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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구원 이후의 여정

by liefd 2024.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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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은 다 같은 수준의 내용이 아니라, 어떤 말씀은 신앙이 아주 어린 사람도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있는 것이지만, 어떤 말씀은 상당한 수준에 이른 사람만이 깨닫고 지킬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성경의 내용은 높이가 서로 다른 계곡과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맥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분수를 의식하는 가운데 성경의 본문이 지금 당장 지켜야 하는 것인지, 점차 그렇게 되도록 나아가야 함을 지시해 주는 지향적인 내용인지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지향적 목표를 지금 당장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있는 현재적 목표로 알게 되면 많은 부작용들이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세상적으로 좋은 것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세속적인 것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보이지 않으나 믿음으로 보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에 대한 태도임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대상은 모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지향적인 목표에 미달되는 자기를 어떻게 대하냐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보통의 경우 지향적인 자기를 자기로 여기는 경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 엄연한 현실적인 자기는 억압하여 닫힌 의식 속으로 밀어 넣고 지향적인 자기를 실제적인 자기인 양 보이려 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적 자기의 억압-닫힌 의식에 밀어 넣는 것-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외식의 문제가 깊어지고, 결국 외면의 자기(열린의식의 자기)와 내면의 자기(단힌 의식의 자기)의 단절이 그만큼 심화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의식하는 열린의식의 자기(외면적 자기)와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는 닫힌 의식적 자기(내면적 자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사야 1:11-17절에서 유대인들은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날짜를 지키는 열린의식의 자기로 알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 억압하여 회피한 닫힌 의식의 자기를 정확하게 읽고 계시는 것입니다(참조: 6;6, 30:9-10).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외면적 모습이 아니라 진정한 내면적 자기, 즉 마음 또는 마음의 중심을 원하십니다(삼상 15:22, 삼상16:7).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면의 자기를 포함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자기입니다.

 

우리 중의 누구도 항상 지향적 목표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그 목표를 향해 가는 도상의 존재인 셈입니다. 그런데 지향적 목표를 당장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면 목표에 미달하는 자기를 그 수중에서 존재화시키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렇게 일어난 부적절한 존재화는 자기에게 항상 맞는 판단으로 확인되어 강화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지향적 목표 앞에서는 늘 미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것을 당장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안다면 미달되는 자기 모습을 보고 죄책감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갖게 되는 죄책감은 적절한 죄책감이 아니라 부적절한 죄책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죄책감을 주셔서, 죄를 범했을 때 우리 마음이 불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죄를 보게 됩니다. 이 때 바른 사람은 죄책감의 움직임을 통해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적절한 죄책감이 가득한 사람은 감사가 없고 소망이 없습니다. 성숙에 대한 노력도 포기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성경에 나타나는 육적인 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인간의 부패한 성품을, 다른 하나는 순수하게 신체적인 것 자체를 의미합니다. 물론 신체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에는 결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으므로 육적인 것=신체적인 것으로 판단하게 되고, 결국 신체적인 성욕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우리를 회개로 이끄는 데까지만 역할을 하고 회개하여 용서받은 다음에는 소멸되어야 하는데 소멸되지 않고 계속 역할을 하는 부적절한 죄책감을 시효가 지난 죄책감이라고 합니다. 정신치료를 하다 보면 시효가 지난 죄책감이 계속 활동함으로써 새로운 자기로 살아가지 못하고 어려움에 봉착해 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 잘못된 죄책감은 하나님의 용서로 인해 단절되어야 하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고질적인 방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기억 또는 연상으로 일으키는 감정이 있습니다. 이는 적절한 죄책감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런 감정은 내가 붙잡아 머물러 있어야 하는 감정은 전혀 아닌 것입니다. 부적절한 죄책감이 신앙의 합병증 증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원수까지 사랑하는 인격으로 당장 변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안되면 자기를 가혹하게 정죄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좋지 않게 보이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지향적 목표를 오해한다는 것은, 중생과 촤종적 성화 사이의 과정 또는 간격을 보지 못하고 거의 동시적인 것으로 보는데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누가 5리를 가자고 하면 평균적으로 3리를 가는 수준에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지요. 그 사람이 자기는 10리를 못가고 3리 밖에 가지 못하는 것을 가슴아파하고 있는데, 그 마음을 공감하여 다루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10리를 가라고 만하는 사람에게는 다시는 내면의 마음을 내놓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지향적 목표만을 얘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공감하면서 아직 목표까지는 먼 길이 남아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가기를 격려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향적 목표에 이르지 못한 것은 모두 실패로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조금의 변화는 변화가 아니라 실패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지향적 목표를 이룰 수 없는 존재임을 절감하는 가운데 역시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는 쪽으로 달음박질합니다. 그러면서 성화 역시 인간의 노력은 필요없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사고로 나아가게 됩니다. 성화의 과정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간섭뿐만 아니라 인간이 책임을 지고 수고해야 하는 노력이 필수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과정적 존재입니다(5:12-6:2).

 

구원을 이루라(2:12), 여기서 구원은 성화의 최종 단계에 이르는 온전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로 받으라 하지 않고 노력하여 이루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라, 성화의 과정에는 인간의 책임영역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협의의 구원은 광의의 구원을 위해 통과하는 과정입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함이라(벧전 2:2). 여기서 구원도 성화의 최종단계인 온전한 구원으로서의 광의의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협의의 구원과 같이 은혜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향하여 계속적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라(3:12-14). 사도 바울은 아직 좇아가고 있는 존재-과정적 존재로 자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는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3:16). 우리는 자신의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을 평생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과정적 존재의 적용

 

아직은(또는 지금은, 현재는 )이라는 표현을 덧붙여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고 정확한 표현입니다. 저는 아직은 3 리를 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아직은 남편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타인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아 그 사람은 지금은 3리를 가고 있는데, 조금 지나면 4, 5리를 가게 되면서 점차 10리에 가깝게 가게 될꺼야.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존재입니다. 신앙인격의 성숙은 갓난아이의 수준에서 당장에 온전한 수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과정적-부분적 성공을 통해 온전한 성공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정을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과정을 존재로 생각해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쉽게 막아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의 감정의 색깔은 하나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기쁘고, 즐겁고 편안하고 자연스럽고 다정스러운 모습이 있어야 진정한 사람을 하는 것이고 사랑을 받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사랑을 한다거나 받는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적인 조건하에서의 사랑일 때만 가능한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 모두가 바라지만, 그러나 그것만이 사랑의 모습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상대방과 맺어온 관계와 양자가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고, 나의 사랑의 분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직 부족하고 상대방과의 관계가 아직 불편한 가운데 있으면, 아직은 부족하나마 현재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과정성을 이해한다면 자신의 수준이 많이 낮고 많이 미성숙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자유와 수용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정직한 자기로 자유하듯이 그러한 모습으로 타인을 대하고, 또 상대방이 나와의 관계에서 정직한 자기 모습으로 자유할 수 있도록 받아주는 태도를 키워 가야 합니다.

 

자기를 수용하는 것,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대해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자기를 부인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요? 그럼 부인되어야 하는 자기와 부인해야 하는 자기는 같은 자기일까요? 용어는 같지만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집합관계로 생각하면 쉽습니다. 전체로서의 자기가 있고, 부분으로서의 자기가 있습니다. 부인되어야 하는 자기는 부분적 자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전체의 자기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살려하는 자기로서의 부분적 자기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과 부정적인 자기상이 결합될 때에는 엄청난 힘으로 사람을 위축시키게 됩니다. 부인해야 하는 자기와 살려야 하는 자기가 있습니다. 부인해야 하는 자기로서, 옛사람과 살려야 하는 자기로서 새사람이 있습니다(4:22-23). 새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자기를 의미합니다. 건강하게 정상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자기에 대한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를 죽이며 살아온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열매가 많지 않습니다. 자신의 건강하고 정상적인 성숙을 위한 생각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피어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판단적 태도가 아니라 치유적 태도로 다가 가신다.

흔히 말하는 해야 한다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언제든 지금 당장 그러해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숙의 개념 안에서 미래적 의미로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자에게 속하는 것은 우상숭배, 살인, 도둑질, 거짓말 , 간음 등등이 속하겠고, 후자에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는 것 등등이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아닌 것은 지금은 아닙니다라고 하자.

성숙한 사람은 자기를 부당하게 미워하는 사람을 위하여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좋은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에게 좋은 뜻으로 지적해준 사람에 대해서도 편안한 마음을 갖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 생각나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도라도 좋은 마음이 아니라 좀 억지 또는 편치 않는 마음으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해도 그의 수준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적절한 아닙니다(no)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수준과 상황을 지혜롭고 선하게 고려한 이 적절한 no는 사실상 완전한 no가 이닙니다. 한시적인 no이고, 앞으로 언젠가 예(yes)를 하기 의한 미래적 yes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세상적인 모습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어떤 상황을 당하든지 할 수 있는 한, 선을 지향하며 사랑으로 사는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분수와 지체성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남을 바라보며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의 분수보다 분명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각자의 분수는 최선을 다해 이룰 수 있는 가능성 또는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여러분의 수준을 넘어서는 강적일 때는 얼마동안 그를 대하는 것이 유보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할 때 좋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 때까지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원하시는 것은, 좋은 모든 일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람을 대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여 사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남과 비교하는 상대적 관점에서 타인과 자신을 보지 말고, 각자에게 고유한 절대적인 관점을 가지고 각자를 보아야 함에 대해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달란트 비유(25:14-30),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21:21). 칭찬받은 과부의 예(12:41-44). 하나님은 인간을 다루실 때 부분으로 전체를 다루지 않고 전체 안에서 부분을 다루십니다. 각자에게 각자의 수준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수준에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과정적 존재/옛 사람과 새 사람(4:22-24)

 

다윗의 범죄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절대적 차이를 보게 됩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용서는 참으로 완벽한 용서입니다. 물론 이에는 다윗의 완벽한 회개가 먼저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인간은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정확히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대하실 때 전체 안에서 부분을 다루시지, 부분으로 전체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신체적 차원을 심리적 차원으로 환원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발달장애라고 하는 자폐증의 원인에 대해서 이전에는 대부분 엄마 또는 부모의 양육태도에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고학력자로 직장을 가지면서 정서적으로 차가운 엄마에게서 자라는 아이가 자폐증에 걸릴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자폐증의 원인이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것이 원인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정신분열증의 원인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심리적인 것이라고 주장되었지만 뇌 연구가들은 뇌의 이상으로 밝혀졌습니다. 우울증은 크게 정신병적 우울증과 신경증적 우울증이 있습니다. 전자는 뇌라는 신체에 이상이 생겨서 일어나는 우울중으로서 주된 치료는 약물치료이고, 보조적으로 정신치료가 병행되며, 후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 입시에서의 불합격, 배우자에 대한 실망 등과 같이 심리적 원인으로 의해 일어나는 우울증으로서 주된 치료는 정신치료이고 약물치료가 보조적으로 시용될 수 있습니다.

 

영적 차원을 심리적 차원으로 환원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 정신과의사의 대부분은 영적인 세계를 부인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차원을 심리화시켜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적인 차원의 것을 볼 수 있을 때만이 인간을 전체적으로 올바르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간음죄의 경우 그리스도에게는 죄에 대해 다루어 주는 것으로 접근해야지 심리적으로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심리적인 차원으로는 실질적인 치유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정신과의사는 심리적 차원을 신체적 차원으로만 다루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심리적 차원만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도 함께 겹쳐져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원인으로 우울증이 올 수 있다. 그런데 우울증 전체가 마치 영적인 원인, 특히 죄에서 온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영적이고 신앙적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우울증은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원인으로 말미암기도 합니다.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이 심하게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대개 부모님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하고 양쪽으로부터 적절한 양육을 받지 못한 채 자라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힘들고 스트레스였습니다. 그는 우선 학생들을 만나 내면의 얘기를 나누고 공감하여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데, 그것이 그에게는 무척 어려웠습니다. 고등부라는 한 조직체를 이끌어가는데 여러 복합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성경에 대한 지식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정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억압된 분노가 이유 없이 남편에게 차갑게 대하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분별된 자기인식이 분명할수록 긍정적인 자기의 부분-새사람-은 강화시키고 부정적인 자기의 부분-옛사람-은 버리는 성숙의 과정을 밝아 가는데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본래적 자기 또는 회복해야 하는 자기로서의 지향적 인간관이 있습니다. 6:1-2, 2:12, 벧전 1:14-16, 벧후 1:4, 5:48, 벧후 1:5-7, 4:13, 15, 요일 3:2

개인적 지향성: 5-10리 지체성, 달란트, 소명, 분수 등

 

그리스도인의 지향성의 실제적 적용

인간은 자기 안에 두 가지 종류의 자기가 있음을 압니다. 두 종유의 자기가 충돌되는 것을 압니다. 이타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을 추구하는 선한 자기와(새사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을 추구하는 악한 자기(옛사람)가 있습니다.

 

변화를 시도하는데 중요한 것은 방향성인데, 이 방향성을 위해 지향적 목표로 주신 것이다. 문자 그대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변화하여 점차 거기에 가깝게 되는 실제적 성숙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나와 확장된 나-작은 우리-를 넘어 전체 우리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을 향하는 지향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신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본받는 인격의 성숙입니다.

 

성경의 믿음은 자기를 대상으로 삼는 것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또는 약속을 믿고 따르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으로만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에 더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성숙을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협의의 구원이 아니라 광의의 구원으로서의 성화입니다. 성화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만 이루어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성숙을 시도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인간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과정적이고 지향적인 그리스도인관을 기초로 하는 권면

 

1. 지향적 목표를 사람을 대하는 실제적인 원리로 삼지 마십시오.

 

5:21-32절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아주 엄격해 보입니다. 반면에 간음한 여인, 우물가의 여인, 삭개오 세 차례나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 등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관대하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통합하여 신앙생활하고 계십니까? 지향적 목표를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통해 인격의 궁극적인 목적을 깨닫게 되는 반면에 사람들 속에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살아가시는 예수님을 통해 실제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목표는 우리에게 지향성을 가르쳐 주는 방향타로 삼되, 사람에 대하여 살아가는 원리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대하시는 모습에서 찾아야 합니다.

 

2. 지향적 목표와 현재적 목표(실제적 목표)를 잘 분별하여 현재적 목표를 설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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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적 목표를 너무 무리하게 세우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기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지향적인 존재라 하여 과도한 짐을 져서도 안됩니다. 지향적 목표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데 현재를 적절하게 살게 해주는 현재적 목표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상당히 드뭅니다.

 

3. 교회 공동체에 개인별 돌봄이 필요합니다

 

설교에서는 가능한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적인 지향적 목표를, 개인적, 상담적 접근에 있어서는 각 개인의 실제 또는 현실을 다루어 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각기 다른 수준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개인을 다양하게 다루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결코 전부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다는 식으로 접근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체인 인간에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닙니다. 인간은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밟아 성숙하여 가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타인을 판단 또는 비판하는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남을 판단하는 것 자체를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선 적절한 평가도 판단으로 여겨져 회피하는 모습들도 보게 됩니다.

 

7:1-5에 나오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의 대상은 누구일까요? 외식하는 사람입니다. 즉 외식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기 때문에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즉 제대로 된 인간이 되려면 먼저 자기에게 문제가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 사건을 통해서 인간은 내면을 포함하는 전체적 자기를 잘 알지 못하면 그만큼 쉽게 남을 판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모르는 자기를 예수님이 지적하셨을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신앙의 성숙 단계의 세 가지

 

1.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관심보다 믿고 싶은 하나님을 믿는 단계입니다.

 

2. 자기 또는 자기 욕구를 벗어나 신앙의 지도자들로부터 들은 하나님, 가르쳐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단계가 있습니다.

 

3. 신앙이 깊어지면서 점차 스스로 객관적으로 거기 계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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