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겔러의 [부활을 입다]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세상이 더 나아지리라는 우리의 희망을 가장 위협하는 요소는 자연 환경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다양한 악입니다. 이 모든 희망의 구심점이 되는 중대한 사건이 하나 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희망을 잃은 세상에 기독교가 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미래에 누릴 부활한 삶을 현재의 생활 방식에 접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우리의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 재물과 권력을 보는 관점, 직장에서 일하는 태도, 성과 인종과 정의에 대한 이해와 실천 등이 모두 변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이 죽은 후에 무엇이 있는지 분명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삶의 현장에서 참여하기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1.당신은 예수님의 부활을 정말 믿습니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둘러싸고 반응을 보면 세 가지 부류가 나타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예수님이 평소에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에 신경이 쓰여서 철통같이 대비하자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빌라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62-64절입니다.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두 번째 부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은 완전히 맨봉 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난 버린 것 같은 절망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반응이 어러했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자신들에게 세 번씩이나 강조하였습니다( 마 16:21, 17:22-23, 20:18-19).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누너지자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들의 개다가 무너지는 순간 믿음에서 떠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 번째 부류는 이른 아침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꺾이자 절망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그래도 그렇지 그냥 주저 앉아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가를 해야 했습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기 위하여 찾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고 무덤에 찾아간 것은 아닙니다. 여인들이 무덤으로 달려가면서 가장 걱정이 되었던 것은 무덤을 막은 돌을 어떻게 옮기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에 찾아갔을 때 이게 웬 일입니까?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지진이 일어났고 천사들이 돌을 굴렸습니다(마 28:2). 당시에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은 이 광경을 보고 무서워하며 떨고 있었습니다(마 28:4). 여인들이 무덤에 들어가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예수님이 누우셨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놀랐습니니다.
그 청년은 누구일까요? 천사였습니다. 그 청년이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6, 7절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죽으신 이른 아침에 전에 일곱 귀신을 내쫓아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슬퍼하여 울고 있는 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했지만 그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슬픈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지 때문입니다.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더 나은 삶의 단계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존 머리, 부활의 주와 함께 하리라)
그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했다는 소식을 남은 제자들에게 전했지만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막 16:13). 이번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을 막고 있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4절).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야 했는지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슬픔에 잠겨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했다는 증인들의 말을 듣고 이전에 예수님이 예고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믿어야 했습니다.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믿고 반응하지 않으면 마음이 완악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부활의 확신을 갖게 하시고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2. 당신은 부활의 증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하십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에게 부활에 대한 확신과 사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기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의 소식을 ㅈ너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6장 15-16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죄의식에 사로잡혀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이러스 대책 마련, 환경 문제, 저출산, 고령화입니까? 외부적인 환경의 요인도 문제이지만 더 심각한 것은 내부적인 악입니다.
과학의 발전과 의학의 발달로 사람들의 수명이 연장되었지만 죄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나 제도나 법을 고쳐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악을 막기 위하여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덮기 위하여 법을 고칩니다. 진정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은 마음의 더러운 것이 깨끗해져야 합니다.
마가복음 7장 20-23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장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도행전 2장 32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 바울 역시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의 생애가 한 순간에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소식을 전한다고 사람들이 믿을까요?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는 순간 믿음이 생기고 회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는 순간 어둠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 복음의 광채를 발견하고 죽었던 영혼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은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정죄를 받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도 죄를 짓고 자책감에 괴로움을 당하다가 마침내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영혼이 죽은 사람입니다. 그저 육신으로 그럴듯하게 보이며 살아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영혼이 죽었는데 예수 믿고 죄 사함받고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복음은 자신의 영혼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충만한 은혜를 받으며 미래가 보장된 사람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오뚜기와 같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환난과 궁핍 가운데서도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고 그 고난에 기쁨으로 동참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하늘과 땅에 속한 권세가 표적과 기사로 나타납니다. 본문 17, 18절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니라.” 그동안 영적으로 눌려서 괴로움을 당하던 사람에게서 귀신이 떠나가므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멜리데 섬에서 불을 피우다가 독사에 물렸는데 조금도 상함이 없었습니다(행 28:3-5).
무슨 독을 마시더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본문을 잘못 해석해서 집단 자살에 이르는 이단 종파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독을 마시고 자신들은 죽지 않는다고 선포했다고 다 죽는 경우가 일어났습니다.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신자가 어떤 곳에서 독인지 모르게 마신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가운데 보호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면 낫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표적으로 사용됩니다. 마가복음 16장 20절입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느니라.”
부활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그의 삶 전체가 목적과 소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가장 의미있고 보람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지금의 우리에게 구원과 삶고 능력의 원천입니다. 부활은 대형마켓에서 물건 가격을 지불하면 주는 영수증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죄책감과 정죄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시킵니다.
이제 우리는 육체의 남은 때를 영혼의 때를 위하여 부지런히 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3절입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시적인 것으로 심고 영원한 것으로 보상받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에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고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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