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비현실성은 세 가지 장벽에서 비롯되었다.
첫째는 지성적인 장벽이었다.
둘째는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장벽이다.
셋째는 사회적인 장벽이었다.
제 1부 이 시대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들
1. 배타성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첫째, 통제, 종교의 분열적인 속성에 대처하는 한 가지 방법은 강력하게 통제하거나 한 걸은 더 나아가 혹독하게 금지시키는 것이다.
둘째, 정부의 통제로는 신앙을 소멸시키거나 무력화시키지 못한다. 모든 종교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주장이 어느 특정한 신앙이 올바르다는 쪽보다 더 편협하다. 믿음에 관하여서는 어떤 주장이든 배타적이다. 다만 그 길이 서로 다를 뿐이다.
셋째, 신앙을 개인적인 영역에 묶어두는 철저한 사유화.
기독교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기독교는 인간의 내면에 작용해 분열성향을 설명하고 깨끗이 지워 버릴 힘이 있다. 기독교는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을 존중할 견고한 토대를 제공한다. 예수는 믿지 않는 이들이 저마다 가진 문화적인 배경과 상관없이 크리스천들의 행동을 대부분 선하게 여기리라고 보았다(마 5:16, 벧전 2:12).
다른 종교들의 가치 구성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있음을 당연히 여기신 것이다. 이처럼 중첩되는 영역이 생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크리스천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선을 행하고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는 존재로 빚어졌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남들보다 윤리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사는 이들이 아니라 제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구세주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깨닫는 자에게 임한다.
2. 악과 고통
하나님이 선하다면 왜 세상에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이슈는 기독교의 배타성이 아니라, 세상에 악과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첫째, 악과 고통은 하나님께 맞서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세상에 넘치는 악과 고통을 끝내지 못해서 잔뜩 화가 난 위대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이 있는가 하면, 그와 동시에 우리로서는 속속들이 알 수 없지만 선한 뜻을 가지고 악과 고통이 계속되도록 허락하는 위대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이 있다.
악과 고통은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루이스는 악이 도리어 무신론에 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고통이 하나님의 부재보다는 존재를 더욱 반증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신론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자연계가 몹시 그릇되고 불공정하며 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비극적인 사건이나 고통, 불의 같은 것들은 모두에게 문제가 된다. 하나님을 믿는데 걸림돌이 되는 만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데에도 큰 장애물이 된다.
철학자 피터 크레프트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일부러 인간의 고통을 뒤집어쓰기 위해 세상에 왔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극히 크고 깊은 고통을 체험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고통스러운 경험 하나하나의 속뜻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쓰라린 아픔과 절망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품고 실제로 고통에 맞설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한다.
십자가게 달려 버림받았음을 한탄하는 예수의 부르짖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속속들이 관계적인 진술이다. 간절히 바라는 관계가 단절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속앓이가 있을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하나님은 참으로 임마누엘임을 알게 된다.
3. 속박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를 옥죄는 오랏줄인가?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믿음은 자유의 적인가? 21세기 초의 사회활동가 엠마 골드만은 기독교를 인류를 획일화시키는
도구, 도전하고 행동하는 인간 의지의 파괴자, 확장과 성장을 옥죄는 철망이나 오랏줄이라고 했다.
첫째, 진리는 피할 수 없다.
진리 주장이 죄다 권력놀음이라고 한다면 그런 말 또한 권력놀음이다.
둘째, 어떤 공동체도 완전히 포용적일 수 없다.
자유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유익보다는 개인의 권리가 우선이며, 구성원들끼리만 공유하고 있는 일단의 몹시 특수한 신념들을 토대로 삼는다. 구체적인 신념과 실천 방안을 구성원들에게 책임지고 제시하지 못하면 그 어떤 공동체도 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없으며 공동체라고 말할 근거를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셋째, 기독교신앙은 문화적으로 경직되어 있지 않다.
이사야 60장과 요한계시록 21-22장과 같은 성경 분문들은 문화적인 다양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새로워지고 완벽한 미래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넷째, 자유는 단순하지 않다.
임마누엘 칸트는 귄위나 전통보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에 의지하는 것을 계몽된 인간의 조건으로 꼽았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발상이다. 실제로 구속과 제한이 자유의 통로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인간본성과 세상의 살상에 잘 부합되는 구속은 더 큰 힘과 능력을 발휘할 기회, 그리고 더 깊은 기쁨과 만족을 낳는다.
다섯째, 사랑, 그 궁극적인 자유는 생각보다 구속적이다
자유는 제약을 없애는 게 아니라 올바른 제한과 통제, 곧 인간의 본성과 잘 들어맞고 자유를 불러주는 제약과 제한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관계가 건강하려면 서로 독립성을 잃어야 한다. 양쪽 다 서로에게 말해야 한다. 그대에게 맞추겠습니다. 내가 달라질게요. 나를 희생해서라도 그대를 섬기겠어요.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육신과 대속사역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맞췄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러했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똑같이 고백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어떻게 스스로를 변화시켜 자신을 주셨는지 알고 나면, 두려움 없이 자유를 포기하고 그분 안에서 참다운 자유를 누리게 된다.
4. 기독교의 불의
교회에 다니는데도 왜 불의한가?
적잖은 이들에게 크리스천의 행동이 기독교신앙에 대한 신뢰성을 갉아먹는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주로 세 가지 이슈가 도드라진다. 우선 한눈에 들어올 만큼 크리스천의 성격적인 결함이다. 다음은 전쟁과 폭력의 문제다. 마지막으로 광신의 문제가 있다.
첫째, 성격적인 결함
성품이 성숙해지고 행동이 변하는 것은 크리스천이 된 뒤에 차츰차츰 일어나는 과정이다. 이는 정서적으로 윤리적으로 영적으로 아직 갈 곳이 먼 미숙하고 연약한 인간들이 교회에 가득하는 뜻이기도 하다. 교회는 성자들을 늘어놓은 박물관이 아니라 죄인들을 치료하는 병원이다.
자 이제 다치고 깨진 과거를 누군가 크리스천이 되고 성품도 예전에 비해 한결 나아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 안정돼서 신앙적인 소속감이 특별히 필요하지 않은 이보다도는 안정감과 자기 절제가 부족할 수 있다.
둘째, 신앙과 폭력
기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은 끔직한 일에 틀림없으며 반드시 심각하게 다루고 또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20세기에 저질러진 폭력 가운데에는 도덕적인 절대주의뿐만 아니라 세속주의에서 비롯된 경우도 수없이 많았다. 그렇다면 어느 사회에 폭력과 전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 사회에 널리 퍼진 신앙까지 부정할 필욘적인 사유가 될 수 있겠는가?
셋째, 광신
광신자는 기독교 신앙을 지나치게 믿고 과하게 따르는 이들이다. 그들은 고압적인 태도로 남을 지배하려 들고 독선적이며 제뜻을 굽히지 않으며 감각이 무디고 냉담하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열성적으로 스스로를 몰아친다는 것은 사실상 그리스도와 복음에 온전히 내어 맡기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악과 고통은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루이스는 악이 도리어 무신론에 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고통이 하나님의 부재보다는 존배를 더욱 반증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신론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자연계가 몹시 그릇되고 불공정하며 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일까? 비극적인 사건이나 고통, 불의같은 것들은 모두에게 문제가 된다. 하나님을 믿는데 걸림돌이 되는 만큼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에도 큰 장애물이 된다.
철학자 피터 크레프트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일부러 인간의 고통을 뒤집어쓰기 위해 세상에 왔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극히 크고 깊은 고통을 체험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고통스러운 경험 하나하나의 속뜻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쓰라린 아픔과 절망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품고 실제로 고통에 맞설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한다.
십자가게 달려 버림받았음을 한탄하는 예수의 부르짖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속속들이 관계적인 진술이다. 간절히 바라는 관계가 단절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속앓이가 있을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하나님은 참으로 임마누엘임을 알게 된다.
5. 심판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가?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세상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또한 심판하는 하나님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피조물을 향한 사랑과 기쁨에서 비롯된다고 성경은 말한다(시 145;17-20).
볼프는 하나님의 공의라는 개념을 믿는 믿음이 최고의 자원이라고 말한다.
체스와프 미워시는 니힐리즘의 절제된 매력들이라는 뛰어난 에세이에서 마르크스가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부르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내생에 대한 약속은 가난한 노동자 계급으로 하여금 부당한 사회적 조건들을 참고 견디게 만든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교리는 서로 사랑하고 평화를 이루는 인간의 노력을 뒷받침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볼프와 미워시는 입을 모은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시간을 주셨다. 그런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잡아다가 영원히 지옥에 넣는다. 고립, 부정, 망상, 자기 몰입이 갈수록 심해진다.
C.S 루이스의 판타지 소설,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버스를 가득을 태우고 지옥을 떠나 천국 언저리에 도착한 승객들의 이야기다. 지옥에 있을 때 발목을 붙들고 있던 죄들을 버리라는 안내를 받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지옥은 투덜거리는, 그러니까 쉴새 없이 불평하는, 늘 남을 탓하는 위기에서 시작된다. 지옥은 인간의 자유를 기리는 가장 거대한 기념물이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주님의 듯이 이우저질지어다“라고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이들과 끝내 ’네 뜻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류죠. 지옥에 있는 이들은 어김없이 후자를 택한 쪽입니다. 잘못된 생각과 행동이 영원히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고 더 편협한 건 아니다.
성경은 사랑의 하나님을 또한 심판의 하나님, 마침내 세상의 모든 일을 바로 잡을 분이라고 말한다.
6. 과학과 기독교
과학이 기독교 신앙이 틀렸음을 증명해 낸 것이 아닌가?
기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과학은 자연현상의 원인을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다. 하지만 다른 데까지 두루 적용되는 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는 날 뒤에 숨은 또 다른 전제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갈등과 대화, 통합, 독립 등 네 가지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고 본다.
크리스천 사상가들은 갈등만이 아니라 저마다 대화, 통화, 독립이라는 바버의 네 가지 모델을 전부 받아들인다.
현대인들은 기적을 자연질서의 ‘일시정지’로 여기지만 예수님은 자연질서를 회복하는 도구로 삼으셨다.
7. 성경
성경의 기적을 어떻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는가?
역사에 비춰보면 성경을 신뢰할 수 없다. 복음서들을 전설로 보기에는 기록 시기가 너무 이르다. 정경의 복음서들은 대부분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고 40-60년쯤 지났을 무렵에 기록되었다. 예수님이 세상에 게실 때 일어난 일들과 관련해 자신의 말인지 참인지 궁금하면 아직 살아있는 증인들에게 가서 확인해 보라고 한다(고전 15;1-6),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행 26;26). 현장에는 예루살렘 시민들이 있었다.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정경의 복음서들이 이니 널리 사용되고 있던 시절부터 백여 년이나 흐른 뒤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고 논란이 많은 가르침에 매여 성경 자체를 거부할 게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과연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는지를 비롯한 핵심적인 주장들을 살피는 게 중요하다.
도전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바꿀 정도로 성경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인터미션
회의에서 믿음으로의 여정 사이에서
크리스찬의 시각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제 2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확실한 근거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을 매주하다
8. 하나님의 존재를 암시하는 실마리들
만물에는 하나님의 실존을 가리키는 신의 지문이 묻어 있다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갈망들은 인간의 태생적인 심오한 욕구들임에 틀림없으며 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는 주요한 실마리가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안다.
9. 하나님을 아는 지식
누구나 이미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버드 로스쿨 앨런 더쇼비취 교수는 권리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우선 인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인권은 자연이나 자연법에서 비롯되는 이들도 잇다. 법률을 제정하는 인간이 인권을 만들어냈다는 또 다른 이론이 있다.
권리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그저 발견될 따름이며 그렇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다.
10. 죄된 본성
마음의 빈 공간은 하나님이 아니면 죄로 채워진다. 시몬 베유는 죄는 빈 구멍을 채우려는 몸부림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내면에 만들어 두신 구멍을 견딜 수 없기에 인간은 온갖 것들로 그 빈틈을 메우려 하지만 오로지 그분이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다.
죄는 하나님 앞에 서기를 바라지 않는 절망적 상태이다. 믿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 안에 제 존재의 근거를 두고 싶어한다(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흔히 죄라고 하면 우성 거룩한 규정을 위반하는 행위를 먼저 떠올리지만 키르케고르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내게 주지 말라는 계명임을 정확히 꿰뚫는다.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그밖에 다른 요소들을 삶의 의미와 목적, 행복의 중심으로 삼고 그 위에 자기 정체성을 세워 가려는 게 죄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토대를 두지 않은 정체성은 또한 어쩔 수 없이 지독한 중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아니라 가족, 명분, 업적 따위에서 삶의 의미를 얻으려 들면 도리어 그것들에 얽매이게 된다.
베유는 이렇게 적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과 우상 사이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신을 부정하면 세상의 무언가를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는 삶은 필연적으로 공허하다. 죄로 인해 텅빈 공간을 예수 그리스도로 채우다.
11. 종교와 복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복음이다
종교는 윤리적 노력을 통한 구원을 이르는 말로, 복음은 은혜를 통한 구원이라는 뜻으로 사용할 것이다. 죄와 악은 곧 남들을 억압하게 만드는 자기중심성과 교만을 가리킨다. 종교의 구동원리는 ‘나는 순종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받아주신다는 개념이다. 반면 복음의 구동원리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은 날 용납해 주신다는 것이다.
가장 큰 차이는 동기에 있다. 종교를 좇는 이들은 두려움 때문에 거룩한 표준을 지키려 한다. 순종하지 않으면 이생과 내생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모두 잃어버리라고 생각한다. 반면 복음을 따라는 이들은 그리스도 덕분에 이미 받은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순종한다. 도덕주의자들은 버림받을까봐 두려워서 마지못해 순종할 따름이지만 크리스천들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분을 기쁘게 하고 닮아 가려는 영원에서 흔쾌히 복종한다.
또 다른 차이는 정체성과 자존감의 문제다. 표준에 미치지 못하면 겸허해 지기도 하는데 자신감을 잃고 실패자가 된 느낌이 된다. 복음은 사무치는 겸손과 자신감을 동시에 가져 온다.
종교와 복음은 다른 신념과 관습을 가진 디들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다른 인종과 신념, 특성을 가진 이들의 가치를 얕잡는 식으로 자존감을 북돋운다. 그러나 복음의 정체성은 조화고 공존한 사회를 세워갈 토양을 제공한다.
인간의 어려움과 고통을 다루는 방식에 관해서도 종교와 복음은 다른 길을 제시한다. 도덕주의적인 종교는 신자들에게 곧바로 살면 하나님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확신을 심어줍니다. 하지만 삶이 틀어지기 시작하면 심신이 쇠약해지리만큼 심각한 분노에 시달린다. 하지만 복음은 삶이 삐그덕 댄다 하더라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쓰라린 상처나 자기 비난이나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준다.
12. 십자가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예수다
첫 번째 이유 : 참다운 용서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아픔
아버지가 미워 죽겠다고 하소연하는 열여섯 살 소녀와 상담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를 미워하면 아버지한테 늘 질 수밖에 없단다. 마음으로 용서하고 사랑하기 시작하지 않으면 언제나 분노가 발목을 잡을 거야. 어린 친구가 그걸 깨닫고 받아들이자 속에서 매듭이 풀려갔다.
예수님이 꼭 죽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무도 심각한 죄를 그냥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용서란 잘못을 저지른 이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대신 자신이 떠안고 상대가 새롭게 달라지기를 기대하며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반드시 죽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갚아야 할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손수 그 값을 치르셨다.
두 번째 이유 : 참다운 사랑은 인격적인 교환
심각한 어려움을 가진 이들의 삶이 변할 만큼 사랑을 쏟기 위해서는 희생적인 사랑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반드시 죽어야 했던 이유를 이해하자면 십자가의 결과(값비싼 대가가 따르는 죄 용서)와 십자가의 방식(세상 가치를 뒤엎는 역전).
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인간 스스로 대신하는 게 죄의 본질이라면,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대신하신 게 구원의 본질이다.
어째서 그리스도는 버림을 받았던 걸까? 꼭 필요한 일이었을까? 성경의 답은 짧고 분명하다. 그렇다, 우리를 위해서
13. 부활이 던지는 도전
예수님의 부활은 완벽한 검증을 거친 역사적 사실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6절에서 빈 무덤과 부활이 사흘 안에 있었던 일이라고 소개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몇몇 개인들과 소그룹들에게 나타나시는데 그치지 않고 500명이나 되는 군중에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이처럼 무덤이 비어 있었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이들이 수백 명에 이른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초기 크리스천들은 부활 중심의 현실 인식을 가졌다. “나로서는 목이 잘려 나갔던 증인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파스칼).
14. 영원한 삶
우리를 위해 준비된 돌아갈 곳이 있다
성경은 보통 창조와 타락, 구원, 회복이라는 네 장으로 그 거대한 드라마를 압축해 보여 준다.
9장에서 살펴보았듯, 죄란 무얼 하든 오로지 자아의 탑을 쌓아 올리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창조해 내는 노력에 힘을 쏟는 행위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자신이 직접 구원자요 주인 노릇을 하려고 덤비는 것을 집어 치울 수 있다. 스스로 구원이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삶을 통째로 바꾸는 하나님이 사랑을 새로운 정체성의 토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사는 어떻게 마무리 될 것인가? 하늘나라가 이 세상으로 내려와 하나가 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를 인간과 자연이 다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인종간의 모든 적대감과 전쟁의 소멸과 함께 상처와 질병, 죽음이 사라지는 새로운 에덴동산이라고 표현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세상을 바로 세우며, 창조세계를 갱신하고 회복하는데 있다.
크리스천 삶이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지라고 권해서 기독교 공동체를 세울 뿐만 아니라 정의와 섬김을 통해 인간 공동체를 굳세게 형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에필로그
그 누구도 하나님 없음을 증명하지 못했다. 이제 하나님을 믿을 준비가 되었는가?
스스로를 안다는 것은 일단 무엇이 무족한지를 안다는 일이다. 이는 진실에 자신을 견주어 보는 일이며 그 반대는 아니다.
첫째, 동기를 되짚어 보라
동기는 늘 뒤섞여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가지려 하는가, 아니면 그분을 끌어다 자신을 섬기게 할 심산인가?
후자라면 기도와 신앙적인 관습을 통해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샤마니즘의 한 갈래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기 보다 이용하는 형태다.
어떻게 해야 그분한테서 이런 저런 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엔 어떻게 하면 그분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을 바꿔가야 한다.
둘째, 치러야 할 대가를 가늠해 보라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가장 근본이 되는 충성을 예수님께 바치는 쪽으로 방향을 완전히 바꾼 사람을 가리킨다.
셋째, 면밀히 살펴보라
결국 신앙과 확신은 예수님에 대해, 그러니까 그분이 어떤 분이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 더 깊이 알아갈수록 성장하게 마련이다.
넷째, 행동에 착수하라.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다. 회개는 개인의 죄를 뉘우치는데 그치지 않으며 훨씬 더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제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계획이야말로 다른 모든 죄의 밑바닥을 흐르는 가장 중요한 죄이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진실로 마음을 변화시키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꾸는 회개가 시작된다.
회개는 하나님 외에 다른 무언가에 기대어 소망과 의미, 안전을 추구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잘못된 일뿐만 아니라 선한 일의 이면에 숨은 몽기들에 대해서도 회개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다.
신뢰라는 단어는 삶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는 신앙을 더 없이 잘 담아낸다.
세 번째는 공동체에 헌신하라.
크리스천이 된다는 데는 언제나 개인적인 면과 집단적인 면이 다 있다. 회개와 맏음 역시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이뤄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좇는 동료집단이 없으면, 신앙의 가족이 없으면 크리스천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없다.
'책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한 마음으로부터의 자유, 샌드라 월슨 (0) | 2024.02.02 |
---|---|
파킨슨의 시간관리 원칙 5가지 (0) | 2024.02.02 |
팀 켈러, 왕의 십자가 (0) | 2024.02.02 |
팀 겔러, 결혼을 말하다 (2) | 2024.02.02 |
티머시 켈러, 예수를 만나다 (2) | 2024.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