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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탓, 데이빗 A.씨맨즈

by liefd 2024.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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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열한 책임 전가 싸움

2. 고난, 그것도 사랑의 표현인가?

3. 현재로 돌아오라

4. 누가 피해자인가?

5. 빛이 들게 하라

6. 무덤 속을 들여다보라

7. 어둠 속의 그림자

8. 믿음의 만약

9. 공동체에 주시는 특별한 은혜

10. 요셉, “만약....만 했더라면이 없는 사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3:12-13).

 

1. 치열한 책임 전가 싸움

 

그리스도인으로 섬기며 살아온 지도 거의 50년 세월이다. 깨지고 상처받은 사람들 돌보느라 평생은 보냈다. 나는 설교와 목회 상담과 집필을 통해,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현재의 패배와 실패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이해하도록 도우려 했다.

 

 그러나 지금 내게는 새로운 관심사가 생겼다. 우리 복음 주의자들은 다른 방향으로 너무 멀리 나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균형을 잃고 반대쪽 극단으로 치달을 위험은 없는가? 1993517일자 크리스차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치료의 혁명이라는 제호 아래 이런 우려를 다루고 있는데, 그 분야의 몇몇 지도자들도 동일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개인적 책임을 회피한 채 다른 누군가 책임 전가의 대상을 찾음으로써 거의 모든 종류의 행동에서 발뺌하려 드는 거대한 책임 전가 싸움이다. 안타깝게도 다수의 그리스도인 내담자들이 이 전염병에 감염되고 말았다. 일부 내담자들은 상담을 통해 얻은 통찰을 은혜와 성화, 즉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 가는 과정의 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적 책임을 회피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수준을 낮춰도 괜찮다는 핑계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경에는 온갖 종류의 피해자들이 전부 등장하지만 피해 의식 속에 살아도 된다고 허용 받은 사람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전체 주제의 두 가지 핵심 단어인 만약’(if)만약만 했더라면(if only)’이라는 말을 연구 바탕으로 삼았다.

 

만약만약만 했더라면’, 둘중 어느 쪽인가?

많은 사람들은 만약이라는 뜻의 if가 성경과 영어 단어 가운데 가장 나약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의 만약, 언제나 불평과 후회와 책임 전가로 뒤를 돌아보며 장애뿐 아니라 죄와 실패에 대해서까지 변명하는데 사용되는 만약이다.

어느 날 나는 만약이라는 말이 앞을 내다보는 믿음의 만약일 때는 가장 강한 단어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야말로 그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는 유일한 조건이다. 뒤를 보는 나약한 단어 만약만 했더라면이 책임 회피의 구실이라면, 믿음에서 나오는 강한 단어 만약은 하나님의 능력의 보고를 여는 열쇠이다.

 

성경에는 긍정적인 의미의 만약과 부정적인 의미의 만약이 둘 다 나타난다. 그 몇 가지 경우들을 살펴보고 싶다. 두 가지 용례를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 분명히 그런 의미로 쓰인 경우에 한하여 이따금씩 만약만약만 했더라면으로 바꿔 씀을 밝혀 둔다.

 

나약한 표현 만약만 했더라면과 강한 표현 만약은 요한 복음 11장에서 가장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요한 복음 11장은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유명한 기사이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if only)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1절과 32절에 나오는 마르다 와 마리아의 이 하소연은 40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도전과 생생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if)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나사로의 기사는 이 책의 기본 윤곽이자 흐름이 될 것이다. 그 세부 사항 속에 책의 주제에 꼭 맞는 성경 적인 개념들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사에는 기독교 상담과 치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함으로 회복되어 가는 모든 과정에 관련된 가장 중요한 신학적 질문들과 영적 논쟁점들도 적잖이 담겨 있다. 내가 믿기는 이 이야기를 보다 깊이 깨달을 때, 우리 모두 자신을 그날 베다니에 모인 무리의 한 사람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만약만 했더라면” “나에게 책임을 묻지 말라” “내 잘못이 아니다등의 태도는 피해 논리라고 하는, 전국적으로 돌고 있는 전염병과 같은 현상이다. ‘피해 논리피해 주의의 급격한 확산에 세상 언론들도 놀라고 있다. 1991,뉴욕(New York)지는 나에게 책임을 묻지 말라!”는 제호 아래 피해 논리의 신 문화를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다.하퍼스(Hsrpers)지는 특집 제목을 모두가 피해자란 말인가?”로 내걸었고, 타임지는 울보 아이들: 영원한 피해자가 커버스토리 였다. 텔레비전의 경우에도 최근 몇 년 사이에 비단 인기 놓은 토크쇼들뿐 아니라 지금(Now)” “48시간데이트라인󰡓 “60” “프라임 타임” “20/20” 등과 같은 심각한 폭로성 뉴스 프로그램들이 책임 전가 싸움으로 알려지게 되는 이런 현상을 후에 분석한 바 있다.

 

좀더 최근 사례로 콜린 처거슨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고향 자마이카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미국으로 이민온 후 뉴욕 시에 살았다. 199312월 그는 캘리포니아 주로 가서 총기 구입에 소요되는 15일 기간을 채운 다음 총을 사서 집으로 돌아와 저녁 퇴근 시간에 롱아일랜드 지하철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치밀한 계획 하에 여섯 명을 난사하여 죽이고 열 아홉 명이 부상을 입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의 주머니는 인종 혐오에 대한 낙서 쪽지들이 가득했다. 그의 변호사는 NBC지금이라는 프로에서,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퍼거슨이야말로 진짜 피해자라고 했다. 그런 극단적이 행위로까지 몰고 간 흑인 분노 증후군의 피해자라고 말이다.

위스콘신 주 정책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 찰스 사익스(피해자의 나라: 미국 국민성의 쇠퇴)라는 책에 이 문제에 관한 심층 학술 연구를 수록한 바있다.

 

신중한 자료 수집과 분석을 통해 그는 지적하기를, 나는 피해자이기 때문에 나한테는 책임이 없고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는 점점 거세지는 국가적 모토는 사회 조직 자체를 파멸시킬 위험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이미 교육 제도나 사법 제도 같은 이 나라의 가장 중대한 기초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

 

각종 정신 장에의 진단 및 통계 규범으로 쓰이는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DSM)라는 책이 상담 자들이 보험 회사에 청구서를 보낼 때 사용할 코드 번호를 이 책에 의존해서 결정할 정도 인간 성격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DSM은 더러 도움이 된다.

최신판 DSM-IV를 보면 흔히 말하는 정신 장애300가지도 넘는다. 1952년도 판에 수록된 수치보다 3배가 높다. 거기 나오는 규정들 가운데는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강한 반감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죄의 행동에 대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다른 구실들로 무마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책임 거부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 두신 도덕 질서를 위반하는 것이고, 바른 성품을 해치는 것이며,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피해 논리 전염병이 퍼지고 결국 정신 건강은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악화된다.

 

 역기능 가정, 완전주의 적인 집안(율법적이 신앙 집안 포함)의 비은혜적 자녀 양육, 구타나 욕설 또는 성폭행의 상처 등 이런 것들로부터 비롯된 정서적영적 비참한 결과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지은 죄의 결과이다. 그것은 비참하기도 하지만 아주 복잡해서, 단순한 거듭남이나 성령 충만보다 훨씬 깊은 특수 차원의 상담과 내적 치유가 필요하다. 1960년대 이런 사실들을 발표하기 시작한 이래로 나는 이 분야에서 하나의 선두 주자 역할을 해 왔다. 그때만 해도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런 얘기가 순순히 받아들여지기 훨씬 전이었다. 이 책의 내용도 어떤 식으로든 기존의 그런 사실들을 부정하는 쪽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상담 및 치유 분야에서 일하는 우리들이 늘 염두에 두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비록 성경에 진짜 피해자들이 숱하게 많이 등장한다 할지라도 피해 논리가 들어설 여지는 조금도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치유 일정 및 회복 과정 속에는 우리 모두가 상처를 뛰어넘어 용서로, 요행 심을 버리고 책임감 있는 행동으로, 책임 전가에서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때가 반드시 있다고 강조한다. 피해자가 승리자로 탈바꿈할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주여사랑하시는 자가 병 들었나이다나사로가 병 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11: 3, 6).

 

2 고난, 그것도 사랑의 표현인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질병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만약만 했더라면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을 놓칠 수 없다. 그 중 첫번째는 예수님이 아직 베다니에 채 이르시기도 정에 마르다가 노상으로 달려나와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했던 말이다. 마르다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지나친 열의와 과도한 불안에 휩싸인 마르다가 예수님께 만약만 했더라면을 그때 처음 내뱉었던 것은 아니다. 언젠가 동생 마리아가 제 할 일을 하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마르다는 마리아가 자신에게 무관심한 것이 예수님께 따지고 들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10;40).

 

그때 마르다가 했던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다. 주님이 저한테 조금만 더 관심이 있으셨어도(if only) 마리아한테 한마디 하셨을 겁니다.잠시 후 예수님은 이들의 나약하고 절망적인 만약만 했더라면을 전혀 다른 종류의 만약으로 맞받아 치셨다. 이 강하고 소망에 찬 만약은 그들의 시각도 달라져야 하고 안색도 달라져야 한다는 주님의 도전이었다. 그분이 이 말씀을 하셨던 때는 가장 어둡고 가장 비참한 순간이었다. 즉 나사로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고, 썩은 시신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얘기를 마르다로부터 들은 직후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if)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기서 만약만 했더라면네가 믿으면이 극명한 대조를 보이며 나란히 등장한다. 하나는 가장 연약한 것이요 하나는 가장 강력한 것이다. 하나는 가장 절망에 찬 말이요 하나는 가장 희망에 찬 말이다.

 

우선, 이 이야기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두자매가 상처와 절망, 심지어 원한까지 품게 된 몇가지 이유들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그 오빠 나사로로 이루어진 베다니의 이 가족과 예수님의 특별한 관계를 일부러 강조한다. 이들의 집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집이라 부르실 만한 유일한 장소가 아니었나 싶다.

 

베다니가 예루살렘에서 3Km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조용한 교외에 아주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집에 머무셨던 것은 단순히 편리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사람이 누구나 그렇듯 예수님께도 소속감이 필요했는데, 그 필요가 가장 잘 채워진 곳은 예수님 본가가 아니라 바로 이 가정에서였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 예수님은 이들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셨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 들었나이다.” 오빠가 병들었을 때 누이 동생들이 보낸 이 전갈의 독특한 표현은 바로 이런 사랑을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에 숨은 진의가 들리지 않는가? 이 말 속에는 요청 못지 않은 불평이 함께 배어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이 그를 사랑하시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그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일이 잘못될 때 우리가 하나님께 던지는 기본적인 질문, “?”라고 물었던 것이다.

 

우리가 던지는 이 모든 질문에 담긴 의미는, 사랑과 고난은 어딘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 줄 알았는데, 어쩌면 이렇게 끔찍한 일이 우리한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시는 방법은 정말 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이 모순이야말로 치유의 모든 과정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장애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언젠가 한번은 꼭 부딪쳐야 하는 문제 아닐까?

 

특수 면역이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우주의 애완 동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재난과 상처와 고통에 대한 특수 면역체가 아니다. 오래 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8;22). 자연까지도 우리의 타락에 영향을 입어 새 창조의 그날을 기다리며 탄식한다.”

 

나를 따라오너라. 편안한 잠자리를 주리라.” “와서 내 제자가 되라. 불의와 재난과 상처와 일절 접촉 없이 이 타락한 세상을 통행할 수 있는 특수 여권을 주리라.” 예수님은 결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자연사로 죽지 않았다. 사도 요한은 고독한 섬에서 유배자로 죽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특수 면역을 약속하신 적이 없다. 다만 특수 임재, 즉 당신의 임재를 약속하셨을 뿐이다. 그분은 결코 해답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다만 해답을 주시는 분인 당신 자신을 약속하셨을 뿐이다.

 

우리의 문제는 어떤 사건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에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지러운 머리에서 나오는 이 질문 뒤에는 고통하는 심령이 던지는 보다 깊은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되도록 허용하셨을까?” “왜 하나님은 이 일을 막지 않으셨을까?”

 

사랑과 고난의 신비가 지닌 이러한 심층 국면이 나사로가 죽은 후 유대인 구경꾼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우시는 것을 보며 이렇게 떠들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11:36-37). 사랑한다면 미리 예방했어야 하고 그게 안되면 적어도 개입이라도 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렇게 능력이 클 뿐 아니라 나사로를 끔찍히도 사랑했으니 당초부터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 그 사랑을 표현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재난과 사고와 비극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간섭하셔서 막아 주셔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사고 체계는 근본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분은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 그런 범칙들을 어기지 않고 거기에 준하여 우주를 주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정례적이기 통상적인 방법이다. 기분 내키는 대로가 아니라 질서를 따라 운행하기로 정하신 것이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정말 개입하실 수 있고 그런 개입을 우리는 당연히 기적이라 부른다. 문제는, 우리가 비극을 당할 때 하나님의 개입 여부에 따라 그분의 사랑의 정도나 우리의 믿음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는 데서 생겨난다.

 

예수님조차 건짐받지 못하셨다. 사랑과 고난의 신비는 면역과 예방과 개입의 보장이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 있다. 예수님이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은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고통의 극에 달했을 때, 종교 지도자들은 구분으로 조롱했다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if)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27:43).

 

여기 또 하나의 커다란 만약이 있다. 만약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구해 주신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될 것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정반대 경우의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똑같은 사고의 오류를 주님께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건져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구해 주시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우리 삶의 문제에 대한 그분의 해답을 더 좋은 길에서 찾게 될 것이다.

 

기독교는 감정을 부인하고 부정적 표현을 억압해야 하는 세련된 형태의 금욕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을 만나든 굳어 버린 미소와 함께 자동으로 할렐루야를 외치는 하나님의 냉동 인간으로 부름받지 않았다.

나사로가 죽었을 당시 예수님의 행동이 그런 생각을 깨끗이 무산시킨다. 예수님의 깊은 슬픔에 젖어 친구의 무덤 앞,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 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 보여 주신 반응은 신비를 한층 증폭시키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한은 이 말에 뒤이어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나사로가 병 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11:6).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닌가. 긴급 구조 신호에 만사 제쳐놓고 즉각 대응에 나서 바로 베다니로 떠나기는커녕 오히려 거기서 이틀이나 시간을 끌고 계셨다.

 

하나님이 우리한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하나님 자신도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모르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여러분도 그런 시간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예수님이 이틀 동안 의도적으로 더 머무셨던 것은 표면상으로는 전혀 말이 안되는 일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께서 당신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정확히 알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잘 생각해 보라. 지금 예수님이 일하고 계신 곳에서 베다니까지는 하룻길 거리였다. 그러므로 심부름을 맡은 사람이 여기까지 오는 데 하루가 걸렸다. 그 상태에서 예수님이 이틀을 더 머무셨다. 거기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리로 가는 데 다시 하루가 걸려 총 나흘이 된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11:17). 심부름꾼도 몰랐고 제자들도 몰랐던 사실을 예수님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 심부름꾼이 예수님께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가 이미 앓는 상태를 넘어서 죽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며 왜 그 일을 하시는지 정확히 아셨다. 그렇기에 그분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건을 통해 훨씬 큰 영광을 받으실 수 있게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원하신 것도 바로 이것이다. 해답에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그들 자신이 해답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분은 또한, 믿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책임 전가를 버리고 믿음으로 향하는 이들의 영적 여정에 그분의 인도가 반드시 필요했다.

 

우리도 만약만 했더라면을 부르짖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을 해주기 원하신다. 살아 계신 말씀이신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각자를 그 손으로 이끄셔서 한 걸음 한 걸음 그 여정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주님께 기회를 드린다면 레슬리 워더헤드(Leslie Weatherhead)의 예리한 표현처럼 그렇게 될 것이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11:21, 32).

 

3. 현재로 돌아오라

 

만약했더라면에 뒤따르는 가장 심각한 문제 하나는, 사람을 과거 시제 그러니까 이미 발생한 뒤라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행동과 사건을 가리키는 시제 속에 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때 그 일만 없었더라면(혹은 있었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다.” 걸핏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듯 만약했더라면은 우리의 시선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모습에 고정시킨다.

 

만약했더라면은 변화 불능의 지나간 사건들에 집착하게 함으로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현재의 실상과 미래의 희망을 바라볼 힘을 빼앗는다. 과거의 사건은 바뀔 수 없어도 그 사건을 보는 눈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과거란 얼마든지 재구성이 가능하다. 우리는 과거를 새로운 렌즈로 바라볼 수 있고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드린 말씀도 이와 비슷하다. 주님께서 그때 여기 계시기만 했다면 지금 아무 문데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젠 너무늦었어요.” 예수님은 어떻게든 이들이 가진 시각의 시제를 바꾸어 주셔야만 했다. 시제가 바뀌어야 마음도 바뀔 수 있음을 아셨던 것이다. 여기서 만약했더라면의 크나큰 실수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현재의 능력을 배제시켰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들의 무력한 과거 시제 만약했더라면을 강력한 현재 시제 네가 믿으면으로 바꾸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취지를 알아차린 마르다는 고심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앞 장에서 이미 말했듯이, 사실 마르다를 깎아 내리는 말이라면 이제 진력이 난다. 마르다는 당시 종교와 문화의 전통을 과감히 깨뜨린 사람이다. 우리는 마르다의 이런 점을 얼마나 알아주고 있는가? 그녀는 마리아처럼 집에서 예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분을 맞기 위해 길가까지 뛰어나왔다. 마르다는 절망을 표현하는 일에도 앞장섰지만 과감히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는 일에도 똑같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11:22). 이제라도이것은 과거의 감옥을 벗어나 현재의 자유로 가려는 마르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민의 작은 신호이다.

 

그러나 마르다는 대번 거기에 이르지는 못한다. 뒤이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라.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예수께서 이렇게 확신을 주시자 마르다는 만약만 했더라면을 되뇌이며 사는 우리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다. 바참한 과거 시제 만약했더라면에서 요원한 미래 시제 만약으로 옮겨가,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하고 말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물론이죠, 주님. 만약 오늘이 장치 다가올 그 위대한 부활의 날이라면(if only) 오빠가 다시 살 줄 저도 압니다.”라는 말과 같다.

 

인간은 제한된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적 하나님이 인간을 영원으로 이끌려 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하나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관심 갖게 하려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영원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들이 현재라고 부르는 그 시점이다. 시간이 영원과 맞닿는 부분이 바로 현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임무는 어떻게든 인간들을 영원한 현재로부터 떼어놓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경우에 따라 인간을 과거 속에 살도록 유혹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다 그보다는 인간을 미래 속에 살도록 만드는 편이 훨씬 낫다.

 

미래란 미지의 시간이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래란 이 세상에서 영원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다. 흔히 미래 속에 사는 삶에는 뒤따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미래의 시간까지 미룸으로써 현재의 행동을 놓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생각이나 말만 해 놓고 그런 관심 자체가 행동인 줄 착각하기도 한다.

제일 중요한 일은 어떻게든 인간의 행동을 막는 것이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한 아무리 생각을 많이 해도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른 무엇을 해도 좋지만 행동만은 안된다. 의지의 결단만 막을 수 있다면 아무리 경건한 묵상도 사랑도 우리에게는 조금도 해가 되지 않는다.행동 없이는 감정이 많을 수록 그만큼 그만큼 행동력은 더 떨어지게 되고 그것이 장기화되면 아예 감정을 느끼는 힘마저 약해질 것이다.

 

그때 그 과거에 이러 이러한 일들만 없었다면. 언젠가 미래에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만약했더라면언젠가는’, 이 두 마디는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다. 언젠가는 그럴 계획이다” “그럴 생각이다” “나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아니까 곧 그렇게 할 것이다” “끊을 (혹은 시작할)것이다.”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하려고 지금 생각 중입니다.상황이 아주 심각해 보이는데도 이렇게 말만 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상대방을 행동으로 이끌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져 충격을 시도할 때가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생각만 하고 있을 셈입니까?”

 

언제나 현재(I AM)이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I AM)부활이요 생명이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예수님이 이 말씀을 마리아에게 하시지 않고 마르다에게 하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렇다. 예수님이 이 놀라운 말씀으로 보상해 주신 사람은 때로 당돌하고 경솔했지만 언제나 정직했고 마음이 열려 있던 너무 고지식한 일꾼마르다였다. 이것이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주신 대답이다 걸핏하면 현재를 잃어버리는 모든 만약했더라면신봉자들의 비참한 성향에 주시는 대답이다.

 

예수님은 위대한 현재(I AM)'이시다. 그분은 언제나 현재형(I AM)으로 계시는 영원한 현재(Eternal Contemporary)이다.

그분은 나는(I AM)부활이요 생명이라“ ”이것을 내가 믿느냐?“ 마르다는 너무나 정직한 여자여서 자기한테 있지도 않는 믿음을 있다고 고백할 사람이 아니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내가 줄 내가 믿나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온전한 믿음 안에서 자기한테 있는 것을 그대로 고백했던 것이다. 마르다는 더이상 과거의 만약했더라면과 미래의 만약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이제 그리스도의 놀라운 현존을 응시한다. 바로 여기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믿음이 나오고 있다. 곧 이어 마리아도 같은 믿음을 갖게 되어, 결국 두 사람 이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준비를 하게 된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의 뿌리는 하나님을 하나의 인격으로 아는 데 있다.” 우리는 상대의 말과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이미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셨다. 당신이 위대한 현재(I AM)이심을 다시 한번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이 말씀이 그분의 행동을 통해 육신이 되는 일뿐이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11:33, 38). 이 본문이 킹 제임스 역에는 친히 탄식하시며로 되어 있고, 필립스 역에는 몹시 안타까워 눈에 띄게 슬퍼하시며로 되어 있다. 그렇다. 예수님은 우셨다.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우셨다. 큰소리로 우셨다.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셨다. 정말 슬퍼하시며 우셨다. 주변 사람들이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11:36)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또는 그 심령에 탄식하사라는 성경의 표현은 곧 예수께서 창자가 뒤틀리고 심장이 터져 나왔다는 말이다. 그 재난이 닥쳤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단 말인가? 우리가 눈물로 베개를 적실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는가? 상실과 고독과 뼈아픈 기억이 마치 의사가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칼로 우리를 푹푹 쑤셔 대는 것과 같을 때, 그때 하나님은 어디 계신단 말인가?” 우리는 모두 이런 질문을 얼마나 많이 던졌던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예수님이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신다. 그분은 깊은 긍휼과 상한 심령으로 우리와 함께 우시고 우리를 위해 우시며 우리 곁에와 계신다. “임마누엘!” 악과 고난의 신비에 대한 최종 해답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 이 세상 모든 일에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와 한편이 되셔서 우리와 같이 계신다.

이 의미를 온전히 다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 시선을 돌려야 한다. 여기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있다.

 

그분은 내가 처한 바로 이곳, 나의 아픔과 고난과 피해 속에서 나와 함께 아픔을 당하시고 나를 이해하시며 온전히 나와 하나가 되시는 위대한 현재이다. 성육하신 하나님, 우리의 맏형, 친구, 변치 않는 연인, 그리고 함께 고난 당하시는 그분이 친히 엄청난 갓을 지불하여 나의 구세주요 치료자요 새 생명의 회복자 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내가 울 때 위대한 현재이신 그분도 우신다. 이 광경 하나만으로도 마르다와 마리아를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현재로 돌아오게 하는 데 충분했다. 그 엄청난 광경을 묵상할 때 우리도 이들과 함께 나란히 그 대열에 설 수 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11:35).

 

4. 누가 피해자인가?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중심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으로 죄인들과 하나 되신 곳으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십자가의 효력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져 깨끗게 되는 것은 정말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효력을 거기에만 국한시킨다면 복음의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레익 박사는 Clinical Theology(임상 신학)라는 탁월한 책을 통해 십자가가 그리스도인 상담가에게 지니는 의미에 대해 역설한다. 그는 인간이 짓는 죄의 문제와 아울러 인간이 겪는 악의 문제까지 철저히 다루지 못하는 목회 상담은 어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레익은 강조하기를,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궁극적 동화는 범죄한 죄인들만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죄 없이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해당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직접 죄를 지은 사람들의 형별과 결과도 담당하셨지만 그와 아울러 타인의 범죄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겪는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 영적 고통도 총망라하여 다 담당하셨다. 그분은 범죄한 죄인들뿐 아니라 무죄한 피해자들과도 온전히 하나가 되신 것이다.

 

죄인의 입장에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고난을 돌보시고 나누시며 이해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 두 가지 필요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해답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죄의 궁극적 구속이자 고난의 궁극적 승리자가 되셨다.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한 궁극적 승리자가 되셨다.

 

그리스도께서 그 죽으심을 통해 의도적으로 그리고 자원함으로 자신을 죄에 대한 구속이자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죄악된 선택에 대한 무죄한 피해자로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부활하심으로 두 가지를 모두 이기셨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도 두 가지 모두에 대해 승리자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설교와 교육과 상담에 이 부분이 빠진다면 그것은 상처받은 이들에게 정작 그들이 절실히 들어야 할 메시지를 말해 주지 않는 것이 된다. 우리의 상처를 고치시는 그분은 우리의 상처를 함께 느끼신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그분은 우리와 함께 우신다. ?”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죄에 짓밟혀 부서진 삶 속에서 죄 없이 고난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이다. 불의(不義)의 파도는 이들을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회의(懷疑)의 바다로 쓸어 낸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다 보면 꼬치꼬치 ?”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 세상에 가능한 모든 불의를 다 겪으셨다. 아무도 그분의 행동에서 작은 실수 하나라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이렇듯 전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세상의 모든 죄악은 물론 모든 억울한 처사에 대해서도 피해자가 되셨다.

 

우리와 온전히 동화되기 위해서는 예수님 역시 피해자가 되셔야 했다. 각기 모양은 달라도 따지고 보면 우리도 전부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내가 하지 않은 선택, 내가 일으키지 않은 사고, 내가 만들지 않은 유전자 결손, 내가 회피할 수 없었던 정서 역기능, 내가 유발하지 않은 영적 문제, 내가 감당할 몫이 아닌 심판 등의 결과로 고통 당하고 있다. 우리 존재의 저 깊고 어두운 동굴의 차원에 들어가 보면, 우리 대부분은 소위 능력과 사랑이 충만하다는 하나님이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한 데 대해 고통의 절규를 토해 본 자들이다.

 

상담을 하다 보면 깊은 상처와 원한, 가해의 욕망에 가득 찬 사람들을 자주 대하게 된다. 처음에는 상담에 필요한 세부 사항을 전혀 감정 표현 없이 얘기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부드럽게 좀더 깊이 파고들어 간다. 마음에 떠오르는 가장 끔찍한 일은 무엇입니까? 심중에 가장 자주 떠오르면서 감정적 고통을 가장 심하게 주는 장면은 어떤 것입니까?” 그러면 변화가 나타난다. 눈시울이 붉어지며 어조가 달라진다. 떨리는 말로 고통스러운 장면들을 털어놓다가 이들 사이에 뚜렷하게 부각되는 한 가지 주제가 있다. 바로 모욕감이다. 뺨이나 머리를 한 대 맞는 것이 다른 부위의 심한 상처보다 훨씬 고통이 컸다. 얼굴과 머리는 어딘지 모르게 인간의 정체감 및 자존감과 깊이 관련되어 있어서 그 곳을 건드리는 것은 아주 심한 비인간적인 모욕을 준다.

 

타이타닉호(해상 침몰로 1,500명의 희생자를 낸 영국의 호화 여객선-역주)가 발견되기 7년 전부터 [내셔널 지오그래픽()는 배를 찾아내어 사진을 찍게 될 그날을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1985년 배가 발견되자 사진 작가 에모리 크리스토프는 수심 및 시계(視界)문제의 계산에 착수했다. 수심 4km까지 내려가는 데는 엄청난 비용의 기술이 필요했다. 과학자들과 영화제작자들 그리고 수중 영화 심연(The Abyss)"의 촬영에 사용된 영화용 조명 장치가 장착된 두 대의 잠수함의 도움으로, 1991년 드디어 크리스토프의 명작 사진 시리즈는 잡지를 통해 빛을 보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미리 소개한 광고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다. 본지 사진 기자, 완벽한 작품을 얻기 위해 얼마나 깊은 곳까지 내려갈 것인가?“

 

죄인들과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과연 얼마나 깊은 곳까지 내려가실 것인가?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그 사자들과 선지자들의 말을 통해 몇 세기를 두고 세심한 준비를 거쳐 드디어 생명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심연 밑바닥까지 내려오신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은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은 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깊다.

 

그러나 그분의 가장 깊은 최후의 동화는 백성들이 멸시하여 외면하고 제자들이 부인하여 저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경험이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고통스런 절규였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으셨다. 하늘은 침묵을 지켰을 뿐아니라 공허한 무() 같아 보였다(15:33-34). 자연의 힘까지도 그분의 고독한 공허를 한층 부추겼다. 대낮이 어둠으로 바뀌는 바람에 가까이 위로해 주러 온 어머니와 사도 요한과 몇몇 신실한 여인들조차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우시는 것을 보고 그 심령으로 탄식하시는 소리를 듣자 마리아와 마르다의 관심이 그분께 고정되었다. 말씀과 행동을 통해 예수님은 책임 전가에서 믿음으로 가는 그들의 여정에서 처음 두 단계를 인도해 주셨다. 그분은 우선 그들을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게 하신 다음,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눈물을 본 유대인들은 그 눈물의 깊은 의미를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했다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돌을 옮겨 놓으라(11:39)

 

5. 빛이 들게 하라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다루시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아주 인상적인 대조를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자상하심과 긍휼을 살펴보았다. 그분은 눈물을 흘리시고 슬픔 중에 탄식하시며 친구들의 고통과 슬픔에 온전히 하나가 되셨다. 동시에 예수님은 놀라운 상담자(기묘자와 모사)이시기도 하다. 그 이름에 걸맞게 이제 우리는 그분 속에 있는 자상하심과 엄격함, 긍휼과 직면(直面)의 절묘한 균형을 보게 된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11:38-39).

 

여기 첨예한 대조를 보이시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두 가지가 있다. 예수님은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셨다. 얼핏 보기에는 긍휼과 직면이 서로 상반되는 듯하지만 사실 그 둘은 예수님의 사역 기간 중 있었던 많은 사건들의 핵심이 되는 하나의 거대한 역설을 이루고 있다.

 

눈물이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직면은 그 사랑의 깊이를 보여준다. 예수님이 특정한 개인을 사랑하셨다는 표현은 성경에 세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얘기하는 본문이 그 중 하나이다. 또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종종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13:23, 21:7, 20)로 지칭된다. 가정적 애정이나 영적 친밀함에 바탕을 둔 이 두 경우는 그런대로 금방 이해가 된다.

 

그러나 세 번째 경우는 좀 다르다. 그는 예수님이 전에 한 번도 만나 보시지 않은 사람이다.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에 대해 물었던 바로 그 부자 청년 관원이다. 마가는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썼다. 그의 패기 있는 인상, 뭔가를 추구하는 마음, 영적 잠재력이 당장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를 깊이 사랑하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셨는가? 그 모든 좋은 자질들에 대해 칭찬하셨는가? 아니다. 그분은 그가 갖추지 못한 부분을 그 자리에서 지적하심으로 사랑을 표하셨다.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10:21).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셨다. 그를 너무도 사랑하여 듣기 좋은 말만 할 수는 없으셨다. 책임을 직면케 했다가 오히려 이 젊은이를 잃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각오하실 만큼 사랑하셨던 것이다. 행동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인자와 긍휼이 풍성한 사랑이지만 동시에 거룩한 사랑이다. 상대의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못 본체 외면하는 사랑은 참된 아가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알맹이 없는 사랑이다.

 

예수께서 매우 긍휼히 여기며 무덤에 가서 돌을 옮겨 놓으라 명하셨던 것도 바로 이런 엄하신 사랑에서 연유했다. 마르다는 그 명령이 가혹하고 무정하게 느껴졌다.주여,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물론 예수님도 명령하실 때 그 사실을 분명 알고 계셨다. 아시면서도 왜 그렇게 하라고 하셨을까?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다. 돌을 옮겨야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이 두 자매의 여정에서 이번 단계는 전체 기적의 일부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빛이 들기 위해서는 돌을 치워야 했다. 빛이 없이는 진리도 없고 새 생명도 없다. 우리는 진리를 직면하지 않으려고 또는 빛으로 인해 밝혀질 사실을 보지 않으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속을 덮어두려 한다. 돌이란 바로 그 덮어두는 방편을 의미한다. 우리는 돌을 치우는 일이 몹시 불쾌하고 고통스런 과정이라는 사실을 안다. 마르다처럼 말이다. 나는 고통에 떨고 있는 수많은 내담자들로부터 마르다의 이의에 해당하는 말들을 수없이 들었다. 그 문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얘기하면 너무 상처가 됩니다. 차라리 잊는 편이 나아요. 이 문제만큼은 그냥 그대로 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변화가 생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요.”

 

성경 전체를 통틀어 빛과 생명은 언제나 연관되어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또는 살라)”(5:8)

 

성경에서 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다행히도 바울이 상당히 도움이 되는 좋은 정의를 내렸다. “무엇이든 눈에 보이게 하는 것은 빛이기 때문에 빛을 비추면 모든 것이 보이게 된다”(5:13,NIV). 필립스(Phillips)역에는 한결 분명하게 번역되어 있다. 빛은 만물의 실체를 보여 줄 수 있다.” 이렇듯 빛은 사물의 실체를 드러내거나 보여준다.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그러므로 돌을 옮겨 놓는다는 것은 곧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자”(요일 1:7)는 권면을 따라 사는 삶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어떤 영역도 어두움 가운데숨기지 않겠다고 하는 의식적 결단이 있어야 한다. 곧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빛에 온전히 열어 놓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만일 해롭지 않은 개인 줄 알았는데 위험한 뱀으로 밝혀지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제거해 달라고 구하면 된다.

 

마르다의 이의가 십분 이해가 간다. 마르다가 그 어두운 무덤 안쪽에 있는 것의 부패한 모습과 그에 대한 절망감을 왜 직면하기 싫었는지 우리는 안다. 마르다도 우리처럼 두려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뚜껑을 열면안으로 빛이 들면서 진실이 밝혀진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밝혀질 진실이 더럽고 냄새 나고 창피하면 어쩌나 두려워 지레 겁을 내 돌을 그대로 둘 수 있다. 월리엄 제임스(Williams James)부패상의 외면화라 표현한 그 작업을 거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완전한 동화를 통해 우리의 기분은 온전히 이해하시고 우리와 함께 우시는 분이다. 문제는 우리가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그 분을 잊는다는데 있다. 우리 속을 열어 보일 때 우리에게 비취는 빛은 십자가의 빛이다. 그 빛은 마르다의 경우와는 다르다. 우리의 모습이 최악에 달한 그 지점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최고를 이룬다. 십자가의 빛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중단하시려 했다면 벌써 오래 전에 그만 두셨을 것이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최악의 모습으로 보고 느끼셨다.

 

하나님이 인생의 어두운 동굴과 무덤 속에 그 십자가의 빛을 비추시는 것은 인간에 대해 모르고 계신 사실을 새롭게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본인도 모르고 있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우리 인간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우리 인생의 그 숨은 상처의 영역에 하나님의 레이저 광선이다. 속을 들춰내고 때로는 화상을 입히기도 하지만 목적은 언제나 치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이미직면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모든 것을 지금직면할 수 있다. 한때 나와 함께 강단에 섰던 스티브 하퍼(Steve Harper) 박사는 최근의 한 설교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예수님의 손을 잡고 있으면 내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도, 최대의 실패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맞는 말이다. 그분의 손에는 못자국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못자국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만든 우리, 바로 당신과 내가 입힌 상처이다. 그 못박힌 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용기를 얻어 돌을 옮길 수 있다.

 

네가 만일 그것만 알았더라면.

성경에는 이런 전환점을 보여 주는 만약...만 했더라면의 멋진 예들이 가끔 나온다. 요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우물가의 여인 이야기 보다. 더 인상 깊은 예는 없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 네가 그것만 알았더라면(if only).이 말씀은 그녀에게 그대로 먹혀 들어갔다.

예수님이 그녀를 마침내 당신을 믿게 하는 지점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가시는 모습은 정말 너무나 멋있다.

 

사람들은 이 여자가 행복한 줄로 알았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여러 남자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애정과 선물을 받아 오지 않았던가 아주 신나고 멋있는 삶 같아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행복의 가면 뒤에 내적 공허와 채워지지 않은 삶과 깊은 갈증이 있음을 아셨다.

 

사람의 실상을 바로 안다면....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현재의 그런 삶으로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다행히도 이 상황 속에는 오직 예수님만 알고 계시던 사실이 있다. 사람들도 몰랐고 여자도 몰랐고 오직 예수님만 아셨다. 이 여자가 더 이상 그런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여자가 변화될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자신의 실체가 무엇이고 예수님의 실체가 무엇인지 바로 알기만 한다면(if only)말이다.

 

 

 

주여....벌써 냄새가 나나이다(11:39)

 

6. 무덤 속을 들여다보라

 

이제 우리 마음속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거기 믿음과 새로운 삶을 향한 우리 여정의 진보를 가로막는 만약...만 했더라면이 숨어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만 했더라면은 여러 가지 형태의 책임 전가로 나타날 수 있다. 우선 본 장에서는 과거 집착형, 동경형, 자기 증오형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변명형, 불순종형, 요행심형 등을 살펴보려 한다. 요한은 나사로의 무덤을 돌로 막아 놓은 굴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돌을 치워 빛이 들게 한 뒤에도 굴 내부에는 여전히 어둠침침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과거 집착형

 

과거 집착형의 끝없는 고통의 근본 원인은 자기한테 깊은 상처를 입힌 사람들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는데 있다. 남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의 다리를 끊는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너무나 분명하게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해 주셨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6:14-15)

과거의 상처에 그렇게 집착한 결과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만약만 했더라면이 삶이 그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결국 피해 의식이 정체감의 기초가 되고 만 것이다.

 

나한테 남은 거라곤 그것밖에 없어요.”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뜻이다. 그게 내 정체감의 전부예요. 그게 바로 나예요. 내가 아는 나는 그것 말고는 없어요. 그것을 포기하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될지 몰라요. 존재 자체도 흔들릴 정도예요. 그것이 나를 파멸에 몰아넣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자아 상실에 모험을 걸 수는 없어요. 그게 바로 나예요!”

 

고통을 잊지 못한디. 인간의 정서적, 영적 문제들 가운데는 우리 성격의 지하실 속에 묻혀 있는 건강치 못하고 파괴적인 경험에 비롯되는 것들이 많다. 많은 경우 우리는 그런 사건들을 토양 삼아 상한 감정의 씨앗을 뿌린다. 성인이 되면서 그 씨앗은 점점 자라 인생 전반에 대한 대응 방식을 망치고, 하나님과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계 양식까지 병 들게 한다. 성장기의 이런 경험들을 자라면서 저절로 떨쳐 내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내적 치유를 위한 특별 상담과 기도가 필요할 때가 많다.

 

과거의 회상이란 단지 그때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감정을 지금 다시 경험하는 것이다. 상담 및 회복을 통해 과거의 가슴 아픈 앙금을 떨치고 하나님의 섭리에 비추어 다시 조명할 때, 우리는 건강치 못한 성격 구조를 재구성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제서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정서적, 영적 온전함을 향한 길로 들어서게 된다.

 

책임 전가에 정체감을 둔다. 상담 과정에는 뒤 돌아보기를 그만두고 앞 내다보기를 시작하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정서적, 영적 소금 기둥에 깔린 과거의 포로가 되고 만다. 앞을 보지 않으면 본래의 고통스럽고 해로운 사건들이 우리의 성장 과정에 슬그머니 끼여들어 와 제 멋대로 온갖 행세를 하고 다닐 수 있다.

 

일단 그렇게 되면 이제 우리가 다루는 문제는 더 이상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이미 하나의 실체로 지속되는 현재의 일부가 된 것이다. 나아가 미래에까지 투사되리라는 것은 보나마나 뻔한 일이다. 이렇게 끝 모르는 만약...만 했더라면은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옛날 사람들은 이를 두고 부질없는 후회라 하기도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내 것으로 굳어지는 사이, 이것은 오히려 숨막히게 점점 더 우리를 죄어들 뿐이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판사가 되어 자신의 감옥에 자신을 가둔 다음 스스로 간수 노릇을 하게 된다. 마치 달팽이가 껍질을 달고 다니듯 과거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것이다. 그 결과 성장이 가로막혀 영원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게 된다.

 

피해 의식은 이렇게 자아 정체감과 자기 가치감과 자존감이 기초가 된다. 책임을 전가하고 만약...만 했더라면에 집착하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자신이 피해자가 됐던 그 사건을 취하여 아예 자기 성격의 본질로 바꿔 버리는 것과 같다. 과거의 사건은 더 이상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되고 만다. 이렇듯, 우리는 과거에게 우리를 이길 수 있는 힘을 내어 준다. 그러나 성경은 과거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정서를 도말 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2:14-15).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죄든 타인의 죄든 더 이상 그런 죄의 피해자가 될 필요도 없고, 그런 죄가 현재 우리의 정체감을 결정하도록 놓아둘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는 그런 낡은 정체감에서 벗어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고후 5:17). 우리의 존재는 더 이상 과거 자신의 행위나 우리를 향한 타인의 행위에 근거를 더 이상 과거 자신의 행위나 우리를 향한 타인의 행위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존재 근거는 우리가 누구에게 속했고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에 있다.

 

동경형

 

성경에서 뒤를 돌아본 사람들로 가장 유명한 경우는, 단연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을 일삼던 이스라엘 백성의 기사이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if only)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16:2-3).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지도자들과 하나님을 향하여 만약...만 했더라면을 외치던 여러 사건 중 하나에 불과하다. 첫 번째 사건은 홍해를 앞두고 바로의 군대가 그들을 잡으려 뒤쫓아오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14:10-14). 두 번째 경우는 위에 기록된 사건이다.

 

그리고 세 번째 사건은 르비딤(므리바)에서 물이 떨어졌을 때였다(17:1-3). 이 사건은 민수기 20:3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백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면(if only)좋을 뻔하였도다...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몇 세기 후 예레미야는 이들이 하나님의 계속되는 기적적인 구원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대적하여 원망한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뒤를 향하고)그 얼굴을 향하지(앞을 향하지)아니하였으며”(7:24).

 

동경형과 욕심형

 

원망이나 불평을 뜻하는 다툼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련하여 스무 번 쓰였고, 복음서에는 여덟 번 등장한다. 바울도 구약 시대의 사건을 지적하며 우리에게 경고한다. “우리는 저희와 같이 (주를)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 10:9-10).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9:62).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똑바로 쟁기질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에는 또 다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결국 뒤로 돌아가게 되고 거기 그대로 눌러앉기 쉽다는 말이다.

 

성경 기자들은 이런 욕심형의 만약...만 했더라면을 아주 위험한 것으로 취급한다. 감사가 멎고 불평이 시작될 때 동경과 욕심이 들기는 쉽다. 즉 광야 생활의 시련과 제자된 삶의 필수 훈련을 바라볼 때 우리는 찬양을 그치고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신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광야 훈련 과정을 진행하시는 동안, 이들은 애굽 상전들의 잔인함과 살을 찢는 듯한 채찍의 고통과 덜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는 까맣게 잊었다.

 

그들은 좋은 일들만 골라서 기억했다. 그들은 자유민의 고통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잘 먹는 노예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사 뒤쫓는 바로의 군대로부터 벗어나게 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셨으며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셨으나,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위해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에 대해 더 이상 감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을 잊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와 매일의 공급은 잊은 채 환상 속의 과거에 동경과 욕심을 품었다. 이런 욕심형 만약...만 했더라면은 자연히 현재에 대한 불평을 낳았다.

 

현재를 찬양하라

 

지나간 일일랑 잊어야 한다는 바울의 얘기가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는 알맞은 때와 장소가 있다. 자신이 이런 동경형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달았을 때가 바로 그때다. 만일 당신이 그 경우라면 이 말씀은 바로 지금 당신이 따라야 할 하나님의 권고이다.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13, 14).”

 

자기 증오형

 

유다와 베드로는 과거의 죄와 실패를 돌아보는 만약...만 했더라면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죄는 아주 심각했다. 그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가해자였다. 하나는 예수님을 배반함으로써, 하나는 예수님을 부인함으로써 였다. 그들은 둘 다 예수님을 버렸다. 하나는 은 30을 얻고 싶은 욕심 때문에, 하나는 사람들의 인정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죄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죄를 짓지 않았던 때로 되돌리거나, 만회하거나 번복할 길은 전혀 없었다.

 

상이한 결말의 핵심은 뉘우침(remorse)’회개(repentance)'의 일대 차이에 있다. 여기 나온 뉘우쳐라는 헬라어 메타멜로마이(metamelomai)‘뭔가에 대해 후회하거나 걱정하거나 속상해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순전히 뒤를 돌아보는 단어로서 바꿔 말하면 이런 뜻이다. 내가 한 일에 대해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정말 끔찍한 일이다. 그렇치 않았다면(if only)좋았을 텐데.” 뉘우침은 후회와 유감과 자기 증오를 포함한다. 그러나 온통 과거에 대한 것뿐이다.

 

회개라는 말의 헬라어는 메타노이에오(metanoieo)'이다. 이 단어에도 과거를 돌아보는 만약...만 했더라면메타멜로마이감정이 들어 있다. 그와 동시에 여기에는 돌아서다‘ ’방향을 전환하다라는 뜻의 미래를 내다보는 시선도 들어 있다. 이 단어는 마음을 바꾸다‘ ’회심하다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과거의 아픔과 자기 증오형의 만약...만 했더라면이 현재의 소망과 방향 전환 의지라는 더없이 중요한 요소와 한데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킹 제임스(King James)역에는 유다가 회개하여로 되어 있지만 뉴 킹 제임스 역에는 다시 유다가 뉘우쳐로 올바로 고쳐져 있다.

 

예수님의 비유 중 가장 놀랍다고 할 만한 탕자 비유에서도 바로 이 말이 핵심 단어이다. 자신의 죄로 멍들고 상한 탕자는 당시 유대 청중들에게 돼지우리의 비유로밖에는 제대로 전달될 수 없는 지독한 자기 증오에 빠졌다. 그가 스스로 돌이켜”-이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처음 했던 일은 내가 죄를 얻었다고백한 것이었다. 이 말이 이 비유의 전환점이다.

 

이 말은 유다에게도 전환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다의 이 말은 오히려 자기 증오를 자기 파멸로 바꾸고 말았다. 탕자가 구원받은 것은 그 고백을 전환점으로 삼아 더 이상 뒤쪽이나 안쪽 또는 아래를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앞을 내다보았다. 아버지를 찾아가 긍휼을 구하기로 했던 것이다.

 

뉘우침이란 후회와 자기 비난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회개에도 그런 요소가 있긴 하다. 그러나 새로운 관계에로의 회복 가능성을 볼 수 있도록 방향을 전환시키는 것이 회개이다. 유다가 끝내 버림받았던 것은 예수님을 배반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용서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를 파멸에 몰아넣은 것은 죄가 너무 중해 용서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계속 뒤만 돌아볼 뿐 방향을 돌려 다시 한 번 예수님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쪽을 택했다.

 

베드로도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다.물론 베드로의 회개에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주권적 역사가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진정한 회개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기 때문이다(고후 7:10).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를 결정할 책임이 있다.

 

오늘날에도 이 메시지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자기 증오형의 만약...만 했더라면은 죄책감과 정죄의 어두운 굴 안에 그들을 꼭꼭 가두어 둔다..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온전히 받아들임으로, 그리고 자신을 용서하는 데 필요한 그분의 은혜와 용기를 온전히 받아들임으로 그 구속 상태를 깨뜨리고 나와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 자신에 대한용서는 서로 너무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후자 없이는 진정 전자의 기쁨을 경험했다 할 수 없다.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11:39).

 

7. 어둠 속의 그림자

 

변명형

 

여기에 해당하는 예는 베데스다 못에 있던 사람의 기사에 잘 나타난다. 1888년 에루살렘 양문(羊門) 근처의 성 앤 교회(the Church of St.Anne)부근에서 고고학 발굴단이 다섯 개의 아치형 행각과 아주 비슷했다. 요즘 같으면 그 못은 간헐적으로 거품을 일으켜 치료 효과가 있는 따뜻한 광천수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천사가 물을 휘젓기 위해 내려온 것이고 바로 그 시간에 못에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요한은 그 못 주변에 모여든 온갖 절망적인 무리 가운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었다고 말한다.

 

38년이라는 기간을 한번 충분히 실감해 보기 바란다. 예컨대 여러분이 살아온 삶의 기간과 비교해 보라. 지난 38년 동안 여러분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전부 다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불구로 지내 온 사람을 상상해 보라. 이 사람이 실제로 못가에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는지는 모른다. 성경은 단순히 오래라고만 말한다. 이 사람은 오래 전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버림받은 이후 수 차례 자기 몸을 못으로 끌고 가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낙심한 그는 다른 수많은 맥빠진 병자들에 둘러싸여 당시 허드레 잠자리였던 얇은 자리 하나만 깔고 그렇게 누워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길었겠는지 도저히 상상도 못할 정도이다.

 

요한은 예수께서 이 사람이 거기 오랫동안 있었다는 사실을 아신 다는 것을 일부러 밝힌다. 그것을 아시면서도 도대체 무슨 이유로 예수님이 그토록 장기간 그 상태로 지낸 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이없는 충격, 바로 그것이 우리의 즉각적 반응이다.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은 이렇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4). 이로 미루어, 이 사람의 신체 장애는 도덕적 병에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심층 질문 속에는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주제와 직접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원리가 들어 있다.

 

첫째, 우리의 소원의 순결성에 관한 것이다. 남들한테야 어떻게 말하든 그와 무관하게 우리는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바에 대해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알고 계셨다.

 

둘째는 우리의 선택의 책임성에 대한 것이다. 상황이 어떠하든 상당 부분의 책임은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다. 책임이란 글자 그대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 즉 무슨 일이 닥쳐오든 거기에 대한 반응 방식을 선택할 만한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요컨대 나를 향한일어나는 일보다 내안에서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전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지만 후자는 어제나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요한은 못 주위에 행각이 다섯 개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쩌면 이 사람이 갖고 있던 다섯 가지 만약만 했더라면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마치 그 하나 하나를 변명 삼아 그 뒤에 숨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나를 챙겨 주는 사람만 있다면 - “주여사람이 없어.”

나를 거들어 주는 사람만 있다면- “나를 못에 넣어 줄.”

나도 남들처럼 기운만 좋다면 -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나도 기회만 놓치지 않으면 - “물이 동할 때에

나도 운만 좋으면 - “내가 가는 동안에,”

 

다 맞는 말이다. 그는 만성 질병을 앓고 있었고 그런 불구의 몸으로 물이 동할 때 못에 맨 먼저 도착한다는 것은 거의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요한 혼자만 기록하는 예수님의 심층 심리의 한 단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2:25). 예수님은 이 병자 속에서 현재의 비참한 상태보다 더 깊은 뭔가를 보고 계셨다.

 

유명한 의료 선교사 폴 브랜드 박사는 나병 환자들의 일그러진 손을 회복시키는 일로 인도에서 장기간 사역하였는데, 사역 초기에 개가를 올린 손의 형태와 기능이 모두 정상이 된 환자가 있었다. 그런데 손이 회복된 지 몇 달 후 그 환자가 다시 낙심에 빠지는 것을 보고 박사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회복된 손에 대해 고마워하는 반면 불평도 하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박사님, 구걸하기에는 이 손이 하나도 도움이 안돼요. 사람들이 전처럼 돈을 후하게 주지 않거든요.그러니까 의사가 나병 환자 특유의 웅크러져 펴지지 않던 손가락을 정상으로 펴주다가, 그만 그의 밥줄을 끊어 버렸던 것이다. 이점에 관해 브랜드 박사는 꽤 의미 심장한 말을 했다. 상한 심령에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는 작업, 바로 그것이 재활의 참된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에게서 뭔가 숨은 의도를 보시고 그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셨다. 병자의 대답을 보면 그런 의도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충격적인 질문은 그의 온갖 변명을 깨끗이 걷어 냄으로써 자기 파멸의 책임 전가로부터 그를 건져내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책임 전가의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치유의 선물을 받기란 요원하다.

 

예수님의 불가능한 명령

 

이 명령에 대해 병자는 그것이야말로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쏘아 대며 적대감을 갖고 방어적으로 응수할 수도 있었다. 다시 본래의 변명들을 되풀이하며 그 자리에 계속 누워 있을 수 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로 그 사실이 기적의 시작이다.

 

위대한 성경 학자 캠벨 모건(G. Campbell Morgan)은 우리는 이 시점에서 기사의 문자적 사실이 아니라 우리 주님 그분의 성품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이 사람에게 전혀 낯선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시선과 어조 속에 담긴 그 무엇이 천사가 물을 동하는 것보다 더 깊이 이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과 명령은 이 사람의 소원의 확인과 소망의 소생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의 시선을 연못에서 인격 즉 그 골치 아픈 물에서 생수의 근원 되신 주님께로 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꿔 말하면 사실 이런 뜻이다. 이제 더 이상 못에 들어가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라. 특정한 방법이나 특별한 시기를 찾는 일일랑 그만두어라. 그리고 나를 보라.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네 곁에는 내가 있다. 너를 못에 넣어 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네 병을 낫게 해주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자 깊이 파묻혔던 희망의 불꽃이 되살아나면서, 오랜 세월 이랬다 저랬다 하던 이 사람의 동기가 초점이 맞는 참된 소원의 불꽃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책임 즉 반응 능력을 행사하려는 의지가 다시 살아났다. 그리하여 결국 어떻게 반응할지 결정했다. 의지하고 순종하기로 말이다. 이렇게 자신의 뜻으로 반응을 보이자 그 몸이 재창조되어 그간 기운 없고 쇠약했던 근육이 새 힘을 얻었다. 불가능했던 일이 이루어졌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5:9). 이사야는 메시아의 날이 이르면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35:6 - 7)이라 예언했다.

 

못가의 병자가 변화된 것도 올바른 대상을 향한 올바른 신앙 덕이었다. 이것이 바로 책임 전가를 버리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성경적 태도의 핵심이다.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뜻과 담대한 순종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뜻이 서로 만나는 것은 마치 전기 스위치를 켜는 것과도 같다. 전혀 새로운 능력의 전원에 플러그를 꽂는 것이다. 그 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 아니라 그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마침 안식일이어서 그 사람은 유대인의 율법을 어긴 셈이었다(5:10- 11).

 

정말 터무니없는 얘기 같지만, 그의 치유 이후에 일어난 모든 소란들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비난을 일삼던 종교인들은 자리를 들고 간 사실에만 집중하느라 기적을 놓쳐 버린 것이다. 그들이 사건의 진상을 바로 이해했다면 이 병자와 함께 감격을 누렸을 것이다. 38년동안 누워지내던 그 자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가는 그를 보면서 말이다. 피해자가 승리자로 변신하는 얼마나 놀라운 장면인가!

 

모든 질문 이면의 질문

 

사람들은 정서적 고통, 영적인 패배, 결혼의 실패 때로 신체적 질병 등 끊임없이 대가를 지불하고도 과거의 고통에 매달린다. 그 근본 원인들이 방금 소개한 대답들과 그 밖의 여러 대답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변명에 집착하는 것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아주 집요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계속 피해자 신분을 주장하며 만약만 했더라면의 책임 전가 싸움을 벌이는 편이 훨씬 더 쉽게 느껴진다. 고통 없이 소득 없다.다들 잘 아는 격언이다. 그런데 이들은 거기서 한술더 뜬다. 고통을 쥐고 있어야 소득이 높아진다.”

 

물론 이들은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와는 전혀 그 배경과 상황이 다르다. 하지만 상태가 오래된사람은 누구나 이 사람처럼 자신을 무력한 불구로 느낄 수 있다. “네가 참으로 낫기를 원하느냐?” 우리도 그리스도의 이 날카로운 질문을 마치 나 자신에게 던지시는 것처럼 들을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조금도 꾸밈없이 정직하게 답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시점이 우리의 치유의 시작일 수 있다.

 

불순종형

 

아주 이상한 사람의 아주 이상한 이야기 속에서 또 하나의 만약만 했더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주인공의 이름은 발람으로 민수기 22 - 24장에 그에 관한 기사가 있다. 발람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살던 미디안 사람이다. 그는 선지자로서 명망이 아주 대단했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발람에게 돈을 주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여모압이 이길 수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겁이 난 발람은 발락의 사신들을 일단 하룻밤 묵게 한다. 자기가 취할 행동을 기도로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밤 기도하고 있는 발람에게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다. 너는 그 백성을 저주하지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발락 왕은 이 대답을 듣고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더 많은 돈을 주어 사신들을 다시 보냈다. 발람은 다시 거절하였다.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 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아주 경건한 만약처럼 들리지만 발람은 곧 이러 위험한 단서를 붙였다.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 는지 알아리라”(22:19) 발람은 자신을 속였다. 우리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혹시 허락하실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일 후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자 발람은 눈이 밝아져 칼을 빼어 든 사자를 보고 그가 자기 길을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22;34). 사실 발람의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다. 이것이 잘못된 일이요 당신이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일인 줄 알기만 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가지 말라고 너무나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

 

만약과 불순종

 

여기서 우리는 순종하지 않는 타협형의 만약만 했더라면을 보게 된다. 발람은 두 마리 토끼를 좇으려 하거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두 주인을 섬기려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예이다. 발람은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와 하나님의 적의 미래를 공유하고자 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도 싶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가능성도 남겨 두고 싶었다. 그 뒷이야기는 다소 복잡하다. 발람은 몇 차례 중요한 예언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의인의 죽음처럼 죽기를 기도하기도 했다(23:10) 하지만 그의 타협은 결과적으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더 타락시켰고 자신은 하나님의 원수들과 함께 칼에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31:8).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이나 당신의 사자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100% 분명하게 보여 주셨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뭐가 옳고 그른지 뻔히 알면서도 이의를 달고 합리화하며 심지어 발람처럼 더 기도해 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 가운데도 만약만 했더라면을 중단하고 순종을 시작해야 할 사람들이 많다. 마땅히 주님이 말씀하셨으니 따르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자리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만 하신다며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에 작은 촛불을 비추실 때 만일 우리가 그 빛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더 밝은 빛을 비추신다 해도 제대로 반응하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로 이점을 가르쳐 주고 계시나. 하나님께서 뭔가 특이하고 색다른 일을 해주시기를 기다리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도 많이 있다. 나한테도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나도 하나님을 믿을텐데.”

 

작은것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는 것에 대해 올바로 반응할 능력이 그만큼 떨어진다. 나는 이 법칙이 하나님께서 인생의 질서 속에 심어 두신 도덕률의 하나라 믿는다. 온전함으로 가는 길 위에 있는 자들에게 작은 일에 충실한 태도는 참으로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영역들에서 날마다 성령의 살피심을 받아 순종하는 일도 중요하다.

 

우리의 나쁜 습관을 깨뜨리시고, 잘못된 대응 수단을 바꾸시며, 건강치 못한 인간 관계 방식을 변화시켜 주시는 성령의 사역이 바로 그런 영역들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깨진 인생을 고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해 가시는 하나님께 건 시시합니다.” “이렇게 작은 일을” “좀 큰 일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중요한 것은 문제의 크기가 아니라 순종하려는 마음의 깊이이다.

 

우리의 저항의 마지막 보루는 대부분 이런 작은 일을 통해 드러난다. 우리가 자신에게 하는 말은 바꿔 말하면 이렇다 이건 시시해. 내 문제니까 내 마음대로 할 거야.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면 마땅히 모든 것의 주님이 되셔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로 더불어 영적 여정의 먼 길을 걸어왔다. 우리는 돌을 옮겨 놓았다. 그리고 빛이 들게 했다. 그리고 고통과 무덤의 악취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여러 가지 잘못된 만약만했더라면의 진실을 직면했다. 성령께서 우리 삶의 어두운 영역들에 관한 진실을 하나 둘 신실하게 밝혀 주심으로써 이런 어두운 영역들의 실체 즉 자신의 실패의 책임을 스스로 변명으로 모면하고 하나님과 타인에게 애꿎게 전가하던 수단이 마침내 빛이신 그분 앞에 밝히 드러났다.

 

이렇게 진리를 보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자. 예수님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신다. 이어 그분은 이렇게 덧붙이신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2, 36). 아들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책임전가를 그만 두고 믿음으로 돌아서라고 도전하신다. 이제 그분과 함께 그 길을 가도록 하자.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11:40)

 

8. 믿음의 만약

 

이 기사 속에는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과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아주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 요한은 그 구분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이) 돌을 옮겨 놓으니 (그제야)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인간의 책임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돌을 옮겨 놓아야 하고, 어둠과 악취를 그대로 내놓아야 하며, 과감히 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들이 안을 들여다보고 난 후에야 예수님은 비로소 위를 올려다보시며 기도를 시작하셨다. 우리가 일삼는 책임 전가의 만약...만 했더라면’ -과거 집착형, 동경형, 자기 증오형, 변명형, 불순종형, 요행심형 -가운데 많은 것들에 대한 해답은 바로 믿음과 순종이 따르는 만약의 기도에 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말 속에 앞에 얘기했던 많은 과거 지향적 만약...만 했더라면의 모토가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는 것이 보는 것으로 그 순서를 거꾸로 바꾸셨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if)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기도가 차지하는 자리와 기도의 방식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우선 첫째로, 그분이 기도하셨다는 사실 자체를 들 수 있다.

 

열린 무덤의 오싹한 광경과 썩는 냄새 앞에서 그분은 기도하셨다. 우리는 어떤가? 자신의 상처와 모욕, 패배와 환멸, 정서 질환과 영적인 병, 두렵고 막강한 만약...만 했더라면등이 모든 것들 앞에서 우리는 기도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 앞길에 책이나 설교 또는 상담자 등을 보내서 그 빛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로 계시해 주시는 시각과 통찰 앞에서 우리는 기도하고 있는가?

 

또한 소위 그리스도인 상담가라고 하는 우리는 정서적, 영적 자유를 위해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는가?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주님을 향한 더 깊은 자기 굴복에 있다.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지음받은 자이고 하나님을 위해 지음받은 자이다. 결국 내담자들을 위한 그리고 내담자들과 함께 하는 기도가 없이는, 그리고 내담자들에게 건강하고 건설적인 기도 방법을 가르치지 않고는 이 궁극적 치유와 온전함은 이루어 질 수 없다.

 

두 번째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주님이 기도하셨다는 사실 외에 그분의 기도의 방식이다.

 

예수님은 기도 제목이 무엇이든 절대 간구로 먼저 시작하지 않으셨다. 언젠가 그분은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는 자리에서 기도란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 성품의 본질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6:9). 예수님 자신은 기도를 어떻게 시작했는지 보자. 그분의 기도는 아버지라는 단어로 시작되었다. 일체의 간구가 있기 전 그분은 경배와 찬양과 감사로 말문을 여셨다. 우리도 예수님의 본을 따라 감사와 찬양으로 기도를 시작하기만 한다면(if only), 우리의 골치 아픈 만약...만 했더라면가운데 많은 부분이 치유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무슨 일을 당하든 그분을 찬양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우리는 구원의 옷을 입는다. 찬양이 없으면 그 당한 일로 말미암아 파멸에 이르게 됐을 테니 정말 글자 그대로 그 일로부터 구원을 받는 셈이다. 실망과 상심은 우리에게 더 이상 붙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과연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다.

 

성경은 신앙의 기초를 감사와 찬양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리가 고통의 감정을 표현해서는 안된다거나 매사를 무조건 할렐루야!”로 덮어 버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무슨 일이든 그 일 자체가 다 감사할 만하다는 얘기도 아니다. 사고로 많이 다치거나, 불치의 암에 걸리거나, 자녀가 죽든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 하나님의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일로 인해 감사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하나님은 일이 어떠 어떠하게 되었기 때문에 일 자체로 인해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끊임없이 감사드리는 그 자체에 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The Book of Common Prayer(공동 기도서)에 보면 수세기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찬양의 영을 불어넣은 일반 감사(General Thanks-giving)’라는 기도가 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 및 그 선하심과 사랑, 창조, 우리를 지키심, 구속을 베풀어주심, 영광의 소망 등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 주의 모든 자비에 합당한 의식주시기를 구한다.

 

믿음의 축복

우리가 믿음의 사다리에서 어디쯤 있든 예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시고 거기서 더 높은 자리로 끌어올려 주신다. 그리스도를 통해 흘러나오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놀라운가! “안됐지만 너는 방법이 틀렸어하고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어떻게든 우리를 받아 주시는 그 하나님은 얼마나 겸손하신 분인가! 그분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우리가 그분께 나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나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깨끗이 내려놓고, 사실대로 다 고하며 당신께 믿음을 두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도 진정한 피해자가 있다. 신체 장애의 피해자뿐 아니라 현대의 비참한 정서적, 영적 고통의 피해자도 있다. 역기능 가정의 비()은혜 ,아동 경시와 방치, 배우자의 배반과 외도, 신체 폭력과성폭행, 이혼과 지독한 자녀 양육권 싸움, 비행 자녀로 인한 고통 등이 그 예들이다. 그야 말로 눌린모습들로 결국 그런 사람은 굴레에 매인 노예가 되고 만다. 노예가 되는 대상은 두려움, 원한 감정, 인간 관계에 대한 불안, 이성에 대한 증오, ()전반에 대한 혐오감 내지 강박증, 중독 행위 등 얼마든지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사회 기관, 교회, 상담, 회복 그룹 할 것 없이 받을 수 있는 도움은 다 받아야 한다. 일단 상한 심령을 고침 받고 과거 아픈 기억의 세력에서 놓이지 않는 한 하나님께 믿음을 둔다는 것은 요원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우리의 궁극적 온전함을 이루는 일은 먼저 옛 신분의 고통과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신분의 기쁨과 자유를 찾은 뒤에야 가능하다.

 

믿음과 순종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믿음과 순종은 원인과 결과의 자리를 서로 맞바꾸며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모본은 거의 모두가 순종의 행위로 예시되어 있고 그것도 대개는 가장 일상적이고 실제적인 일들에 대한 순종이었다.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여행을 떠났다. 믿음으로 사라와 아브라함은 아기를 가졌다.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아기를 숨겼다. 믿음으로 여호수아는 성벽 둘레를 돌았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이들에게는 과연 두려움도 없고 회의도 없고 의문도 없었을까? 각 사람의 기사를 읽어보면 해답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이들은 믿음으로움직였고 모험을 감행했다. 이들은 순종함으로 믿었고, 믿음으로 순종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우리는 어떤 때는 순종하기 위해 믿어야 하고 어떤 때는 믿기 위해 순종해야 한다.본회퍼는 이 진리의 양쪽 균형을 잘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균형을 잃으면 한쪽으로는 값싼 은혜의 과오에 빠지게 되고 다른 한쪽으로는 행위 구원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어느 경우든 저주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작고 불완전한 믿음

 

클수록 좋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그 말대로라면 제일 큰 것이 제일 좋다는 얘기가 된다. 예수님은 제일 큰 것이 제일 좋다고 여기지 않으셨다.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크고 완전해야 하는 것일까? 예수님은 중요한 믿음의 만약을 통해 우리에게 그 답을 들려주신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자기들은 귀신 쫓는 기적을 행할 수 없으냐고 여쭙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7:20). 그 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심으로써 작은 것의 능력을 강조하신 적이 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13:32).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한테 큰 믿음이 없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정말 우리는 믿음이 작다. 하지만 아무리 작다 해도 믿음이란 회의나 의문이나 불신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전한 것이라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겨자씨만큼만 믿으면의 그 만약에 또 하나의 다른 당신이 믿으면이라는 구절을 합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구절은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병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내어쫓아 달라는 아버지의 감동적인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9;14-29). 처음에 그 아버지는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은 거의 꾸짖으시는 투로 말씀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그러자 소년의 아버지는 즉각 소리쳤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아버지의 믿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과 참으로 아파하는 마음을 보시고 또 도움을 청하는 그 절박한 외침을 들으신 순간, 예수님은 그의 작고 불완전한 믿음을 귀히 보셔서 그 아들의 병을 고쳐 주셨다.

 

이것은 나의 고된 노력을 뜻하는 아비스(avis)라는 말과,‘은혜와 선물을 뜻하는 그리하여 주여, 제게 은혜로 믿음의 선물을 베푸사 이 불신을 이기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카리스(charis)와의 차이이다. 또한 두 가지 만약...만 했더라면의 차이이기도 하다. 하나는 믿음이 생기도록 내가 좀더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if only)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믿음의 은혜를 주시지 않는 한 내 힘으로는 믿을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기만 한다면(if only)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50:20)

 

9. 공동체에 주시는 특별한 은혜

 

마르다와 마리아는 뭔가에 홀린 듯 열려진 무덤 앞에 서 있었다.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신 사이 이들의 믿음은 자라고 있었다. 이들은 비로소 믿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자마자 곧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르다와 마리아도 무덤 입구의 어둠침침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마치 누군가 땅 위에서 발을 질질 끄는것 같은 바스락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11:44) 갑자기 여기저기서 놀라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수님은 두 자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말씀하셨었다. 이들은 그 말씀 그대로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었다. 4년처럼 느껴지던 지난 4일 동안의 괴로운 시련이 드디어 끝났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다.

 

이제는 그들이 그룹 은혜의 능력으로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노동 분할을 천명하셨다. 그것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죽음에서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기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분은 인간이 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그분은 그것을 당신이 직접 해주시지도 않았고 나사로에게 하라고 하시지도 않았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그 사람들에게 명하셨다. 이것은 오직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인생은 이런 일들로 가득 차 있다.

 

풀려 나야 할 사람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

 

나사로는 자신을 꽁꽁 동여맨 질긴 세마포 자락을 자기 힘으로는 벗겨 낼 수 없었다. 누군가 천자락을 느슨하게 풀어 주어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게 해주어야만 했다. 예수님은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나사로에게는 무덤의 모든 흔적을 완전히 벗는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여기 중대한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아주 놀라운 그림이 있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과거 무덤의 천조각을 남들에게 벗겨 달라고 하지 않는 한 진정 자신에게 필요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기란 어렵다.

 

우리는 여기서 간단한 심리적, 영적 원리를 찾을 수 있다. 은혜와 믿음을 가로막는 우리의 장애물은 대부분 과거의 건강치 못하고 파괴적이거나 죄악된 인간 관계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런 것들은 생명이 아닌 사망의 방식을 좇아 우리를 다치게 한 다음 꽁꽁 묶어 옥에 가둔다. 그리하여 우리는 방어 일변도가 되거나 너무 경직되거나 너무 유약하거나 도는 자신과 남들을 기만하려 하며, 그 결과 인생 대처 및 대인 관계에 있어 여러 가지 그릇된 방식들이 생겨난다.

 

이런 잘못된 유형은 후에 조용한 절망이 될 수도 있고 생존의 몸부림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일종의 살아 있는 죽음처럼 그저 존재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바로 우리의 전신을 꽁꽁 묶고 칭칭 동여매고 있는 과거의 낡고 냄새 나는 썩은 방식들이다. 이런 수의를 벗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현재의 건강하고 건설적인 인간 관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친밀감과 신뢰감의 풍토 속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 점을 아주 잘 표현한 고든 맥도날드(Gordon McDonald)의 말을 들어 보라.

 

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이 서로 뒤통수나 쳐다보고 있는 한 친밀감은 생길 수 없다.... 대형 교회는...건강한 소그룹을 잘 혼합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볼 때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대규모 집회만 가지고는 자라지 않는다. 믿음 안에서 자라고 싶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어떤 형태로든 소그룹에 속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소그룹의 열쇠는 하나님께 자신을 더 깊이 오픈하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오픈하는 분위기에 있다.

 

더 많이 오픈해야

 

지난 세대의 유명한 케직 사경회 강사 노만 그럽 (Norman Grubb), 종종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방이 지붕을 떠받치는 벽들로 둘러싸인 집 안에 있는 사람에 비유하곤 했다. 사방의 벽이란 우리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시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죄들, 이를테면 욕심과 이기심과 원한과 용서하지 않는 마음과 부정직과 교만과 영적 가식 따위의 죄를 듯한다. 지붕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키는 우리 족의 불순종과 불신을 가리킨다.

 

그럽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맨 처음 구원받을 때 이 집의 지붕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멍이 한 뚫린다.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길이 열려 우리는 그분과 대화를 나누며 사귐을 갖기 시작한다. 그 후로 말씀과 기도와 기타 영적인 훈련을 통해 지붕의 구멍을 계속 키워 가는 사이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은혜 안에서 점점 자라간다. 얼마 후 우리는 중대한 것을 발견한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그 벽들을 다 헐어 버린다면 지붕은 저절로 내려앉는다는 사실이다. 흔히 이런 행동에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보상이 매우 크다는 것을 그럽은 강조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열어 놓게 되면 언제나 새롭고 더 멋지게 하나님께 자신을 열게 된다.

 

초대 교회 때부터 교회는 그룹 은혜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4:32). AD 3세기부터 일대일 고해 성사가 시행되면서 이런 오픈된 교제를 잃어버린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인가! 결국은 밀폐된 고해실까지 나오고 말았다. 상담자라면 누구나 일대일 고해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는 인간의 많은 문제의 핵심 즉 교만과 가식을 벗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문제가 제대로 처리되기 어렵다.

 

후원, 책임, 기도

 

우리 가운데는 현대판 나사로가 많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의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런 죄들의 수의에 그대로 묶여 있다. 그 죄는 내가 지은 죄일 수도 있고 남이 나한테 지은 죄일 수도 있고 아니면 둘 다 일 수도 있고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다.

 

평생 목회 상담을 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 우리 가운데 이렇게 꽁꽁 수의에 싸여 있는 사람들은 그룹 은혜의 기본 요소들 없이는 결코 진정한 치유와 회복과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참여한 모든 소그룹들은 그 형태는 약간씩 다르지만 세 가지 기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사랑의 수용과 후원이요, 둘째는 직면과 책임이요, 셋째는 개인 및 합심 기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상담 사역의 핵심 부분은 사람들을 전반적 교회 생활로 이끌어 줄 뿐 아니라. 나아가 어떤 소그룹 즉 교회 안의 교회에 들게 하는 것이었다.

 

풀어 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

 

지금부터는 우리처럼 풀어주는 일을 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에게 소그룹이 주는 의미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예수님은 사자의 부활이나 견줄 수 있을 만큼 좀처럼 믿기 어려운 엄청난 기적들이 사람들의 삶 속에 행하셨다. 그런 후에도 우리는 그분께서 하라고 명하시는 일을 하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풀어 놓아 다니게 해야 할 그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옛날에 대해 우리는 옛날의 생각과 태도를 버리지 못한 채 계속해서 그들을 이전의 삶의 수의로 꼭꼭 감아 둔다. 우리는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부활 전의 시각을 그대로 붙들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그러고 있는 한 그들이 이전에 걸치고 있던 낡은 방식을 벗고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된다고 해도 아주 어려운 일이다.

 

여기가 바로 두 가지 만약이 함께 만나는 곳이다. 우리가 믿으면(if), 우리는 영광을 볼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 말씀에 재빨리 순종하여 나사로를 풀어 놓았던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우리가 돌보고 있는 자들을 풀어 주기만 한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을 볼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또는 우리의 삶의 영역들 가운데 예수께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실 만한 것들은 없는지 생각해 보라. 주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우리도 자신과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우리 집에서부터 시작하기를 원하실 것이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자신의 배우자의 개성을 모두 알고 있다.

 

아내 헬렌이 내 개성을 쭉 생각하더니 이런 말을 했다. 개성(idiosyncrasies)이라는 단어가 idiot(바보), sin(), crazy(제 정신이아님),이렇게 고어(古語) 영어 세 단어에서 왔다고 한다. 사실 이 단어는 preson, with, mixture를 뜻하는 세 단어의 희랍어로 구성되었다. 혼합된 기질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배우자와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우리는 상대의 혼합된 다양한 특성을 정말 모두 알고 있다. 한 가지 비극은 우리가 때로 자신의 배우자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상대가 무덤속에 너무 오랫동안 있었다고 혼자 혀를 차곤 한다. 이렇게 우리의 배우자를 칭칭 동여매다 보니 급기야 상대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낡은 태도와 기대 밖으로 걸어 나올 길이 전혀 없어져 버린다.

 

그러나 정작 그것은 무덤이 아니라 쳇바퀴일 수도 있다. 대단한 차이다. 쳇바퀴는 양 옆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자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한다면 그들은 쳇바퀴에서 빠져 나와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평신도 전도 대회에서 간증했던 어느 부부가 기억난다. 그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저는 남편과 남편이 하는 많은 이상한 행동들이 마음에 거슬렸어요. 특히 내 종교와 교회 생활을 바는 것이 불만스러웠죠. 나는 이렇게 기도하곤 했어요. ‘주님께서 남편을 사랑해 주세요. 제가 남편을 달라지게 해볼게요." 그러던 어느 날 낮은 목소리로 그 기도를 중얼거리고 있는데 꼭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밀리, 네가 대단히 오해하고 있구나. 네가 남편을 사랑해라. 달라지게 하는 일은 내가 하겠다.” 그리고 몇 마디 덧붙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편을 사랑했고 그 결과 2년이 채 안돼 남편도 회심하고 같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고 말이다. 지금 이 부부는 각지를 순회하며 함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풀어 주어 내보내라. 자라게 하라. 그것이 모험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아이들이 네뜻대로 바른 길로 가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풀어 주라.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과를 맞게 하라. 나란히 함께 설지언정 그 길을 막아서지는 말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믿으라. 그리고 믿는다고 말해 주라.

 

아이들이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할 때에라도 너는 믿음을 버리지 말라. 네가 아이들에게 새 영을 주었다면, 나는 그 아이들에게 새 생명을 줄 것이다. 아이들을 내 손에 맡기고 네 손일랑 아이들 위에 얹고 기도할 때만 사용하라. 아 아이들은 너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속한 아이들이다. 사랑이란 붙들어야 할 때를 알고 또한 내보내야 할 때를 아는 것이다. 놓아 주어 가게 하라. 네가 그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주변 사람들

 

생각하면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처음 몇 년을 돌아보면 한 가지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님께 철저해야 한다는 열정만 가지고 사람들을 고정된 범주에 집어넣어 영적으로 구분 지었던 것이다. 마치 칸막인 서류를 분류하듯이 말이다. 이를테면 구원받은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 ‘세상적인 사람’ ‘깊이가 없는 사람등이었다. 정말 지겨울 만큼 많았다. 나와는 다른 각양각색의 사람들에게 그들을 풀어 놓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칸칸이 무덤을 파고 사람들을 거기 묻은 셈이다. 그러나 정작 그 칸막이에 묻힌 것은 나였다. 스스로에게 속아서 그 많은 놀라운 그리스도인들과 풍성한 교제를 놓쳐 버렸다.

 

뿐만 아니라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들의 삶 속에 역사하게 하기는커녕 그들을 죄의 수의에 감긴 채로 그냥 놓아두었다. 나는 만일 그들이 어떠 어떠한 일을 하기만 했다면 또는 그런 일만 없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며 마땅히 그렇게 됐어야 한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과 나의 사랑으로 감싸 안지는 못하고, 미리 정해진 의에 대한 나 자신의 관념으로 줄곧 붕대에 감아 두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사역자들에게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잘못과 범죄와 실책을 그대로 굳게 하여 콘크리트로 굳히는 일을 멈추고 모든 사람을 향하여 소망에 찬 구속적 태도를 품으라 하신다.

 

수많은 사람들이 현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좀처럼 그들이 향상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임을 그분은 새삼 지적해 주신다. 우리에게 그들이 변화될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에 그들은 정말 변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만 묶어 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풀어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손마저 묶어 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풀어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손마저 묶어 두고 있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믿는 것이요, 믿음이란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사람들을 풀어 주기만 하면 부활과 해방의 기적은 오늘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계속될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11:44)

 

10. 요셉, “만약...만 했더라면이 없는 사람

 

진정한 피해자였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승리자가 된 사람이 성경에 우리 주님 말고 또 누가 있을까? 가족들의 죄와 친구들의 과오와 전반적 상황으로 인해 정말로 피해를 입은 자로되 모든 것을 뚫고 나와 당당한 승자가 된 사람. 이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바로 요셉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종종 구약에서 가장 그리스도를 많이 닮은 사람으로 지칭되어 왔다. 그의 생애를 잘 살펴보면 우리의 삶 가운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 입은 영역에 승리를 끌어들이는 비결을 발견하게 된다.

 

요셉은 장벽을 뛰어넘지 않을 구실로 만약...만 했더라면을 되뇌이며 뒤를 돌아본 적이 없다. 단 한번도 없다.

요셉은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책임 전가 싸움을 벌이지 않았다. 그저 믿기 위해 즉 의지하고 순종하기위해 바싹 달라붙어 오를 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자기 주변을 가로막는 벽들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흔미한 역기능 가정의 장벽

 

창세 이래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깨어져 엉망이 된 가정과 거기서 받은 상처로 혼돈에 빠진 아이들을 취하셔서 기적을 일으키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는 일에 도통하신 분이니 말이다. 역사상 가장 어두운 금요일을 취하셔서 세상에서 가장 발은 일요일 즉 부활의 날로 바꾸신 하나님께 그 외에 달리 도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이제는 그 어둡던 날조차 성 금요일로 부르고 있지 않은가.

 

뒤를 돌아보며 내가 다른 집에서 태어나기만 했다면!”하고 말할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단연 요셉이다. 그러나 요셉은 에너지를 책임 전가에 사용한것이 아니라 믿음에 쏟아 부었다. 창세기 41:51-52에 나오는 놀라운 말씀을 눈여겨본 적이 있는가?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잊어버리다’)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 (‘두 배의 창성’)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불의와 피해의 장벽

 

용서의 중요성은 나의 상담 경험을 통해서도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학대자를 용서하지 않고 그 쓴 뿌리를 계속 품고 사는 피해자는 상대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의식, 무의식 할 것 없이 모든 생활이 학대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먹을 때나 일할 때나 놀 때나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그야말로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그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치 내가 그 사람들한테 사슬로 묶여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건강도 나빠졌고 감정도 안정적이지 못했으며 또 대인 관계에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용서하고 복수심을 버리고 나서야 진정 그 사람들로부터 벗어났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의 실패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과 책임 전가를 버리고 내적 평안을 찾을 수 있었고, 또한 건설적인 대인 관계 형성을 통해 원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셉의 용서하는 마음은 정말 너무너무 놀라운 것이다. 특히 그 당시는 복수와 보복이 법적인 권리이자 도덕적으로도 옳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묘사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구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49:23-25).

 

요셉은 자기 형들의 질투와 적의에 찬 날카로운 화살의 피해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당당한 권세로 벌할 기회가 왔을 때 결단코 그들에게 화살을 되쏘지 않았다.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려면 팔에 힘을 잔뜩 주어야 한다.

 

강한 팔을 유하게두어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요셉이 독한 마음을 품지 않았고 그 팔에 힘을 주지도 않았으며 제 손으로 복수에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주 멋있게 표현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목자...전능자의 손에 맡겼다. 피해자 요셉은 피해 의식 논리의 사용을 거부한 채 가해자를 용서하고 승리자가 되었다.

 

요셉의 이야기에는 용서와 화해의 중요한 차이가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성경은 용서만 하면 잘못을 행한 사람과의 화해가 자동적으로 뒤따른다고 보장하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줄로 생각하다가 결과가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 대해 잘못된 죄책감을 갖곤 한다. 화해란 상대편이 함께 가담해야 하는 양방 통행로이다. 하지만 상대편이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용서란 일방 통로가 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항상 화해하려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원히 화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요셉의 경우 이미 오래 전에 형들을 용서하긴 했지만 정작 화해가 이루어질 때까지는 20년 이상 기다려야 했다. 물론 두 가지가 한꺼번에 일어날 수도 있다.

 

뉴스위크지에 실린 최근의 한 사건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거짓 고소와 거짓 약속의 장벽

 

요셉은 이렇게 책임 전가나 원한에 찬 심정으로 뒤돌아보는 일 없이 끝까지 이스라엘의 전능자를 향한 믿음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그러했기에 그는 자신의 신앙뿐 아니라 정체감과 자존감과 자신감 그리고 진정한 자아까지 지킬 수 있었다.

거듭 되풀이하여 피해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그 피해 사실을 핑계 삼지 않았으며 그 결과 한 번도 자신이 피해자라는 정체감에 빠지지 않았다. 요셉은 과연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장애물을 뛰어넘는 사람, 승자, 이것이 그의 정체가 되었다.

 

장벽 꼭대기에 올라 내다보는 50/20 시력

 

마침내 포도나무 가지가 벽의 꼭대기에 이르게 되면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이제 요셉은 자신의 인생과 자기가 겪어 온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유리한 고지란 특정 장소나 상황 대해 보다 넓은 총체적 시야나 전망을 확보할 수 있는 지점을 말한다.

 

피해자도 장벽 꼭대기의 유리한 고지에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달라 보인다. 그 위에 서라야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느니라-NIV)"(8:28)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무성한 가지

 

요셉의 비밀은 무엇일까? 아무 열매 없는 무모한 행위인 책임 전가를 버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믿음과 섬김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요셉이 풍성 한 가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참 포도나무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하나님이 믿음, 용서, 신실한, 용기 등 요셉이 보여 준 모든 열매의 근원이시다. 또 한가지 요셉이 무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샘 곁에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이 샘이나 시내로 비유되는 경우를 수 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야곱이 사용한 이미지도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지칭하여 사용하신 놀라운 상징과 똑같다.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생수라 선포하셨다.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 나중에 성전에서도 그 분은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7:38).

 

요셉이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가 된 것은, 참 포도나무와 온전히 하나되어 만유의 근원이요 샘물이신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마셨기 때문이다. 요셉은 진정 담을 뛰어넘은 포도나무 가지요 무성한 가지였다. 우리도 우리 생명의 근원이요 우리에게 힘 주시는 샘물이신 그분께 늘 붙어 있다는 그와 똑같이 될 수 있다.

 

최후의 싸움터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사랑하는 형제 나사로의 무덤에서 이 책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두 자매에게 주시는 도전의 말씀을 들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이어 주님은 그들이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주셨고 우리도 주님을 따라 그 행로에 동참했다. 두 자매는 구경꾼 입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나사로를 싸고 있던 수의를 벗겨 풀어 놓아 줌으로써, 그 영광의 협력자가 되었고 우리도 함께 그 과정에 참여했다.

 

끝으로 우리는 요셉을 살펴보았다.

 

거듭 피해를 당하면서도 절대로 피해자의 만약만했더라면에 빠져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항상 이스라엘의 전능자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위를 바라보아 결국 숭리자가 된 성경에 나타난 유일한 인간이다. 우리는 요셉이 후에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역사상 최대의 피해자이자 최대의 승리자가 되신 예수님의 가장 분명한 모형임을 알게 되었다.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n)선과 악이 유일하게 공유하고 있는 것은 싸움터라고 말했다. 악의 궁극적인 힘은 인간이 선악을 혼동하여 악을 선하다”(5:20) 함으로써 그 악의 도를 더하게 할 때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힘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하실 때 나타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성령의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볼 때 당신은 피해자인가 승리자인가? 선택은 당신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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