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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구속사적 성경해석과 설교, 그 흐름과 전망, 박종칠 교수

by liefd 2024.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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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성경해석과 그 적용의 설교문제는 원래 모범적 성경해석과 그 적용에 반대하여 1930년대에 화란 개혁교회 안에서 치열하게 논쟁되었던 문제였다. 시대와 지역으로 보아서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라고 제쳐놓을 수도 있을지 모르나 그 당시 제기된 논점은 바로 우리와 직접 관련된 문제였다. 비록 기독교회는 그 개체적 특징들이 시대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복음을 죄악 세상에 전달하려는 과정에서 당면하는 문제점들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엇비슷한 점들이 많은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양적 성장에 따른 후유증을 자성하면서 바른 성경해석과 바른 설교 전달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래서 필자는 화란교회의 논점들을 반세기가 지난 오늘의 한국교회에 소개함으로써(1) 그 성경해석 및 설교구조 형성에 기여하려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인지는 모르나 요즈음 한국교회에서는 구속사적 성경해석과 설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영어를 말하는 미주 신학에도 모범적구속사적 논쟁의 논점들은 1970년도에 시드니 크레이다누스(S. Greidanus)의 학위논문인 'Sola Scriptura : problems and principles in preaching historical texts (Toronto)'(2)를 통하여 소개된 이후 1987, 8년도부터 불붙고 있다. 차제에 우리는 구속사적 해석과 설교와 논쟁에 개입된 역사적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바른 성경해석과 설교를 위해 그 전망을 내다보는 것도 의의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Ⅰ. 설교와 성경해석은 단순해야 하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설교와 성경해석은 단순해야 한다고 한다. 세상살이에 복잡하게 시달린 교우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해야지 무슨 신학내용을 중요하게 알린다하여 복잡하게 하면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단순한 복음 (simple gospel)"을 주장하면 제시하는 내용과 방법도 쉬워야만 한다. 가능한 복잡한 것을 삼가고 쉽게 관찰해서 풀어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의 감성에 쉽게 호소할 수 있고 사람의 믿음이 움직여진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을 드러내기 위해 어려운 분석을 하면 이것은 복잡하게 만들고 지성화시키는 일이요, 문제를 머리로만 이해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는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이렇게 생각지 않는다. 준비하지 않고 내용 없이 즉흥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목사를 탄식하고 있다. 이들은 설교에서 󰡒많이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을 듣기 원하는 것이다. 설교에서 단순히 감성에만 호소하는 것을 언짢게 생각하고 설교에서 적어도 건져낼 수 있는 구조적인 사상체계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전자가 감정 호소에 중점을 두는 설교라면 후자는 이성과 합리에 치중하는 설교라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청중의 계층도 다양화되었고 그 기호도 사람마다 다들 다르니 조화를 이루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러 층의 사람들이 제 각기 자기 구미에 따라 설교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평가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적어도 설교에 대해서는 이러쿵 저러쿵 할 수 있는지 모르나 설교자가 사용하고 해석하는 설교본문 자체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말씀에 대해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경 본문 자체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일방성을 나타내고 있는가 이다. 예를 들어 보자.  신자라면 사랑을 좋아하고 사랑을 언급하는 성경본문을 선호한다. 고린도전서 13장 또는 요한서신을 들먹인다. 시편 133편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를 찬송하며,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고 말하는 성경구절을 좋아한다. 아무리 이렇게 할지라도 사랑의 정신으로 말하지 않는 성경 본문이라 해서 마음대로 도려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성경을 참되게 믿는 신자라면 성경 전체를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것이다. 어느 누가 인정하든 안하든 그리고 그가 개인적 기호에 따라 어떻게 성경을 사용하든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오직 하나님 말씀 아닌 어떤 것도 말하려 하지 않는 것이 참 신자의 성경읽는(해석) 법이다. 참 신자이면 하나님은 자비하시면서도 또한 공의로우신 분으로 믿고 아는 터이다. 다른 사람이야 󰡒사랑의 정신󰡓으로 말하지 않는 성경 본문을 어떻게 사용하고 평가하든지 참 신자는 그 성경 본문이 말하는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복음서의 서술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구약의 선지서들이 강조하는 면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것들이 상호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포개진 겹의 한 면이 별도로 제시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사랑을 말할 때도 하나의 사상적 구조(scheme)를 가진다. 이럼으로써 사람들이 사랑 개념을 생각할 때에는 그에 따른 표준과 규범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 개념으로만 보아서도 단순히 한 면으로 치우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 자신에게는 자신 모든 덕들의 통일성이 있다. 사랑과 자비가 있는가 하면 더욱이 공의와 엄숙성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구별하도록 하신다. 포개진 겹의 전후를 살피도록 하시는 것이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정통주의적 일방적 단순논리는 그것이 진정 단순함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성경적 사랑은 복잡한 요소들이 조율되어있는 사랑이다. 교회사적으로도 사랑 개념이 복잡함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라는 이름을 내세워 미워하고 핍박하기도 했지만 관용 (tolerance)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정신 분석적 심리학에서도 사랑 개념은 단순치만은 않다.

 

Ⅱ. 정원의 꽃송이 말씀

 

요한계시록 222절에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보자.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죄악 세상의 온갖 구름덮개가 다 걷히고 난 다음에 드러난 하나님 정원의 나무들과 열매들이므로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3:18).

 

우리가 만약 하나님 말씀을 동산의 꽃송이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그 꽃송이를 그 말씀자체의 정원과 토양에 서있도록 해서 하나님 자신이 알려주는 교훈에 따라 그 의미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꽃이 좋다하여 자기 구미 또는 학문적 취향에 따라 꽃잎들을 떼어낸다면 그 생명력은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동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말씀의 사건들마다 그 전체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기에 그 전체에서 떼어낸다면 오류가 되기 마련이다. 심지어 우화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전체를 손상시키지 않은 채 보존하여 하나님 말씀 정원에서 거닐도록 해야한다.

 

위에 든 비유는 성경해석이나 설교가 성경을 사용하되 전체적인 관련 속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구속사적 성경해석에 성경역사, 구속사, 언약사, 계시사 등과 같은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이런 용어가 지시하는 방식대로 성경말씀을 접근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것 자체들이 성경내용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것은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경에서부터 언약사, 계시사가 어떤 것인지 추적은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성경 자체가 ‘계시사’ 또는 ‘언약사’ 라고 칭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이런 점을 간과한다면 성경말씀의 좌우에 날선 칼로 심령 골수를 찌르는 면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가령 한 부분의 역사를 전체와 분리시켜 성경역사를 배우고 그 부분 역사를 성경말씀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은 예언서나 서신서들을 알게 되면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바울의 선교여행 역사 이야기를 듣고 일종의 낭만적인 바울상을 가진 사람은 바울 서신들을 철저히 알게 되면 교의적이면서 변호적인 또 다른 바울상을 만나게 된다. 이 경우 성경역사는 성경 자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전체에서 분리된 역사를 성경으로 배운 데서 오는 일그러진 상은 좀처럼 지우기 어렵다. 그러니 성경 역사 자체어릴 때에 배운 성경는 성경 자체가 기술하는 즉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이야기하는 󰡒하나님 설교(sermo Dei)" 와는 다른 것이다.

 

특히 어릴 때 성경 역사에서 배운 예수상이 복음서를 읽어갈 때에 교회 안에서 논박하는 예수, 구유에 오신 목적이 평화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칼과 검으로 나누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예수상에 부딪히면 어려움을 만난다. 흔히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왜 이방 민족들을 멸절시키느냐고 묻는 것이다. 역사 기술은 한 봉우리 꽃송이에서 이 꽃잎 저 꽃잎들을 떼어버린 채 꽃송이라고 여기는 것은 진정한 꽃송이가 아니라 꽃송이라고 생각는 데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예수상, 바울상은 경건한 사람에게 위로의 그리스도상은 될지 몰라도 하나님 말씀은 못되는 것이다. 설교자는 말씀의 설교자이어야 하며 교의학이나 구속사의 설교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Ⅲ. 모범적 해석과 구속사적 해석

 

위에서 지는 해(?)에 불과하다고 하는 문제가 설교에서 논쟁된 것이 바로 모범적구속사적 설교 논쟁이었다. 모범적 성경이해에서는 성경의 인물이며 그 인물의 행동 하나 하나가선하든지 악하든지하나의 윤리적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사울, 다윗 등의 역사 이야기들 모두가 일련의 모범들이 되어서 우리 신자들이 따르느냐 그렇지 아니하냐에 따라 그 축복과 징벌 같은 보상을 기다리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인물들을 하나님 구속사적 표징으로 삼아 두었으니 우리는 이런 성경의 자료들을 적용해서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 해석을 모범적(exemplaristic)" 이라고 한다. 홀버다(B. Holwerda)가 말한 대로는 그것은 성경역사를 온갖 종류의 독립된 역사로 취급하여 우리를 위한 모범으로 여기는 해결을 찾기 때문이라고 한다.

 

구속론자들은 이런 성경이해를 닫는 해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성경해석에 극렬히 반대하여 일어난 사람들이 구속론자들이다. 쉴더(K. Schilder), 홀버다(B. Holwerda)가 반 디크(Van Dijk), 반드 비어(Vant Veer), 카프테인(Kapteyn 등이었다. 이들의 입장은 성경의 인물이나 역사(사건)마다 그 독자적 위치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로 지향하고 말미암는 인도과정에 있는 구속사적 위치로 조명해 보는 것이다. 여기서 구약과 신약의 구분이 강조되는가 하면 두 언약의 통일성도 강조된다. (신약에서도 언약저주가 있으며 성취되어 감을 말한다).

 

1. 모범적 해석이 비판받는 점들

 

여기 구속론자들이 모범적 성경이해에 대해 비판하는 점들을 살펴보면

첫째, 무엇보다도 모범적 성경해석은 성경의 통일성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특별한 성경구절이 구속사라는 넓은 문맥에서 해석되고 설교되는 대신 성경의 통일성을 무시한 채 구속의 대 드라마 가운데 중심인 그리스도와 단절되므로 단편화되고 통일성을 해친다는 것이다.

 

둘째, 모범론자들은 문맥(context)에 주의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홀버다에 따르면 해석학의 가장 중요한 규칙들 가운데 하나는 자료의 각 유형(type) 따라 문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는데 모범론자들은 성경말씀의 그때(then)" 와 지금(now)" 을 연결시키려는 나머지 본문 문맥에 주의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령 예언서는 그 나름대로 주장을 갖고 하나님 백성이 범한 죄를 발견하고 징벌을 고하며 약속된 은혜를 알리는 것인데 이것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 모범적으로 해석하고 설교한다면 그 생명력과 특징은 사라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본문을 다룬다면 그것이 역사로 남아야지 하나의 단순한 예화가 되거나 윤리적, 심리적 차원으로 바뀌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와 밀접히 관련된 문제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어떤 인간 경험에서 일어나는 구원서정에 귀속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 신자들 신앙생활의 여러 단계들을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행위들에 앞세우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셋째, 모범론자들이 하나님 계시의 통일성이며 문맥을 무시할진대 또 하나의 실패는 구속의 전진적 특징들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성경계시는 '덜한 것' 에서 '더한 것'으로(less-more), '그림자' 에서 '성취', '점진' 에서 '발전'으로(물론 퇴보되는 시대도 없지 않으나 일반적 구조에서 볼 때) 함께 다루어진다. 그렇기에 개혁주의 성경신학이 각 시대 마다 계속되는 계시의 연속성과 구별되는 특징들이 인정된다. 그런데 모범론자들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모범적 등식에만 집중하다 보니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구속사적 차이점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넷째, 모범론자들은 성경계시를 도덕화, 심리화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과,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모두 신령하게 우리 생활의 규범이 되며, 성경인물의 성공과 실패노아의 주정, 아브라함의 거짓말, 욥의 세속성, 야곱의 간사 등가 오늘날 우리 생활의 규범이 된다. 과거 백성에 대한 서술(description)이 오늘 우리들을 향한 도덕적 규범(prescription)으로 바꾸어지는 것이다. 물론 구속론자들 편에서도 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에 심리적으로 병행할 만한 요소가 없지 않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주종을 바꾸어서는 안되며 변두리 사항을 일차적 초점으로 부각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섯째, 근본적으로 구속론자들이 모범론자들의 성경이해에 두려워하는 것은 신 중심적이며 기독론 중심보다 인간론 중심이라는 점이다. 이원론적 초점기독론과 인간론의 경쟁 가운데 결국 강조되는 것은 인간이 아니냐는 우려를 한다.

 

2. 구속사적 해석이 비판받는 점들

 

모범론적 성경이해가 비판을 받는 것 못지 않게 구속사적 성경이해도 비판을 받는다. 앞에서 말한 시드니 크레이다누스는 그의 논문 'Sola Scriptura'에서 구속사적 성경접근에 다음 세가지 약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1) 도식주의(schematicis)라는 것이다.

 

K. 스킬더는 구속사 개념이 '하나님의 작정' 에 기초하고 있다는 성경적인 말을 하지만 󰡒스킬더는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말을 성경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크레이다누스는 스킬더가 이 말을 역사의 과정과 관련된(논리적인) 추론을 만들어 내기 위한 선험적인 것으로 사용한다고 말하고 우리가 의심하는 것은 성경 역사적 본문들의 풍성한 다양성이 스킬더가 하고자 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의 도식에 포착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

 

2) 사변(speculation)적이라는 것이다.

 

크레이다누스는 스킬더의 유명한 삼부작 '수난의 그리스도(Christ in Zijn Lijden)' 에서 예를 든다. 스킬더는 점진적 선에 매혹된 나머지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에 근거하며 그 선들을 주저 없이 늘이고 있다. 그는 언급된(그리고 때로는 언급되지 않은) 모든 세목들의 신적 필연성을 드러내고자 애쓰고 있다. 

 

3) 객관주의(objectivis)라는 것이다.

 

스킬더의 설교가 압도적으로 객관적이어서 적용이라고 하는 것이 기껏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정도이다. 이렇게 객관적이 되는 이유는 첫째, 스킬더의 점진적 계시 사상 때문이다. 그는 계시는 하나의 사건이며 따라서 교리가 될 수 없다는 바르트 사상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교리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인데 크레이다누스는 스킬더는 구속사의 틀에다.자기의 교의적 체계가 구속사 구조를 지배하고 심지어 그것을 대신하기 까지 한다고 한다. 둘째로 이것은 다른 한 선으로 말하면 점진적 구속사라는 것이다. 구속역사 즉 발생한 것은 정확하게 말하는 객관적인 사실들을 다룬다. 스킬더의 말대로는 구속사를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건물로 보았는데 크레이다누스가 질문하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설계도를 찾아내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만 해서야 오늘의 청중들에게 실존적으로 와 닿는가 라고 질문한다.

 

Ⅳ. 스킬더와 C. 트림프의 반응

 

시드니 크레이다누스가 구속사적모범적 논점들을 종합 평가하여 영어세계에 소개한 것은 1970년이라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 논쟁이 이차대전 훨씬 이전이었던 반면 종전 이후에 이미 구속사적 입장을 주창하면서도 그 일방성에 주의를 환기시킨 학자는 구약학자 H. 스킬더였다. 그가 특별히 그의 전임자 홀버다의 입장을 교정하려 했던 반면 이러한 입장에 많은 암시를 받아 구체화 내지는 보완시킨 교수가 C. 트림프 박사이다. 몇 가지 항목을 나누어 생각해 보겠다.

 

1. 모범의 기능을 인정한다.

 

H. 스킬더는 모범적 설교(모범적구속사적 해석을 설명한 뒤에 이렇게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그 당시 모범적 방법과 구속사적 방법에 대해 처음에는 명백한 대조점을 만들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구속사적 설교에 대해 말했으나 이 말은 본질적으로 논쟁에 있어서 잠정적, 실제적 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도 '모범' '구속사' 가 아무런 대조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즉 성경 자체는 언제나 역사 안에 있는 '모범들' 을 증거하고 있다. 기도의 능력을 말하는 야고보를 생각해보며 비 오기를 기도한 엘리야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쟁이 진행됨에 따라 정확히 공식화될 수 있는 것, 즉 역사적 사건에 있어서 항구적으로 계시된 일반 규칙과, 그것에서 오는 구체적인 역사적 형편에서의 특별한 적용이며 오실(혹은 신약에서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아 목표와는 구별지어야만 한다. 어떤 때는 두 용어를 상호 관련시켜, 즉 구속사적모범적 또는 특별히 구속사와 관련된 구속사적 모범은 성경 자체가 지시하는 것에 따라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알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즉 스킬더가 주장하는 것은 모범주의는 반대하지만 구속사 범주 안에 있는 모범에 대한 정당한 위치와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C. 트림프교수는 그의 책 'Heilsgeschidnis en predeking' (Kampen : Van den Berg, 1986)에서 -그의 구속사적성경해석에 대한 평가가 필자의 '구속사적 구약성경해석' pp. 112~125에서 소개되어 나온다이 모범이라는 말이 부당하게 표기되어 왔다는 사실과 성경 역사들의 모든 예화적 면을 거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한다. 바로 이와 같은 식으로 '모범' 을 금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라' 고 하는 성경의 분명한 요구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13:15, 15:12, 벧전2:21). 그리스도는 누구도 그를 따를 수 없었던 유일한 길을 갔다. 그러나 그 유일성에서 그는 동시에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그이 안에서 계시한 것을 사랑 가운데 남아 있어야 한다.

 

고신대학 신학대학원에서 10년간 봉직한 고재수(N.H.Gootjes) 박사는 이와 관련된 논문 세편을 썼다.

 

1) 성경의 역사적 본문에 있어서 모범의 기능

2) 성경의 역사적 본문에 대한 구속사적 해석

3) 구약의 역사적 본문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

 

첫째 논문에서 고 교수는 H. 스킬더와 C. 트림프의 연구를 구체화시켜 모범과 예증적인 예화를 구분 짓고 모범을 세가지 종류로 말한다.

 

1) 하나님의 모범적 행동레위기 9, 10장의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 사무엘하 6장의 웃사의 사건은 그 행동이 역사적 사건으로서 유일한 것인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사건으로서 그 행동이 모범적이라는 것이다.

 

2) 인간의 행동아브라함의 신앙 (15),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경고하는 모범 (고전10), 히브리서 11, 아담과 하와의 결혼제도이 어떻게 모범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두가지로 언급할 수 있다. 첫째, 일치는 상황적인 것이 아니라(not situational) 구성적인 것이다(structural). 둘째, 모범적인 기능은 하나님의 행동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반응이 그것을 모범으로 만드는 것이다.(18)

 

3) 그리스도의 모범적 행동그의 인격(2:5), 그의 사역(10:45, 20:28, 40일 금식)에서 비록 완전은 못돼도 우리는 우리의 차원, 우리의 상태에서 그분의 태도를 닮아가야 한다.

 

2. 하나님 말씀은 주관도 객관도 아닌 심령골수를 쪼갠다

 

구속사는 '역사' '과거' 를 강조하다 보니 개인생활의 아기자기한 면이 소홀히 된다고 한다. 신앙생활의 주체가 어디까지나 개인이니(교회공동체 생활의 일원이기는 하나) 여기에 강조해서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설교양상도 교회의 순수성, 오직 칭의, 오직 은혜, 개혁주의 기치 아래 오직 말씀만 강조하는가 하면 다른 면으로 개인의 신앙생활, 성령의 임하심, 성화와 인간책임을 강조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이런 양면성 문제가 구속사모범적 논쟁 때에는 '객관적' 이니 '주관적' 이니 하는 문제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홀버다는 이렇게 쓴다. 󰡒사람들은 '열정', '뭔가 실제적인 것' 을 요구한다. 이 요구는 제법 정당해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성경의 내용을 '하나님과 영혼' 이라는 주제로 환원시키는 일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다.

 

반면에 주관적인 설교는 그와는 반대로 이 진리들에 대한 인격적인 동화, 구속의 내적 실현, 내적 경험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모든 본문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적용이 모두고 유일한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 본문과 말씀을 강조해서 인간사와는 유리된 경우 밖에 있는 객관적인 것에 몰두하는 양상이 있다.

 

이런 양극상에 균형을 시도한 것이 󰡒결합󰡓을 해보려는 것이었다. 결합함으로써 상호보완적이 된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결합한다 해서 치유될 것은 아니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H. 스킬더교수는 이런 양극적인 딜레마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서 나온 것으로 파악한다. 어디 하나님 말씀이 나에게 관련없는, 그리고 주관적 적용을 필요로 하는 객관적 사실만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에게 말하여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개어 회개 아니면 완악성으로 이끈다. 요컨대 하나님 말씀은 준비되어 있는 그런 것으로 오로지 섬겨질  수 있고 그렇게 되어져야만 한다.

 

사실 그리스도는 자기와의 교제를 자기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연관시켜 놓았다. 그리스도는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많은 능력을 행하나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들을 경고하고 있다(7~21).그리고 송별사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14:15)고 말하고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 비교 14:24, 16:14~15, 12:3 )고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말하면서 그것이 나에게 오늘 행하도록 하는 것을 유리한 채 나의 구체적 기도와 일, 사고와 행위에서 이탈된다면 그것은 이상스러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H. 스킬더는 말하기를 그 모든 것은 전적으로 훈훈하지도 '영광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상층권의 별처럼 희소하고 차갑다고 한다. 우리는 언제나 지상에 살면서 나그네와 거주자로서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하나님 형상을 가진 자로, 왕국의 자녀로 믿음, 소망,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자들이다.

트림프 박사도 구속사론자의 일방성에 반대하여 구속사의 전진을 과대 평가하는 반면 교통에 대해서는 과소 평가하는 경향, 즉 그리스도 오심의 길을 예비함에 하나님 일에만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춘 반면에 성령의 사역도 구속사에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자인했다. 또한 트림프 교수는 메마른 구조주의, 즉 직선적 선으로 두드려 맞추기보다도 인간 편의 후패, 반복, 타락으로 둘러가는 것과 같은 끝없는 투쟁이 있는 역사임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진술했다.

 

3. 개인의 경건과 공동체적 관심

 

성경읽음이나 설교에서 일방적으로 개인의 신앙생활을 강조하는가 하면 다른 면으로는 사회생활, 유기적 관계정치, 경제 등를 강조하는 면을 듣게 된다. 이에 대해 H. 스킬더 교수는 개인의 중생 경험들이 개인의 사회책임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화란개혁교회의 '31주 교리문답' 에서 말씀전파와 공적증거는 말하는 자들 모두에게와 참된 신앙으로 복음의 약속을 믿는대로 그들 모든 죄가 사하여진 각 사람에게(allen en eeniegelijk) 전파된다면서 여기 청중은 믿든 믿지 않든 망라된 '모든 총체(als totaal)가 아니라 개인적 책임을 갖고 듣는 무리로 해석한다.

 

개인의 신앙생활은 교회 안에서의 삶이며 언약 공동체 안에서 나의 가정생활, 정치,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사회적 적응(implication)을 갖는 것이다. 또한 스킬더는 에스겔서 18장과 311~20절 해석에서 죄는 지으면서 과거의 의 때문에 구원받는다든지 자기 아버지의 경건 때문에 구원받게 된다는 것은 반대하지만 동시에 회개를 하는데 과거의 죄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상을 모두 배제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같이 가고 있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스킬더의 관점은 구속사적 안목을 넓힌 독보적 성경이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다시 말하면 그는 우리 개혁주의 구속사 이해에 사회학적 공동체적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Ⅴ. 미주 신학에 불붙은 구속사 개념

 

필자가 1987년도 1월 말에 미주를 방문하였을 때만 해도 󰡒개혁주의 학교에서조차도 구속사적 성경이해 문제를 강조는 하는 듯하나 그 이론적 관심과 체제는 발전되지 못하고 있었다󰡓(25)고 했는데 최근에는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즉 구속사적 방법을 진작시키고 있는 책이 이미 발간되고 있었다. 크레이다누스는 그의 학위논문인 'Sola Scriptura' 이후에 '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Grand Rapids : Eerdmans, 1988) 저술하였고 게머런 (Willem van Gemeren)'The Progress of Redemption' (Grand Rapids : Zondervan, 1988)(26을 썼다. 구속사적 성경 이해에 대한 논문을 쓴 사람도 있는데 미국 카버넌트 대학 교수인 크라벤담(K. Krabbandam)󰡒Hermeneutics and preaching󰡓(Phillipsburg : presbyterian and reformed, 1986)(27), 그리고 현재 캐나다 행글리에서 개혁교회 목사로 일하는 비서(J. Visser) 박사의 󰡒Redemptive Historical Preaching Revisited󰡓 (Hamilton : Senate of the Theological College of the Conadion Reformed Churches, 1989) 등이 나왔다. 그 넓은 대륙 어딘가에 이 주제에 관심을 가졌던 학도들이 많이 있다고 본다면 구속사 개념이 미주 신앙토양에 이미 불붙고 있다고 보아진다.

 

1. 크라벤담의 비평

 

크라벤담은 모범적 방법과 구속사적 방법 양자에 대해 그 일방성을 비평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성경을 일종의 모범들의 '미술관(picturegallery)'으로 보고 이것을 인간 상태와 생활환경에 맞추려고 한다. 그러니 이 방법은 본문을 도덕화, 심리화, 영해 또는 심지어 풍유화시킬 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것보다는 예화적으로, 종합적으로보다는 원자적으로 해석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도 모범적 방법에는 특이한 내용과 특이한 목적을 갖고 있는 특이한 입장의 교회사적 사건들이 설교에 성경본문과 같이 이용된다. 그리하여 성경계시의 유일성이 손상된다고 한다.

 

구속사적 방법은 두가지 주제, 즉 만사를 기독론 중심으로 보는 것과 그리스도를 역사의 중심으로 보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이런 구속사 입장에서 볼 때 본문이 일종의 창문이고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가 역사에 행진하는 국면들이며 사실들이 증거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 탓에 이 방법이 본문을 '교훈' 이 발사되는 로켓 발사대로 사용된다고 비유하기도 하며 상층권을 나는 비행기에는 파노라마의 장관이 펼쳐지지만 그것이 지상의 부요를 전달해 주지 못하니 이 방법은 궁극적으로 불임증이 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크라벤담은 모범적, 구속사적 방법을 비평한 뒤 자신의 방법이라고 하는 언약사적 (Covenant Historical) 방법을 제시한다. 언약적인 것은 역사적인 것의 기초 또는 종자가 되며 그 특징은 삼위일체적이며 그 목표는 세가지인데 중생, 칭의, 성화라고 한다.

 

크라벤담의 입장은 구속사적 방법이 전적으로 기독론 중심인 듯dl 매도하고 있는데, 물론 이 방법에 기독론적 요소가 주 원인이 되어 있는 것만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중심 내지 성령중심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H. 스킬더는 이 구속사적 방법을 󰡒하나님 중심적이며 그리스도적(Theocentrisch en Christologisch)으로 대치한다. 그리고 크라벤담은 중생, 칭의, 성화를 주제로 하고 목표로 삼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구속론자들이 어떤 주제로 한정짓는다든지 아니면 환원시킨다고 비방하는 그 자신이 이 비평을 받아야 할 처지가 아닌가? 이런 그의 도식은 구속사의 풍성 내지 본문을 강압하고 있다고 본다.

 

또 구속사를 설명함에 '상층에 나는 것(flyover)' '함께 나는 것(fly-by)'으로 비유하면서 미적 정관을 즐기는 상층권의 구속사는 무미 건조하다고 말하지만 구속사는 이들을 분리해서 생각할 것은 아니다... 항공로, 버스편, 철도편, 하늘과 바다며 펼쳐지는 평원들, 아름다운 도시들과 장관들, 그리고 사건들이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가는 것이다. 이 구속사적 이해는 하나님, 인간, 역사, 나 자신이 다함께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임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요셉 이야기에서 우리는 요셉 자신이 말한 하나님의 경륜을 안다(45:7~8).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야곱의 탄식과 눈물 또한 의외의 기쁜 소식(42:36, 43:6, 14 )이 있었다. 이렇게 비밀스런 하나님의 경륜에 가려진 채 역사의 희로애락이 함께 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구속사에 엮어지는 요소이다. 크라벤담이 언약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이는 구속사 연구에 풍성을 약속할 것이다.

 

2. G. 크레이다누스와 W. 반 게머런

 

크레이다누스가 그의 'Sola Scriptura'(1970)에서 밝힌 것은 구속론자들이나 모범론자들이 모두 '역사적 본문의 고유한 성격' 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탓으로 '역사적 본문과 역사적 사실을 부당하게 동일시함으로 해서' 구속론자들은 하나님의 원래 행동을 강조하려 했고 그 결과 구속사적 틀로 역사적인 본문들을 부자연스럽게 제한시켰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모범론자들도 인물들의 행동을 모범으로 찾아내려고 했다는 것이다.

 

크레이다누스가 생각하는 바는 본문이 나오게 된 경위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저자들이 입수할 수 있는 자료들을, 그 자료로 하여금 자기들의 수신인들에게 말하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선택하고, 엮고, 바꾸며, 또 정리했다는 것은 그저 자연스러울 따름이다. 그들이 만든 변화는 그들의 생각에 결코 자기들의 메시지의 권위나 신뢰 가능성을 위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 말은 크레이다누스는 본문의 속성을 선포, 곧 케리그마로 보고 저자가 교회형편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적응성이 있도록 하기 위해 변화를 시켰다는 뜻이겠다. 그러니 설교는 사실에서가 아니라 본문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를 더욱 심화시킨 책이 그의 '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1988) 이다. 여기서 그는 이 책 부제가 밝히듯이 '성경 문헌의 해석과 설교' 를 다루고 있다. 해석자(설교자)는 우선 성경문헌의 상이한 장르들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 예언, 지혜, , 복음 서신, 묵시는 물론이거니와 하부 형태로는 율법, , 애가, 비유, 이적 등이 많으며 이렇게 서로 다른 문학 장르와 형식에 따라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역사적 비평 방법, 자료 비평, 양식 비평, 편집 비평, 웅변적 비평, 성경신학적 비평, 정경론적 비평 같은 문학적 해석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 이해이며 신학적인 해석이 있다. 여기에 걸맞게 설교며 그 설교의 형식이며 적실성 문제를 다루고, 이야기, 예언서, 복음서, 서신서들에 대한 설교 지침들을 다루어 나가는 것이다.

 

설교의 적실성 문제에 관해서 크레이다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설교가들이 그 시대 청중들에게 향한 하나님 말씀과 동일, 적실한 방법으로 오늘날 전하기 원하다면 그 메시지를 그 갭(gap)을 넘어 현대의 역사적문화적 상황에 전달해주는 길밖에 다른 선택은 없다.

 

그런데 많은 설교가들이 그 갭(gap)을 부당한 방법, 즉 풍유화, 영해, 성경인물 모범화, 도덕화를 사용하는데(36 이런 과도한 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원 메시지(the original message)에 집중하는 길밖에 없다. 이렇게 할 때, 본문의 요소들과 관련은 있지만 원래 의도된 메시지와는 상관없는 온갖 종류의 실천적인 잡담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무슨 문제점들을 전달하려 했으며, 무슨 문제에 답하려 했으며, 전하려고 한 특별한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과정 속에 성경 본문에 관련된 역사, 문화처럼 시대적으로 불연적인 것과 시대를 초월해서 신실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 같은 연속성이 있다는 점들을 유의해야 한다(이 점에 대해서는 H. 스킬더가 이미 지적하였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서 설교자는 전하려는 메시지가 본문에 적실하게 되게 하기 위해 본문 배후의 문제 즉, 그 본문이 기록되었어야만 하는 이유와 목적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적실성의 반이 이루어지고 그 다음 반은 현재 청중들에게서 순수한 유사점 (analogy)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크레이다누스가 비록 본문과 사건(사실)을 이간시키는 이상스러운 전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강조하는 점들과 성경의 여러 장르며 형식을 바르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 여러 비평양식을 주의 깊은 마음으로 살피면서 최대한 이용한다는 것, 본문의 원래 의미, 불연속성과 연속성 문제들을 다루었는데 이는 구속사적 방법에 풍성을 주는데 기여하고 있다 하겠다.

 

반 게머런 역시 그의 책 'The Progress of Redemption' 의 서론에서 같은 논조로 설명해준다. 분석(역사적 문법적 해석), 종합(삼중적 접근: 문체적 문맥, 정경적 문맥, 구속사적 문맥), 평가와 적용(기독론적, 종말론적 초점)이 그것이다.

 

구속사적 방법에 대해서 그가 말하는 바는 이 방법은 성경의 부분들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연결하는 구조(framework)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그것 역시 많은 주제들을 하나의 모자이크로 나타내 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구속사 연구는 역사, 문화, 문학이며 신앙 공동체의 원래 문맥에서 주어진 본문에 세심한 주의를 함으로써 인간의 의사전달이며 문명의 회로들을 존경한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첫 오심의 성취에만 제한한다면 구약과 신약을 대조하는 경향이 되기 쉬우니 역사의 목표인 만물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야 구약과 신약이 동시에 소망에 대한 증거로 함께 엮어진다고 한다.

 

Ⅵ. 결어적인 전망

 

이 모범적구속사적 논쟁이 이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화란에서 시작될 때에는 전체와 유리된 채 원자적으로 해석하는 모범주의에 반대하여 구속론자의 반격이었다고 하면, 종전 후와 특히 이 논쟁이 미주신학에 접목되면서부터는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하겠다. 즉 성경에서 '모범' 의 타당성을 인정하는가 하면 구속론자들이 성경의 구속사의 주된 흐름에 치중하다보면 본문 자체를 무시하는 듯한 경향을 염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문맥이 본문을 강압해 버리는 듯한 태도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것에 대한 교정을 두 개의 깔때기(funnel) 기능에 비유한 비서 (J. Visser )의 말은 적당하다고 본다. 󰡒문맥의 넓은 전개는 본문으로 협소화시켜야만 하고 그리고 본문의 협소화 전개는 성취와 적용의 넓은 분야로 열려져야만 한다 (The wide opening of the context must narrow down to the text and the narrow opening of the text must open up to the broad expanse of fulfilment and application).󰡓(40)

 

그러나 이러한 구속사적 접근에 수정과 보완이 역사적으로 논의되었다해서 성경이해에 기본적인 구속사적 틀이 부인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부요하게 만들고 있다.하겠다. 우선 구속사의 의미를 더욱 풍성히 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성경계시를 어떤 신학적 중심 테마로 조명해 볼 수 있느냐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 어떤 이는 그것이 '약속(promise)' 또는 '계약(covenant)' 또는 '왕국(kingdom)' 또는 '임마누엘 모티프' 등이라고 한다. 구속사 연구에서는 그것들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신중히 고려해 참고할 때에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전체적인 틀 구성에 부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예컨대 언약(covenant) 개념이 세속의 종주권 계약이냐 쌍무적 계약이냐, 또는 그것이 조건적 언약이냐 아니면 무조건적 언약이냐를 굳이 구별하여 난처하게 되기보다는 유연하게 구별하여(fluid distinction)(41) 하나님과 인간의 교통의 의미를 더 풍성히 하는 것으로 봄이 좋겠다. 교의신학자 캄피어스(J. Kamphuis) 교수는 하나님과의 언약 생활을 은혜에서 사는 것, 순종에서 사는 것, 이적에서 사는 것, 기도에서 사는 것, 교제 가운데서 사는 것 등 다섯 요소로 들고 있다.

 

이런 것들에 주의할 때 구속사가 객관주의나 주관주의의 함정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하나님그리스도성령의 구속사적인 성경이해에 중점을 두면서도 인간적인 면에 이해를 더하게 될 것이다. 구속사가 문맥 전체를 강조하다.보니 개체 본문에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염려를 한다. 󰡒성경의 뜻을 알려면 계시 전체를 따라서 각 부분의 특수한 뜻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속사적 접근은 본문의 언어학적․고고학적․문화적 빛을 제외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요즈음 유가릿 또는 에브라 토판문헌들이 발견됨으로써 시편에 대한 많은 언어학적 조명을 받았다. 또한 다윗이 여부스족 예루살렘성을 정복할 때에 '수구'를 이용했다고 하지만 고고학적 발굴과 근동 셈족 언어를 비교함으로써 '쇠갈고리' 를 이용해서 성을 공략했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됐다.

 

또 한가지 예를 든다면 고린도전서 1529절의 세례를 받느뇨가 오히려 사전의 도움을 받을 때에 ~을 위해 마음을 쓰라, 신경을 쓰라가 되어 그 전후문맥이 더욱 의미가 통한다고 한다. 그러니 앞으로 이런 면에 많은 연구가 기대되는 것이다.

 

말씀을 맡은 설교자 앞에는 언제나 말씀의 본문자체가 있고 이것을 바르게 분별해서 전해야 하는 것이 모두의 일일 것이다. 여기에 언어 문화적, 역사적 연구에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구속사적 성경해석과 설교에 부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논의되어 온 구약과 신약의 연계문제예컨대 율법과 복음, 약속과 성취, 표징과 실체같은 것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그 결과의 성취가 필요할 것이다. 구속사는 더 밝아진 진리라 해서 신약만을 존중히 여긴다든지 아니면 신약의 입장에서 구약을 보는 입장을 피하고 구약은 구약으로 그 시대적 의미를 가지면서도 점진적으로 신약의 의미가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왈키(Walke) 교수는 시편연구의 네가지 단계를 말하는데, 원래의 시인이 의도한 의미첫 성전 시대의 초기 수집에서의 의미완성된 구약정경에서의 의미약성경이 첨가됨으로써 완성된 성경에서의 최종적 의미를 말하면서 󰡒본문의 의도는 정경의 범위가 확립되어 가면서 더 깊어져 가고 더 명료해져 간다. 구속자체가 성장해 가는 정경적 문학의 일부가 되어가면서 구속의 의미가 점진적으로(더 깊고 명료하게 인식되어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한다. 그의 정경과정해석법 (canonical process interpretation)이 과연 정해진 연대단계로 확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제기는 된다 할지라도 계시 초기의 글에 의도된 것이 후대의 글에서 '유전적이고 유기적인 통일성 (genetic and organic connection )'을 강조하는 점은 구속사 연구에 부분적 유기적 세속관이 전체의 통일에 조화를 기한다는 의미에서 좋다.

 

끝으로 부언하고 싶은 것은 구속사 해석은 빈틈없는 ‘체계’ 라고 하기보다는 ‘여유’에 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을 전달함에 어떤 철근 같은 규율에 얽매이기보다는 주석에서 용솟음치는 원리를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듣는 청중에게 신앙과 순종, 봉사를 유발시키려 할 때 그때에 맞는 적용을 하는 것이다. 이제는 실제적인 본문적용을 보여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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