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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싸움에 나갈 만한 자(민 1:1-54),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4.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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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는 창조의 기원과 목적,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 구원의 목적, 레위기는 언약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 민수기는 광야생활에서 순종과 불순종의 훈련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수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011절까지는 인구조사 및 각 지파 배치, 행군준비, 10:11-24장까지는 시내산 출발에서 모압 평지에서 진치기까지 39년간 광야생활, 26-36장은 제 2차 인구조사, 미디안과의 전투, 요단 동편 땅 분매 및 가나안 정복전쟁 준비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1장에는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남자라는 단어가 무려 14회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싸움이 나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하나는 아무리 체력이 좋다 하더라도 연령이 20세 미만이면 싸움에 나가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20세 이상이 돠어도 체력이 약하면 싸움에 나가지 못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성숙하고 강건할 때 대적 마귀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요일 2:13, 14). 광야에서 가나안까지,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은 오늘날 교회생활을 가리키는데 악한 영들과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6:10-17). 각 지파별로 인구조사하는 데 협조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각 지파에서 20세 이상 된 사람들을 조사해내는데 있어서 협력할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생존한 사람들의 실명이 기록된 것으로 볼 때 성경은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이름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지어졌습니다. "엘리술"(5)은 하나님께서 반석이란 뜻이고, "슬루미엘"(6)은 하나님께서 왕성함이라는 뜻이고, "느다넬"(8)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뜻입니다. "엘리압(9)"은 하나님께서 아버지라는 뜻입니. 이를 통해서 볼 때 그들은 하나님 중심적인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매 지파에 대하여 동일한 표현을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각 남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라는 표현을 계속 반복해서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히브리어 문법의 역설체(力設體)로서 모세가 각 지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것을 귀하게 여겨서 계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곳 시내 산에서 근 1년 동안 계속 체류한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된 선민으로서 그들의 삶에 필요한 종교. 도덕. 사회의 각종 율법에 대한 교훈을 받고, 또한 그들의 삶의 중심적인 역할을 할 성막을 건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가능한 빠른 시간내에 가나안에 입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따르는 신앙과 그분을 중심한 경건한 생활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과정이 없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다면 그곳은 그들에게 복된 땅이 아니라 타락과 방종의 땅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의 '광야'는 인간이 견뎌내기 힘든 '죽음의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식량 생산을 위해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이 1년여 동안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었습니다. '죽음의 땅'위에 세워진 '회막''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존할 수 있었던 해답이었습니다. 회막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만나는 곳입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수많은 민사 소송을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한 행정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18:13-26). 하지만 광야 행진과 가나안 정복 전쟁을 조직적으로 수행해 낼만한 군사 체계는 아직 미흡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군사조직으로서의 편재를 갖추는데 힘쓰며. 또한 정비된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지휘관들을 직접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이어서 인간이 그것을 수행해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볼 때 그 명령이 불합리하고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오직 전적인 순종만이 요구될 뿐이다(22:1-19). 그러므로 명령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순종뿐입니다.

 

성경 기록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각 지파별로 계수 기간은 단 하루 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1, 18). 이처럼 60만 명이 넘는 장정들의 인구 조사가 단 하루 동안에 끝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일전에 성막건축을 위한 인두세(人頭稅) 수금시 인구 조사를 철저히 실시했던 그 자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이며(30:11, 12; 38:26) (2) 이스라엘 백성이 한 곳에 밀집하여 모여 있었다는 사실도 그 이유가 될 수 있고 (3) 또한 각 두령들의 헌신적인 노력 및 백성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르우벤은 이스라엘(야곱)12아들 중 장남이었으나, 서모(庶母) 빌하와 간통함으로써 가문과 여호와의 영광을 더럽혔습니다(35:22 ;49:4). 그 결과 그는 저주를 받아 장자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대신 요셉이 그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대상 5:1,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르우벤 지파가 인구 조사 결과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아마 그의 영적 장자의 지위는 인정하지 않더라도, 육체적으로 야곱의 첫째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는 저자의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르우벤 지파와 함께 시므온과 갓 지파가 언급된 것은 그들이 르우벤 지파와 가장 절친한 형제 지파이기 때문입니다. 즉 시므온은 르우벤을 장남으로 낳은 레아의 둘째 아들이며, 갓은 레아의 시녀인 실바의 장남입니다(29:33; 30:10, 11). 한편 이들 세 지파는 진 배치에 있어서도 동일한 선상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일련의 조치는 결코 파벌 의식을 조장키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갈등과 마찰을 해소시키고 형제의 우애를 돈독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로운 조치였습니다. 사실 인간이 모인 곳에는 어디나 갈등과 긴장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만유를 통일하시며 평안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당면한 모든 갈등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4:6).

 

광야 행진에서 유다 진기(陣旗)에 속한 지파의 총계입니다(26-31). 여기서 유다가 레아의 넷째 아들이면서도 르우벤 진() 배열에 소속되지 않은 것은 그가 르우벤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장자에 피택되었으므로 독립적인 지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49:8-12). 특별히 이 지파는 가장 많은 군인 수를 보유하였을 뿐 아니라. 광야 행진중 선봉(先鋒)에서 영예로운 승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야곱의 예언(49:8-11)이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후 예수님께서 이 지파에서 출생하심으로써 야곱의 메시야적 예언은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1:2; 5:5), 한편 유다 지파와 절친한 레위 지파가 이곳에 등재되지 않은 것은 그 지파는 특별히 성막봉사자들로 성별(聖別)되어 군복무를 면제 받았기 때문입니다(47-53; 8:9-26). 유다 진영의 깃발 아래 소속된 잇사갈과 스불론은 각각 레아의 다섯째와 여섯째 아들입니다.

 

32-37절은 요셉과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들의 총계입니다(32-37). 여기서 요셉의 두 아들의 지파가 계수된 것은 구속사의 일익을 담당했던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축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48:5-20). 그중에서도 동생 에브라임 지파가 모든 면에서 형 므낫세 지파보다 우위를 차지한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주권적 선택의 결과였습니다(48:13, 14, 17-19),

 

즉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유언적 예언을 통해 '그 아우를 그 형보다 크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성과 제도에 얽매이시지 않고 당신의 선한 계획을 추진해 가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적이고 주권적인 섭리 앞에 인간은 다만 겸손히 그것을 수용, 인정해야 할 뿐입니다.

 

단 지파와 그의 가까운 지파들 곧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군인수 총계입니다(38-43). 이들은 계수 때나 행진시를 불문하고 맨 마지막에 언급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육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열등한 지파였기 때문이다(2:25-31: 10:25-27). 특히 단 지파는 가나안 정착 이후에 이스라엘 내에서 기업이 될 땅을 얻지 못해 방황하기도 했으며, 또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자적으로 우상 숭배를 일삼아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기도 했습니다(18).

 

그러므로 계시록의 기록에 의하면 결국 이들은 12지파의 반열에서 제외되는 비운을 맞게 됩니다(7:5-8). 이는 단의 장래를 예언한 야곱의 말이 온전히 성취된 것입니다(49:16-18). 이러한 단 지파의 결말은 곧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자들의 최후가 허무와 절망임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단 진영의 깃발 아래 소속된 아셀은 레아의 여종 실바의 막내 아들이고, 납달리는 라헬의 여종 빌하의 막내 아들입니다(30-13).

 

한편 오늘날 믿음의 군사로 부름받은 신자들도 단순히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등재된 것만으로 자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구됨과 소유됨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삶의 최종 목표인 영적 가나안 곧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날마다 사단과 싸워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12지파 중 싸움에 나갈 만한 군사로 부름받은 자의 총계가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는 대략 아홉 달 전 성막 건축을 위한 속전 대상자의 총계와 동일합니다(30:11-16; 38:26). 아마 모세는 지난번 성막 건축전의 속전 대상자 총계를 근거로 이번 징병대상자의 총계를 산출했던 것 같습니다.

 

레위 족속이 군대에 종사하지 않고 신령한 일만 취급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으로 하여금을 성막을 섬기는 일을 특별히 구별하여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것은 일반 사무와 같이 누구나 함부로 그 일을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레위 지파는 병역 의무로부터 면제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성별(聖別)되어 하나님의 임재 하시는 성막을 섬기며, 또한 그곳에서 진행되는 제반 업무에 전적으로 봉사할 사명을 맡았기 때문입니다(3; 13:2, 13).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적인 일, 심지어 자신의 생계를 위한 여타의 노동도 할 수 없었으며,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한편, 그러나 여기에 레위인이 계수에 들지 않았다는 것은 전체 이스라엘 군인수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일 뿐, 그들이 전혀 계수함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레위 지파가 가지는 독특한 의미 및 직무를 따라 일개월 이상된 남자들로써 별도로 계수함 받았습니다(3:39).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에 계수되지 않은 이유는(48-49), 그들은 금송아지 숭배 사건때 하나님께 전적 헌신함으로 말미암아 (32:26-29), 그후 오직 하나님의 일만을 하도록 특별히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레위인 성별 사상은 일찍이 레위기 규례 속에서 암시되어 오다가(25:32-34), 이제 본서에 이르러 완전히 공식 인준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위인들은 명분상 이스라엘 장자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초태생 규례(13:2, 13)에 근거해 그들 대신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 간주되어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 속에는 계수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증거의 성막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는 성막을 가리킵니다. 한편 이 말이 생겨난 것은 성막 속에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을 증거하는 증거판(십계명 두 돌판)이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막과 모든 기구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나타내는 동시에(40:34, 35),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그의 중보 사역을 보여주는 가견적 상징물입니다 (8:1-6; 9:1-15;10:19, 20).

 

그러므로 그것들은 세심한 배려 속에 잘 관리되어야 했습니다. 한편 영적으로 오늘날에는 성도들 각자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성전이며(고전 3:16, 17; 6:19), 신령하고 보편적인 성전을 이루는 각 지체들입니다(2:21, 22).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몸을 모든 악의 요소로부터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성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12:1, 2).

 

레위인 중에는 성물을 그 종류에 따라 고핫 자손처럼(4:15) 어깨로 메어 옮기기도 했으며,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처럼(7:7, 8) 수레로 운반하기도 했다. 레위인들에게는 성막의 기구들을 돌보는 책임이 공식적으로 부여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는 교회의 지체들, 곧 성도들을 돌보는 책임이 부과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2:4).

 

레위인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처소인 거룩한 장막 주위에 항상 거하면서 준비를 해야 했으며 (2)성막에 접근하는 자들을 통제해야 했고, 성물이 탈취당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지 않도록 긴장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 늘 동행하면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고전 10:31).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동 생활을 연일 계속해야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동에 편리한 장막 구조를 허락하셔서 그것을 걷고 세우는 일을 반복케 하셨습니다.

 

한편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영원한 거주지로 삼을 수 없었으며, 가나안을 목적 삼고 장막을 매일 걷고 세우는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즉 세상에 대해서는 행인과 나그네요 이방인 일 수밖에 없는(11:13; 벧전2:11). 우리들은 이 세상에 안주하여 잠시 잠깐의 쾌락을 추구하기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매일 진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레위인은 증거의 장막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끗하게 진실하게 전하고 그대로 순종하는 일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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