틀로써 그 상징을 통해 연상되는 장면은 강압에 의해 십자가를 지고 도시를 지나 자기 처형장소까지 감으로써 로마에 자신이 복종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죄인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신이 전에는 반항했던 권위에 굴복하고 복종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에 예수께서 복종하신 것은 하나님의 요구에 마땅히 응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임을 삶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숨겨져 있고 부활의 영광에서 밝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명과 성격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이해되지 않곤합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너무 교리화 되어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문제가 언제나 왜곡되어 나타납니다. 교회에서 강조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받고 평안을 누리다가 나중에 죽으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이에 있는 그리스도를 따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이 이 현실의 생의 여정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가야 할 사항임을 우리는 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인생의 여정에서 이루어져야하는 과제입니다. 그 여정에서 끝임없이 자기 부인을 해가면서 그를 따라야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의 여정에서 전연 다른 방식으로 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국 연방정부의 고위 관료이자 주서독 대사였던 아더번즈는 상당히 비중있는 인물이였다고 합니다. 그는 중간정도의 키와 은빛 곱슬머리 그리고 파이프로 상징되는 그는 아이젠하워에서 로널드 레이건에 이르는 수많은 대통령의 경제 자문관으로 활약했습니다. 그의 의견은 무게있게 다루어졌고 워싱턴 정가는 거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습니다. 그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아더 번즈는 유대인이었는데 1970년대에 백악관의 비공식적인 기도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사실상 그 모임에서 아무도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으며 매주 돌아가면서 한 사람이 마무리 기도를 했는데 번즈는 거기에서 줄곧 면제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존경과 조심스러움 때문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번즈의 특별한 지위를 모르는 새로운 참석자가 모임을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모임이 끝날 때가 되자 그는 아더 번즈에게 마무리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모임에 이전부터 참석해 왔던 몇몇 사람은 놀란표정으로 서로 쳐다보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의아해했습니다. 그러나 번즈는 곧 손을 내밀어 둥글게 둘러선 다른 이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회교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끝으로 주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그후 아더 번즈의 기도는 워싱턴에서 전설적인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신선하고 단도직입적인 기도로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과 '기독교'를 향해 중요한 일침-정기적으로 반복할 필요가 있는-을 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도달한 자가 아니라 이생에 있는 동안 항상 '그리스도의 추종자'요 '그 도'를 따르는 자로서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란 사실입니다.
오스 기니스가 쓴 "소명"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인, 기독교라는 세용어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첫 번째 용어가 두 번째로 그리고 세 번째로 진전되는 과정에서 두 방향 중 한 쪽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인격적인 것으로부터 비인격적인 방향으로 흐르거나 혹은 참신하고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제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종종 타락한-방향으로 흐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해 매력을 느끼더라도 '기독교'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거나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매우 많다."고 했습니다.
오스 기니스의 견해에 따르면 "물론 그 이유는 타락한 세상의 현실에 있습니다. 죄의 현존과 시간의 흐름이라는 두가지 요인 때문에 어떤 인격적인 관계나 영적인 체험도 자율적인 영속성을 지닐 수 없습니다.각각은 계속해서 영양분을 공급하고 유지하고 부채질 해주어야 불꽃을 본존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사라지고 맙니다. 영적인 부흥도 오래 지속 될 수 없습니다. 인격적인 것과 영적인 것에 적용되는 자연적인 영적 소생의 능력의 경로는 몰락과 죽음을 향해 가거나 위축되고 추한 모습,즉 '형식주의적'이 됩니다. 반복을 하다보면 비범한 것도 평범하게 혁명적인 것도 일상적으로 변해 버립니다." 그는 '그리스도'는 자유롭고 신선한 반면에 '기독교'는 종종 형식적이고 죽은, 혹은 더 나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노병과는 달리 신앙의 낡은 표현 방식과 종교기관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그것들은 본래의 목적을 망치고 왜곡시키며 심지어 그 목적과 모순되는 산물로 땅을 가득 메우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지난 2000년에 걸쳐온, 기독교 역사에는 너무나 많은 비 신앙적인 것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티셔츠에 이런 구절이 쓰인적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신의 추종자들로부터 나를 구하소서.' "
오스 기니스는 말하기를 "다행스럽게도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에 따라 살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이들이 어느 정도는 있지만, 그러나 슬픈 사실은 전반적인 교회사는 종종 교회가 그리스도의 모범에서 이탈하고 '기독교'가 그리스도를 선전하기 보다는 스스로가 정죄하는 악한 모습을 공공연하게 보여 온 이야기가 더 많다."고 했습니다.
"에라무스는 그의 동시대인에게 당시의 더욱 타락한 세대에 대해 이렇게 상기시켰습니다. '터키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한다면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오스왈드 챔버는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킨 것이 너무나 놀라워서 나는 그 어떤 사람도 단념할 수 없다.' "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번 해볼만한 일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일입니다. 그 길이 바로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이것은 이 세속 사회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행위이며, 이 현실에서 영원한 생명을 추구해 가는 길입니다. 성도 여러분 금년 한 해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분을 따르는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진정한 십자가의 의미는 여러분들의 소명을 의미합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들의 위치에서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감당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은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첫째는,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이며, 둘째는, 천국 열쇠를 맡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베드로에게 주셨던 것과 같은 축복을 부어주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축복을 온전히 받고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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