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크랩에 [고통 속에 하나님을 발견하다]에 책에 보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핵심은 자신이다. 우리는 말한다. “어째든 나는고생했어. 그러니 이제는 보살핌을 받아야 해. 나는 네가 필요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의심함으로써 삶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생길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다. 사랑하기 위해tj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유쾌하게 해줄 뭔가를 얻기 위해서다. 뭔가를 하긴 해야 하겠는데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내가 살아남는 법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누구의 눈을 더 의식하며 살아오셨습니까? 그것이 당신의 인생을 여기까지 오게 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당신이 누구의 눈을 더 의식하는가에 따라서 앞으로 당신의 인생이 확연히 달라질 것입니다. 당신은 요즈음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의 문제들, 장애물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당신은 파도를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파도를 일으킨 분을 보고 있는가? 상황이 어려워질 때 당신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가는 가? 당신은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눈을 더 의식하는가?
오늘 본문은 축복의 문턱에서 사람들의 눈의 의식하다가 인생이 꼬여버린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눈을 더 의식하다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의 눈을 더 의식하십니까? 해가 돋기 직전에 가장 어둡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축복의 직전에 가장 어두운 순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할 때
가나안 정탐은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제안한 것을 모세가 좋게 여겨서 결정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인간의 순리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이성적인 판단을 더 앞세웁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사람의 숫자나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은 금물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크게 보이고 부러워 보일 때 나만 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그러나"를 경게해야 합니다.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역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됩니다.
사실을 바꿀 수 없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너무나 잘 아는 가나안 땅에 12명의 정탐군이 현지를 답사하여 보고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명의 정탐군들의 보고를 듣고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취하자고 했습니다. 반면에 열명의 정탐꾼들은ㅁ 우리가 올라가서 그 백성을 취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똑 같은 사실을 목격하고도 왜 이렇게 다른 반응을 나타냈을까요? 누구의 눈을 더 의식하는가에 따라서 판단이 완전히 달리지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정탐을 최남단에서 최북단까지 약 400킬로의 거리를 40일에 걸쳐서 답사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처음에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포도송이가 얼마나 큰지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올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거기의 특산물 석류와 무화과 나무를 백성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가나안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이것들이 거기서 가져온 과일들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본문 28절입니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커서 우리가 상대하기에는 역 부족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여기 저기서 백성들이 웅성거리며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갈렙이 백성을 조용히 하게 합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자 그와 함께 올라갔던 다른 정탐군들은 우리가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취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심지어 방금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했지만 이제는 그 땅을 악평합니다. 32절 하반절입니다. 이스라엘 바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내가 못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렇게 좋아보였던 것들이 그렇게 싫어졌던 것입니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바뀐 것뿐입니다.
2.자신의 눈을 의식할 때
가나안 주민들을 바라보고 자신들과 비교해 볼 때 스스로 보기에 메뚜기같이 보였고. 그들도 자신들을 그렇게 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자신들은 메뚜기 떼와 같이 초라하고 형편없는 존재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에도 10가지 재앙, 광야에서도 수많은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목격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커다란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된 이유는 가나안 주민들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32절에 의하면 그 거주민은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 가나안 주민들이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보았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을 뇌물로 매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부탁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니 이수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는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민 22:5, 6). 우리는 이상하게도 사실을 그대로 믿지 아니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려준 기생 라합도 이스라엘 뱍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고 했습니다(수 5:1).
당신은 누구의 눈을 더 의식하시겠습니까? 왜 사람을 두려워하면 안되는지 아십니까? 잠언 22장 9절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이 말씀은 8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둑질에 공범이 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악한 일에 공범이 되면 결국 법정에 서는 신세가 됩니다. 법정에 서서 자신과 함께 도둑질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진술하지 못합니다. 후환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러지도 모르고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 구속에 처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바르게 말하면 후환이 두려워서 증언을 피하지 말고 인간의 생사회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여 정직하게 증언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3.하나님의 눈을 의식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로 부추깁니다. 그러자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여 두려워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바로 그때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갑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중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입니다(7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가나안 땅을 심히 아름다운 땅으로 감탄해합니다. 그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여러분들이여! 제발 하나님을 거역하지는 마십시오. 가나안 주민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먹이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9절).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담대한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신명기 11장 12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요셉이 외롭고 힘든 상황에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질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창세기 39장 9절 하반절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눈을 의식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눈을 더 의식하였던 것입니다. 당신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누구의 눈을 더 의식하며 살아가십니까?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십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십니까?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하십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십니까?
이전에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왔는데 이제는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분이 계십니까? 역대하 16장 9절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게 행하였음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견자 하나니를 통해서 유다 왕 아사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사 왕이 한 때는 북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남유다를 침공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아람 왕을 의지할 때 주신 메시지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할 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망령된 일입니다. 선견자 하나니가 아사 왕을 책망하였지만 아사 왕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자신발에 병이 들어 매우 위독하여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할 때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신자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여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사의 손을 통해서 우리의 병을 고쳐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사는 수술하고 치료하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고쳐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전에 중국에 유명한 한의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분께 참 대단한 일을 하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이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단은 우리가 하고 처방을 해서 한약으로 처방하지만 고치시는 분은 신만이 학십니다.
하나님의 눈을 더 의식하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일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히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악한 영의 공격을 받기 쉽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하여 주목할 때 악한 영이 사울 왕을 번뇌케 하였습니다. 사람을 지나치게 미워하거나 두려워하여 악한 영의 공격을 받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의 눈을 계속해서 의식하는 순간 당신은 거기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귀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할 때, 바로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닭이 곧 울었습니다. 주께서 그때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바로 그때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베드로를 변화시킨 것은 주님의 사랑의 시선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시선과 마주칠 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며 회개했던 것입니다. 라틴어로 이런 말이 있습니다. Me vivit Deus-하나님을 보고 계시다.
하나님이 보시는 나, 내가 보는 나라는 책자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진정 어떤 사람인가?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말하는가? 나는 어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가? 이제 진정한 나를 찾자! 우리는 세상의 잣대에 맞추어 자신을 바라본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하고, 더 많은 것을 이루지 못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모습은 진정한 우리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럽게 보시고 외아들의 목숨을 주고 사실만큼 소중히 여기시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중요한 사역에 부르실 만큼 유능한 존재로 보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참 모습이다! 이제 하나님이 보시는 바로 그 모습으로 스스로를 바라보자. 세상이 바뀔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별 수 없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아니면 자신이 바라보는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나아올 때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진정한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늘 아버지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 시작할 때 세상의 모든 고통스런 문제와 장애물은 아주 작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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