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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폐결핵으로 요양하며 누워있을 때였습니다. 저를 돌보며 집안 살림을 하던 누님은 그때 시집갈 준비를 하면서 제 옆에서 수틀에 수를 놓고 있었습니다. 나는 수의 뒷면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누님이 수를 놓는 것이 참 바보같이 보였습니다. 빨강실, 파랑실, 노랑실이 좌우 양면으로 서로 얽히고 설켜 있기 때문에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참 실력이 없구나! 수를 뭐 저렇게 놓느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누님은 한 일주일 지나고 난 다음 수틀을 뜯어냈습니다.
놓은 수의 앞면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꽃이 있고 나비가 있고 시내가 있고 아름다운 경치가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습니다. 뒷편은 앞면하고 너무나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맡겨 놓으면 우리 인생에 좋은 일, 나쁜 일, 밝은 일, 어두운 일, 성공, 실패, 건강, 질병, 행복했던 것, 불행했던 것, 모든 것이 우리 인생의 수틀에 하나님이 바늘로 놓아 주시면 나중에 가서 합력하여 유익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생이란 수를 놓아주시겠습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하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2절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23절에 보면 신자들까지도 속으로 계속해서 탄식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탄식하는 것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연약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 때문에 탄식합니다.
1.고난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당이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면 문제에 사로잡혀서 기도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때가 기도가 가장 필요한 때입니다.
막상 기도하려고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이 안나오고 탄식이 저절로 나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지만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연약하여 좌절하기 쉬운 상황에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고난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두 가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저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시편 119편 71절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난을 통해서 주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죄를 그쳐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절입니다.”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베드로전서 4장 2절입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2.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본문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했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가능합니다.
신자가 교회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봉사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신자라면 세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한일서 4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거나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요한일서 5장 13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신앙을 갖는 것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존재의 도움을 구하는 종교성과는 다릅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세 전에 미리 정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장차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르신 곳에서]라는 복음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내가 걸어길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힘이 되는 그곳에서 예배하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갑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 기서 모든 것이란 좋은 일들뿐만 아니라 나쁜 일도, 고난과 탄식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실패하고 고통을 당하면 외롭고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이것도 합력하여 모든 것이 유익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려운 일들을 겪을 때 그 사건 하나만 생각하면 슬프고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러면 선을 이룬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선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 모든 것을 좋게 해 주신다는 뜻일까요?여기서 말하는 선은 누구의 선을 가리킬까요? 신자의 선일까요, 하나님의 선일까요? 신자의 선의 의미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선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에게도 선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윗은 위기의 상황애 처한 성도들에게 시편 34편 8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로마서 8장 29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셩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선을 이루어 간다는 것은 모든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단게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모든 것들을 통해 선한 방향으로 바꾸어 가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존 뉴턴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만류하시는 것은 그 어떠한 것도 불필요한 것이다.”
고난 자체는 힘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하신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닮도록 빚어가십니다. 우리가 삶에서 역경과 불행과 고통을 당할 때가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십니다.
3.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구체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요셉이 자신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 넘긴 형들을 대면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50장 20절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의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형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로 재직할 때에 자기 가족들을 초청하여 이민 수속을 받게 됩니다. 죽을 줄 알았던 아버지 야곱이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을 만났을 때 그 기쁨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피 엔딩으로 끝난 것일까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흘러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극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정에서 태어난 남자 아니는 나일강에 다 죽여야만 했습니다. 43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 노릇 하던 그 시간들은 불행하고 버려진 날들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시고 애굽의 무거운 짐 밑에서 빼어내어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의 광야 길로 코스를 잡았을 때 이 소식을 들은 애굽의 바로 왕이 그들을 추격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에서는 애굽의 병거들이 추격하고 앞에는 시퍼런 홍해바다가 혀를 날를 거리면서 집어 삼키려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죽었다고 아우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실수하신 건가요?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바다 위로 내밀라고 하셨을 때 바다의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나중에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여리고성 주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아모리 사람의두 왕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일을 듣고 우리의 마음이 녹았다고 기생 라합이 여리고 두명의 점탐꾼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수 2:10, 11).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출애굽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출애급 2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인해 나라 잃은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가 되어서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패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에 구원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로마서 11장 11절입니다. “그들(이스라엘)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마지막 시대에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로마서 11장 25, 26절입니다.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성경 주석가 윌리엄 바클레이가 목회 초년병으로 사역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느 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한 여인을 심방하였습니다. 고통에 시달리던 그녀는 목사에게 이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바클레이는 어릴 때부터 청력이 매우 안 좋아 그 여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잖아도 어려움으로 고생하고 있는 여인에게 부담을 주기 싫은 마음에 그 젊은 목사는 다시 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쨌든 그 여인에게 용기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답니다. “아,그거 참 좋은 생각입니다. 저도 그보다 더 좋은 생각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그 때 그 여인은 웃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이후 그 여인은 자살을 포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서부터 치유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고통이나 불행이 찾아왔어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참지 못할 슬픔이 찾아왔어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어도 반드시 하나님의 선을 지금 이루어 가시는 중입니다. 우리는 지금 눈에 나타나는 것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중에 달라집니다. 멀리 봐야 합니다. 끝까지 지켜봐야 합니다. 긍극적으로 하나님이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선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있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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