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일주일에 최소한 3번 이상의 완전한 설교를 해야 한다. 일년이면 156회의 설교를, 10년이면 1560회이고, 3,40년 목회의 기간동안 5,000회 이상의 설교를 해야 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국 교회 성도들처럼 설교를 많이 듣고 있는 성도들이 없다는 말도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설교의 홍수 속에서도 한국 교회 성도들의 삶은 그 다지 큰 변화가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왜 그럴까? 문제가 무엇일까? 어쩌면 설교의 목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까? 성도들이 많은 설교를 듣지만 그 설교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혹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이런 성도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를 도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들의 신앙 생활을 지탱해 주는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런 강단의 말씀 선포의 약화로 인하여 한국 교회는 누가 크게 염려하듯 기복 신앙이 되어 가고 습관적이며 형식적인 종교 생활로 타락해 가는 것은 아닐까?
데이빗 스미드(David Smith)는 말하기를 “설교는 행동으로 결론지어 주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결국 설교가 무엇인가를 성취시켜야 하는 것이라면, 설교는 정말 그 목적이 분명해야 하며, 설교자는 이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나는 왜 이 설교를 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하는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교회 부흥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목사의 설교에 있다.
몇 해전 ‘목회와 신학’라는 잡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설교를 듣고 교회를 나오는 사람이 38%라는 통계가 나왔다. 그렇다면 나머지 무엇 때문에 교회를 나오며 교회에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이 목적에서 벗어 난 성도들의 그렇게 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목사의 설교가 그들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며 삶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만일 그 답이 맞는다면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 추궁 들어야 하는 일들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눅12:48). 위에서 말한 38%의 통계 숫자는 단적으로 사람들이 교회를 선택하는데 설교가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설교가 좋은 설교이며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설교는 어떤 설교인가?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설교가 있다. 간혹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설교 가운데 복음적이 아닌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에 설교라고 말할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진리 안에서 성도들이 듣기 원하는 설교는 어떤 설교일까?
설교의 내용 면에서 꼭 해야 하는 설교
기독교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의 설교는 복음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다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 모든 악의 세력을 이기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이며, 개인들과 사회와 나라들, 그리고 온 우주 속에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주실 수 있음을 선포하는 복된 소식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 용서의 복음, 부활의 복음, 새 생명의 복음을 그 중심으로 한다. 기독교의 설교는 이러한 복음의 선포이다. 어떤 내용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언제나 설교는 이 복음과 만나야 하며, 이 복음의 소식이 그 골격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설교는 예수의 부활과 함께 탄생되었으며, 초기의 설교자들은 예수의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고, 그들의 생명을 걸었다. 그래서 리챠드 리셔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오늘의 설교자가 계속해서“설교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기독교 설교의 원형은 케리그마였다고 말한 다드(C. H. Dodd)의 주장과 같이 현대 설교 역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생명의 소식이 그 중심을 이루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이 초대 교회에 “복된 소식”(good news)이었던 것처럼 설교는 복된 소식의 선포여야 하며, 절망과 삶의 문제들에 대한 치유의 복음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 교회에서 흔히 이해되는 “복된 소식”이라는 개념에는 많은 오해와 오류가 혼란스럽게 뒤섞인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 “복된 소식”은 자기들의 인간적인 욕구를 채워 주는 하나님의 응답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그렇다. “복된 소식”의 진수가 주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구원의 부활임에도 불구하고 “복된 소식”의 부가 가치적인 요소들, 다시 말하면 신유, 치유, 기복, 성공 같은 것들이 감히 “복된 소식”의 자리에 앉아 “복된 소식”의 참 뜻과 “복된 소식”의 능력을 흐리게 하여 “복된 소식”으로 인한 구원의 기쁨을 희석시켜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설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설교에는 비 복음적인 요소가 많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율법도 설교되어야 하고 축복도 설교되어야 하며 치유와 인생살이의 지침들도 설교되어야 하지만, 율법적인 설교는 강압적인 요소가 설교의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어서 성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복음의 희열과 위로, 감격을 가지고 가기보다는 부담감과 반발심을 가지고 돌아간다면 문제가 많은 사역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축복의 설교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한 구원의 기쁨보다는 자기들의 세속적인 욕구와 소망을 찾게 하는 요구를 수용하여 설교를 하는 이유로 설교의 가장 핵심인 “복된 소식”이 사라지고 말았다면 그것은 이미 설교가 아니라 세상살이를 가르치는 處世訓에 불과할 것이다.
기독교의 설교는 기본적으로 복음적이며, 복음의 골격을 가져야 한다. 이교 문화의 첨단을 걷고 있었던 로마를 변화시켰던 것은 복음이었고, 로마가 복음을 들었기에 그곳은 변화될 수 있었다. 21세기에도 하나님의 복음은 전해져야 하며, 변화하는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도 복음이다. 그러므로 21세기에 지향하는 설교 신학은 어떻게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에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하며, 설교자들이 복음의 열정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성령님의 감동이 있는 설교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칼빈은 성령 님의 도우심과 그 역사 하심을 강조하면서 "성령님께서 설교자의 앞에 놓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이 그 가르침의 멍에가 될 때에만 하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유용한 능력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칼빈에 따르면 우리의 설교자들은 철저하게 성령님의 가르침이 동반되도록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란 지극히 제한된 것임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모두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님의 동행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감각적인 능력이 얼마나 약한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이 계속해서 우리의 감각 기능과 교제하지 않는 한 눈과 귀는 본연의 기능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고 그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모든 능력은 결코 설교자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 님의 조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능력"이어야 함을 말한다. 거기에 더하여 성령님의 역사에 의하여 우리의 귀가 뚫어지고 눈이 열려져야 우리들이 주의 말씀을 정확하게 듣고 이해 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인간의 오성이 지극히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 인간의 감각적이고 지성적인 기능이 최상의 것처럼 여기고 만족하고 살아가는 인간들이지만 사실은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칼빈의 다음의 주장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감각적인 능력이 얼마나 약한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이 계속해서 우리의 감각 기능과 교제하지 않는 한 눈과 귀는 본연의 기능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으며, 그의 도움이 없이는 주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을 전혀 이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주장들을 종합하면서 오늘의 한국 교회 설교자들이 전해야 할 본문을 앞에 놓고 그 말씀의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얼마나 절박하게 성령님의 도움을 간구하는지에 대한 자성적인 관찰을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이 자신의 말을 도구로 삼아 운반해야 할 본문 말씀을 앞에 두고 취한 단계는 다음의 세 부류로 분류된다.
하나의 부류는 본문을 읽고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본문의 뜻으로 정해 버리는 지극히 경망스러운 설교자들이다. 이들은 때로는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하여 거기에 맞는 본문을 찾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부류의 설교자들에게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말씀의 뜻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필요성마저 느끼지 아니한다.
둘째의 부류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주석을 겸한 성경 한 권으로 말씀의 뜻을 채우려는 단순한 노력형의 설교자들이다. 그리고 더 이상의 석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대충 넘기는 경우이다.
셋째의 부류에 속한 사람은 설교의 이론을 충실히 따르는 형태이다. 먼저 칼빈의 말대로 성령님의 동행을 간구하고 자신의 오감을 깨우쳐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한다. 그리고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신이 찾아 볼 수 있는 각각 달리 번역된 성경과 원어 사전과 성서 사전을 비롯한 각종 사전류를 펴고 오늘의 말씀의 뜻을 찾기에 골몰한다. 그리고 다수의 성경 주석을 가지고 남은 어떻게 이 말씀을 해석했는지를 찾아 땀을 흘린다. 여기에서 미래의 설교자들이 가야 할 바른 길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점검하게 된다.
. 말씀의 해석이 분명한 설교
설교자에게 가장 무거운 부담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알아 성도들에게 전해 주는 이일 것이다. 설교자가 본문을 먼저 이해하는 과정은 하나님이 무엇을 이 말씀에서 의도하고 계시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출발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의 사역을 수행케 했던 제일의 주된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내가 율법을 모세가 쓴 것으로, 시편을 다윗과 다른 선지자들의 것으로 여기며, 이런 식으로 모든 성경에 담겨진 것을 파악한다면, 이 사역은 어떻게 될까요? 나는 말씀의 사역이 유지되어야 한다, 또는 유지되어서는 안된다는 식의 토론을 벌일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나는 죽을 운명의 사역 자들에 대해 반박하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율법과, 그리고 성경에 들어 있는 모든 교리에 권위를 부여하신다면 이러한 핑계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는 말이 교회에서 흔히 쓰여지는 용어라 하여 결코 공연한 소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 이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청할 것을 강요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오만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새로운 법률이나 신조 등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라고 하여 성경의 권위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며 그의 설교가 그것을 바탕으로 선포되기 때문에 동등한 권위가 있음을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 해석과 강해에 주력했고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기록된 말씀에 대한 진실 되고 순수한 주해”와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의 생활에 적용시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의 할 일 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칼빈의 설교 관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강단의 행태와 얼마나 상치되고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개혁자의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임무에 대한 깨우침에 귀기울여 실천해야 할 것이다.
칼빈은 시편 119편 설교를 시작하며 “나는 하나님께서 취하신 방법에 맞춰 본문의 진정한 흐름을 그대로 따르려 할 것입니다. 나는 권면을 지루하게 고집하지 않고 다만 다윗의 시(흔히 말하는 대로)를 사람들이 소화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는 것으로 만족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각 8절을 한편의 설교로 완성시킬 생각을 했었고 또 가장 배우지 못한 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다만 본문의 단순한 핵심을 밝히는 것으로 그치려 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구. 신약 성경은 주님이 자신의 뜻을 표명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는 그의 설교를 이용해 자기 고유의 사상을 표현할 권리란 없다는 것을 믿었다. 칼빈은 그의 설교 집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적으로 말하였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도록 하자. 즉 경솔하게 그 자신을 신뢰하거나 자기 자신의 업적을 미봉책으로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진리에 붙들리도록 하라. 그는 마땅히 그의 교리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는 설교자는 그의 설교에 있어서 성경 본문의 지배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말하기를 “성경을 읽는 사람이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어리석은 사색을 구한다든지 그들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 개조해 보려고 교회로 나온다면 그들은 복음을 더럽히는 꼴이 될 것이다”라고도 하였다. 칼빈은 확신과 겸손을 진실히 갖고 성경 본문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이 우리 마음속에 말하여질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귀담아 들으려 했고 들은 바를 그대로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성경 본문 해석에는 언제나 인간을 통하여 그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절대로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그의 성경관에 입각한 그의 설교는 언제나 무겁고 심각하고 열정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설교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설교자가 말씀 앞에 겸손한 설교.
우리는 하나님께 하듯 성경을 똑같이 존중해야 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보려고 할 때에 듣고 읽은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교만을 부려서는 곤란하다. 그리고 우리는 경외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야 한다.
칼빈은 이상과 같은 경외 심을 가지고 말씀을 대한 설교자는 자연적으로 성령 님의 계시에 자기를 맡기고 그분이 말씀의 해석 자가 되어 주기를 간구하는 겸손한 자세가 있게 된다고 했다. 결코 자신의 지식과 관찰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참 해석 자는 말씀 앞에 겸손한 자들에게 보내진 성령님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설교
설교가 하나님 말씀의 전달 개념을 쉽게 무너뜨리는 것은 바로 설교의 사역 장에 설교자가 홀로 서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자신의 신앙적인 경험이나 지식을 펼치는데 급급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어떤 신앙 수필을 낭독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강의로 행하여 질 수 있는 행위들이지 결코 설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교회는 강의와 신앙 간증을 하나님 말씀의 전달인 설교 사역과 혼돈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설교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들에게 운반하는 사역이다. 그리고 이 말씀 전달의 사역은 어떤 경우도 설교자라는 한 인간의 단독으로 이룩될 수 없다는 것이 설교 학의 이론이며 기독교 설교 역사의 기록이다. 설교는 듣는 사람으로부터 공감을 받아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에 성령님에 의하여 감동이 생기고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주목적이다. 이러한 감동과 변화는 설교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으며 성 님의 감동과 감화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칼빈은 성령 님께서 설교자와 동행하여 주시고 회중들의 마음속에서 활동하지 않는다면 이상과 같은 감동과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 설교 사역에 있어서 성령님의 가르침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밖으로 울려퍼지는 설교는 공허하고 듣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께서 말씀을 받아 드리도록 회중들의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한, 하나님의 말씀도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칼빈은 "놀랍고 특별한 힘을 소유한 성령님께서 들을 수 있는 귀와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주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성령님의 동반이 설교 사역에 있어져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된다. 즉 인간인 설교자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의 말은 어떤 형태로든지 외칠 수 있으나 `듣는 사람들의 귀와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조정할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깊은 주의를 요한다. 이것은 설교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성령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그 분의 동반이 없이는 조금의 효력도 발생시킬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성 님의 동반에 대한 증거다. 대부분의 설교자와 회중이 설교의 현장에서 찾는 성령님의 역사는 즉각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어떤 신비한 체험이나 즉각적인 감동을 요구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의 동반이라는 개념을 설교를 듣는 것과 같은 시간대에 일어 나는 어떤 변화라는 동시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성령님의 없었다고 생각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질 급한 인간 사고의 결과이지 결코 그것이 사실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칼빈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식의 가르침을 보여 주시는데 먼저 주님은 사랑의 입술로 우리의 귀에 들려주신다. 그리고 다음으로 주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내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이것을 주님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에 동시에 하거나 아니면 따로 따로 행한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을 이해하는 설교
전통적으로 설교에 있어서 청중은 수동적으로 그저 받아들이는 존재(passive receiver)로 이해되어져 왔다. 설교자가 준비한 말씀을 잘 전달해 주면 청중들은 그 말씀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말씀이 전달되어야 하는 메시지의 최종적인 종착지이며 그들의 역할은 단지 귀를 열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그러나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단순한 청취자가 아니라 설교자와 함께 설교의 여정을 함께 가는 동반자(partner)이다. 설교를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the event of encounter)으로 이해해 볼 때, 그리고 설교를 통해 회중들을 보다 강한 믿음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보다 깊은 헌신을 불러 일으켜야 하는 하나님의 사건으로 이해할 때에 우리는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청중 이해에 변화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현대 설교학의 중심 되는 관심의 하나는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대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청중들이 수동적인 수령자들로 여겨졌다면 설교자들은 청중들보다는 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으며 말씀에 대한 모든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원천(source)이었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발전과 함께 현대 설교 학자들은 설교자와 청중들의 위치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다.
설교자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존재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청중들의 자리인 믿음의 공동체로부터 나온 전달자이며 청중들과 같은 지체이며 그들을 위해서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가지고 회중 석으로부터 올라와 서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설교자도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존재이다. 반면 청중들은 설교자와 함께 말씀의 여정을 함께 가는 존재다. 그들은 그 여정을 함께 해 가면서 서로 돕는 존재들이며, 서로 영향을 주는 자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설교는 서로 작용하는 공동 작업(interactive preaching)이 되어야 한다.
21세기에 고려되어야 할 사항의 하나로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성에 대한 재 이해를 들 수 있다. 특별히 권위적인 설교를 지향하고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설교를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여정을 함께 가는 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피동적인 청중으로서가 아니라 역동적인 존재로 설교자의 권위로 말씀과 그 결론을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설교가 아니라 그 말씀의 의미를 스스로 깨닫게 하며 그 메시지의 결론에 함께 도달해 가는 청중의 참여가 있는 말씀 사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로서 설교
종교 개혁자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Deus loquens)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Preaching is the Word of God)." 이러한 개혁자들의 주장은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설교는 오늘의 삶속에 주시는 그분의 계시의 사건임을 새롭게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God who speaks)“이시라는 고백으로부터 설교 사역은 시작된다. 또한 설교자가 이 사실을 확실하게 고백할 때에 그는 온전한 설교자가 되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바른 설교자는 ”거룩한 말씀의 전달이라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게 되며 설교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청중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고 하나님의 뜻 앞에서 겸허하게 무릎을 꿇게 할 것인지에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설교자들을 통해서 과거에도 계속해서 말씀해 오신 하나님께서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그 말씀 사역을 계속하고 계심을 고백하는 설교자는 이 말씀이 바로 들려질 수 있기 위하여 시대와 삶의 자리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아니할 것이다.
문화 사회적인 변화를 포함해서 청중들의 의식과 삶의 정황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설교자는 말씀의 역동성을 기대할 수 없으며 청중들의 삶과의 관련성(relevance)이 없는 설교는 허공에 맴돌다 사라지는 말씀이 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그들의 삶의 연관성이 없고 의미를 주지 못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성장하는 교회의 설교들은 청중들의 삶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으며(relevant) 깊은 의미를 부여해 주는 말씀이었고(meaningful) 또한 흥미를 유발시켜 주는 말씀(interesting)이 있다.
설교는 사람의 말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키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는 설교자는 자신의 준비에 결코 등한히 해서는 안된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하여 기도와 묵상 말씀 연구도 등한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그가 준비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이 놀라운 신비 앞에서 그는 성령 님을 깊이 의지해야 한다. 그것은 성령님은 말씀 사역의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을 주관하시며 그 성패와 효율성(effectiveness)을 지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는 설교자는 마치 일상의 식사를 드시고 축사하실 때 성찬이 되게 했던 엠마오 어느 집에서의 기적을 늘 가슴속에 열망하는 존재들이다.
성경이 중심이 되는 설교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이요 선포라고 이해할 때 본문이 중심이 되고 본문이 말씀하도록 하는 설교여야 한다. 그 동안 한국 교회의 설교는 너무나 인위적인 요소로 가득 찼고 성경이 말하게 하는 설교가 아니라 설교자가 말하고 성경은 그것을 증명하는 자료(proof-text)로 삼는 누를 자주 범하고는 했다. 그것은 중세 교회가 범했던 오류였고 그러한 오류 가운데 사로잡혀 있던 교회는 긴 말씀의 암흑의 시대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에서 종교 개혁자들이 내 세운 기치도 “오직 성경(말씀)으로!”였으며, 루터 같은 종교 개혁자는 “말씀이 말씀되게 하라”는 기치를 내세웠던 것이다.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라는 슬로간은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의 외침의 중심을 이루었다. 칼빈이나 쯔윙글리, 루터와 같은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설교이기 때문이다”라는 고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을 수천년전에 쓰여진 기독교의 경전이기 때문에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설교의 영광을 구가하기 위해서 한국 교회 설교자들에게 반드시 들려져야 할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성경이 말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당위성을 위해서 성경을 새롭게 읽어야 할 것이며 자신의 말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표현하는 훈련을 쌓아야 할 것이며 바른 설교 신학을 세워 가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동안 주제 설교 혹은 제목 설교와 같은 설교 스타일에 익숙했던 초기 설교 전통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게 하는 설교로 구성하는데 실패해 왔으며 이러한 강단에서의 실패는 오늘날의 설교에 역기능적인 요소들이 많이 자아내게 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작금에 들어서 이러한 한국 교회 강단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성경이 말씀하게 하는 설교의 본래적인 모습을 되찾으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바른 말씀 선포 신학은 강단의 권위를 바로 세울 수 있게 될 것이며--인간 설교자의 권위로서가 아니라 성경의 권위로서--권위를 거부하는 포스트 모던 시대에서 바른 말씀의 권위를 세워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을 주는 설교
설교에서의 은혜란 깨달음을 말하기도 한다. 진리를 깨닫고 삶의 질을 깨닫고, 잘 잘못을 깨닫게 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 그런데 목사가 성도들에게 신임을 받고 존경을 받을 대에는 이 설교가 대단히 효과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오히려 비웃음과 조롱을 받게 될 것이다.
성도들을 깨우치기 위한 설교 가운데 목사가 크게 실수하는 부분들이 있다. 목사의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성도들을 깨우치려는 경우가 그렇고, 목사가 의도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암시적으로 성도들을 교훈하려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깨우침은 진리에 대한 깨우침이 아닐 수가 있어서 성도들을 시험 들게 하거나 강력한 거부감을 가지게 할 우려가 있다. 예를 들면 성전 건축을 위하여 목사는 성도들에게 성전 건축의 의미와 그에 따르는 축복을 강조한다. 이런 유형의 설교와 부흥 집회는 과거 60-70년대에는 흔히 있었던 일이고 응당 있어야 하는 성전 건축을 위한 절차 였다. 그런 집회의 현장에서 보면 성도의 제일된 의무는 성전 건축이며 성전 건축을 위해 헌신만 하면 대박이 터지는 것처럼 강조되곤 했다. 이런 목사의 강요와 교회 분위기에 휘말려 어떤 청년은 평생 해도 다 못할 성전 건축을 작정했고 어떤 가난한 집사는 소위 그 믿음으로 감당할 수 없는 헌금을 작정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그 작정 헌금으로 인해 시험에 들기도 했다. 그러나 작금에 와서는 그런 구태의연한 방법의 헌금 강요가 먹히지 않는다.
성전 건축의 필요성을 성도들이 깨달아 스스로 헌신하도록 말씀으로 깨우치고 감동을 주지 못하면 결단코 성전 건축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비단 성전 건축 뿐 아니라 교회 생활의 전반에 걸친 여러 일들이 모두 말씀에 의한 깨우침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매우 쉽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목사의 신령한 능력과 해박한 말씀의 해석과 감동적인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큰 일을 하게 하는 힘이 있을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스스로 자원하여 헌신하게 하는 설교를 좋아한다.
삶의 지침을 제시하는 설교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에서 특별한 어떤 메시지를 얻고자 하는 경우가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든지 마음에 와 닫는 삶의 지침을 듣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일에 대한 결단이 필요할 때에 그러하고 심각한 어려움이 있을 때에도 그렇다. 이럴 경우에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에서 어떤 하나님의 지침을 얻고자 한다. 그런데 그들이 바라는 지침이란 대개의 경우에 자기들의 원하는 것을 확답 받기 위한 경우가 많다. 만일 그들이 바라는 말씀을 목사가 전하지 못한다면 그 설교에서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답을 얻는다면 설교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목사는 그런 이기적이며 편향적인 성도의 욕구에 편승해서는 안된다. 듣는 성도들이 은혜를 받던 못 받던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이기주의에 의해 스스로 설정된 인생의 목표가 아닌 하나님의 바른 교훈을 듣고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힘을 줄 수 있는 설교를 해야 한다. 성도들은 평소에는 그렇지 않지만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을 강력히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믿고자 하는 신뢰 심은 하나님의 어떤 형상이 아니라 확신과 기쁨과 만족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대개의 경우에 설교를 통해 얻고자 한다. 이런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성도가 목사의 설교에서 평생의 삶의 지침을 얻는 말씀을 얻었다면 그 말씀을 붙잡고 살아 갈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전한 목사를 잊지 못할 것이다. 나도 1964년 7월에 시골 어느 교회에서 나를 사랑해 주시던 믿음의 어머니로부터 벧후 1:5-8절의 말씀에서 은혜를 받았고 그 때 그 시간을 잊지 못하며 그 은혜를 전해 주신 그 분을 평생 은인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문제의 해답을 주는 설교
사람은 언제나 수없이 많은 문제를 만나고 그 문제를 풀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같다. 문제를 잘 풀어 가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고 잘못 풀면 인생을 실패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이 인생살이의 많은 문제들에서 정확하고 확실한 해답을 찾지 못하여 시행착오를 하고 잘못해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했는지 모른다. 그것은 누군가 바른 충고나 말씀을 전해 주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생과 목회 생활의 많은 경험을 가지고 충고를 해주어도 나의 욕심과 교만과 착각 때문에 바른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자기 고집대로 하다가 실패를 한 경우가 참으로 많이 있었다. 이럴 때에 나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은 내가 전적으로 신임하고 믿을 만한 인생의 스승이였다.
우리에게는 그런 분이 계신다.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는 주님의 말씀은 주님이 하신 말씀으로만 듣고 나에게 주신 삶의 지침이요 문제의 해답이 됨을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보험에 들지 않은 차를 운전하여 성도들을 집에 데려다 주던 우리아들이 차 사고를 냈다. 검사인 우리 교회 집사가 그들이 요구하는 거액의 보상금을 주고 합의를 하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겨우 3주의 진단이 나왔고 사고는 그의 과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 3년여를 고통 당하고 민 형사상의 재판을 통해 그들이 요구하는 금액 이외에 더 많은 금전적인 손해를 보고 말았다.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내게서 떠나지 않는 주님의 말씀이 있었다. 마 5:39-42절의 말씀인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 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라는 말씀이다.
특히 42절의 말씀인 “또 너를 송사 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의 말씀은 나의 심장을 뚫고 나의 핏속에 용해되어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씀으로 깊이 내 심장에 박혔다. 그와 그들이 우리 차에 보험이 없음을 알고 온갖 못된 짓거리를 하며 무리한 요구를 했다.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셨다. 들어주되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하라고 하셨다. 마 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 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많은 물질적 정신적인 손해를 보았으며 우리 아들은 전과를 가지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 보다 더 큰 손실이 있었다. 그들은 목사와 송사를 하면서 얼마나 목사를 욕했을까? 그러면서 하나님을 ------하나님의 뜻이면 그도 주님을 영접해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내가 주님과 그를 얼마나 멀리 갈라놓았을까? 성도들이 늘 만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다면 그는 정말 훌륭한 목사일 것이다. 성도들은 그런 목사의 설교를 듣기 원한다.
마음을 너그럽게 해 주는 설교
마음을 너그럽게 해 줄 수 있는 설교를 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타인에게 대한 노여움과 분노를 가릴 때가 많다. 그런 분노를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용서하고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런 이중적인 사고 속에서 고민하면서도 타인을 용서할 만한 마음이 여유와 너그러움이 없어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원망과 노여움의 노예가 되어 사는 때가 많이 있다. 그럴 때에 목사의 설교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되고 모든 분노를 잠재우고 어떤 사람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면 그는 정말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도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마음을 기질 수 있고 그런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알고 설교를 해야 한다. 주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는 능력 잇는 설교를 하도록 하라.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잇노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운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고 원수도 사랑할 수 있으며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면 그 목사의 설교를 평생들을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삶의 여유를 주는 설교, 인내와 관용과 사랑을 가슴 속 깊이에서 울어 나게 해 주는 말씀의 은혜, 마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찾아 와 주셔서 인간의 온갖 오욕을 씻어 내리시고 청순하고 거룩한 마음을 가지게 하므로 내가 주님과 같이 변화될 수 있기를 성도들은 바란다. 설교를 들으면서 가져서는 안되는 마음을 버리고, 자기의 잘못을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회개하게 하는 말씀의 은총을 기대한다. 그것은 마치 사마리아 수가 성의 물긷는 여인에게서 볼 수 있었던 놀라운 은혜인 것이다.
매번 설교하는 설교에서 이런 은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러나 평생 한 번만이라도 이런 은혜를 받는다면 그 성도는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해준 목사와 그 설교를 잊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한 달에 한 번 분기에 한 번 만이라도 이런 설교를 할 수 있다면 그 교회는 그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 온 성도로 초만원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신 데 그 말씀이 목사의 입을 통해 전해질 때에 왜 그 능력을 상실하는 것일까? 오로지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가진 완악하고 목이 곧은 이유만일까?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하는 설교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피하지 못하는 유혹이 몇 가지 있다.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자기 과시의 유혹, 세상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미화하려는 지식 자랑의 유혹, 자기의 생각과 경험을 말씀으로 꾸며 전하는 착각 그리고 누구에게도 듣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어떤 놀랍고 신기한 것을 말하고자 하는 유혹들이 있다.
이런 유혹을 알지 못하고 그 함정에 빠지게 되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의 위치에서 떠난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새롭고 놀라운 어떤 것을 전하겠다는 유혹을 버리라. 성도들이 바라는 새로운 것은 성경에 없는 새로운 소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늘 듣고 배우고 익히 잘 알고 있는 말씀에서부터 새로운 말씀의 힘이다. 베드로의 고백 가운데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이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나 잘 알며 우리들의 신앙 고백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이 새로운 말씀으로 성도들의 심령을 강타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내가 아는 권사님이 계시다. 아주 옛날에 우리 교회를 나오시던 권사님이신데 시골의 자그마한 교회를 다닐 적에 산 넘어 교회의 부흥 집회를 참석하셨다고 한다. 집회를 참석하였을 때는 별로 큰 은혜를 받은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권사님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체험했다. 그 말씀은 처음 듣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가 되신다는 늘하는 신앙 고백의 말씀이셨다. 그 말씀이 권사님의 심령을 아주 강력하게 떨어졌다. 권사님은 그 자리에서 쓸어져 하나님이 자신의 주가 되심에 대하여 울면서 감사하고 그 말씀을 듣기만 하였지 그 말씀이 주는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았던 믿음의 생활을 크게 회개했다. 그리고 평생 그 말씀에 붙들린바 되어 믿음의 생활을 너무 잘하셨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시험에 드는 일이 없고 살아 계신 주님 앞에서 경거 망동한 일을 하지 않았으며 거룩하고 깨끗한 믿음의 생활을 하셨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찾 와 설교를 들으면서 그렇게 자신을 새롭게 해줄 말씀을 찾아 헤메는 것일까? 목사는 많고 그 목사들이 일주일 동안 쏟아 내는 설교는 수를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의 성도들은 언제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허덕이듯이 말씀의 은혜를 찾아 헤메인다. 그러나 이제는 상당히 많은 성도들은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이웃 교회에서 말씀의 잔치를 한다고 해도 가지 않는다. 그래서 60-70년대의 그 흥분되고 기대되던 부흥 집회는 안 할 수 없는 연례 행사와 같이 되어지고 시간은 짧아져서 시작하면 곧 끝나 버리는 약식 집회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을 지금 들어야 한다. 암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우리는 지금 어느 때 보다 더 많은 설교들과 설교 책들과 설교 자료들을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때 보다 말씀에 굶주린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헤메이는 비극적인 상황을 보고 있다. 이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각 개인의 생활에 관계 있는 설교를 해야 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나 신학 강의를 듣기 위해 교회를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활을 돕고 힘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설교를 들으려 나온다. 이 점에 있어서 목사들은 많은 실수를 한다. 예를 들면 오순절 절기에 많이 선포되는 초대 교회로 돌아가기 설교들이 그렇다. 초대 교회는 교회의 특징이 모든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전적인 헌신, 모이는데 전심 전력, 24시간 기도와 전도, 금식, 각종 은사, 교회 성장 등의 특성을 가진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와 성도들은 그런 초대 교회의 모습을 도저히 가지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초대 교회로 돌아가기를 아무리 외쳐 봐야 성도들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은혜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부담스러워 한다. 초대 교회는 우리 모든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이지만 현실과는 너무나 맞지 않는 꿈이다.
치유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
한국의 “개혁과 설교 연구지”라는 무크지가 설교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사 발표한 일이 있다. 그 발표의 제목은 「10개 교회의 최근 년간의 성장 곡선과 설교 내용」이다. 그들은 10개의 교회를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5개 교회는 년간 2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인 교회로서 3,000명 이상이 모인 교회를 대상으로 하고, 5개 교회는 1,000이하의 성도들이 모인 교회를 대상으로 년간 10%의 성장률을 보인 교회를 선택했다. 각 교회는 교파를 초월하여 설교 제목, 내용, 주보, 통계, 관계 서적들을 중심 해서 조사했다.
이 통계의 분석에서 대 교회며 성장이 빠른 교회일수록 치유 적인 설교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치유적인 설교를 하는 교회는 성장을 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내용을 설교하고 있는 교회는 성장 속도가 느리거나 오히려 퇴조하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치유적 설교의 위험인 “복음의 진수를 잃지 않는 과오”를 범하지 않는다면 치 적인 설교가 복음 전도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기쁨과 평안이 있어야 한다. 처음으로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평안이 있도록 설교를 해야 한다.
꼭 해야 하지만 주의를 요하는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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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강조하는 설교.
성도들에게 믿음을 성장하게 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 그런데 믿음을 강조하는 설교가 많이 있으되 착각 적인 믿음을 유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런 성도들의 자기 믿음에 대한 착각의 책임은 전적으로 설교하는 목사들에게 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믿음에 대하여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고 이 말씀을 아주 구체적으로 해석해서 성경 말씀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를 확실히 가르치셨다. 그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은 믿음이며(히11:3), 주님께 경건한 예배를 드리는 믿음이며(히11:4),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이며(히11:5), 하나님을 믿고 찾아야 하는 믿음이며(히11:6), 순종하는 믿음이라고 하셨다(히11:7). 이 말씀 이외에도 믿음에 대하여 계속 잘 설명하며 믿음의 예를 들어 말씀하시고 있다. 이렇게 믿음을 강조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말하는 목사들의 설교에는 이런 복음적인 요소들이 전혀 배제되어 있는 기복적인 축사에 불과한 강요와 거짓 말과 인위적인 긍정적 사고 방식 배양들이 믿음이라는 가면을 쓰고 강단에서 공공연히 강요되고 확인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언젠가 부터 우리 한국 교회의 강단은 화답의 강단이 되었다. 즉 설교자가 어떤 말을 크게 강조하므로 듣는 사람들의 화답을 이끌어 내는 경우를 말한다. 대체적으로 “믿습니다”에 “아멘”하고 “축원합니다”에 “아멘”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이런 정치하는 사람들이 청중들의 반응을 유도하는 듯한 발언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경우가 많이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부흥회를 인도하는 목사는 ‘자기의 말에 큰 소리로 화답하는 성도가 믿음이 있으며 축복을 받는다’고 애써 강조하곤 한다. 정말 그런 것인가? 아멘만 크게 하고 믿습니다만 힘있게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그에게 성취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런 식으로 성도들에게 스스로 잘 믿고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하지 말라. 나는 50년대에 아멘도 할 줄 모르고 믿습니다를 쎄게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헌신했던 일들을 알고 있고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목사의 설교는 그런 인위적인 방법의 확신이나 확신의 착각으로 주는 것으로 사람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는 자기 사명을 잘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믿을 수 있는 말과 믿을 수 있는 증거와 믿을 수 있는 성령 님의 감동과 살아 있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을 확실히 믿고 순종하게 해야 좋은 설교를 했다고할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목사의 유도에 따라 아멘을 크게 말한 성도들은 그렇게 아멘을 크게 많이 말하고 화답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대단한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여 만족해한다. 그리고 그 만족은 서서히 교만으로 바뀐다.
내가 이촌동에 있는 현신애 권사의 교회를 방문했을 때에 그것에 신유의 은사를 기대하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 어떤 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해 주는 현권사를 믿고 와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우리들의 믿음과 강조되는 믿음과 거짓된 믿음과 긍정적인 사고 방식의 다른 이름인 믿음과 자기 신념과 자기 확신과 성경의 말씀에 계시된 구원의 믿음을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믿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되도록 강요하는 믿음을 말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믿노라고 큰 소리를 쳐도 하나님은 분명히 들어주실 것은 들어주시고 거절하실 것은 거절하신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믿음인가 아니면 자기의 생각대로 믿는 믿음인가가 문제다. 사실 이 문제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이런 분별을 거치지 아니하고 거저 믿음을 강조하고 확신을 주는 설교를 좋아한다. 그리고 설교를 하는 목사들은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닐 것인데도 불구하고 단순히 성도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거짓 믿음을 강조하고 설교한다. 이런 강단에는 이미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다. 오직 거짓 선지자 역할을 하는 목사와 자기의 야욕과 야심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죄인만 있을 뿐이다. 이 부분에 대한 나의 글이 있다. ‘30년 목회담’의 ‘목사가 해서는 안되는 일들 제 30번 글’에 「믿는다고 장담을 했지만 응답을 받지 못해 망신을 당한 목사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이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칭찬하는 설교
성도들은 자기들을 칭찬해 주는 설교를 듣기 매우 좋아한다. 기도하는 것에도 칭찬, 예배에 참예하는 일에도 칭찬, 헌금에도 칭찬, 작은 봉사에도 칭찬, 하잘 것없는 헌신에도 칭찬 받기를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목사들은 성도들을 칭찬해 주어야 한다. 칭찬을 하되 그냥 해 주어서는 안된다. 그야말로 엄청난 칭찬을 해주어야 한다. 오늘의 성도들이 그렇게 엄청난 칭찬을 들을 만한 일들을 하나님을 위해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런 칭찬을 많이 듣는 성도들은 어떤 신앙적 인격을 가지게 될 것인가? 성도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나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해 주신 일들과 비교해 볼 때 감히 할 수 없는 칭찬을 들은 성도들은 어떤 성도들이 되어 가는 것일까?
나는 짧은 인생살이 가운데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람을 교만하게 하여 병신 되게 하는 아주 간단한 한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그를 면전에서 자꾸 칭찬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칭찬의 방법이 아마 어린아이들 교육의 한 방법으로 강조된 것이 설교에 도입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칭찬만 듣고 자란 어린아이들은 버릇이 없고 거만하고 모든 일에 자기 중심적이며 사람의 위아래를 분별하지 못하며 선악을 구별 못하는 정신적인 기형아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정신적인 기형아로 성장한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어 칭찬만 해 주지 않는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에 당할 끔찍한 정신적인 충격은 과히 천지가 개벽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결국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는 건강한 인격을 가진 사회인이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다. 이렇게 칭찬만 듣기에 익숙해진 성도들에게 만일 어떤 꾸중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목사가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놀라고 실망한 나머지 목사가 자기를 저주했다고 분노하고 울부짖으며 결국 목사를 핍박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문제 성도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칭찬만 듣기 좋아하는 성도는 결단코 건강한 성도가 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성도들은 칭찬만 듣고 싶어한다. 책망이나 잘못을 전혀 듣고 싶어하지 아니하며 이런 말을 하는 목사는 좋은 목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보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칭찬하시기보다는 많은 책망을 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너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신 말씀들이다.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 도다”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사단을 꾸짖으셨을 때에 하시던 말씀과 동일하신 말씀이시다.(마4:10) 이런 극심한 책망을 받았을지라도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은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헌신을 했다. 그런데 만일 우리 목사들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여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성도에게 이런 책망을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칭찬 듣기만을 좋아하고 자란 오늘의 성도들은 죄의 책망도 견디지 못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헌신의 요구도 수용하지 못한다. 내가 한달 동안을 전도하고 기도하자고 했더니 설교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을 상당히 많이 보았다. 그것도 일류 대학을 나온 우리 사회의 엘리트 성도들이 그 모양이다. 그들은 공부를 남 보다 조금 잘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평생 칭찬만 받고 살았기 때문에 자존심이 너무 강하고 교만하며 자기 잘못을 고칠 줄을 모르는 기형아가 되어 버린 때문이다.
이런 칭찬 듣기만을 즐겨 하고 좋아하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죄를 말하며 회개를 하게 할까?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죄의 회개는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복음이기 때문이다. (마 3:2, 3:8, 마 4:17). 성도들을 칭찬하는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칭찬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칭찬하시는 수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즉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마 25:21)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6). "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시니라”(마 16:17).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이며 (눅 1:45).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 23)의 수준을 말한다.
위로하는 설교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설교 가운데 위로하는 설교가 있다. 이 설교를 많이 하고 듣기 좋아하는 성도의 생각은 이렇다. ‘세상살이가 얼마나 어려운가? 일주일 동안 그 어려운 세상살이를 하면서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았는가? 그래서 교회에 와 위로와 격려와 힘을 얻는 설교를 들어야 마땅하다.’ 이런 생각을 가장 많이 강조하고 세상살이에 가장 동정적인 설교를 많이 한 사람은 저 유명한 누구 목사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정말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에서 위로를 받아야 할만큼 세상살이가 어려운가? 요즘의 성도들이 세상을 살면서 누구를 위해 고생을 하며 어떤 고난을 겪고 살아가는 것일까?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너무 먹어 살찌는 것을 고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돈을 많이 벌어 잘 살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생각하면서 일주일 동안 열심히 자기를 위해 산 사람들이 주일에만 주님에게 나와 상처를 받았으니 위로를 해 달라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위로를 하실 수가 있을까?
주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찾아다니시면서 위로하고 격려하셨던 상처받은 심령들과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였을까? 그들과 지금의 위로를 갈구하는 성도들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 해답을 모르는 목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성도들이 요구하는 그 위로라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이며 나약한 심령의 현상인가를 모르는 목사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성도들을 따독거려 가며 위로해야 한다. 값진 침대와 화려한 침구 속에서 칭얼대는 어린아이들을 달래며 자장가를 불러 주며 잠들기를 고대하는 심령으로------ 목사들은 모두 갓난아이의 유모가 되어 버렸다. 그래야 교회가 평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안한 교회는 점점 썩어 가며 교회의 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위로한 설교는 이렇게 해야 한다. 철이 든 성도라면 마땅히 바라고 기대할 만한 위로의 설교가 있다. 주님을 위한 고난을 위로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고난의 주님으로 인하여 받은 핍박과 환난과 가난과 고통과 죽음을 말한다. 결코 자기를 위해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고난과 괴로움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고난을 당하고 사는 성도가 오늘 몇이나 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에게 나와 위로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으니 여기에 목사의 설교의 갈등이 있는 것이다.
축복 설교
목사의 설교에서 가장 많이 난발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 축복이라는 개념에 큰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받는 축복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축복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자녀들도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 부분의 성도들이 이해하는 축복은 세상적인 것이다.
\솔로몬은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온갖 축복을 다 받아 누리며 살던 사람이 였지만 그 모든 것들이 헛되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헛된 것들은 대표적으로 다섯 가지인데 부귀영화, 자식 많은 것, 쾌락과 향락, 지식, 권력 소유들이다. 요즘 사람들이 그렇게 소망하고 바라는 모든 것들을 망라했다. 결국 그가 이 모든 것들을 누리며 살아 본 결과 얻은 결론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라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이 최고의 행복이요 축복이라고 했다.
그러나 성도들은 끝임 없는 욕구와 욕심으로 세상 것들을 추구하며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한 방법을 제시해 주기를 목사의 설교에서 요구한다. 이것을 간파하고 있는 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축복을 말하고 기원하고 주술 하기를 서슴지 아니하며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짓은 이미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위치에서 벗어 난 것이며 바르지 못한 것이다.
소망적인 설교.
설교에는 반드시 소망 적인 요소가 강하게 들어 이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죄인을 책망하실 때에도 소망적인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셨다. 그런데 한국 교회 목사들의 설교에서의 소망은 정말 어처구니없고 터무니 없는 공수표를 떼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다. 전혀 성경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세속적인 약속들이 많이 있거나 아니면 세속적인 약속들만 골라 집중적으로 강조하는 경우가 많고 수치적인 것들이 많이 있다. 하나를 심어 백배가 된다는 식이다. 그리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당대에 심어 당대에 거둔다는 것을 강조해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소망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히브리 서에서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했지만 이 세상에서는 아무 대가를 받지 못한 성도들(히11:36-40)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른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전에 믿음으로 살아 충분한 보상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셨다.(히 11:33-35). 이런 이중적인 구조를 가진 하나님의 주실 축복에 대하여 어느 한편으로 치중한 강조를 삼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성도들의 소망은 다분히 현세적인 면에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 또한 설교자의 한가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설교의 방법 면에서
재미있는 설교
나는 여러 방송에서 목사들의 방송 설교를 많이 듣는다. 설교하는 목사들의 설교 유형이 각가지여서 참으로 배울 점이 많다. 어떤 목사는 아주 좋은 설교를 너무 강력한 어조와 고음으로 계속하기 때문에 은혜가 되기보다는 듣기에 매우 피곤한 경우도 있다. 어떤 목사는 너무 말이 빨라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누구는 이미 매스컴에 보도되어 잘 알고 있는 사실들을 나열해 놓아 들으나 마나 한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전혀 비 성경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주 유명한 목사의 설교 가운데 “우리가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어요”라고 했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설교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가 있어서 듣고 싶은 목사님의 설교가 있다. 나는 그 목사님의 설교를 기다린다. 극동 방송에서 오전 9시에 방송되는 설교 가운데 충신 교회 박종순 목사님의 설교가 그렇다. 박목사님은 가끔 설교를 하시는데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날은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재미가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박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시면 내가 말한 설교 듣는 재미가 무엇인지 이해할 것이다.
유머가 있는 설교.
미국 목사들은 설교를 20분 동안 하는데 3가지 대지를 설정해서 설교하면서 3번 웃기고 3가지 예화를 말한다고 한다. 이것이 설교의 원칙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설교 중에 듣는 성도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웃기는 것은 설교를 매우 윤택하며 부드럽게 하는 특효가 있다. 어떤 목사는 설교 중에 성도들을 웃겨야 한다는 말을 잘못 이해해서 유머를 쓴 책을 구입하기도 하고 인터넷에 올라 있는 황당한 농담을 기억했다가 써먹는 경우가 있다. 물른 설교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야기를 말한다.
설교 중의 유머는 그런 인위적이고 꾸며낸 이야기를 말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어떤 유우모어를 해야 하는가를 말하기보다는 앞에서 말한 박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목사가 강단에서 어떤 유머를 해서 성도들을 즐겁게 하며 그 마음을 풀어 주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목사의 설교 스타일로 인해 도무지 유머가 어울리지 않거나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런 스타일로 설교를 하는 목사가 웃기는 이야기를 하면 그 분위기가 너무나 마지않기 때문에 성도들이 웃기는커녕 황당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웃기기 위한 유머는 효과가 없다. 유우모어를 할 수 있고 그 유머에 반응할 수 있는 설교 스타일이 무엇인지를 여러 목사들의 설교를 많이 들고 배우도록 해야 한다.
. 목적이 분명한 설교.
오늘 왜 설교를 하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하는 설교를 하라. 즉 설교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게 하는 설교를 하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대지 설교를 하는 것이 좋다. 대지는 한 설교에 3-4가지 정도로 하고 대지의 소지를 가급적이면 줄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꼭 첫째, 둘째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듣는 성도들은 설교의 흐름으로 보아 첫 번째, 두 번째의 대지를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설교의 목적이 확실히 부각되어야 한다. 설교를 듣고 난 후에 성도들이 ‘왜 저런 말씀을 하실까’라고 반문한다든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라고 하면 그 교회는 설교를 통해서는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목사는 오늘 주일에는 무슨 설교를 해야할까가 언제나 숙제다. 그 숙제를 푸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한경직 목사님은 심방을 통해 성도들을 알고 설교 준비를 했다고 한다. 날마다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서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찾는 방법도 있다. 부목사나 전도사와 교회 형편을 대화하는 가운데 그 자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각종 매스컴의 소식들과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보고 할 설교를 찾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성도들이 잘 알아듣고 감동될 수 있는 설교를 해야 한다. 우리 목사들이 목사라는 직분과 설교자라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한 설교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벗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갈등은 내가 가진 갈등이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누구도 가지지 못한 영광을 우리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아 감사 감격해야 한다.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설교를 아주 잘하시는 목사님들의 설교 책을 많이 보고 그 설교의 내용, 구성, 표현 어휘, 문장 조직, 예화와 강조 점등을 배우고 설교를 들어 음성의 높낮이, 강조 점의 강조, 유우모어의 사용법 등들을 익히며 설교 방송이나 설교 녹화나 인터넷 상에 그려지는 설교하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배우고 익혀야 한다. 배우고 노력한 것만큼만 잘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들려지는 설교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설교 신학의 관점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게 할 것이냐가 될 것이다. 앞서 언급 한대로 변화하는 시대는 진리를 보편화시키고, 구체적이며, 다양한 정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을 잃게 되는 시대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가장 관심 해야 할 것은 어떻게 복음의 말씀을 전달할 것인가? 즉 어떻게 하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들려지는 설교일 수 있을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연구와 설교의 방법론, 그리고 오늘의 청중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설교의 자리인 오늘의 상황에 대한 연구를 포함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에 이것은 설교자가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야 할 사항이다. 특별히 21세기는 거대한 문화 사회적인 변혁의 시대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시대가 될 것이며, 아무도 듣지 아니하려는 시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외로움을 설교자가 더 깊이 느껴야 할 시대가 될 것 것이다.
알아듣기 쉬운 설교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전해도 듣는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한다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천태만상이다. 무식한 노인들로부터 박식한 박사들이 있고 남녀 노소가 있으며, 그들이 설교를 듣고 받고자 하는 은혜도 모두 다 다르다. 그러나 그들이 설교에 대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알아듣기 쉬운 설교를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해야 한다.
\아세아 연합 신학 대학의 김기홍 교수는 설교 학 강의에서 목회자가 설교를 할 때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수준을 국민학교 3-4학년 정도로 생각하라는 말을 자주 했다. 즉 설교하는 사람이 그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설교하라는 말이다. 목사가 자기의 설교를 성도들이 잘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를 알려면 성도들의 반응을 살피면 된다. 그것도 모르는 목사라고 하면 정말 답답한 사람이다.
설교를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 전달 방법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이다. 김운용교수는 ‘이야기식 설교에 대한 소고’라는 글에서 “현대 설교 학의 가장 중심 되는 주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가 "어떻게 들려지게 할 것인가"이다. 아마 이러한 관심은 현대 설교 학의 관심 주제일 뿐만 아니라 각 시대의 설교자들의 관심 사항이었다. 왜냐하면 들려지는 설교, 전달되지 않는 설교는 설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대화식 설교
대화식 설교가 있다. 사람과 대화하듯이 설교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한 글은 이미 본인의 홈에 많이 올려져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참고로 대화식 설교에 대한 본인의 글을 여기 다시 기록했다. 늘 하는 일상 대화를 연구해 보라. 우리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일대일의 대화를 하는 것처럼 설교를 하라. 대화식 설교는 배워야 하지만, 한경직 목사나 곽선희 목사나 옥한흠 목사나 김삼환 목사의 설교에 잘 드러난다. 그 분들의 설교를 모방하는 것이 아주 좋을 것이다.
특별히 충신 교회 박종순 목사의 설교를 깊이 참고하시기 바란다. 박목사의 설교는 극동 방송의 오전 9시의 방송 설교에서 종종 들을 수 있다. 그 분들의 설교와 여러분의 설교 차이를 모르겠거든 여러분의 설교를 녹음하던지 아니면 녹화를 해서 비교를 해 보라. 그러면 확연히 구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대화 설교 인줄 모르겠거든 텔레비전 드라마 가운데 목사가 나와 설교하는 장면을 탤런트가 연기하는데 그 때 그들의 말하는 것을 자세히 보고 들으면 대화식 설교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설교에 대한 인식은 설교란 신적 행위인 것이었다. 고로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며”,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시고 가까이 오신다.”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을 우리가 소유함과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와 일반적이고도 평범한 방법으로 대화하신다. 이렇게 복음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하강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목사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말씀하시듯이 말씀을 전달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미련하고 아둔한 인간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실 것인가? 그 예를 우리는 주님의 설교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마 5-7장의 산상보훈의 말씀들을 어떻게 말씀하셨을까를 깊이 생각해 보라.
그러나 이 대화식 설교 가운데 각별히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즉 하나님 말씀의 선포가 아니라 설교자의 말만을 선포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사적인 대화의 언어와 공적인 장소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차별성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야기식 설교
이야기 설교도 있다. 이 설교에 대한 글도 올려져 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여기 기록한다. 이렇듯 설교의 전달에 깊이 관심 해 온 현대 설교 학은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사용에 대해서 깊이 관심 해 왔다. 복음서의 대부분이 이야기로 되어 있으며,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달하실 때 주로 이 방법을 사용하셨다. 어떠한 사람이 좋은 이웃인가에 대해서 질문 받으셨을 때에도 그분은 신학적인 논리나 논지로 그 사실을 전달하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내려가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했는가를 신학적인 논리로 규명하려 하시지 않고,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의 이야기'를 사용하셨다.
왜 그분은 거의 이야기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신 것일까? 이야기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던(마 13:34) 이유는 무엇일까? 이야기는 청중들로 하여금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며(understand),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킨다(attention). 또한 이야기는 오래 기억하게 하며 (remember), 감성적인 부분들을 고양시켜 준다(stir up).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인간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택하신 이유이다.
이야기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The Story)를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러한 점에서 엘리 위젤(Elie Wiesel)은 하나님은 이야기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람을 창조하셨다(God made man because He loves stories)고 말한다. 그러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이제 나아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는 이야기꾼(storytellers)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세상을 새롭게 창조해 가는 것이다. 아담이 온갖 동물들과 식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naming) 하나의 존재가 되게 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말함으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며, 새로운 정체성(identity)을 부여하는 신학화의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성경에는 이야기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구약의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스리시며,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다스림 가운데서 살아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되어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시대를 넘어서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과 역사를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경험한다. 기억하고(remembering), 이야기하면서(telling)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건들은 새롭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야기(storytelling event)를 통해 현존하시며, 당신의 역사를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는 형성되어지고, 거룩한 이야기들을 되뇌면서(retelling)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고, 미래의 사건을 기대하게 된다.
복음서 역시 그 대부분이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들로 되어 있으며, 이야기 형태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래디 데이비스(H. Grady Davis)는 이러한 점을 관심 하면서, 복음서의 1/10이 교리에 대한 것이라면 9/10은 이야기로 되어져 있다고 주장하며, 중심 개념을 주로 이야기(story told)로 전하고 있음을 밝힌다. 예수님은 그의 설교의 대부분을 이야기로 전하셨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설교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전하실 때에도 이야기로 전하셨다.
예수님의 이야기 공동체에서 성숙한 복음서 기자들 역시,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꾼(storyteller)들이 되었으며, 복음과 교회는 본질적으로 이야기 전통 속에서 생성되어진다. 그들은 복음의 사건을 다시 듣고(reheard), 다시 말할 수 있기 위하여(retelling)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교회는 복음의 가장 선봉적인 이야기 공동체가 되었다. 교회는 함께 모여(assemble), 성만찬을 행하며(break bread), 주님의 행하심과 주신 말씀들을 다시 되뇌이는(retelling)는 이야기 공동체였다. 이렇듯이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는 이야기 형태를 가졌으며, 교회는 이야기 공동체였다. 이야기 형태를 통해, 즉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storytelling)을 통해서 오늘도 그리스도는 현존하신다.
보이는 설교
21세기의 언어는 “그림 언어”가 되어질 것이다. 개념(concept)을 통해서 전하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듯이 보여주는 언어(audiovisual language)를 통해서 말씀을 증거할 때, 가장 확실하게 메시지가 전달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즉 다가오는 세대는 그림 언어 (picture language)로 말씀을 전하게 가장 확실하게 메시지가 전달될 것이다 는 말이다. 언어는 보여주는(audiovisual) 매체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면서, 커뮤니케이션 학자인 피레 바빈(Pierre Babin)은 보여주는 언어 매체야말로 현대 사회의 문화에서 가장 적절한 새로운 언어라고 주장한다. 특별히 그림 언어는 이미지와 스토리, 메타포(은유)와 같은 가시적인 상상력이 담긴 언어를 통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말씀이 전달되어진다.
현대의 청중들을 터치하고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설교자는 강의실에서 던져지는 것과 같은 추상적인 언어, 논증적이고 이성적(rational)인 언어보다는 상상력이 풍부한 그림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토론장이 아니라 화랑 (not a debating hall, but a picture gallery)이기 때문에 이러한 언어를 통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말씀이 전달되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월터 브르그만은 설교자들은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서구 신학은 명확한 논리와 명제를 통해서 메시지가 가장 잘 전달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세계는 화랑과 같음을 외면해 왔음을 발견하게 되면서 현대 신학에서는 이야기와 같은 언어 구조를 통해서 신학 함에 깊이 관심 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적인 흐름에 깊이 관심 해 온 현대 설교학도 새로운 언어체계와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깊이 관심 하면서 새로운 설교 학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동안 한국 교회의 설교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분석적인 방법을 사용하였고, 거기에서 분석한 내용들을 정돈 배열해서 그저 가르치기만 하는 형태의 설교를 좋은 설교라고 생각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설교는 논리적인 개요를 통해서 신학 강의와 같이 그저 설명하고 적용해 주는 식의 설교를 지향해 왔다. 여기에서 설교의 언어가 한가지 측면--논리적이고 분석적인--에만 관심 해 왔음을 부인 할 수 없다. 이제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의 특징을 깊이 관심 하면서 새로운 설교 언어 개발에 깊이 관심 해야 할 것이다.
설교를 잘하기 위해서 해야 할 설교자의 노력
설교를 위한 목사의 노력
이런 예를 드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즐거움을 주며, 슬픔을 나누는 노래 잘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 부르는 태도에서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단 3-5분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하는지----- 그 노래의 연습의 정도에 따라 노래의 감흥력이 달라진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노래 부르는 현장에서 노래를 부를 때 혼신의 힘을 다 쏟아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온 몸은 그들의 노래를 말하기 위해 온갖 ‘짓’들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노래 보다 몇 천만배 중요한 사람을 살리는 설교에 우리는 어떤 정성을 쏟아 준비를 하며, 어떤 열정을 쏟아 전하려고 하는가? 원고가 없는 것처럼 설교를 하고, 원고가 없으면 설교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설교를 준비하라는 유명한 말을 명신홍 박사는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우리 목사가 그 귀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시간에 그저 그 자리에서 생각나는 즉흥 설교, 즉석 설교, 현실에 전혀 맞지 않는 설교, 성도들의 귓전만 울리는 설교, 전혀 현실감이 없는 설교, 재탕 삼탕하는 설교, 다른 사람의 설교, 인쇄소에서 보내는 원고대로 하는 설교, 설교가 아닌 성경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언제나 생각하고 자성해야 한다.
설교를 잘하기 위한 배움이 필요하다.
목사들은 대강 자기의 설교에 대하여 전혀 객관성이 없는 자기 만족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전혀 성경에 맞지 아니한 터부니 없는 설교를 하고 나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기 설교에 대하여 비평하는 것을 참아 내지 못하고 심하게 기분이 나빠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 였다. 특히 설교 후에 아내가 설교에 대해 이렇꿍 저러꿍 이야기하는 것에 대하여 정말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 일조차 있었다. 물른 설교를 비평해 주는 사람의 방법론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겠으나, 그것보다도 자기 설교에 대한 자존심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것은 설교를 하는 사람으로써 절대적인 설교 성장 발전 요소를 방해하는 어리석은 자존심이다. 설교를 비평받고 고칠 줄 알아야 설교에 발전이 있는 것 아닌가? 설교를 잘 하기를 바라면서도 자기 설교를 비판받지 아니하려는 것은 참으로 자가당착적 모순이다.
설교와 회중
회중이란 소리를 내건, 조용히 있건 간에 설교에 적극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자는 회중의 필요를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회중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설교라야 바람직하다 볼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첫째, 회중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즉 설교자는 회중을 아는 것과 그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는 것 사이에 중요한 연관이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또한 회중을 알 뿐 아니라, 그들이 번민하고 있는 죄, 좌절, 두려움, 증오, 슬픔, 낙담, 실망, 염려 따위의 제반 문제들을 알아야 하며 그들의 소망, 기쁨, 사랑, 승리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회중을 이해할 때 설교는 더욱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회중을 사랑해야 한다. 성경 시대의 위대한 설교가들 - 예수 ,베드로, 바울-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은 회중을 향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가졌었다. 회중이 동의하지 않고 반대했고 이 설교자들을 죽이려고 했음에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한 것을 볼 수 있다. 회중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고의 선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셋째, 회중에게 먹여야 한다. 회중은 굶주리기에 생명의 떡이 필요하다. 회중은 문제, 결정, 기회, 위기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인생의 문제들에 직면해 있는 그들을 돕는 설교를 듣고자 갈망한다. 설교자는 회중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설교 작성에 부단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회중이 설교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적어도 설교의 본질에 대해서 세 가지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설교의 내용은 회중들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설교는 회중에 대한 철저한 지식과 많은 양의 정보 수집을 필요로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회중들이 설교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설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청중들은 설교자가 회중들에게 말하기 이전에 벌써 설교자에게 말하고 있다.
둘째로 설교는 회중들로 하여금 설교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고, 행하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또 움직여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가 온 회중의 행위라고 믿는 설교자는 그 행위를 가능케 하는 설교의 기법을 개발해야 하며, 또한 다른 사람의 결론에 대해서 수년간 잠자코 듣기만 했던 회중들이 그것을 극복할 때까지 인내할 줄도 알아야 한다.
셋째로, 설교란 회중을 향하여 하는 말인 동시에 회중을 위하여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설교자가 회중들의 역할에 대해 생각한다면 전체 회중들을 위한 설교, 즉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신앙과 의심, 두려움과 분노, 사랑과 기쁨, 그리고 감사를 표현하는 설교를 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가 회중들에게 삶의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것은 회중들의 시급한 필요, 혹은 피부에 와 닿는 필요를 무시 한데서 온다고 하겠다. 어떤 유형의 설교이든지 한 시대를 흔들고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가져왔던 위대한 설교가들의 설교는 한결같이 회중들의 필요에 민감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회중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이냐? 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3가지 회중에 대한 접근법을 접목하려 한다.
첫째, 지적인 접근 방식으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고 알아야 할 것을 소개하는 접근 방식이다. 필요한 접근이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이것이 설교의 유일한 형태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감성적 접근 방식으로, 인간에게 지식보다 훨씬 강렬한 것이 감정이므로 설교를 통해 서러움과 아픈 감정의 씻어냄을 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접근 방식이다.
셋째, 의지적 접근 방식으로, 삶의 변화를 창출해 내는 방식이다. 설교자는 의지적 접근을 통해 회중들의 행동 방향을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순서에 있어서는 지식에서 시작해서 감정으로 그 다음에 의지로 나아갈 수 있고, 감정에서 시작해서 지식을 통하여 그 다음에 의지로 나아갈 수 있다.
결국 설교자가 회중의 심령 상태와 지적 수준과 환경을 자세히 알고 있다면 그 설교는 회중에게 더욱 공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회중은 설교자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여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설교자는 회중의 영적인 지도자로서, 그리고 신령한 인도자로서, 그들을 바로 인도해야 할 것으로 회중과 설교자와의 관계성을 말할 수 있겠다.
여기에 대한 칼빈의 다음과 같은 대답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전달하실 때에, 모여 있던 백성들의 귀에 하늘에서 직접 천둥소리로 말씀을 전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직접 모습을 들어내고 그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신다면 그 앞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인간을 부르시고 그 인간을 통하여 그때 그 장소의 그 인간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신 것이다.
설교는 설교자의 땀과 눈물과 때로는 피로 회중을 적시는 것임을 새롭게 인식하여야 한다. 이러한 설교의 본질을 알고 소명을 수행한 한국의 충성된 설교자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 교회는 이처럼 자랑스러운 궤도에 서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설교자들의 얼이 오늘도 우리의 설교 사역을 지켜보고 있다.
그 동안 한국 교회 설교에서 사용되어 온 언어들은 논리적이고, 논증적이며, 명령적이고, 분석적이었다. 이러한 언어는 왼쪽 뇌를 자극하여 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쓰여지는 언어이다. 그러한 언어는 어떤 정보에 대한 지적인 지식의 축적을 돕는 언어이며, 그들의 지성에 호소하는 언어이다. 그러한 언어는 삶을 바꾸는 데에는 크게 역할 하지 못하는 언어이다. 그러나 오른쪽 뇌 접근 방식은 감정에 호소하며, 보여 주고, 느끼게 하는 언어이다. 즉 귀로 듣는 말을 마치 눈으로 보는 듯 보고 느끼게 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응답하게 만들어 주는 언어이다.
그래서 동방의 격언 가운데 진정으로 위대한 스승은 당신이 진리를 볼 수 있도록 당신의 귀를 눈으로 바꾸어 놓는 사람이다라는 말과 같이, 좋은 설교자는 “말씀을 듣는 청중들의 귀가 눈이 되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이다. 즉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청중들이 그 설교를 통해서 귀로 들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설교자가 가장 훌륭하다는 말이다.
시대의 변천이나 개인의 발전이 어떤 단계에 이르든지 인간은 빵으로만 살수 없는 피조물임을 스스로 알고 한국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서 아직껏 교회를 찾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 신앙은 그 표현에 있어서의 문제는 있었으나 "기독교나 천도교만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가 공유한 아득한 옛부터의 신앙임"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역은 이 땅의 종교 문화로부터 거대한 위치를 차지고 있다.
이런 종교 문화에 발판을 둔 한국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심성은 신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에 대한 대단한 존경을 갖게 되고 주어진 메시지에 관하여는 최우선적인 경의를 표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서 깊은 주의를 요하는 것은 첨단의 문화에 승선(乘船)한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선포된 메시지에 맹종 적인 경청이나 추종을 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판단을 거쳐 소화 내지 거부를 한다는 현실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목이 쉬도록 외친 오늘의 설교자 앞에 앉아 있는 성도들이 그 설교에 만족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이론대로 전달한 메시지가 의도 한데로 회중들에 의하여 공유(共有-Sharing)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설교자가 자신이 전한 메시지에 대한 메아리가 최소한 다음의 것들이기를 바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수가 없다.
"목사님, 오늘의 설교는 저의 생애에 소중한 결단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목사님, 오늘의 설교에서 깊은 은혜와 감명을 받았습니다. "
"목사님,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저의 고민하여 온 문제의 해답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이러한 주옥같은 반응을 받은 설교자들이 한국의 땅에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들의 교회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생명이 차고 넘치는 말씀으로 가득한 현장을 본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을 이해할 것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를 각각의 생각 나름대로 듣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니,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화하여 회개하고 순종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정말 은혜를 받는 성도라면, 설교하는 사람이 유명한 부흥사이든, 자기 교회 목사든, 전도사든, 유 초등부 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서 은혜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성도들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유명도가 높은 목사가 설교를 하면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처음 만났을 때는 지금까지 이런 설교를 들은 일이 없다 하고, 감격했던 사람들이 3년쯤 지나면 설교에 식상을 해서 설교를 비평하고 비난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발생한다. 그리고 설교야 어떻든 예화를 두 번 했다는 이유로 그 설교 전체를 마치, 못 쓸 말씀을 전한 것처럼 매도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들의 현실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수하게 받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를 모두 각각의 나름대로 듣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는 내가 한 설교를 내가 받은 은혜만큼 설교를 들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도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기분 나빠하고, 터무니 없지만 칭찬은 좋다고 한다. 이런 경향 속에서 설교를 해야 하는 목사들의 설교에 대한 고민이 심각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그 말씀을 듣는 성도들 사이에서 설교에 갈등을 해야 하는 목사의 위기감을 아시는지-------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성도들이 듣고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사의 피나는 고민과 자기 연단과 자기 죽임과 그리고 성령의 감동 감화력이 있어야 한다.
만일 목사가 설교를 했는데, 듣는 성도들의 마음에 아무런 감흥도 없어, 자기 나름대로 말씀을 해석하여 축복의 말씀을 저주하는 것으로, 책망하시는 말씀을 칭찬하시는 말씀으로 자기 편의에 따라 해석해 듣고 만다면, 그 과오의 가장 큰 책임은 목사에게 있다.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설교------ 이런 말을 하면 목사의 매번 모든 설교에서 어떻게 성도들을 감동시킬 수가 있다는 말인 가라고 반문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정말 위험한 생각이다.
설교를 잘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총 동원하라.
다른 목사의 설교집을 보고 연구하라.
다른 사람의 설교 집을 보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칼뱅이 기독교 강요를 쓸 때 수 없이 많은 신학서를 참고로 했기 대문에 그런 책을 쓸 수 있었으며, 우리가 한편의 논문을 쓸 때도 많은 서적을 참고로 해야 한다. 하물며 좋은 설교를 하기 위한 노력 가운데 많은 은혜를 끼친 유명 목사들의 설교 책을 본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될 수 없다.
어떤 경우에 내 설교에 성도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거든 차라리 유명한 설교가들의 설교를 그대로 설교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즉 교회가 시험에 빠졌을 때, 목사를 시험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목사의 격한 감정이 설교 중에 돌출 될 염려가 있을 때, 성도들이 새로운 어떤 말씀에 대하여 강력한 기대를 하고 있을 때에 아주 효과적이다. 그러나 다른 목사의 설교를 설교할 때에는 자기 교회의 형편에 맞게 조리를 잘하는 말씀의 능력이 따로 필요하다.
유명한 이들의 설교 집을 많이 보라. 그들의 논조, 성경 해석, 도입과 강조점들, 문장력, 설교의 현실감, 설교의 쉽고 분명한 점들, 설교의 현실적인 감각, 설교에 동원된 단어들, 원고 작성법 등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런 분들의 설교를 공부하다 보면 자기 개성이 없는 모방 설교로 발전하는 일이 있으니 이 점을 경계하고 조심할 일이다.
나는 매번 내가 하는 설교에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이 내게 계속되었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이런 글을 쓸 시간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생각대로 되로 않는 설교들과, 내가 한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시험을 당했던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미안한 마음과 죄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이런 글을 써 우리들의 고민을 이야기하므로 무엇인가 개선해야 할 점이 있지 아니할까를 생각코자 하는 것이다.
첫째, 설교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기에 그 설교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분명한 의도와 내용이 모두 있어야 한다. 설교의 목적이 단순히 어떤 주제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설교는 주제를 설명하는 일 뿐만 아니라 적용하는 일도 한다. 설교자는 단순히 지성(Mind)을 교훈 하는 것에만 만족해서는 안되고, 감정(Emotion)도 흔들어 놓아야 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개인적으로 적용하려는 의지를 갖게 하는 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설교는 조직적이며 구체적이어야 한다. 설교의 명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이 본문에는 우리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와 같은 종류의 설교 평은 설교자라면 모두 피해야 한다. 사실 ‘것들(things)’이란 말은 모호하므로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셋째, 감명을 주기 위한 설교가 아니라 표현하기 위한 설교를 하라. 설교자는 쇠해야 하고 구세주는 흥해야 한다(요 3:30). 즉 전해지는 말씀은 예수님이고, 설교자는 그것을 전하는 목소리에 불과하다. “저런 설교는 나도 할 수 있겠다”라고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설교에는 단순성이 있어야 한다. 죠오지 모리슨 (George H. Morrison)은 “당신의 설교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설교하라” 고 말하면서 ‘위대한 설교’를 위해 준비하려고 애쓰지 말고 위대하신 구세주를 드높이려고 애쓰라고 말한다.
넷째, 개개인에게 설교하라. 효과적인 이야기는 모두 개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스펄젼의 설교를 들은 어떤 소녀가 자기 어머니에게 말했다. “스펄젼 선생님이 ‘저’에게 말하는 거예요?” 설교를 들은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현재 시제를 갖고 설교하되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라. 말씀 속에 있는 시대를 초월한 진리의 원칙을 발견하여 이해될 수 있는 말로 옷을 입혀서 기다리는 회중의 필요에 적용시키는 것이 설교자의 할 일이다. 또한 상상력은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창조적인 설교자는 자신의 상상력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설교에 적용하는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설교는 생활과 생각 속에서 나오는데 그 두 가지를 묶는 것이 바로 상상력인 것이다.
설교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말라.
설교 학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말씀의 내용 파악과 그 말씀을 듣는 성도들에 대한 분석과 말씀의 전달 방법들이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인 면에서 발전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유독 어떤 목사들은 설교에 대한 모든 발전적인 요소들에게서 눈을 감아 버리고 구태의연한 구태를 답습하며 그것에 안주하려 하고 있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세상에 살아 남기 위해서나 자기들의 소망을 채우기 위해 첨단적인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오늘에 잘 사는 법을 연구하고 실천하고 있는데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을 때에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느낌을 가진다면 그들이 어떻게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더 더욱이 경계하고 근심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목사가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보면서 설교 준비를 했던 그 때 그 시절의 노력에서 훨씬 퇴보하여 편의주의 적으로 설교 준비를 하는 목사들이 너무나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택배로 배달되는 설교를 하는가 하면 인터넷에 올라 있는 수 없이 많은 설교들을 조금도 여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프린트해서 쏟아내는 모방 설교와 흉내 내기 설교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설교자의 피와 땀과 고민과 근심이 전혀 없는 설교가 얼마나 생명력 없는 공허한 메시지가 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설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이지만 전하는 자의 생명력이 없는 녹음기와 별로 다를 바가 없고 들어 누워 라디오 방송의 설교를 듣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설교!!!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설교자를 통해 그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메시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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