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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기술]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어서 소개해드립니다. “감사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결정짓는다. 감사하는 것과 감사하지 않는 것은 가르마를 오른쪽으로 탔다가 왼쪽으로 타는 것처럼 별 것 아닌 것이 아니다. 나란히 떨어지는 빗방울이 대서양으로 흐르느냐 태평양으로 흐르냐를 결정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백두산에서 떨어지는 한방울의 물이 압록감으로 흐르느냐, 두만강으로 흐르느냐를 결정짓습니다.
1. 하나님께서 어떤 경우에 우리를 낮추실까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양한 이유로 인간을 낮추시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첫번째 경우는 인간이 범죄할 때 하나님께서 낮추시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게 합니다. 이로 인해 밧세바를 통해서 낳은 아들이 죽게 되고 나중에는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 왕은 피난길에 오르게 됩니다. 서글픈 피난 길에 오른 다윗 왕을 향해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합니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시므이의 머리를 베어버리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라고 말하면서 혹시 그 저주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고 응수합니다(삼하 16:9, 10)
두번째 경우는하나님께서 쓰시게 위해 낮추십니다.
모세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애굽의 2인자인 모세가 자신의 동포를 구하려다가 애굽인을 죽임으로 인해 미디안 광야에 도주하여 목동으로 40년간을 보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80세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는데 모세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저는 못한다고 거부합니다. 이전에 자기 동족으로 받은 상처와 꺽임이 너무 컸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없다라는 생각으로 꽉 찼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광야의 길로 들어서게 한 것입니다. 모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낮추시고 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똑 바로 걷고 싶어요 라는 복음송가 가사에 보면 “ 주님 이 낮은 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세번째 경우는 교만을 꺾으시기 위하여 낮추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다니엘 4장 3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에게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고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을 우러러보게 만들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실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라는 사실을 직감한 그는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술사를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꿈을 꾸고 그것이 무엇을 예고하는지 번민하고 있느니라. 그러자 그들이 왕에게 그 꿈을 종들에게 이르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느부갓네살 왕은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해석을 말하지 않으면 너희 몸을 쪼개고 너희의 집을 거름더미로 만들 것이니라. 그러자 그들이 이 일은 육체와 함께 살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그것을 보일 자가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낮추시는데도 자신이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을 꺾어야 합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다니엘이 왕에게 찾아가 그 꿈과 해석을 아뢰게 됩니다. 왕이 보신 것은 큰 신상입니다. 그리고 해석을 알려줄 때 느부갓네살 왕은 너무 놀라서 다니엘에게 절하고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라고 말로는 그렇게 고백합니다(단 2:46-47).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꾼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께닫지 못하고 자신을 위하여 금신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자신이 높아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공포합니다. 이로 인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3장 28절에 의하면 그들이 불 가운데 들어갔지만 불에 그슬린 흔적이 없는 것을 보고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였도다.” 라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높임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강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두 번째 꿈을 꾸게 됩니다. 다니엘이 그 꿈을 이렇게 해석해 줍니다. 4장 25, 26절에 의하면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는 지낼 것이며 그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라.“
그리고 나서 열 두달이 지난 후에 느부갓네살 왕이 왕궁 지붕을 거닐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 4장 30절입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교만은 “내가 내가 내가”를 자주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그로부터 일곱 때가 될 때까지 그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들징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고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언제까지 이런 일이 계속된다고 하신지 아십니까? 32절 하반절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즉 나의 힘과 능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회복이 된 것입니다. 그 기간이 차매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총명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볼 때 총명이 자신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때 느부갓네살은 지극히 높이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총명이 그에게 돌아왔고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회복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깨닫게 하실 때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낮추실 때 중심이 바뀌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실 때 중심이 바뀌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자신을 우러러보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자로 바뀌어야 합니다. 나 증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였다가 나중에 내 힘과 내 능력으로 내가 이렇게 했다고 바뀔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마치 짐승처럼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완전히 실패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하늘을 우러러 볼 때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 [“감사는 단순한 말 이상의 것으로 각 사람의 중심, 즉 그의 우선순위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식에 대한 이해를 드러낸다. 어떤 신학자의 말처럼 우리가 ㅇ러마나 감사하는가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진정으로 믿는 것과 우리 자신에 대해 진정으로 믿는 것,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 대해 진정으로 믿는 것을 이해하는 열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실 때 우리를 달아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명기 8장 2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허락하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는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광야에서 생활이 불편하고 마음이 상할 때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마음이;어떠한 자를 달아보신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를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셋째, 스스로 주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입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낮추신다고 선언합니다(삼하 2:7; 사 2:11-17, 26:5; 겔 17:24; 호 14:9). 그러나 야고보는 주 앞에서 낮추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사람들괴 비교하면 자신을 낮추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이사야 선지자처럼 화로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로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하면 주께서 높여주십니다. 누가복음 14장 11절에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러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낮아지는 과정을 잘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자신을 낮추셨을까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지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실만큼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낮추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시기도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스스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낮이지는 과정을 통해서 많이 고통을 겪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하고 다른 것에 마음에 빼앗겨 있을 때 때로는 막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호 2:5, 6). 우리의 마음이 빼앗겨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으실 때 바로 그때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낮추실 때 우리는 자존심 상해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교만을 꺾으시고 사용하십니다. 알고 보면 가장 위험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계속해서 고공행진하고 잘 나갈 때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가장 안전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철저하게 낮아질 때입니다. 인생은 수영과 같아서 바닥 끝에 닿아야만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를 명령하는 그런 우를 범하지않아야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물래돌 실력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많은 영토와 업적을 얻었던 것은 다윗의 업적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다는 것을 다윗이 확인하고 싶어서 인구조사를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을 내가 이만큼 이루어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과거에 받았던 상처와 분노로 인해 불면증에 시달리는 분들이 있습니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낮아지셔서 속이 상한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 낮아지셨든지 그것을 불행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낮아지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생각지 않게 낮아지는 순간에 주님을 만나면 엄청난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세상은 높아지기 대회를 하고 있지만 교회는 낮아지기 대회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사람을 성공했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이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성공은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하여 있다면 신자의 형통은 그 사람을 나누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높여달라고 하지만 신자는 하늘을 우러러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장 약한 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귀한 자라고 여깁니다. 우리가 원하는대로 안되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기회가 됩니다. 우리가 강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실 때 어디에 쓰시려고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과정을 잘 통과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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