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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당신의 영적 건강을 진단하라

by liefd 2024.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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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당신의 영적건강을 진단하라? 10주 과정을 통해서 새해에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당신은 영적으로 건강하십니까? 아니면 영적으로 분주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십니까?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더욱 친밀하게 알기 원하며, 그분께 온전하게 순종하길 원하십니까?

 

1. 당신은 하나님을 갈망하는가?(시 42:1-2)

 

사도 바울 역시 빌립보서 310절에서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강력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입니다.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지금 인생의 말년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아주 친밀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알고 싶어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 저자는 시편 421-2절에서 이와 비슷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을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당신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갈망이 있는가?

 

영적인 목마름의 세 가지 종류

 

하나님은 인간을 자연적인 상태에 만족하도록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모든 사람은 현재의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나는 것은 그들의 영혼 안에 있는 목마름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1. 공허한 영혼의 목마름

 

이 세상의 보통 사람, 곧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공허한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줄곧 자신의 공허함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아다닙니다. 여기에는 돈, 섹스, 권력, 주택, 토지, 스포츠, 취미활동, 오락, 탁월함, 중요함, 교육 같은 것이 포합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2:3)입니다. 공허한 영혼은 항상 뭔가를 추구하지만 결코 안식하지 못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만들어 놓으신 빈 공간을 결코 채우지 못합니다.

 

갈증을 느끼며 뭔가를 찾아 헤매이지만 공허한 영혼은 자신의 진정한 필요에는 눈이 멀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추구한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향해 갈급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그런 하나님, 곧 그들이 원하는 그런 신을 향해 갈급해 합니다.

 

공허한 영혼이 가지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다른 많은 삶의 영역에서는 그렇게도 끝없이 불만족스러운 것을 발견합니다. 정작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만족해 버립니다. 영적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누가복음 1219절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2. 메마른 영혼의 목마름

 

공허한 영혼과 메마른 영혼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생수의 강(7:38)을 전혀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후자는 그것을 맛본 적이 있지만 지금은 상실한 상태에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성도가 메마른 영혼이 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의 참된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주님의 생수를 마실 때 우리 안에는 샘이 하나 생겨납니다. 그 샘은 갈증을 해소시켜 줍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에 대한 필요 자체를 없애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목마를 때마다 주님이 물을 줄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계속 퍼줄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다음 세 가지 하나 때문에 건조해집니다.

 

가장 흔한 원인은 세상의 소원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것을 마시면서, 정작 하나님의 강’(65:9)에는 너무나도 적은 양의 물을 마십니다. 잘못된 것을 마시면 마실수록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는 또 다른 원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충만하게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어떤 때는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의식으로 우리의 영혼이 메마르게 됩니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때라고 느끼게 됩니다(27:46).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23:4).

 

다윗은 시편 1436-7절에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영혼이 피곤하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이러한 상황에 처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자신의 관계를 점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거리를 느끼는 부분이 무엇인지 회개하고 돌이키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양이 구름 뒤에 숨었다고 해도 태양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메마르게 되는 세 번째 원인은 지속적인 정신적 또는 욱체적 피로 때문입니다. 성도라 해도 피로하고 녹초가 된 상태에서는 영적인 성장을 감지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생수 이외에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당신과 함께 계신다는 것, 그분의 임재에 대한 감각을 되찾는 것입니다.

 

3. 만족한 영혼의 목마름

 

메마른 영혼과는 달리 만족한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만족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목말라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34:8).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맛은 너무나 독특한 만족을 주기 때문에 더욱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3:7-8). 이렇게 하는 이유가 바로 10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알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영혼의 만족을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목말라했습니다. 참된 은혜 안에는 무한히 반복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사람은 목말라함으로써 더욱 받게 되고, 받음으로써 더욱 목말라하게 됩니다.

 

영적인 목마름의 축복

 

이사야 선지자는 그를 기다리는 자(열망하는 자) 마다 복이 있도다.”(30:18)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은 영적인 목마름을 일으키신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목말라 하는 이유는 성령께서 그 안에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8:15). 사람이 본성대로라면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열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육적인 상태(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목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새롭게 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빨리 다른 것을 갈망합니다.

 

2. 하나님은 영적인 목마름을 채워주시기 위해 목마름을 일으키신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107: 9).

예수님도 우리에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5: 6)라고 하셨다..

 

갈망을 만족시켜 주는 분을 갈급하기 위한 실천적인 단계

 

1. 성경을 묵상하라

 

단지 성경을 읽지 말고 성경을 묵상하라.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성경을 묵상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흐르는 어떤 것을 우리가 흡수할 때 비로소 그것은 하늘로부터 온 영감있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흡수하지 않고서는 우리 영혼의 갈증을 해소할 방법이 없습니다. 말씀을 읽는 시간의 25%는 읽은 말씀가운데 어떤 특정한 구절이나 단어를 묵상하는데 사용하라. 그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라 펜을 가지고 메모하고 생각나는 대로 써보라. 그 말씀을 적용하거나 그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을 한 가지 이상 찾아보라.

 

2. 성경을 가지고 기도하라

 

예를 들면 시편 63편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본문을 먼저 읽고 주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심을 고백하는 기도로 시작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으로 인해 즐거워하라. 다음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인정하면서 그분에 대한 영혼의 목마름과 갈망을 표현하라. 그리고 본문에 와 닿는 것을 가지고 기도하라.

 

3. 우리를 영적으로 목마르게 만들어 주는 작가들의 책을 읽으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읽은 다음에는 우리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 있는 고전작품을 읽어라. 존 번연의 천로역정, 리차드 포스터의 영적성장 등

 

2.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으로 지배를 받고 있는가?

 

다가오는 영원한 세상을 위해 반드시 준비해야 할 것은 성경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당신에게 명하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값진 물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다이아몬드, 고급 아파트, 모나리자 그림, 왕의 무덤에 있는 황금가면 같은 것들은 값이 나가는 것들이다. 하지만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인해 죽어 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세셍에서 가장 귀한 보배라 해도 전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맙니다.

 

누군가 내게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물건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성경을 고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526절의 말씀처럼 세상의 물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성경은 또한 음식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151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예수님 자신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4:4)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 몸이 음식을 먹지 않으면 몇 일도 못가서 죽게 되는 것처럼 이와같이 영혼의 양식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멸망하게 됩니다.

 

음식과 물은 생명에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생명에는 이것말고도 기본적인 것들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이런 것들로 비유됩니다. (119:105), 불과 연장(23:29), 병기(6:17), 씨앗(벧전 1:23) .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확실하며, 정직하고, 순결하고 정결하며, 의로우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고,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입니다(19:7-10).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소성하게 하고,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해 줄 수 있습니다(19: 7-9).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4:12)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자신은 거의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아주 분명하게 알리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그 분에게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선포하신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리 장구하고 번성한다 해도, 그 인생은 무의미하며 무가치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본질적인 것, 또는 영원한 어떤 것을 제공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들이 그의 완전한 아들의 형상을 점점 더 닮아 성장하기 위해 먹이시는 만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당신이 영적인 건강과 성장을 평가할 수 있는 한 가지 질문은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지속적으로 지배를 받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삶의 구체적인 영역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스스로 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까? 성경을 어떤 상황에 적용하고자 할 때 영적으로 당신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거나 당신보다 성숙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가? 실제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서 성경을 보는 것이 당신에게 습관이 되어 있는가?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멸망하느냐 구원을 받느냐의 문제로 진리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영적인 죽음의 표지다”(존 파이퍼). 당신은 진리에 대해 무관심한 편인가? 당신은 영적으로 퇴보하고 있지 않은가?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게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가?

 

말씀에 의해 지배를 받으시는 말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셨던 예수님(1:1)은 계속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를 받으셨습니다. 공적인 사역에 들어가시기 직전에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과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시험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성경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분은 마귀의 교묘한 속임수를 계속 반복해서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4:1-11).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이사야 선지자가 살던 시대도 우리가 사는 시대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엉뚱한 곳에서 해답을 찾았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르라(8:20)고 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한다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은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 있어서 자라가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보다 민첩하게 그리고 자주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 것입니다.

 

내 아이를 어떻게 양육할까? 이번의 정치 분야 선거에서는 어떻게 투표하길 하나님이 원하실까? 내가 이 물건을 꼭 사야하나? 교회를 선택하는 올바른 근거는 무엇일까? 이분이 우리 교회의 새로운 목회자라 적합한가? 우리 교회와 내가 어떻게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 서야하는가?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어느 정도가 되야 과도한 것일까? 직장에서 은퇴하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중요한 선택이든 사소한 선택이든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성경을 부지런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시편 119105절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가 어딜 가든, 그리고 우리 앞에 결정해야 할 어떤 일이 있든지 간에, 인생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참되게 좇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인이 성장해 가는 과정에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실제로 성경의 특정한 본문들이 주는 가르침을 통해 자신이 점점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자주 느끼게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말씀이 모든 선한 일을 하도록 우리를 인도해 준다고 단언하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학ㄹ 능력을 겆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다음은 이런 중요한 진리를 당신에게 확증할 수 있는 기초적인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망을 심화시켜라

 

당신을 성장하게 하는 순전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는가? (벧전 2:2) 영적양식이 없다면 영적성장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양식에 대한 입맛을 얻고 성령의 소욕을 개발하는 최선의 길 가운데 하나는 단순하게 당신 자신이 그것을 즐기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성경 자체보다 더 성경에 대해 배고픔을 느끼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열망을 다시 불붙이는 탁월한 방법입니다. 성경을 그저 읽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묵상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발견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만일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망에 관해서 인도함을 받기 원한다면 시편 119편을 가지고 기도나 묵상을 해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라

 

보이는 음식도 그것을 먹으려면 시간을 내야 하는 것처럼 영적인 양식을 먹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다음과 같이 결심하라. “나는 나 자신이 성경의 지식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발견하고 인지하기 위해서 성경을 아주 꾸준히, 부단하게 그리고 수시로 공부할 것을 결심한다.”

 

성경을 매일 읽으라. 그리고 성경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해야 할 일을 적어도 한 가지 알려 주시기 전에는 성경을 덮지 말아라

 

응답에는 새롭게 믿어야 할 내용들이 포함 될 수 있고, 새로 시작해야 하는 습관이나 끊어야 하는 습관, 기도 제목, 먼저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일, 편지나 이메일 보낼 일, 전화 걸 일, 영적인 훈련 그 밖의 것들이 포함될 수 잇습니다. 단순한 정보를 얻기 위해 성경을 읽지 말고 적용하기 위해 성경을 읽으라

 

당신이 최근에 성경적인 관점을 가지고 고려하지 않았던 분야를 적어도 다섯 가지 이상 적어 보라

 

그런 다음 성경을 펼쳐 가면서 5동안 매일 한 분야 씩 기도하는 가운데 생각해 보라

 

* 교회: 출석, 세례, 교인등록, 봉사, 헌금, 양육, 기도, 친교, 성찬, 연합

 

* 제자훈련: 성경 묵상, 기도, 전도, 선교, 시간의 우선순위와 시간의 청지기, 금 식, 침묵과 독거, 신앙일기, 배움과 독서

 

* 가정: 결혼, 가장 위기, 거듭나지 않은 가족 구성원, 자녀가 없음, 연로한 부모 봉양, 자녀들에 대한 부모 노릇, 십대들에 대한 부모 노릇, 이혼, , 가족의 헌신

 

* ; 구제, 저축, 빚 관리, 만족, 예산자기, 도박 낭비, 돈을 사랑하지 않는 법, 적은 것을 가지고 단순하게 사는 법

 

* : 일의 분량, 여행, 일에 대한 태도, 신뢰성, 성실성, 증인된 삶, 관계(직장 상 사, 동료, 고객, 거래처) 신앙과 일의 통합, 은퇴

 

성경은 이것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훈련을 하라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의 뜻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말씀을 통해 성령의 지배받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랑의 계획에 맞추어 살아갈 때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발견하고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3. 당신의 사랑은 점점 터 커가고 있는가?

 

사람은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형상에 더 가까워집니다=마틴 루터

 

예수님은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확실한 표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4-35절에서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줄 알리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당신 안에서 자라고 있다면, 특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랑이 자라고 있다면 당신의 신앙은 성장하고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사랑의 중요성이 얼마나 강조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것이니라”(15:12)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15:17)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12:10)

피차 사랑의 집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13:8)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5:14)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5:2)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 4:9)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10:24)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13:1)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한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2:8)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느니 마음으로 피차 뜨겁게 사랑하라‘(벧전 1:22)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요일3:11)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3:23)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요일4:21)

내가 이제 너희에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요이5)

 

사랑은 기독교의 상징이며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많은 영역에서 자신의 진보를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증거하고, 가르치고, 심지어 설교하는 능력도 포함되고(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성경적인 안목과 지식도 포함되고(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신앙과 봉사 그리고 구제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내가 네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그러나 이런 것들도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인 사랑의 자라남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이 식어짐

 

사랑이 식어질 때 죄가 점점 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는 점점 더 예수님의 모습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4절은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인내심을 잃고 맙니다. “사랑은 온유한 것인데 우리는 자주 온유하지 못한 모습이 됩니다.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는 것인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특권에 대해 투기하는 죄를 범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가족 중에 투기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이 부족하다고 비난을 받을 때 우리는 신속하게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사랑을 위해 우리가 지불한 희생을 열거하면서 사랑의 증거를 댑니다. 하지만 사랑은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사랑에 무뎌지면 우리는 점점 사람들에게 무례해집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고전1 3:5)..

 

우리는 자신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권리를 다른 사람들의 권리나 필요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합니다”. 사랑이 식어질 때 우리는 훨씬 더 화를 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이 부족할 때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결점을 잡아내고 머릿 속에 불쾌한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일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면서도, 사람들을 위해서는 시간을 내지 않을 때 우리는 사랑을 키우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친구나 직장 동료들의 명예를 보호해주고, 가족들의 육체적, 영적 건강을 보호해 주고 있지 않는다면 사랑이 식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이 식으면 무엇이든지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이 식는 것은 불신자들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육체적인 필요에 대해 덜 민감해 질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에 대해 덜 부담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안 좋은 것은 우리 마음과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냉담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과 상반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을 한 유일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 또한 교회 역사에 나오는 어떤 믿음의 영웅도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의 기준에 따라 산 것은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이라도 진보가 느리며 그들의 성취가 미미한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어떤 종류의 사랑인가?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연적인 사랑을 사랑이라고 잘못 분류합니다(1:31, 딤후 3:3).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하고, 가족들은 서로를 사랑하며, 사람들은 친구를 사랑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나 비 그리스도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난 자연적인 사랑은 그저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을 가장하는 여러 가지 사랑 의 종류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자연적인 사랑외에 위조된 사랑이 있는데 그것은 지나친 자기애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유익은 그것이 우선 나를 즐겁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비해 이차적으로 중요할 뿐입니다.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는 정말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그녀가 그를 위해 해주는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위조된 사랑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저도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유형의 사랑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헌신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보상을 바라고 베푸는 거래일 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사랑의 축소판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6:32)

 

다음에 불균형적인 사랑이라 불리는 위조된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몸과 영혼의 통일체로서의 사람을 다루는데 실패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적인 물질에 대해서 관대하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사랑이 없으며 관심이 없습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의 영혼을 굉장히 사랑하는 것같지만 그들의 몸에 대해서는 긍휼을 베풀지 않으며 자비로 대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 모두에 대해 긍휼을 가지고 대하셨고, 불쌍한 마음으로 그 두 가지 모두의 필요를 만족케 하시는 놀라운 본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셨습니다.

 

현실에서의 사랑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사람들은 적어도 세 가지 영역에서 그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첫째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강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요일3:14).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영적으로 한 가족이 된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표현해야 된다고 말합니다(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둘째 사랑 안에서 자라가야 하는 두 번째 영역은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6:27, 32)

 

셋째 사랑 안에서 자라가고 있는 가를 측정할 때 점검해야 하는 세 번째 영역은 당신의 가족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사랑스럽지 않은 말과 태도를 가장 많이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과 다른 차이는 그가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사랑은 자기희생보다 더 한 것입니다. 그것은 수평적인 차원일뿐 아니라 수직적인 하나님을 향한 차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사랑의 최고 동기는 세상 사람은 일 수조차 없는 다른 측면을 포함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5:5). 사랑은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이 차고 넘쳐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즐겁게 만족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시작합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개발하는 법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구별된 표지로서 사랑에 대해 묵상하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요일 4:8). 당신은 더 많이 사랑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가? 만일 사랑 안에서 자라가기 원한다면 사랑에 대해 생각하라. 사랑의 성경 구절을 묵상하라.

 

하나님의 사랑의 불로 당신의 가슴이 뜨거워지도록 하라

 

마치 화로의 불꽃이 우리의 시선을 매료시키는 것처럼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혀야 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8-19).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신 것을 확증하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 4:7).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그의 본성 사랑의 본성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즐거워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5:1-2). 사랑의 본질에서 하나님을 닮아가라.

 

사람 안에서 성장하는데 가장 필요로 하는 관계들을 규명하라

 

당신의 마음에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정하라

 

주도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라.

 

특별히 당신이 그런 사랑에 대해 아무런 보답을 기대하기 힘든 곳에서부터 시작하라

먼저 사랑을 시도했을 때 나타나는 반응에 상관말고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기쁨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4.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전보다 더 민감한가?(28:16)

 

믿는 자의 영혼이 만일 건강한 상태에 있다면 그는 때를 따라 자주 하나님과 교제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올 것이다-아더 핑크

 

하나님은 여기 계신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한 때가 언제인가? 아마도 그것은 대개 성령충만한 가운데 말씀이 전해지는 동안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자연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가까이 계시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것은 마치 자동차 사고에서 눈 깜짝하는 소리에 짜릿하게 구출되었던 순간처럼 순식간에 감정이 충만해지면서 하나님이 바로 곁에 계신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또한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당신은 자주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끔 경혐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언제나 초자연적인 임재를 느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는 느낌이 특별한 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분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분의 임재를 보다 쉽게 느껴야 합니다

 

분명히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28:20)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보다는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28:16)고 말하는 야곱의 말에 우리는 더 공감을 합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자신을 개신교인, 천주교인, 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소개하는 성인 여덞 명 가운데 한 명 꼴로(13%)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껴본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32%는 평생 동안 전혀 하나님의 임재를 감지해 본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조사받은 대상 가운데 자기 자신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가히 충격적입니다. 그들 중 삼분의 일(32%)이 하나님의 임재를 전혀 느껴 본적이 없거나 이제까지 살면서 고작 한두 번 감지했을 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분명히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15:3)라는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설마 누가 보겠는가? 라는 모세의 마음 상태와 비슷합니다.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느니라‘(2:12). 설령 보는 사람이 없다 해도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어떤 존재보다도 더욱 실존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정말로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세상의 쾌락을 좇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분별하는가?

 

보편적인 하나님의 임재

 

이것은 모든 곳에 거하시는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다는 뜻입니다(139:5-12, 23:24).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은 에수 그리스도 안에 계셨고 지금도 그 안에 계십니다. 요한복음 11절과 14, 그리고 골로새서 29절을 보라. 예수님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1:23)이다.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성부 하나님은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의 안에 거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성도들 안에 거하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요한복음 1416-17절을 보라. 성령은 우리의 육체 가운데 우리와 함께 거하고 계시는 두 번째 위격이십니다.

 

인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임재는 종종 그분의 사역과 영향을 통해 인지됩니다. 누가복음 166절과 사도행전 1121절을 보라. 이것은 대개 우리가 어떤 강력한 설교나 간증을 들은 다음에 ‘ “주님이 그와 함께 하셨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의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임재는 다른 어떤 곳보다 하늘나라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69절과 1810절을 보라. 천국이 천국 되는 까닭은 하나님의 임재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임재

 

요한계시록 213절과 데살로니가후서 19절을 보라.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심지어 지옥조차 계십니다. 하지만 지옥이 너무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곳에 계시지만 그의 사랑과 자비는 나타내지 않으면서 오직 거룩한 분노와 공의만을 드러내실 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분의 보편적인 임재를 제외하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5절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임재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말씀처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1:15).

 

하나님이 먼저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결코 바르고 진실되게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분은 피조물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1:20). 훨썬 더 구체적인 계시는 말씀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하나는 성육신 하신 말씀(예수님)이고, 다른 하나는 기록된 말씀입니다(성경).

 

예를 들어 성경을 읽거나 묵상할 때, 혹은 설교를 들을 때에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공중예배나 성만찬과 같은 의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숲을 거닐거나 직장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 개인의 생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에 기초해야 합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가 그분의 현존하심과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모해야 할 것을 교훈합니다그분은 자비하시며, 오래 참으시고 나와 교제하는 것을 즐기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나를 사랑하시며 나와 동행하시는 그분이 존재하심을 압니다. 그분은 나의 죄를 속해 주시기 위해서 갈보리에서 죽으셨고, 이제는 나를 천국 집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다시 재림 하실 그분을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에게 이전보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더 민감하십니까? 라고 물을 때 단순히 여러분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 같은 체험을 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이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이 있는 곳에서 점차 더 많이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그곳에 임재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있는 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버려두심을 통한 성장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실제로 그분의 임재를 의도적으로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잊어버리시고 버리시는 것처럼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그분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 라고 절규했던 경우와 삼손이 막 잡히기 전에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16:20)라는 구절의 부르짖음은 전혀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전자의 하나님의 부재가 그리스도의 고뇌라면, 후자의 하나님의 부재는 그리스도인의 냉담입니다. 영적인 모든 축복 가운데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입재입니다. (존 스티븐슨).

 

영적인 눈을 열어 그분의 임재를 보는 것

 

하나님의 임재를 계속해서 인식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실천적인 단계를 밝아갈 수 있을까?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가장 분명하게 제시하시는 장소를 자주 찾으라. 그 곳은 바로 성경입니다.

 

마틴 로이드 죤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읽을수록 우리를 더 많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만일 주님을 항상 당신 앞에 모시기를 원한다면 많은 시간을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데 보내도록 하라.”

 

하나님과 대화함으로써 그 분의 임재를 인정하라

 

셀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할 때 전에는 결코 경험한 적이 없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는 경험을 했다고 증거했습니다. 이와같이 기도함으로써 진정한 기도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배 가운데 그분의 임재하심을 구하라

 

공중예배 가운데서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는 특별합니다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합니다(고전 6:19). 그러나 성령의 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개별적인 성도들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성도들의 모임에 대한 것으로써 훨씬 더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고전 3:9, 16-17).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하나님의 전에 가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는 진리를 계속해서 재확인하라

 

사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함께 계십니다. 스스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는 명확한 약속을 주셨습니다(28:20). 주님은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 해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주 멀리 계신 것같아”, 라고 내 감정이 아주 강하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르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지? 진리 안에 거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런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계셔, 그분은 결코 나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어, 내가 그분의 임재를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진리는 하나야. 하나님은 내 삶의 어떤 순간에도 나와 함게 계셔. 나는 진리를 믿을꺼야.“

 

당신은 어느 곳에 있든지 모든 곳들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라. 당신 자신에게 종종 이렇게 말하라. “주님은 여기 계십니다.” 특히 삶의 일상적인 장소에게 그렇게 말하도록 하라. 컴퓨터 앞에서 않아 있을 때든, 주유소나 쇼핑몰에 갈 때든지,

 

 

 

5.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참되게 닮아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존 칼빈

 

기독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종교입니다. 소위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가운데 기독교인만큼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종교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살피는 지각 있는 눈과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신속한 손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의 출생마크입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은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성경적으로 균형잡기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의 영적 및 현실적인 필요 모두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종종 환자의 몸을 치유하시면서 동시에 진리를 가르치시는 모습을 통해 이런 이중적인 관심에 대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가르침과 현실적인 필요에 대한 이런 이중적인 강조는 오순절 이후에 나타난 교회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4:33-35).

사도들은 야고보, 베드로 및 요한이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의하였을 때, 바울은 그들이 자신들을 설교자로 보내는 것 외에 구제의 일을 부탁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2:10).

 

복음주의자들은 사회 사업보다는 선교와 복음 전파를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전형적인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필요를 경시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215-16절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다른 말로 하자면 물질적으로 절박한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면서 영적인 축복을 주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육체적. 물질적인 필요에 대해서는 굉장한 관심을 보이지만 영적인 필요를 채워 주지 않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성경 말씀과 복음을 담은 책자만 주면 된다는 생각은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일이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일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며 상호보완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현실적인 필요뿐 아니라 영적인 필요를 채워 주시는 균형잡힌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 예수 그리스도의 우선적인 목적은 우리의 영원한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이지만, 그분의 현실적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마가복음 634절은 이 두 가지 목표를 성취하시는 예수님의 방법이 완벽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은 그들이 마음을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하늘로부터 오는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 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그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 주셨습니다.

 

한 가지 보편적인 공통분모는 모든 사람들은 영적인 필요를 가지고 있는 데 그중 가장 주된 것은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필요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 이전 보다 빨리 감지하게 됩니다.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통해 신앙의 성숙의 정도가 어떤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요구를 언제나 만족시켜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도 모든 필요에 대해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그분은 병든 모든 자들을 고치신 경우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항상 그러셨던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121절의 그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그런 경우 밀려나기도 하셨습니다. 간혹 그분은 걸음을 재촉하거나 배를 타고 떠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필요를 알고 계셨지만 그 순간 자신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었던 다른 것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의 영웅들

 

교회에서 가장 칭송받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와 현실적인 필요 두 가지 모두를 채워 줌으로써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정말 훌륭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아이들과 고아를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5-6세기에 그리스도인의 영향으로 로마 제국의 어린이들이 법적으로 보호를 받게 됩니다. 루터 칼빈과 동 시대 사람이었던 스위스의 개혁가 훌드라이히 쯔빙글리(1484-1531)는 취리히의 의회를 설득하여 몇 지역에 있는 수도원들을 고아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역사상 가장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던 복음전도자 중 하나였던 조지 휫필드(1484-1531)는 그의 수임 중 많은 부분을 식민지였던 조지아 지방의 고아원을 세우는 일에 바쳤습니다.

 

영국 선교사였던 윌리엄 캐리(1761-1834)는 인도에서 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 미망인을 화장하는 수백 년 된 오랜 관습을 법적으로 금지시키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조지 뮬러(1805-1898)는 그의 일기에서 기도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을 5만번 이상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2천명에 이르던 고아들에게 먹고, 입고, 자고 교육할 수 있는 자원들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설교자의 왕으로 기억되어 온 찰즈 해돈 스펄젼은 늙은 과부들을 위해 17채 이상의 집을 지어 주었으며, 인종과 배경에 상관없이 수백 명의 어린이들을 돌보는 고아원을 한 채 세웠습니다.

 

오늘날 미국에는 미연방 주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나 미혼모들을 위해서 가정과 교육을 제공합니다. 역사적으로 항상 그리스도인들은 과부와 고아를 부양하고, 병원을 세우고, 세계 모든 대륙에서 재난 구조의 일을 선도해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의료, 교육,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호가 뒤따랐습니다. 사람들의 필요가 있는 곳, 즉 기아, 식수부족, 문맹, 질병, 무주택 또는 다른 불행을 유발하는 어떤 깃이든지 그리스도인은 최전방에서 세상의 필요를 위해 일애 왔습니다. 기독교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는 종교입니다.

 

성장을 위한 단계

 

다른 사람의 영적인 또는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가? 그렇다면 지금 할 일은 무엇인가?

 

위대한 안과의사인 예수님에게로 가십시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영적인 눈이 멀어있는 자들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소경을 고치셨습니다(고후 4:6). 우리가 일단 거듭난 다음에는 우리의 영적인 시력을 비롯해서 모든 것이 새롭게 됩니다. 당신의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갈 때 당신은 전에는 보지 못했던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현실적인 필요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과 가정 속에 있는 상처를 찾으십시오.

 

모든 사람의 마음과 가정에는 상처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의 깊은 상처들이 있습니다. 모든 가정들이 평균 6개월마다 한번 씩 위기 내지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출산, 죽음, 부상, 전직이나 이직, 자동차 사고, 재정적인 파산 혹은 자녀의 가출 같은 사건이 포함됩니다.

 

당신은 그들의 영적인 필요가 무엇인가? 라는 여과기를 통해 이웃, 직장, 학급, 교회, 가장을 살펴보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손을 내밀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당이나 정원 일, 차량 이동, 잔심부름, 자동차 수리, 청소, 식사, 컴퓨터 작업, 제설 작업, 땔감마련 페인트 칠, 지붕 수리, 지붕 밑의 홈통 청소, 아이들을 돌보는 일들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당신에게 보여 주실 것입니다.

 

복음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좋은 일을 하십시오.

 

물론 예수님은 당신이 본 모든 필요를 채워주라고 기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복음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뛰어드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당신을 필요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그분의 도구가 되십시오. 당신 또한 그분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6. 당신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인해 즐거워하는가?(16:3)

 

주님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다른 성도들과도 더욱 가까워질 것입니다-피터 제프리-

 

잠언의 저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아굴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30:18-19).

 

독수리, , 배에 대해서도 그 자취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남자가 그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하는 행로는 얼마나 경이로운지 모릅니다. 구약 성경의 족장 가운데 야곱은 라반의 딸, 라헬을 얻기 위해 그가 결혼 조건으로 내세운 7년을 라헬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위해 봉사했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29:2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좋아할 때는 아무리 오래 기다린다 할지라도, 혹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여행, 곧 천국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내려오는 여행을 예수님은 감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눈동자 같은 교회를 위해 기쁨으로 30년 이상을 수고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5: 25-27).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영을 그리스도 안에 속한 모든 자들에게 거하도록 하셨다(8:9)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분명히 그리스도처럼 예수의 영을 받았던 남자나 여자나 예수님이 사랑하사 목숨을 바친, 곧 그의 신부인 교회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가 여부를 시험해 보는 최고의 방법 중의 하나가 곧 주님의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을 기뻐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요일 3:14).

 

또한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의 말은 성도들이 서로에게 가지는 이러한 사랑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16:3). 이 구절의 전반부에 나오는 성도“(saints)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성경에서 성도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용어 중의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 거의 대부분에서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성도라는 단어를 50회 이상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1세기의 성도들은 평범한 그리스도인긴 했지만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 보였습니다( 5:22-23).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때로는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죄 문제로 씨름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고전1:2).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은 성도라는 사실입니다. 헬라어의 문자적인 의미로 성도는 거룩한 자입니다. 성도는 특출나게 경건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바로 다윗이 땅에 있는 성도라고 말한것입니다..

 

다윗은 심지어 성도들을 가리켜 존귀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뛰어난 자’, 또는 영광스러운 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성도들은 그렇게 불러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성도들로 인하여 즐거워했던 것은 그들 자신의 존귀함과 뛰어남 혹은 영광 때문만은 아닙니다. 다윗은 성도들이 자신과 더불어 하나님의 존귀함과 뛰어남 그리고 영광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진정으로 존귀한 분을 사랑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의 눈에는 그들만이 존귀한 자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기독교입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인해 즐거워합니까? 당신은 그분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로 인해 즐거워합니까? 결국 그리스도의 신부는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19;9)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전체적으로 모이는 행사를 말합니다. 당신은 교회, 곧 성도들의 모임을 즐거워하십니까? 교회 공동체의 경험과 수고를 즐거워하고 계십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의 신부되는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싫어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이상한 일입니다.

 

당신은 교회로 인하여 기꺼이 기뻐하는가?

 

땅에 있는 성도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다윗의 기쁨은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영혼에 부어주시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굳은 결심을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122:1)라는 말씀처럼 자원하는 심령을 요구합니다.

 

어떤 사람이 오로지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교회생활에 참석하고 있다면 그것은 뭔가가 잘못된 것입니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은 주로 마음의 원함으로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지, ‘해야 함으로 동기부여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기쁨이란 항상 자발적인 기쁨으로 되는 것이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단순히 결심한다고 해서 좋아지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즐거워하는 것은 거듭난 성도들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당신은 교회의 친교를 즐거워하는가?

 

어떤 이들은 단순히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땅에 있는 성도의 존재가 그들이 성도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즐거움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성도가 되게 하시는 분은 그들 안에 거하시면서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온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지역 교회에 함께 모일 때에는 모든 곳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십니다.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을 성령의 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이지만(고전 6:19), 성도들 전체를 그렇게 부르는 경우가 훨썬 더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사도들의 말 속에는 너희라는 복수가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은 그 편지의 수신자인 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 6:16)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2)

 

그러므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도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가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실체적인 임재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기뻐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하나님과 교회를 미워하던 자들이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성도들을 포함해서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애정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살아계신 성전을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만남에서 영적으로 충만한 기쁨을 경험하거나 교회를 즐거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는 아프고 지친 상태로 예배를 드리는 회중 가운데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보다 인간의 악취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성도들은 성도들과 같이 있을 때 마음이 밝아지고 심령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것은 하늘로부터 내리는 불을 받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교회의 활동을 즐거워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사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몇십 년이 지나 마칠 때까지 일하는 동안 줄곧 반대와 핍박에 직면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투옥과 구타 그리고 돌에 맞는 것을 어떻게 기꺼이 견딜 수 있었을까요?(고후11:23-28) 그의 마지막 서신서 가운데 사도 바울은 인생의 종말을 앞에 두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택한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딤후 2:10). 그의 스승인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택한 자, 곧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는 가운데 비할 수 없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많은 사업을 벌이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것을 구입하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에 그대로 놔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사역,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이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것이므로 우리의 목적 또한 이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것을 본래의 모습 그대로 보게 된다면 우리도 그것으로 인해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는 사역은 온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며 가장 영혼을 만족케 하는 사업입니다. 어떤 것도 이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직장, 가정, 정복, 성공, 건강, 정치, 은퇴 그 어떤 것도 비교가 안됩니다. 게다가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원토록 유효하며 유일한 일입니다. 교회 사역에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지극히 근시안적이며 자기 파멸적입니다.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커다란 특권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아닌 다른 것으로 즐거워하는 것은 마치 자신의 결혼 첫날 밤에 다른 사람의 결혼식 비디오나 보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당신은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라

 

기쁨이란 일시적인 기분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진정한 기쁨이란 반드시 표현되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성도들이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 두 가지 차원에 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교회와 사역에 대한 기쁨의 온도계를 높이는 것과 관계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외적인 변화와 관계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하는 일을 예수님이 보시는 것처럼 보고자 노력하라

 

당신은 교회 및 사역 가운데서 세상이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고 계십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 및 사역 가운데서 사랑하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의 모습이 교회와 사역 가운데 점점 더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부인 교회에게 그의 거룩함이라는 아름다움을 주었는데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이런 아름다움이 성도들의 마음과 삶 속에서 자라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아름다움 세 가지를 든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종종 당시에는 무미건조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세상이 아직은 볼 수 없는 아름다움과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의 영향력은 영원무궁합니다. 이것을 보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시력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약해지는 반면, 영적인 영역에서는 믿음이 성숙해질수록 믿음의 시력이 더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집니다(고후 4:16). 당신의 눈이 신부인 교회 및 사역을 점점 더 예수님이 보는 것처럼 인식하면 할수록 당신은 더욱 더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확실히 구별되게끔 당신이 그리스도의 신부로 인해 정말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지역교회의 사역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입니다. 당신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는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교회의 필요에 대해 정기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당신이 아직도 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면 주도적으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해 보십시오. 감추어져 dlT고 잘 알려지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는 기쁨을 찾으십시오. 마음과 시간, , 여정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그의 신부인 교회에 기울이십시오.

 

이런 일을 얼마나 오래 해야만 할까요? 당신이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은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시는 동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은 영원한 것을 건축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3:14). 교회의 사역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아무리 하잖아 보이고 이 세상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으로 영원히 빛을 발할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온 후에 천국에 기록되어 있을 역사책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지면이 주식 시장, 회사합병, 대통령 선거, 운동경기의 결승전 같은 것에 할애되어 있을까요? 그런 것 대신 이 책은 지역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활동들, 즉 세상이 무시했던 사람들이 행한, 그 당시에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던 행위들을 지배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겠습니까? 많은 권세자들과 귀인들의 이름은 단지 각주에나 나오고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성도들을 섬겼던 사람들의 이름이 그 책의 모든 지면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6:10).

 

시편 1494절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기뻐하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습니까?

 

 

7. 당신은 갈수록 영적인 훈련을 중시하는가?

 

훈련이 없다면 여러분은 침체에 빠질 것입니다-피터 제프리(Peter Jeffrey)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열정과 빛을 키우는데 있어서 영적인 훈련을 꾸준히 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습니다.

 

무엇이 영적 훈련인가?

 

영적 훈련이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도록 정하신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주님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종종 그분을 예기하지 않은 장소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훈련과 같은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그분을 규칙적으로 만나 변화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주님을 깨끗한 생수를 공급하는 강에 비교한다면, 영적인 훈련은 우리를 이런 강으로 인도하는 길과 같습니다.

 

그동안 이런 경건 훈련과 성화 훈련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습니다. 어떤 방식은 그것을 개인적인 훈련과 단체(또는 회중) 훈련으로 구분합니다. 전자의 예로는 개인적인 성경 읽기와 묵상, 개인기도, 금식, 영적인 일기 작성 등이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훈련에는 회중 예배, 합심 기도, 성찬 친교 등이 포함됩니다.

 

영적인 훈련이란 성경적이며(하나님이 주신 것), 그분의 기록된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함을 명심하라. 이 범주에 속하지 않는 다른 훈련들은 결코 영적인 훈련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영적 훈련은 성경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경건한 훈련과 삶을 변화시키는 훈련을 제시하셨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영은 이런 각각의 훈련들을 통해서 독특하게 일하십니다. 그분은 한 가지 훈련을 통해서 주신 것을 다른 훈련에서도 똑같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금식을 통해서 얻는 축복과 동일한 복을 다른 일반적인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으로 영적인 훈련이란 태도가 아니라 연습임을 또한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품, 그리스도인의 장점, 혹은 성령의 열매’(5:22-23)와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영적인 훈련이지만, 사랑은 엄밀히 말해서 훈련이 아닙니다. 시간과 돈을 충성되게 관리하는 것은 훈련이지만, 기쁨은 아닙니다.

 

왜 영적인 훈련을 해야 하는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히브리서 1214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물론 거룩함을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주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함을 계속해서 따르는 모습(다른 말로 성화, 경건, 그리스도를 닮는 것)주님을 보기 위해천국에 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특징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 거룩함을 따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거룩한 임재와 거룩한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것을 갈망하며, 때때로 그것이 부족함으로 인해 애통해 합니다. 이제 그것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47절은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갈수록 영적인 훈련을 중시하고 있습니까? 물론 하루나 또는 한 주 정도 영적훈련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보다 높아졌다고 해서(그것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성장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의 영향이 당신의 삶 속에서 계속 확대되는가의 여부입니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점점 욕심을 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분이 너무나 유쾌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되려고 갈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 예수님이 했던 것을 하고자 갈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적인 훈련을 하셨습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 그분은 의지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했던 것과 동일한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훈련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훈련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이 그분과 의도적으로 교제하는 성경적인 길입니다. 예수님과 점점 더 친밀하게 될수록 당신은 분명히 그런 친밀함을 만들어주는 방도를 찾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훈련을 단지 의무로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하늘로부터 우리 영혼에 내려온 생명이요 빛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리스도와 점점 더 친밀해지면 질수록, 반드시 그리스도를 보다 깊이 경험하게 해주는 훈련에 참여할 것입니다. 영적인 훈련은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통로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지속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줍니다.

 

훈련의 위험은 무엇인가?

 

바리새인들은 한 주에 두 번 금식을 했고, 장시간 기도를 했으며, 여러 해 동안 구약의 성경을 배웠습니다. 엄청난 양의 시간을 바쳐서 훈련했지만 ,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훈련에 있어서는 모법적이었지만, 여전히 불경건의 대명사로 불려졌습니다. 사이비 집단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장기간의 기도와 금식 그리고 거대한 규모의 종교적인 봉헌에 힘을 기울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성화를 이루어 가시지 않는다면 그런 노력은 단지 심판대 앞에서 죄를 더욱 가중시킬 뿐입니다.

 

영적인 훈련은 그 자체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잇다는 표지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방편이 됩니다.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영적 훈련을 악용하는 위험과 함께 또 다른 위험이 있는데 그것은 불균형입니다. 교회에서 자신이 훈련을 어떻게 받고 있는지 가장 점검이 필요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정말 이상한 사실이지만, 그들은 교회에서 가장 활발하게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적잖은 성도들이 공동체적인 훈련에 너무나 열정적으로 참여하느냐 개인적으로 훈련할 시간을 거의 갖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충실하게 봉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훈련, 즉 개인적 훈련인 기도와 성경 묵상을 위해서는 시간을 내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가장 성실한 일꾼이지만 교회 문밖에 나가면 성경을 전혀 읽지 않고 기도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으며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일 공적인 예배에서 진심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어떻게 그런 경험을 한 주에 한번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주일에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 어떻게 이제 충분해요, 한 주 동안 사는 데는 더 이상 필요한 게 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 예배자가 어떻게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이와 정반대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영성에만 몰입되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공동체적인 훈련을 통해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홀로 시간을 가지는 일과 다른 개인적인 영적인 훈련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데 필수적인 반면에,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이 행하는 것처럼 공적인 예배와 기도, 친교, 다른 성도들에 대한 봉사와 그와 함께 하는 봉사, 성만찬을 통한 성도의교제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효율성을 추구하고 당면 과제를 완수하는 일에 전념하기 보다는 영적인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에 좀 더 전념하라.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이 성취해야 할 임무와 활동을 안고 마감 시간에 좇기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갈수록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이 조직하고, 더 많이 저장하고, 더 잘 유지해야 합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점점 더 무의미한 삶을 이끌어가는 일에 유능해져 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수단을 통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며 우리의 삶을 평가하실 분인 예수님을 좀 더 닮아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더 많은 일들을 이루어서 부를 획득한 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초단파 영성이나 또는 단 기간에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는 방법을 믿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치라

 

신학자 스프라울은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습니다. “영적인 성숙에는 쉬운 지름길이 없습니다. 보다 깊은 차원의 성숙을 추구하는 영혼은 오랫동안 고된 일을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가운데 느끼는 친밀함과 그분의 아름다운 형상을 추구하는 것은 값진 일입니다.

 

적어도 하나 이상의 분명한 불쏘시개를 가지고 영적인 생명의 불을 지펴라

 

난로의 장직불이 잘 타고 있을 때 대개는 한 두 차례 철 불쏘시개를 가지고 잘 쑤셔줘야 불이 계속해서 잘 탑니다. 마찬가지로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영적인 훈련을 선택해서 영적 성장을 이루는 불을 지펴라. 그리고 적어도 한번은 확실하게 영적인 불을 들쑤셔 줘라

 

 

 

8. 당신은 죄에 대해 점점 더 애통해 하고 있는가?

 

더 높은 차원의 거룩함에 도달하는 첫 번째 단계는 죄의 놀라운 되성을 보다 완전히 깨닫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라일

 

1725년 젊은 조나단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요즘 나는 과거 내가 회심하기 전의 그 어느 때보다 내 자신의 사악함과 마음의 악함을 뼈버리게 느끼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나의 죄를 점수로 매기신다면 나는 창세 이래로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사람보다도 가장 악한 자로 드러날 것이며 지옥의 맨 밑바닥에 떨어질 것이라는 느낌이 들곤 했다.

 

이 사람은 정상적이며 건강한 기독교인가?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에드워즈처럼 생각하고 애통해 해야 한다고 믿는다.

 

애통해 하는 것이 성장하는 것이 되는 때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여러분은 죄를 더욱 더 미워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도 죄를 미워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면 갈수록 죄를 여전히 미워하게 될 것이다.

 

자기 생애의 말년을 보내고 있던 사도 바울보다 더 그리스도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인정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형상을 닮은 본보기였다. 그는 여러 차례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으며(9:1-6; 18:8-10), 천국의 영광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특권까지 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말년에 쓴 서신서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언젠가 신학교 교수인 죤 한나가 한 말이 기억난다.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어떤 점에서 더욱 비참함을 느끼게 된다. ”성령께서 거룩한 진리, 거룩한 것, 그리고 거룩하신 분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심어 놓은 사람은 그들 안에 거룩하지 못한 어떤 것을 발견할 때마다.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종종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죄 의식에 짓눌려 너무 비참해지는 때가 있다.

 

그러나 죄와의 투쟁이 있고 죄로 인해 애통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은 좋은 것이다. 아더 핑크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신앙을 가졌다고 말로만 떠벌리는 자들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를 구별짓는 기준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애통해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죄에 대해 더욱 더 예민해진다는 것은 성장의 표시다. 그리스도의 빛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분의 거룩한 빛이 여러분 안에 있는 죄를 더 많이 보게 할 것이다. 19세기의 성경학자인 토마스 버나드의 말처럼 죄의식이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에 정비례한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죄에 대해 더 많이 애통하게 된다.

 

죄에 대해 계속 슬퍼해야만 하는가?

 

어떤 이메일의 내용에 이런 의구심이 나타나 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오히려 항상 자신의 죄에 대해 의식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결국, 우리는 이미 용서를 받았는데 그것은 비생산적이지 않는가? 물론 과도한 내적성찰은 그 자체가 죄가 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생각할 때 두 가지 경우를 균형있게 다루어야 한다. 하나는 삶 가운데 당면하게 되는 죄의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용서와 은혜, 즉 영적자유를 누리는 문제이다. 성도는 위선자와 마찬가지로 기쁨과 위로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죄에 대한 거룩한 슬픔과 애통함도 겸해서 받아들인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죄에 대해서 애통해 본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죄에 대해 애통해하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설명하고 있다(5:4).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읽어보면 우리는 그가 끝없이 죄애 대하여 슬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종종 우리는 그가 아주 기뻐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결코 슬퍼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6:25절에 보면 빌립보 감옥에서 실라와 더불어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 올 무렵 그는 자기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인은 회개를 경험하는 것이 일회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까닭에 이런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미 끝난 이야기인데 뭐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평생 회개하는 사람들이고 평생 믿는 사람들이다. 원죄는 한 번의 용서로 해결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거듭 태어날 때 가졌던 첫 경험, 곧 회개와 믿음의 경험은 전체의 삶을 통해 늘 일어난다.

 

17세기 영국 청교도 설교자들 가운데 하나인 제러마이어 버로우즈, 그의 책, 악 중의 악에서 다음과 같이 상술하고 있다.

죄로 인해 고통 받는 문제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면이 있다. 그것은 죄에 대해 단 한번 회개하고 애통해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죄로 인해 고통을 당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위험한 착각이다. 왜냐하면 죄로 인한 참된 슬픔과 참된 회개는 일평생 동안 계속 지속되어야만 할 행위이기 때문이다. 평생 죄를 회개한다는 것은 평생 죄로 인해 애통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에 대해 애통하는 법-바른 방법과 잘못된 방법

 

고린도후서 78-11절에서 성경은 죄로 인한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을 나란히 대조해 두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위한슬픔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은헤와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인 반면, 세상적인 근심은 성도들로부터 성경적인 회개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점을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어린 아이가 자기 형제에게 억지로 미안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를 솔직히 나는 그 사람들이 죄에 대해 마지못해 하는 그 이상으로 슬퍼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에 대해 겨우 이 정도밖에 느끼지 못한다면 말이 되는가? 죄로 인한 경건한 슬픔은 애통함을 담고 있어야 한다.

 

경건한 슬픔은 회개, 즉 죄에 대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고, 이것은 다시 행동의 변화를 만들어 낸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죄에 대해 편지를 썼다. 나중에 그는 이런 결과를 얻은 것에 대해 기뻐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고후 7:9). 죄에 대한 이들의 슬픔과 구약 성경의 족장인 야곱의 형 에서가 보여 준 태도를 비교해 보라.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7). 에서와 같이 우리는 죄에 대해 후회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마음이나 삶에는 변화가 없을 수도 있다. 죄에 대한 세상적인 슬픔에서는 초점이 자기 자신이다.

 

다윗 왕은 커다란 죄를 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사람“(13:22)이라고 불렀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 중심으로 슬퍼하고 있는 지를 주목해 보라.”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51:4). 그는 시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 19절 안에 무려 31·번이나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 나온다. 다윗이 보여주는 바대로 경건한 슬픔이란 하나님을 향한슬픔이다. 우리의 초점이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될 때 우리는 은총을 소망하면서 다윗처럼 기대를 가지고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51:12).

 

우리가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이유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앞으로 올 거룩함을 너무나 사모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823절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성령의 임재는 우리가 약속을 받았지만 아직 받지 못한 것, 곧 거룩한 몸 안에 완전히 거룩한 심령과 거룩한 마음에 대한 사모함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내가 죄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존 오웬은 과감히 이런 말을 했다. “죄가 가장 큰 마음의 부담이요 슬픔이요 고통이 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참된 성도가 될 수 있는지 나는 이해가 안된다.”

 

신약 성경의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지 점검하라

 

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명확히 모르고 있다는 것에 항상 놀란다. 복음의 두 부분에 주의를 기울여라.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이 필요한 이유이며, 또 하나는 믿음과 회개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 죄의 실체를 보여 달라고 간구하라

 

여러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그리고 누구에게 죄를 지었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보여 달라고 구하라

 

시편 51편을 가지고 천천히 기도하라. 그것이 마음에서 우러난 여러분 자신의 기도가 되게 하라

 

이 말씀이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반영할 때까지 이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라.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거룩하고 죄 없으신 분이 바로 우리들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을 묵상하라.

 

여러분은 에수님을 죽게 한 사실에 대해 슬퍼해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의 죄로 인해 가장 순결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분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런 다음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회개하고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죄로부터 구속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여러분의 죄가 여러분을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도록 몰아세우게 하라. 나는 여러분의 죄가 오직 그리스도를 더욱 더 높이는 일에만 도움이 되길 바란다.

 

복음을 여러분 자신에게 매일 전파하라

 

여러분 자신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죄에 계속적으로 직면한 다음, 예수님의 흘린 피와 의로운 생명을 믿고 그분에게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 자신이 진지하게 거룩함을 추구하였을 때, 자신이 얼마나 끔직한 죄인인가를 깨닫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사고방식에 기초하여 당신의 삶을 두 가지 방법으로 평가해 보라. 하나는 이상에 근접한 방법이며, 하나는 이상을 향해 가고 있는 방법이다. 여러분은 이상적인 모습, 곧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그려 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이것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현실에 낙담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예수님의 완전함과 너무 지나치게 비교해 보는 것은 우리를 상심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비교도 해 보지 않는 것은 영적인 교만을 낳을 수 있다. 하지만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 두 가지 중 어디에 속하든지 지금까지 온 것을 보면서 희망을 가져야 한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이 두 가지 과정을 모두 거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9. 당신은 용서를 빨리 하는가?

 

용서하지 않는 것은 영혼의 생명을 죽이는 첫째 요인이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하시리라“(11:25-26)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기도해 봐야 헛것이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용서하고 싶어한다

 

용서란 해방과 기쁨을 맞는 지름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을 때(고후5:17),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뜻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기질을 주신다(40:8).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의 갈망을 주신다. 한 예로 용서하고자 하는 갈망은 심지어 우리가 그것을 거부하는 죄를 짓는 순간에도 우리 안에서 강하게 요둉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세 차례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결부시켰다(11:25-26; 6:14-15; 6:37). 거기서 하나님은 용서하라. 그러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범한 죄에 대해 우리가 용서를 베푼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범한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오히려 본문은 용서하는 영혼은 용서를 받아본 자들의 특징이다라는 것을 알려 준다.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는 자는 다른 사람에 대해 용서를 베푸는 자다. 용서가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한 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처럼 기꺼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점에서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용서하고 싶어하게 된다.

 

마태복음 1821-25절에서 예수님은 어떤 임금과 한 종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그 종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었지만 임금은 크게 불쌍히 여겨 전부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자기에게도 얼마 되지 않은 사람과 길에서 마주치자 그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심하게 독촉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은 그 종을 다시 불러다가 그 빚을 갚도록 했다. 그에게는 그것을 청산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핵심적인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35). 이 이야기에 나오는 종과는 달리 하나님의 진실한 종은 용서하는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힘으로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죄의 빚을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기꺼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헤로 말미암아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지은 상대적으로 사고한 죄들을 단지 말로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고 싶어할 것이다.

 

마르틴 존스의 간증이 모든 성도들의 마음 속에 절규가 되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복된 주님께서 내게 행하신 일들을 깨달을 때마다 누구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해서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용서할 준비가 된 것과 용서를 베푸는 것

 

나는 누구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해서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로이드 존스의 말을 주목하라. 많은 사람들이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과 실제로 용서를 베푸는 것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적으로 용서란 회개가 없이는 성립되지 않으며 요구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누군가 용서를 구할 때 용서를 베풀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범한 사람이 용서를 구하든 말든 죄가 되는 원한과 증오를 버려야 한다. 이것은 단지 기꺼이 용서하기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이제 죄를 지은 자가 회개한다면, 우리는 당신은 용서합니다라는 말을 함으로서 용서의 과정을 마무리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용서를 선포하는 사람은 회개의 중요성을 무시해버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성경의 요구사항까지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용서와 망각

 

성경은 절대로 우리가 용서했던 그 범죄를 아예 잊어버리라고 명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31:34)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은 결코 우리의 죄를 잊어버릴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용서가 의미하는 바는 그분이 이제는 더 이상 그것들을 기억하심으로 우리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절대로 그것을 들춰내지 않으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이런 식이 되어야 한다. 당신은 용서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죄를 범한 사람을 대적하는 일에 그것을 결코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그 범죄를 완전히 잊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한 사람으로 대우해야 한다.

 

용서는 했지만 곧 다시 그 사건이 마음에 떠오르고, 그것과 더불어 싸웠던 수많은 순간들이 머리속에 스쳐 지나가고 .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17:3-4).

 

우리는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죄에 대한 용서를 신실하게 구한다면 그 횟수에 상관없이 그를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하루에 일곱 번 자의로 죄를 지은 다음에 그것을 회개하기 위해 일곱 번이나 신실한 마음으로 겸손히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좀 특이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내게 범죄했을 때, 그 범죄에 대한 기억이 내 마음에 하루에 일곱 번 다시 떠오르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한 가지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다기 가서 용서하고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고, 또 다시 용서하고 , 매번 이런 용서의 위기를 겪을 따마다 용서하기가 그 이전보다 더 수월해졌다.

 

 

당신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반대로 말하면 당신 주변에 아직도 용서하기에 앙금이 남아있는 사람이 있는가? 교회, 직장, 이웃이나 가족 가운데 혹시 그들의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속을 쓰라리게 하는 고통을 더해 주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성장하는 것이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하라. 다윗 왕은 시편 865절에서 주는 선하사 사죄하시기를 즐겨하신다 라고 증언했다.

 

어떤 사람에 대해 먼저 용서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만일 스스로 죄를 범한 사실을 알고 있다면 다음 절차는 너무나 분명하다. 회개하라. 단지 사과만 해서는 안된다. 당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라.

때로는 당신이 그 사람에게 죄를 알도록 한 후에 화해를 위해 힘쓰는 것이다.

 

당신은 용서를 사랑하는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이 너무나 쉽게 토라진다. 어떤 사람은 원한을 마음에 품거나,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것을 거부한다. 또는 용서를 구하거나 베풀지 않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용서를 사랑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용서를 주고받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존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만큼 우리를 가장 하나님 닮게 하는 것은 없다

 

 

10. 당신은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동경하는가?

 

사람은 그가 무엇을 갈망하는가에 따라 어떤 사람인가 판별된다-스펄젼

 

천국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때문에 좌절감을 느껴 본적이 없으십니까? 현재의 삶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런데 장기간의 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마지막 도착지에 언제 도착하냐? 하는 마음의 간절함이 있습니다. 특별히 천국과 같이 영광스럽고 훌륭한 장소를 향해 갈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수 십 년 동안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그분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은 자연히 그분을 간절히 보고 싶어합니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은 탄식하는 그리스도인이다.

 

로마서 822-23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피조물의 탄식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부터 사람들은 타락의 결과가 제거될 것을 기다리며 탄식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탄식하는 사람들은 소위 특별히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단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인 우리. 다른 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리며, 이와 같은 탄식을 경험한다. 장래에 우리의 몸과 거할 장소에 대한 이런 갈망은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고린도후서 52절에서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물론 그리스도인의 탄식은 단순히 새롭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덧입기를 위함일 뿐 아니라, 그런 변화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8절에 보면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그리스도인이 몸의 구속을 위해 탄식할 때, 그는 또한 그의 몸을 구속하실 (영화롭게 하실) 주님의 임재 앞에 서는 것입니다. 즉 천국에 영원히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는 것을 바라며 탄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동경하게 될 때, 그의 일상생활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1742년에 기록한 데이비드 브레이너의 생애와 일기에 이런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612일 토요일, 오늘 아침에는 기도를 드리면서 달콤한 순간을 흠뻑 누렸다. 이 때문에 하루 종일 하나님을 향한 다함이 없는 모르는 불쌍한 영혼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나 자신의 무력함을 발견한다. 하지만 나는 복되신 하나님께 갈 수 있지 않은가?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서 그 분의 영광을 뵈옵는 것이다. 오 나의 약하고 지친 영혼이 내 아버지 집에 도착할 날을 갈망하나이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은 거룩함을 열망한다

 

천국을 향하는 모든 열망들이 전부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점점 나이가 들고 몸도 맘대로 되지 않으면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려는 욕망에 대해 더 많이 동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교인이나 모슬렘 교도 및 무신론자들도 그것에 대한 바람이 있습니다. 피곤한 삶에 종지부를 찌고 새롭고 보다 쉼을 누릴 수 있는 삶을 시작하고픈 갈망은 유독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비슷하게 세상의 염려로부터 영원히 해방되고 싶은 간절함 또한 보편적인 것이며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인생의 짐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때를 꿈꾸게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증오한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과 해방에 대한 욕구처럼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이들과의 재회에 대한 바람은 신자들만큼이나 비신자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이 단지 천국에 있는 자녀나 부모 또는 배우자를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 점점 더 희망에 들뜬다고 해서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자연적인 애정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열심도 반드시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닮고 있다는 증거도 더더군나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처녀 마리아나 또는 다윗 왕을 보고 싶은 것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자연적인 호기심 또는 단순히 어떤 유명인을 만나보고자 하는 욕망이 유일한 동기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하길 동경합니까? 라는 질문뿐만 아니라 당신은 어떠한 의미에서 천국과 예수님을 동경합니까? 라는 질문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안식하는 천국이 아닌 거룩한 천국을 갈망합니다. 그들은 거룩한 곳, 거룩한 백성, ”거룩. 거룩 거룩하신 “(4:8) 하나님을 점점 더 그리워하기 때문에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 사는 것에 대해 점점 더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들은 천국의 안식, 해방 또는 재회보다 이런 거룩함에 동참할 것을 학수고대합니다.

 

에드워즈는 자자 자신의 영적인 갈망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내가 열망하는 천국은 거룩함의 천국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면서 그리스도와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 곳입니다. 내 마음은 천국과 그곳에 있는 즐거움, 완전한 거룩함과 겸손, 그리고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것에 대한 묵상으로 온통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브레이드는 자기가 죽고 싶다고 표현한 것은 단지 이 생의 고난과 역경을 회피하고 싶어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동기를 전혀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천국에서의 최종적인 모습이 생애의 최고 목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에게 매달려 있는 죄의 굴레로부터 그를 궁극적으로 해방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말은 로마서 823절에서 바울이 묘사한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최고의 소망이며 가장 깊은 마음속의 열망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천국에서 찾고자 하고 소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천국에 가는 것을 기대해 본 적이 있습니까? 죽음을 고대하는 사람은 단지 고통 때문에 인생을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방종교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천국에 대한 긍정적인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천국에 가는 것을 기대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 이보다 당신은 천국에 도착했을 때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당신이 열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천국의 안식입니까? 고통과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입니까? 당신은 그 모든 것들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천국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바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분의 얼굴을 보고 또 보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갈망이 당신에게도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천국에 있는 거룩함을 열망합니다

 

고린도후서 5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열망하는 천국의 거룩함을 우리가 간절히 사모하는어떤 것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이 편지를 쓰기 수년 전에 그는 거룩한 집에서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잠깐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형언하기 어려운 경험을 한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였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1:22-23).

 

바울은 사도로서 비할 수 없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설교할 때면 드라마틱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손을 통해서 자주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나기도 하는 등 굉장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좋았다그냥 더 좋은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좋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탄식하며 간절히 사모한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욕망을 가진 것이 더욱 좋다는 말의 강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을 뿐만 아니라(34:8),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영원히 거절 할 수 없는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탄식했고,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 즉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큰 기쁨을 맛보게 되기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외쳤습니다.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 영혼을 만족케 하는 유일한 행복입니다.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온전한 기쁨을 누리는 것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로 쾌적한 편의시설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남편과 아내, 자녀들, 또는 세상 친구들은 단지 그림자에 불과하나, 하나님은 본체가 되십니다. 그런 것들은 단지 흩어지는 빛에 불과하나 하나님은 본체가 되십니다. 그런 것들은 단지 흩어지는 빛에 불과하나 하나님은 태양이 되십니다. 그런 것들은 단지 강의 지류에 불과하나, 하나님은 대양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21)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모든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처럼 당신의 보물이 천국에 있을 때, 당신의 마음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 천국을 애타게 사모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정당한 갈망을 가지고 바랄 수 있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거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해서 자녀를 갖고 직장에서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과 같은 열망도 강력하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런 열망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성숙의 과정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천국의 거룩함에 대한 열망보다 더한 것은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열망하는 그리스도인은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은 천국과 천국에 있는 것을 열망합니다. 즉 열망하는 그리스도인은 성장합니다.

 

그들은 위에 있는 것에 마음을 고정시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장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일들이나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3:1-2)는 명령을 기쁘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의 위대한 보물은 하나님이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들의 최대의 소망과 영원한 집은 위의 것에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생각도 종종 거기에 가 있습니다.

 

이런 천국 지향적인 마음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으로 영국의 청교도 목사이며 작가인 리차드 백스터가 있습니다. 그는 외롭게 투병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책인 성도의 영원한 안식”을 썼습니다. 그는 천국에 대해 삼십분을 정기적으로 묵상하므로 변화되었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다가올 세상과 다시 오시는 분에 대해 규칙적으로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겠다는 결심은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어 주고 강건하게 만들어 주며, 생기를 주고, 빛을 주며, 기쁨으로 충만케 할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에서 해방시켜 준다고 했습니다. 

 

열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깨끗한 분을 보고자 하는 기대 가운데 자신을 깨끗케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3:2)라는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기록했습니다. 주님을 보고자 하는 이런 기대를 가지고 열망하는 자들에 대해서 그 다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3). 즉 예수님의 재림을 동경하는 모든 사람마다 그 소망에 의해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보고자 신실하게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아갑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모든 이들이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기때문입니다. 즉 천국의 거룩함을 사모할 때 우리는 자연히 현재의 거룩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주님이 계신 그대로 보고자 하는 이 소망을 당신은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이런 소망이 당신을 깨끗케 하는 일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는 것으로 인해 당신은 어떻게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여행을 하다 보면 도착지가 가까워 오면 올수록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를 기다리고 있는 대상이나 사람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신은 요즈음 본향을 향해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가?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늘에 있는 본향에 점점 더 가까이 갈수록 천국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분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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