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죽음과 심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과학은 우리의 오감과 이성에게는 많은 것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심령을 만족시켜주지는 못한다. 고난의 때와 임종 때에 자연을 정복한 것과 문명이 주는 복들과 과학의 승리와 예술품들의 향유가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사람이 온 천하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
과학은 우리의 기원, 우리의 본질, 우리의 종착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의 굶주림을 없애줄 떡이나 우리의 목마름을 그치게 해줄 물을 우리에게 줄 수 없다. 또한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줄 말씀도 해줄 수 없다
확신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미 감각에 의한 확신과 이성에 의한 확신을 구별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학과 종교의 중요한 차이는 과학은 인간적인 확신으로 만족할 수 있는 반면에, 종교는 신적인 확신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대상은 전적으로 믿을 수 있고 무오하며 영원한 진리여서, 우리가 사나 죽으나 현세와 내세를 위해 그것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불신앙의 책임은 하나님과 그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다.
복음은 양심을 위로하고,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주며, 의지를 강화시켜서, 전인적으로 새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수여한다.
복음은 양심을 위로하고,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주며, 의지를 강화시켜서, 전인적으로 새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수여한다.
믿음이라는 식물이 하나님의 약속들이라는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확신의 열매를 맺게 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들이라는 땅에 더 깊고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게 될수록, 더 튼튼하고 크게 자라고, 그 열매도 더 풍성하게 맺힌다.
19세기를 살았던 경건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자신에게 몰두하여 세상(wereld)을 잊었다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는 세상 속에서 우리 자신(onszelven)을 잃어버릴 위험성을 감수하며 살아간다. -
과학적인 확신은 이성적인 기초 위에 근거한다. 반면 믿음의 확신은 계시와 권위 위에 근거하며, 따라서 그것은 그러한 권위를 인정하는 믿음의 결과이다.
믿음의 확신의 주관적 힘은 과학적 확신보다 훨씬 더 강하다. 믿음의 확신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깊고 강렬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확신은 가장 완전한 안식이며, 최고의 영적 자유이다.
도리어 믿음의 확신과 이와 연결된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전개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바빙크의 마음을 거듭거듭 사로잡았고, 그가 가장 원숙한 사고를 기울인 주제는 신앙과 학문의 상호관계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관심 분야, 곧 생활 분야에 속한 그의 저작들로는 이와 같은 것들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1918), 『그리스도인 가정』(1908), 『현대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음』(1918), 『전쟁의 문제』(1915), 『기독교, 전쟁, 국가 연합』(1920).
마지막에 언급된 책을 보면, 바빙크가 20세기의 문제들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보였는지 알게 된다.
정말로 바빙크는 “자기 시대에 대해 예민한 분별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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