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탁월한 정신으로 일하는 사람들(수 14:6-15)
앞으로 우리는 탁월함으로 세우는 교회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교회는 왜 탁월함이 필요할까요?
모든 봉사에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Do your best in every area of service). 골로새서 3:17에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주의 일을 할 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우수성, 사역의 우수성, 성도의 우수성을 말합니다. 바로 그 우수성을 탁월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탁월함의 매력(The attraction of excellence)을 가지고 있어야 효과적으로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성도들이 교회에서 환상적인 광경을 보면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자신이 본 것을 전달하고 싶어 합니다. 예를 들어 예배를 드렸는데 감명과 감동을 받은 탁월한 예배를 체험했다면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안드레가 그의 형제 베드로에게 가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 1:41-42). 안드레는 시몬을 데리고 예수께 왔습니다. 왜 안드레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올 생각을 했을까요? “메시야를 발견했기(found the Messiah) 때문"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한 것도 동일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한복음 1:45-47). 빌립도 예수님을 발견하고 체험했던 사람이기에 나다나엘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드레이든 빌립이든 그들 자신이 체험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가서 자신의 체험을 들려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탁월한 체험을 하면 우리가 체험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 할 것입니다. 특별한 체험을 했다면 더욱 자랑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탁월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저는 미국의 사우스이스트 크리스천 교회(Southeast Christian Church)의 예를 들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원리를 통하여 성장하는 모범적인 교회이며 현재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그러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거룩한 욕심 때문입니다.
사우스이스트 크리스천 교회는 2001년 한해에 교인들이 교회로 새롭게 초청하는 불신자들의 수가 14000명이었고 이 일에 전교인의 90%가 참여했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인 러셀 목사는 이렇게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길 ‘그들은 매주 교회에서 충격을 받을 정도로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교회는 안내, 찬양, 예배, 설교, 양육, 돌봄 등이 탁월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교회가 준비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고 전도에 대한 열정도 없고 환영하는 교회의 모습도 하고 있지 않다면 어떤 교인이 ‘와서 보라’고 감동적으로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최선을 다하여 탁월함을 보여줄 때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교회에 대하여 말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교회가 되고 탁월함을 체험할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은 교회 부흥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탁월함은 교회의 미래를 밝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다면 탁월함으로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첫째, 탁월함이란 최대한 노력(hard work)을 하는 것입니다.
탁월하게 일한다는 것은 힘든 노력을 우선으로 해야만 합니다. 사우스이스트 크리스천 교회의 예배 봉사자들은 2시간 전에 와서 예배준비를 한다고 했습니다. 러셀 목사는 한편의 설교를 위해 매주 15-20시간을 준비한다고 했습니다. 그 자신이 발견한 것은 ‘좋은 설교’와 ‘탁월한 설교’의 차이는 바로 5시간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탁월한 설교를 하려면 더 열심이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탁월함이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사우스이스트 크리스천 교회의 성도들은 교회의 건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아름답게 세워져야 올바른 것이라고 하면서 청소부터 건물을 관리하고 잔디를 보호하는 것에 최선을 노력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바닥에 먼지하나 없이 밤을 새우면 청소하고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있기에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탁월한 교회로 만들기 위하여 수고하는 열심이 있는 교회인가를 사람들이 인정하고 신뢰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도 닮아야 될 실천행동입니다. 교회 성장이나 부흥은 힘든 노력의 결과입니다. 탁월함이란 최대한의 노력입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탁월한 노력의 열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 22:3).
둘째, 탁월함이란 세밀한 부분까지 명료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우스이스트 크리스천 교회는 어느 부서이든지 자원하는 봉사자들이 넘치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을 탁월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이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원봉사자들도 충분한 훈련을 통해서 가르치고 관리하고 확인하여 최고의 우수한 일꾼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활절, 추수감사절 행사나 교회의 특별프로그램들을 준비할 때 하나하나 세밀하게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빈틈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사우스이스트 크리스천 교회의 교인들을 위한 리더십 컨퍼런스에서 참가자의 명찰(name tag)에 이름이 틀렸을 때 교인 중 자원봉사자가 발견하고는 새로운 것으로 다시 프린트해서 만들어주는 것은 항상 세밀하게 끝까지 마무리하는 모습 중의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탁월함이란 세밀한 것인 동시에 명확하게 끝맺음까지 잘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일하는 곳입니다. 그 일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끝맺음을 잘하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일꾼의 생명은 마무리를 잘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땀을 흘리며 씨를 뿌렸다 할지라도 추수를 못하고 창고에 들여 놓지도 못한다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낭비한 것입니다. 탁월하게 일하는 것은 세밀하게 끝까지 일을 잘 마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13:7). 하나님은 끝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탁월함은 끝까지 잘하는 것입니다.
셋째, 탁월함이란 끊임없이 부지런해야 하는 것입니다.
새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고 해서 그 집이 영원히 아름답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손질을 하고 페인트를 칠하고 유리를 닦아주고 고장 난 것은 고쳐주어야 늘 새집에서 살게 됩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고 탁월함을 유지하려면 계속해서 끊임없이 일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시작하는 프로그램이 탁월했다면 그 다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하는 부지런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역을 더욱 잘하려면 더 부지런해야 합니다.
탁월함이란 부지런한 땀의 양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일의 성취도 중요하지만 노력하는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로마서 12:11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게으른 교회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탁월함이란 부지런한 것입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살피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모습으로 탁월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탁월하게 일할 수 있습니까?
먼저 오늘 본문의 인물인 갈렙의 정신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잠시살피며 배경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나와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을 하게 됩니다. 그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는 12명의 정탐꾼을 40일 동안 보낸 후 돌아온 그들로부터 보고를 듣게 됩니다. 12명의 정탐꾼 중의 열 명은 그 땅을 취하기 불가능하다고 보고를 하였고 나머지 두 명의 정탐꾼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음으로 소망 있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로 세워졌지만 갈렙은 화려하게 소개되지 않고 숨겨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교회를 탁월하게 세우고 탁월한 일꾼으로서 사역을 하려면 갈렙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화려한 지도자가 아니라 갈렙과 같은 용기의 지도자가 필요하며 승리를 경험하는 지도자가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어떤 사람입니까?
7-8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갈렙은 성실한 사람입니다.
갈렙은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사람입니다.
다시 11-12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갈렙은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은 사람입니다.
다시 13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결국 갈렙은 헤브론을 기업으로 얻는 축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개척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탁월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갈렙은 10명의 다른 정탐꾼과 특별하게 다른 점이 없는 평범하게 가나안의 상황을 본 사람입니다. 똑같이 보았고 똑같이 느끼고 똑같이 그곳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가 있었습니다. 가능성의 세계, 믿음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대한 보고를 들을 때 그 땅의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아낙 자손이 있다고 했을 때 백성들은 실망과 두려움과 낙심과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더 이상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그 땅을 취하자’라고 했습니다. 이런 갈렙을 민수기 14:24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갈렙을 ‘마음이 다른 사람’(a different spirit)이라고 했습니다. 즉 정신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반응은 같은 상황이라도 다르게 보입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 똑같은 일을 해도 다릅니다. 하나님을 보는 사람과 세상을 보는 사람은 다릅니다. 바로 교회가 그런 곳입니다.
그러므로 왜 탁월한 정신이 먼저 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교회는 믿음을 크게 보고 일하는 것입니다. 교회 일은 실력이 있기 전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여건이 조성되고 환경이 좋아질 때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는 우리가 가진 것의 양의 아니라 우리의 믿음입니다.
인간은 한계적 동물입니다. 약속의 땅은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인간의 능력으로 전쟁을 치루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정복은 믿음으로 하는 정복입니다. 산지의 얻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산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정복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산지들이 높이 서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산을 옮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하겠다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탁월한 교회, 탁월한 직분자, 탁월한 사역을 원한다면 먼저 갈렙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탁월함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정신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갈렙이 소유한 탁월함은 개척자의 정신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갈렙이 구하는 땅은 편지가 아니라 산지였습니다. 헤브론은 산악 지대에 있는 땅입니다. 그리고 아낙 사람이 살고 있는 거인 족의 땅이며 천연적 요새였습니다. 그렇지만 갈렙은 그 땅을 원했습니다. 보통 사람이 원하는 땅은 기름이 흐르는 젖과 꿀의 땅일 것입니다. 돈이 되는 땅,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라 아무도 원하지 않는 땅을 갈렙은 원했습니다.
이것은 개척자만이 할 수 있는 정신입니다. 개척 정신이란 아직 어떤 사람도 한번 가보지 않은 땅을 가서 취하고자하는 정신입니다. 이것은 희생과 대가를 치루는 정신입니다. 위험과 두려움을 극복해야 얻을 수 있는 정신입니다. 바로 교회 일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거칠고 척박한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1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갈렙이 얻은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로 ‘아르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헤브론의 뜻은 ‘교제’ 하나님과 교제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도시가 하나님의 도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의 도시로 만들기 위하여 뛰는 사람이 바로 영적 개척자입니다.
교회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터를 넓히고 사람들을 많이 키워내고 탁월한 일터, 탁월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다니는 모든 성도는 갈렙과 같은 개척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경우는 내가 싫어하는 땅을 경작하고 가지 싫은 곳을 향해 가야하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헤브론 사역을 해야 합니다.
갈렙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룬 축복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유업을 받은 축복의 인물입니다. 교회에 필요한 사람과 교회 사역을 하는 우리의 정신은 갈렙과 같아야 합니다. 탁월한 믿음의 정신, 탁월한 개척자로 앞으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희생해야 우리 교회가 탁월한 교회가 됩니다. 교회는 믿음을 검증받는 곳이고 대가를 지불하는 곳입니다. 교회를 탁월하게 만드는 것은 탁울한 사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해오던 모습과 다른 사람이라는 칭찬을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믿음의 훈련을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개척자의 정신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헤브론을 향하여 달려가는 탁월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두려움을 극복하는 탁월한 개척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실과 하나님의 뜻을 좇는 탁월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탁월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마가복음 10:42-45)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아름다운 삶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4에서 “푯대를 향하여”라는 특별한 인생 목표를 세우고 달려갔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4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하시면서 마지막까지 그 하나님의 일을 목표로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신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탁월함도 하나의 목표입니다. 탁월한 교회가 되는 것이나 개인적으로 탁월한 일꾼이 되는 것은 목표입니다.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탁월함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탁월한 자세 즉 태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떤 태도를 가져야 탁월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탁월한 일은 탁월한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이유를 분석해 보면 태도가 올바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탁월한 사람이 되는데 필요한 태도에 대한 주님의 역설적 메시지입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3,44)고 했습니다. 크고자 하는 자나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란 탁월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크고자 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great)을 뜻하고 으뜸의 사람은 첫째의 사람(first)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위대하고 첫째가 되는 사람이 되는 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종이 되는 것(to be servant)과 섬기는 것(to be served)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섬김이 먼저이고 첫째의 사람은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탁월한 사람이란 위대하고 첫째 되는 사람인데 그는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도를 말합니다. 섬기는 것이나 종이 되는 것은 이론신앙이 아니라 실천신앙입니다. 머리 신앙이 아니라 손과 발이 따라가는 신앙입니다. 이런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탁월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도자라고 했고 탁월한 지도자는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주면서 일하는 탁월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시하신 탁월한 사람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섬기는 종으로서 리더가 되는 것이 탁월한 사람이라고 할 때 그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까? 3가지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탁월한 교회가 되는 것은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데 어느 날 우리 교회가 탁월한 교회가 되고 탁월한 사람들로 가득 채워지지 않습니다. 탁월한 사람이 되기 원한다면 먼저 탁월한 책임의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진실로 위대한 사람이 되고 첫째 되는 사람으로 쓰임을 받기 원한다면 이러한 태도를 실천해야 합니다.
첫째, 탁월한 거룩함의 태도를 가져라.
왜 탁월한 사람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이 거룩함에 있는지 아십니까?
창세기 49:3-4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입니다. 르우벤은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탁월한 사람이 되지 못한 이유는 거룩함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르우벤은 특별하고 다른 형제들과 비교될 수 없는 축복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입니다. 야곱은 다른 자식들보다 2배의 축복과 분깃을 르우벤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탁월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이유는 거룩을 소홀하게 여긴 것입니다. 침상을 더럽히며 누울 자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태도로 인하여 탁월함을 박탈당한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거룩하지 못하여 그 위대해 질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영향을 주기 위하여 특별한 사람들로 부르실 때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시편 110:3에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라고 능력의 날에 주의 쓰임을 받는 사람들은 거룩한 옷을 입은 사람과 즐거이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거룩한 옷을 입은 사람이란 사도 요한이 표현한 것처럼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사람”(계 19:14)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들을 부르셔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세우도록 하십니다. 교회는 거룩한 백성, 거룩한 군대들이 모인 곳이어야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땅이 없고 돈이 없고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이 쓰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다같이 베드로전서 1:14-16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탁월한 사람이 되려면 예전에 좇던 삶을 버리고 사욕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사람은 무엇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입니까?
출애굽기 20:11에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라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지키는 것이 거룩의 기초입니다.
탁월한 사람의 태도는 일을 먼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서 거룩하게 산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거룩은 시간의 질서, 삶의 질서, 영적 질서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탁월한 사람은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삶의 최우선으로 놓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가 탁월한 교회가 되려면 주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거룩한 사람이 탁월한 태도를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 탁월한 긍휼을 베풀라.
탁월한 사람이 되는 두 번째 조건은 긍휼함입니다. 왜 긍휼함이 탁월함의 조건이 되는지 사도 야고보의 말씀을 보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
긍휼(mercy)이란 상대방을 향하여 마땅히 베푸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은혜와는 다릅니다. 은혜란 거저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원한 생명, 구원, 중생, 하늘나라는 예수를 믿으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받을 수 없는 가운데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말씀입니다.
내가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심판의 그날에 나에게도 긍휼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때 의를 기준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그 의는 긍휼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일을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내가 긍휼을 베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무 자신의 고집을 앞세우다가 자비를 베풀지 못한다면 우리도 긍휼함을 받지 못하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긍휼을 베푸는 곳입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긍휼함의 체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니엘의 기도를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9:18-19)
다니엘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긍휼을 의지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을 사자의 굴에서 구원하고 위대한 지도자로 사용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탁월한 사람은 긍휼을 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사역은 의로 하기보다 긍휼로 하는 것입니다. 의를 강조하다가 사람을 잃고 교회가 분열이 되고 상처를 주면서 교회를 세워간다면 그 교회는 심판의 때에 견디지 못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긍휼의 심판을 기억해야 합니다.
탁월한 사람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는 다니엘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용서하소서”라는 기도는 기도 중의 기장 위력있는 기도입니다. 저 사람을 심판해 달라는 기도나 저 사람을 손봐달라는 기도는 긍휼이 없는 기도이며 칼을 들고 기도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탁월한 지도였습니다. 그의 지도력은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될 지도력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유다 광야에서 지낼 때 400명이 몰려 왔습니다. 사무엘상 22:2에 보면 그 사람들의 종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데리고 다윗은 그들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신분 회복을 위하여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 다윗이 왕이 되어 강한 지도력을 갖고 나라를 세울 때 함께 했던 용사들이(삼하 23:8-39) 필요했는데 바로 유다 광야 아둘람 굴에 살았던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긍휼함을 갖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긍휼과 자비는 소극적인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소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신뢰하며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긍휼을 베풀면 찾아오는 3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첫째,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
둘째, 서로 성장을 하게 합니다.
셋째, 유익을 함께 얻게 됩니다.
교회의 사역은 긍휼의 사역입니다. 교회는 옳고 그름을 따지며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한 곳이라면 죽음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소망을 주며 허물과 단점을 가려주게 된다면 어떤 사람들도 치유를 받고 생명을 얻는 곳이 될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교회가 아니라 긍휼을 알게 하는 교회가 되도록 탁월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셋째, 탁월한 정직을 행하라.
탁월한 사람이 되는 세 번째 조건은 정직입니다. 정직은 태도입니다. 오늘날 가장 필요한 사람의 유형 가운데 정직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은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위대한 첫째 되는 사람도 정직한 사람입니다.
신명기 6:18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히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하신 아름다운 땅을 들어가서 얻으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
신명기 13:18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정직을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은 모든 사람 앞에서의 정직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정직의 관계란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정직한 관계를 갖고 있어야 하나님은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이 탁월한 지도자들로 세운 사람들이 왕입니다. 역대하서에 소개된 왕들을 나열하면서 그들을 쓰시고 버리시는 기준이 정직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정직을 행한 왕들은 나라도 평안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쓰셨던 정직한 왕들은 여호사밧(20:32), 요아스(24:2), 아마샤(25:2), 웃시야(26:4), 요담(27:2), 히스기야(29:2), 요시야(34:1,2) 왕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나라를 탁월하게 다스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역대상 29:17에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라고 다윗은 하나님이 정직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정직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거절하는 사람은 거짓을 행하는 자입니다(잠 6:16-19). 거짓은 하나님의 미움을 받습니다. 거짓은 심판을 받습니다(계 22:15). 거짓은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행동입니다(잠 17:9).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축복하십니다. 시편 112:2에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약속했습니다. 복을 받는 교회를 만드는 것은 나의 정직함에 있습니다. 가정과 가문의 축복도 정직함에 있습니다.
정직한 자에게 기쁨을 주시고(시 97:11), 정직한 자에게 의를 베풀어 주십니다(시 36:10). 정직한 자를 돌보시며(욥 8:6) 그의 삶을 인도하시고 고난에서 구원하시며 그의 모든 필요를 채우십니다(시 125:4, 잠 11:6, 신 6:18,19). 무엇보다도 정직한 사람은 마음이 즐겁습니다(시 32:11, 97:11). 또한 정직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지혜를 주십니다. 잠언 2:7에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라고 하나님의 비밀의 지혜를 정직한 사람에게 미리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정직은 탁월한 사람이 되게 하는 자질인 동시에 실천 신앙입니다. 교회는 정직한 곳일 때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 됩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 거짓을 행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예레미야 9:23-24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탁월한 사람은 무엇을 자랑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정직을 땅에 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잠언 14:11의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다시 잠언 11:11의 말씀을 읽어드립니다.“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흥하는 집과 망하는 집의 기준이 정직입니다. 개인도 똑 같습니다. 흥하는 인생과 망하는 인생의 차이도 정직에 있습니다. 거짓을 통해서는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관계이든 직장에서든 돈 관리이든 경영이든 가정사이든 교회 사역이든 모든 것의 기준이 정직입니다. 잘되는 기업이나 교회도 정직에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정신, 물질,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더러우면 하나님은 버리십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능력과 축복을 주십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탁월한 사람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3가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듣는 것에 있지 않고 변화되는 것에 있습니다. 탁월한 태도는 거룩과 긍휼과 정직이라고 했습니다.
그와 같은 행동을 하려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사십시오.
둘째, 빛 가운데 사십시오.
셋째, 하나님의 뜻을 제일 자리에 놓으십시오.
탁월한 사람은 탁월한 태도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탁월하게 쓰임받기 원한다면 탁월한 태도로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 서십시오. 하나님은 탁월한 사람 즉 거룩하고 긍휼을 베풀고 정직한 사람을 통하여 교회를 일으키시고 변화시키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탁월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을 달라지게 만들고 깨끗하게 만드는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거룩하게 세우는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하고 거룩한 모습. 긍휼을 베푸는 모습, 정직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쓰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 탁월한 행동을 실천하는 사람들(누가복음 6:46-49)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주신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복하고(subdue) 다스리는(rule over) 복을 주셨습니다(창1:28).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축복으로써 온 세상에 대한 인간의 대표권과 통치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성에 따른 인간의 모습은 정복하고 다스리는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영웅이 되고 초인되고 지식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으라는 의도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영향을 주고 변화시키는 탁월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형상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기는 알지만 그 영광에는 턱없는 행동만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썩어질 것과 바꾼 것입니다. 썩어질 사람을 의지하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쫓고 버러지 형상을 구하며 그러한 것들의 종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형상이 사라진 것입니다.
탁월한 사람이란 IQ가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 탁월한 사람이란 능력만을 소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탁월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감사하며 인간의 본분을 지키는 사람이 탁월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본분을 망각하면 썩어질 것을 의존하게 됩니다. 썩어질 것을 의존하면 하나님의 이미지가 깨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탁월한 사람은 로마서 12:2의 말씀처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죽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좇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세상의 형상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만 세상의 영광에 욕심내는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탁월한 사람은 세상에 대하여 못 박은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일들의 배후에는 나의 욕심을 채우다 벌어진 사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욕심은 죄를 만들어 내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는 “속지 말라”(약1:16)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의도로 그 일을 하고 있으며 누구를 위하여 하고 있느냐는 것은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탁월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탁월한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의 핵심이 바로 ‘행동’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탁월한 정신과 탁월한 태도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탁월한 행동은 정신과 태도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정신을 갖고 있다고 해도 탁월한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행동하는 신앙이란 행함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52:1에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시온은 교회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옷을 입혀 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가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다시 이렇게 옷에 대해서 말하길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61:10)고 했습니다. 신부는 자신을 가꿔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한 가난한 여자가 왕자의 청혼을 받았다고 할 때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결혼에 필요한 돈을 마련할 방법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복을 입지 않고는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그녀를 깊이 사랑하는 왕자는 혼인날 입을 옷과 보석을 사라고 그녀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돈으로 결혼에 필요한 신부드레스를 사지 않고 다른 것에 써버렸습니다. 그리고 결혼식 날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복 없이 나타났습니다. 왕과 왕자는 모욕을 당했다며 결혼을 파기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혼인의 날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결혼할 자격이 없다는 경고입니다.
이 말씀을 요한 계시록의 말씀으로 풀어준다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7-8).
그 옷은 바로 옳은 행실(dikaioma 디카이오마)입니다. 옳은 행실이란 의롭고 공정한 행동입니다. 성도는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에 대해서 강조한 사도가 야고보입니다. 그는 단오하게 행함에 대해서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약 2:20) 반문하면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언제나 두 부류로 사람을 나누었습니다. 행함이 있는 사람과 행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2-40).
복 받을 사람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던 그 사람을 찾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46절의 말씀에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고 행동하지 않는 믿음에 대한 주님의 질책입니다. 주님은 일생동안 섬기는 자로 행동하는 자로 사셨습니다. 그분은 영광을 받고 군림을 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분이셨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아주 강한 말씀입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행하지 않는 사람과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풀며 감싸는 행동을 하는 사람의 차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주님의 사랑을 받겠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9-10).
여러분들은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사람들임을 알고 계십니까? 그 때 주를 기쁘게 하는 사람이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몸으로 행하는 것에 얼마나 힘을 다했나가 기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유능하고 실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성경학자가 되고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라도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것은 엄청난 일을 하는 것이라기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잘해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행동 신앙이 핵심입니다. 실천 신앙이 초점입니다.
그렇다면 탁월한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두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그것은 ‘순종의 행동’과 ‘충성의 행동’입니다. 성도 여러분 중에는 순종과 충성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또 그 설교하시는구나! 이미 다 알고 있거나 오늘 설교도 지루하겠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그동안 알고 있던 것을 이 시간 버리고 지식적인 언어에서 행동의 언어로 다시 받아드리시길 바랍니다. 언제부터인지 교회에서 사라져가는 언어 중에서 고어처럼 취급받는 것이 순종과 충성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순종과 충성 없이 탁월한 교회, 탁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탁월한 순종의 행동이란 무엇인가?
빌립보서 2:5-8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은 순종의 절정을 이룬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분이라는 사실은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자신을 비어 종이 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 최대의 순종인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기도하실 때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라고 절대적 순종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순종을 통하여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히브리서 5:7-10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순종하는 삶에 대해서 심도 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순종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훈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순종을 훈련하셨습니다. 탁월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순종을 훈련해야 합니다. 만일 순종 훈련을 하지 않으면 불순종의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순종은 훈련을 통해서 세워집니다. 순종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오랜 기간 인내로 만들어집니다. 교회는 순종을 요구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고난의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고난의 훈련이 없이 탁월한 순종의 열매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실천하셨습니다. 불순종의 길은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며 말씀대로 살고 진리와 의를 행하며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섬기고 헌신을 하려면 많은 어려움의 겪어야 하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주님도 통곡을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그 길을 가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도 순종의 길을 그렇게 가셨는데 주를 따르는 사람인들 그 길로 가지 않는다면 어찌 순종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난의 길이 순종의 길입니다. 고난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길은 고난 없이 갈 수 없습니다. 주의 일을 탁월하게 한다고 해서 늘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란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에 문제가 없고 어려움이 없다면 그 교회는 안정만을 추구하고 변화하지 않으려는 교회일 것입니다. 교회가 때로 문제 속에 있고 주의 일을 하면서 피곤을 느끼는 것은 새로워지고 창조적이며 모험을 시고하며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고난이 있으면 기뻐하라고 하면서 고난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도구라고 했습니다(약 1:2-4).
베드로전서 5:10에는 잠깐의 고난이 사람을 온전케 하고 강하게 하고 터를 견고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순종은 탁월한 사람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하여 일을 하십니다.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봉사를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웁니다. 아픔을 느끼면서 이를 깨물며 진리대로 살려고 하고 최선을 다하려고 순종하십시오.
둘째, 탁월한 충성이란 무엇인가?
두 번째 탁월한 행동은 충성입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들에게 특징이 있다면 그들은 충성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충성은 변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본문 48절에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라고 요동치 않는 집은 잘 지은 집이며 반석 위에 세운 집니다. 요동하지 않는 집이란 견고한 집입니다. 잘 지은 집입니다. 충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충성하는 사람은 요동치 않는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시편 101:6에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라고 하나님은 충성된 사람과 함께하십니다. 충성된 사람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이 서신서 교회들을 세우면서 당한 고통을 기록한 말씀이 고린도후서 11장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주의 길을 가는데 보통 신자들이 경험할 수 없는 극단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돌로 맞고 먹지 못하고 잠자지 못하고 옥에 갇히고 굶고 추위에 떨고 매를 맞고 죽을 뻔 하였습니다(23-27). 그러나 그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그는 교회를 세우고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충성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약한 것이 충성입니다. 어려움이 오면 쉽게 포기합니다.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피하고 싶어 합니다. 봉사를 하라고 해도 피합니다. 요즘 개척교회는 부담이 된다고 기피합니다. 직분을 받았지만 오랜 기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런 이유는 충성 신앙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25:13에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이 충성된 자입니다. 주인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이 충성된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가 탁월한 교회가 되려면 이런 성도들이 많아야 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도 되어야 하지만 모인 사람들 중에서 충성된 사람이 더욱 많아야 탁월한 교회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그런 사람이라고 고백 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하나님은 바울 쓰시기 전에 그를 시험하는 테스트가 충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세밀하게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후 위대한 하나님의 직분을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크게 할 수 있도록 직분을 주시지 않았다고 불평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자신의 충성도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들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감당하며 최선을 다하였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충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하나님의 일꾼은 충성된 사람이며 맡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더 정확하게 충성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같이 누가복음 16:10-13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충성의 시작은 작은 것부터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큰 것에 있지 않고 작은 것부터라는 것입니다. 평상시의 적은 일들을 하는 모습을 하나님은 충성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주일예배를 지키는 것,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 성도를 섬기고 돌보는 것, 기도를 하는 것 등, 사람들이 생각하는 적은 것들을 하나님은 크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무대 위에 서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 뒤에서의 일들, 조명이 비취지 않는 표시나지 않는 일들, 별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않고 보잘 것 없는 일들에 충성하는 사람에게 더 큰 충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탁월한 사람이라고 해서 큰일을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오해를 버려야 합니다. 탁월한 사람은 작은 일도 큰일처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직장 생활이든, 약속을 지키는 일이든 교회의 일이든 이것이 나를 시험하는 도구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크게 쓰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크게 쓰임을 받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충성심이나 충성도가 낮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큰일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적은 일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별것 아닌 것 같은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걸고 일해야 합니다. 교회는 큰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적은 일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충성해야 탁월한 사람으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탁월한 사람이 되려면 두 가지 행동인 순종과 충성을 실천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들과 차별화가 되고 우리 성도들이 더욱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쓰임을 받게 되려면 힘들고 어려워도 순종하는 청지기, 충성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도 예외일 수 없으며 어느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입니다. 탁월한 교회가 되는 것은 순종하는 성도들과 충성하는 성도들이 가득 찰 때 만들어집니다. 행동은 실천입니다. 행동은 활동입니다. 행동은 결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과 충성이 탁월한 사람으로 쓰임 받는 하나님의 기준임을 인식하고 나의 모습을 재발견하기를 기대합니다.
4. 탁월한 형상을 만드는 사람(베드로전서 2:9-10)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의 목적과 사명과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성경은 나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교과서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어 놓고 그들에게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2:10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선한 일을 하도록 목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존귀한 존재입니다(사 49:5).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 있기 때문에 더욱 존귀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존귀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고 살만큼 가치가 있는 탁월한 존재인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 자신의 가치성을 높이보고 스스로를 존중히 여기지 못하면 옆에 있는 사람을 존중히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미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단계 더 높여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본문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그리스도인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명예로운 사람들이고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더 자세하게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로마서 1:20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창세로부터 인간을 만드셨을 때 능력과 신성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셔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분명한 청사진으로 축복을 하셨습니다.
바울은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하나님의 예정 계획은 탁월하셨습니다. 우리를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그 목적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의 형상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보기 위해서 하나님은 계획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 주님의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 신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대로 사는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목적 있게 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1:26-28의 말씀을 보겠습니다.“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위의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주신 것이 5대 비전입니다.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복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노동의 열매입니다. 생육에서 다스리는 과정은 저절로 되는 우연한 사건이아니라 철저한 노동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정당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모습을 갖는 것은 노동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2:5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경작할 사람(no man to work)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경작이란 노동, 일, 섬김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노동이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행동이며 수고와 인내와 노력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노동한다는 것은 땀을 흘리며 애를 쓰는 수고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만일 노동을 저주의 대가로 해석한다면 그는 창세기 3장 이후의 죄의 결과로 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노동을 고통으로 여기고 심판 받은 삶으로 여기며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을 창조의 축복으로 받아들이면 그는 노동을 기쁨으로 복으로 여기며 즐거워할 것입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축복이었습니다. 생육한다는 것은 생존을 의미합니다. 생존을 죄의 형벌로 보면 하루하루 사는 것을 지겨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하여 일하며 사는 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면 살아가는 것 자체도 행복한 것입니다.
번성하는 것도 축복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열매를 맺고 창고를 채우며 사는 것을 피곤하고 지겨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축복으로 받아들이면 즐겁습니다. 충만한 것도 일해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정복하는 것도 일하라는 것입니다. 성취를 위하여 뛰도록 하신 것은 축복입니다. 다스림도 일하는 것입니다. 만물을 잘 다스리는 것도 열심히 일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주신 모든 명령의 본질이 노동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동이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은 일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23:3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신명기 5: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잠언 18:9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 하는 자의 형제니라.”
고린도전서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일하는 시간 관리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각각 일에 대해 평가를 하신다고 했습니다. 일하지 않고 게으른 삶을 사는 것은 파괴적인 삶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밤낮 일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휴식이나 안식을 말하기 전에 노동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혼란스러운 것이 노동이 먼저인가 휴식이 먼저인가라는 딜레마입니다. 주 5일 근무제가 실시되면서 사람의 관심사가 어떻게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며 잘 놀고 휴식을 취하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여행을 떠나고 취미 생활을 하고 외식을 하고 몸 관리를 잘하며 잘 먹고 잘 쉬고 잘 놀며 상류사회에서 사는 자처럼 웰빙 생활을 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노동이 없는 휴식은 사치입니다. 노동이 없는 놀이는 파멸입니다. 일하지 않고 쉬기만을 바라는 것은 빈곤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놀이 문화가 노동 문화보다 앞서면 사회이든 개인이든 경쟁력을 상실하고 부요한 사람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에 아직도 시기상조인 것이 주5일 근무제에 대한 정립 없는 시행입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주5일 근무제가 무엇인지 이해를 못합니다. 5일 일하고 2일 쉬는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5일 동안 어떻게 일할까를 고민하기보다는 2박3일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차를 몰고 떠나고 그렇지 않으면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고 외식을 하는 정도로 생산적 시간이 아닌 낭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노는 것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 노는 것이 무서울 때가 올 것입니다. 노는 것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시기가 도래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정확하게 말씀하신 것이 휴식보다 노동이 먼저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일하지 않는 사람,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 직업 없이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며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쉬기 위해서 일하십니까? 아니면 일하기 위해서 쉬십니까? 대부분의 성공하는 사람들은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휴식을 차선에 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노는 것이 먼저이고 일하는 것은 나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경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경작이란 황무지를 옥토로 만드는 작업과 같습니다. 경작한다는 것은 황무지의 땅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땅을 경작을 하려는 목적은 기름진 땅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경작은 환경을 바꾸는 것입니다. 경작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경작은 창조적 행위입니다.
경작은 옥토를 만드는 것입니다. 기름진 땅을 만들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위하여 땀을 흘리고 수고하는 모습이 경작입니다. 그리고 경작의 결과는 좋은 열매를 수확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경작(cultivate)이란 문화(culture)를 바꾼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황무하고 돌들이 수북하게 쌓인 황무지를 기름진 옥토로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리는 문화가 경작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첫 번째 주신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자인 사람은 ‘경작자’(tiller)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노동이란 경작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노동, 어떤 일, 어떤 것을 경작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십니까? 이것은 탁월한 사람이나 탁월한 교회를 세우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일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이렇게 내리셨습니다. 요한복음 6:27-29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기독교의 노동의 가치나 본질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먼저 말씀하시기를 썩을 것(spoil)과 지속적인 것(endure)을 비교하시면서 썩을 것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고 영원히 지속적인 것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일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월급(pay)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언젠가는 모두 썩어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이신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일, 예수를 믿는 노동, 예수를 믿는 경작을 잘하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일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탁월한 사람은 먼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입니다. 탁월한 교회는 예수를 잘 믿도록 가르치고 훈련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은 우리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예수를 만나도록 도와주는 사역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도 직장 생활도 잘하고 사업도 잘하고 가정을 돌보는 일도 잘해야 하지만 예수 믿는 일은 더욱 잘해야 합니다. 정말 좋은 교회는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그런 교회가 되도록 일해야 합니다.
바로 그 일이 ‘선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5:29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10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9:4에서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진정한 일에 대해 강조한 유일한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끊임없이 계속되도록 일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 것을 노동의 가치로 본 것입니다. 노력과 애씀과 수고와 열심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거나 거듭나는 것은 단순한 것입니다. 나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며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면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은 계속해서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고 자기를 버리고 정욕을 제거하며 절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구원받고 난 이후의 삶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성화의 삶을 살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것은 모든 수고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더 예수님을 잘 믿도록 변화를 주고 수고를 하게 하는 곳입니다. 성도들이 생각하는 교회는 편하고 자유롭고 안식처나 휴식의 공간과 같은 문화적인 요소들이 있고,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교제를 하며 음식을 나누는 공간과 시설로 되어 있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교회의 목적이 되면 일하는 곳으로서의 교회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게 만들어주는 곳이어야지 커피 맛이 좋은 교회가 되는 것이 좋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들이 점점 예수를 잘 믿게 하는 노동의 교회, 경작하는 교회의 모습을 하지 않을 때 교회는 타락하고 사람들은 점점 떠나갈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킬 것을 지키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를 잘 믿도록 동기를 주고 훈련을 하며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나님이 탁월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이렇게 사셨습니다. 요한복음 17:4에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예수님의 인생의 목적과 비전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일을 하는 것이었고 그 일을 실천하므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노동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길은 오직 우리에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예수를 잘 믿도록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먼저 해야 될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행 26:20).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일을 가장 먼저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정말 탁월한 교회에 대한 꿈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환경 가운데서도 존귀하게 쓰임 받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인 나 자신과 모든 성도들은 탁월하게 선택된 것처럼 탁월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명예로운 사람들이고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신분을 가졌다는 것만을 자랑하며 게으르고 나태하게 앉아 있으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영적 실업자’가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12-14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에베소서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디도서 3:14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교회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어둠의 일이 아닌 빛의 일을 해야 합니다. 정욕을 위한 일이 아닌 영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 주의 일에 힘을 쓰고 선한 일을 위하여 수고하고 좋은 일을 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잘 믿고 사람들을 잘 세워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확장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일하는 사람입니다(행 9:36). 땀을 흘리는 사람입니다.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노동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헌신을 통해서만 세워집니다. 교회는 노동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부흥이 됩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수고하는 교회의 모델, 땀을 흘렸던 교회의 모델, 노동하는 교회의 모델로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바울의 사람이며 예수님의 형상을 닮았던 사람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로마서 16:1-23의 말씀입니다.“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도대체 바울이 교회를 세워갈 때 그 혼자서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많은 주의 일을 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교회가 세워지는 원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는 신앙의 교과서이며 신학의 교과서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말씀을 마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피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교회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을 칭찬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의 기준이 ‘수고’ 즉 일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더욱 좋은 교회로 만들고 예수님을 더욱 잘 믿게 하고 교회 사역을 더 잘할 수 있도록 그들이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탁월하게 세워지려면 이런 수고의 사람들로 차고 넘쳐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수고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일하고 노동하며 땀을 흘리는 성도들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노동의 가치를 휴식의 가치보다 더 높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교회의 일에 더욱 열심이며 선한 일을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해야 될 선하고 좋은 일들이 많습니다. 아니 모두가 수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일하고 모두가 땀을 흘리고 모두가 수고하는 교회가 되면 우리 교회는 다음 주일부터 앉을 자리가 없이 사람들로 가득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꿈을 꾸고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두가 함께 땀 그리고 진액을 다 쏟으십시다. 일하는 사람, 일하는 교회를 하나님이 쓰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쓰임 받는 탁월한 영적 제직이 되기를 바랍니다.
5. 탁월한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 (사도행전 20:17-28)
교회를 원리에 의해서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로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4번에 걸쳐 '탁월함'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탁월함에 대해서 정리를 하고 탁월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마지막 설교를 듣기 전에 결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나는 탁월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것과 ‘우리 교회는 탁월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라는 목표와 꿈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탁월한 사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렸고 탁월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할 때 과연 탁월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탁월한 교회는 무엇을 추구하는 교회인가? 탁월한 교회를 어떻게 세울 수 있는가?하고 질문하게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 충만하고 전도 잘하고 열심히 예배드리고 좋고 넓은 교회 건물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탁월한 교회인가? 아니면 탁월한 교회의 모델은 어느 교회인가하고 정의를 내리는 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유형은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형태로 화려함을 드러내는 교회와 서신서의 형태로 진지함을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가장 탁월한 교회의 유형은 바로 이 둘의 형태를 다 포함하고 있는 교회일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힘 있고 능력 있으며 기적이 나타나고 3천명, 5천명 수가 폭발하는 강력한 어떤 힘에 이끌리는 교회였습니다. 탁월한 교회가 되려면 이런 능력들이 있어야 합니다. 탁월하다는 것은 지식적인 교회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엘리트가 모여 있는 교회라고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 능력이 있고 옥 터가 흔들리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며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고 광풍이 잔잔해 지는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휘감는 교회일 수 있습니다. 탁월한 교회는 그러한 역사도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형태의 교회인 서신서 교회가 있습니다.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갈라디아교회, 고린도교회 등은 사도행전 교회와는 다른 유형의 교회입니다. 서신서 교회의 특징은 사도행전의 화려함이나 어떤 눈에 보이는 초자연적인 역사,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특별한 형상보다는 내부적인 교회로 교회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교회가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교회입니다. 예를 들러 오늘 본문은 에베소 교회를 세운 바울의 의도와 교회의 본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에베소교회가 세워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요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겸손, 눈물, 시험, 결박, 환란이라는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는데 필요한 요소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세워지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능력을 나타내는 교회이거나 표적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라는 것보다는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다른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이고 눈물이고 시험이고 결박이고 환란입니다.
교회는 겸손으로 세워진다고 할 때 왜 겸손이 그렇게 중요하기에 바울의 고별설교 내용이어야 하고 교회는 꼭 겸손으로만 세워져야 하는 것일까? 그러면 겸손이(humility)란 무엇인가하고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입니다. 교회는 겸손으로 세워집니다. 겸손이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곳이어야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바울은 겸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탁월한 교회는 겸손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높여주기 위하여 자신은 낮은 자리에 서는 것을 행동으로 보이는 교회가 탁월한 교회입니다. 모두가 높아지려는 교회에서 낮은 자리에 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라면 그 교회는 폭풍을 잔잔케 하는 능력의 교회보다 강한 교회일 것입니다.
눈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눈물을 흘리고 있어야 합니까? 사람들이 교회 오면 우는 것보다 웃는 것을 선호하는데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처량하고 초라한 교회이고 문제가 많은 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를 세우기 위한 바울의 눈물은 거룩한 눈물이며 다른 사람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 있어야 교회입니다. 웃는 교회보다 우는 교회를 가르친 것입니다. 시험도 결박도 환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당하는 것이라면 큰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하여 당하는 것이라면 가치 있는 것이며 고귀한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28절을 보시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자기 자신과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는 것입니다. ‘삼가하라’는 것은 '지키라'(watch over)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자기를 잃고 양 떼를 잃는 행위이기에 조심하라는 것을 더 강하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이 <자신과 양떼> <개인과 공동체>라는 두 가지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개인의 중요성 못지않게 공동체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나 한사람의 위치도 중요하지만 성도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나는 공동체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나 자신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말씀을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라고 했습니다(Be shepherds of the church of God). 교회론을 세우는데 아주 중요한 배경입니다. 교회를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이시며 그 교회를 치도록 사람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친다’라는 것은 다스리는 것이나 권력주의나 계급성의 차원이 아니라 돌보고 나누고 먹이고 섬기고 이끌고 치유하고 보살피고 보호하고 사랑하는 목양(shepherding)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교회에서 일어나는 비난, 비판, 비방, 분열과 같은 논쟁의 교회(controversial church)에서 서로에게 상처 주고 상처 받는 교회가 아닙니다. 서로 대립하고 찢고 나누고 갈라지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 교회는 특별한 사랑이 있는 교회이고 서로가 깊은 돌봄이 있으며 서로가 애정 깊게 감싸주는 보호가 있는 서로를 지켜주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탁월한 교회는 목양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만이 목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목양하는 교회입니다. 흔히 목양하면 푸른 초장이 있고 양떼들이 먹이를 뜯는 초원의 목장을 상상하는데 하나님이 값을 지불하시고 세우신 교회는 그런 동물적 목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구원 받은 백성들이 모여 있는 영혼의 목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영혼의 목장에는 서로가 목자로서 돌보는 곳입니다. 다만 가장 목장의 우두머리는 목자장입니다. 그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때문에 교회에서 모든 직분자들은 서로를 돌보고 보호하고 먹이고 보호하며 사랑하는 관계에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곳은 개인 한사람이 교회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신서 교회는 연합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흩어지고 갈라지고 쪼개지고 찢어진 모습을 경고하며 하나 된 교회를 세우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연합이라는 것을 원칙으로 받아들이는 교회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연합이란 우리 모두가 하나이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설계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5). 우리 모두가 산돌들로 서로 모여 건설된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탁월한 교회가 되는 비결입니다.
탁월한 교회란 하나 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기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엡2:21). 연결되어 있는 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것은 연합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하셨습니다. 유언의 기도입니다. 최후의 기도입니다. 더 이상 기도할 기회는 없습니다. 이제 무엇을 예수님은 구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21-23을 보십시오.“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의 기도 내용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합을 마지막 기도 제목으로 삼으셨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려면 무엇이 필수적이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소원이기도 하고 유언인 그 기도가 아직도 오늘의 교회에서 응답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도 가운데 아직 응답되지 않은 유일한 기도가 "하나되는 것"이라고 영적 부흥사인 토미 테니(Tommy Tenney)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의 교회에 바라시는 것이 부흥이거나 봉사이거나 성경 공부가 아니라 먼저 하나 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꿈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소원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첫째,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 되는 연합이란 섬김입니다. 종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기 의지를 내세우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는 것이며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의지를 내세우면 팀도 깨어지고 사람들도 흩어집니다. 자기 의지는 자기주장이 앞서는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앞세워서 사람들에게 칼을 휘두르면 그 사람의 주변에는 피 묻은 사람만이 모여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사람이 탁월한 사람입니다.
둘째, 자신의 통제력을 강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 되는 연합은 조화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자신이 이끄는 대로 사람들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은 강한 반감이나 분리를 가져옵니다. 교회는 자기의 뜻을 내세우는 제단이 될 때 교회의 제단은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만이 하나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통제력으로 교회를 다스리려는 것은 교회를 장악하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섬기고 돌보는 곳이지 자기 발 앞에 엎드리게 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기가 깨어지는 곳이 되어야 하나가 됩니다. 가기부정과 자기 통제가 필요한 것이지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태도로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셋째, 자신의 권리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 되는 연합은 서로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만일 권리 주장을 통하여 타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자기 이득만을 추구한다면 사람들은 흩어집니다. 연합은 권리 주장이 아니라 서로 책임 분담이며 분배입니다. 교회는 목사의 권리, 장로의 권리, 집사의 권리를 주장하는 곳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책임만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밀레도 항에서 에베소 교회들에게 했던 마지막 충고가 책임만을 다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기 권리 주장은 자기 과시에서 비롯됩니다. 이기적 명성이나 야망이나 자아 집착은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훈련이 있어야 하나 됩니다.
교회의 하나 됨과 연합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것이 분열과 불화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조직체에 동일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연합을 통해 세상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불화와 분열을 통해서 사람들을 교회에서 몰아냅니다. 헌신을 파괴시키는 것이 분열입니다. 교회의 고질적인 죄악이 하나 됨을 방해하는 분열입니다. 교회를 악성으로 만드는 것이 불화입니다.
교회는 혀에 의한 범죄가 행동으로 인한 범죄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체적으로 교회의 문제들은 모두가 하나가 되면 다 해결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다툼은 분열의 시작입니다. 싸움은 파괴의 씨앗입니다. 만일 교회가 계속해서 시끄러운 다툼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면 그 교회에 사람들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분열은 교회를 시들게 합니다. 교회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분열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면서 분열의 위험성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1-3을 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육신에 속한 자란 세속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자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을 유아라고 했습니다. 유아의 특징이 시기와 분쟁입니다. 다른 아이가 나보다 더 갖고 있으면 견디지 못하는 아이를 유아라고 합니다. 바로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밥을 먹지 못하고 항상 우유로 배를 채웁니다. 나이는 먹었어도 먹는 것은 우유뿐입니다. 젖 먹는 아이 신자들이 고린도 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자라지 않았습니다. 성숙함이 없었습니다.
시기하고 분쟁하는 것은 어린아이 짓입니다. 어른이 되면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힘든 것도 먼저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신자는 두 종류입니다. 세속에 속한(in worldly) 육신적인 신자와 영에 속한(in spiritual) 신령한 신자입니다. 이들이 교회에 같이 존재하지만 육신적인 유아들보다 신령한 장성한 사람들이 많아야 교회도 어른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볼로이든 게바이든 바울이든 모두가 일반이라고 하면서 마지막에 중요한 자신들의 위치를 “우리는 동역자”(고전3:9)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같은 일을 같은 마음으로 같이 하는 사람을 동역자라고 합니다. 공동체나 동역자의 모임입니다.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같이 뛰는 사람이 동역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세울 때에도 강조했던 것이 똑같습니다. 빌립보서 2:1-4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다시 14절을 보시길 바랍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세우는데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이 하나 되고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뜻과 남을 낫게 여기고 돌아보고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래야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분열로는 교회를 세우지 못합니다. 허영으로는 교회를 잘 지을 수 없습니다. 원망으로는 사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동역자로 세워진다는 것은 교회를 위하여 같이 수고하고 땀을 흘리고 힘을 쏟는다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분열은 교회를 무너지게 하는 질병입니다. 분열은 죽음의 교회로 가도록 이끄는 유혹입니다. 분열은 교회를 출혈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연합은 교회를 하나 되게 만듭니다. 연합은 서로를 세워줍니다. 연합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제공합니다. 연합은 사람들을 교회에 머물도록 합니다. 하나가 되어 한 뜻으로 움직이는 것은 어떤 일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성경에는 각 주제에 따른 중요성과 가치를 주면서 성도들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동일한 언어를 반복해서 기록했습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라는 말은 24회, 제사라는 말은 265회, 기도라는 말은 100회 나오지만 함께라는 말은 무려 484회나 나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19-20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것은 분명히 개인주의를 버리라는 것이고 고립된 교회로 만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서로 의존적 교회이며 서로가 하나 된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모였는데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다르고 자기주장만을 편다면 그 교회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세 사람이 모였어도 그들의 생각이 일치하고 합심되었다면 그들은 어떤 일들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많이 모인 사람들의 수로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모인 사람들의 하나 됨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 교회가 기도 하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하나 되어 서로 함께 하는 연합 공동체를 만들고 몸으로 세워진 지체 공동체, 가족 공동체, 동역 공동체가 되도록 소원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꿈입니다. 우리가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 되고 연합되기 위해서 최소한의 우리의 일은 무엇입니까?
수건을 두르는 것입니다. 지금은 검을 뽑을 때가 아니라 수건을 두를 때라고 테니 목사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닮은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이 형편없었고 문제투성이이고 어린아이 같고 잠시 후면 도망가고 배반할 것도 아시지만 그들을 향해 비난이나 통제를 하면서 분열을 조장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건을 두르고 발을 씻겨주며 사랑하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발씻김의 의식을 행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이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친히 본(example)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 되고 연합하는 유일한 비결이 이것입니다.
나 스스로가 본이 되어야합니다.수건을 두르는데 본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이 말씀한 오늘 본문을 상기하시길 바랍니다. 겸손, 눈물, 시험, 결박, 환란으로 세운 에베소 교회이고 그 교회를 치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탁월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탁월한 하나님의 종들로 쓰임을 받아야 하고 탁월한 교회로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의 어떤 일을 할 때라도 탁월한 모습, 탁월한 태도, 탁월한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하고 눈물로 하고 시험을 이기며 결박을 풀고 환란에서 승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수건을 두른 탁월한 성도들이 모인 우리 교회를 크게 쓰실 것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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