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북미 지역에는 전통적인 신앙과 도덕관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 과거에 성장한 주류 교회들은 쇠퇴했어도 복음주의 교회들 대부분은 건재하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을 두고도, 탈기독교 사회로 완전히 진입했다기보다 여러 지역에 걸쳐 기독교의 영향력이 드문드문 분포된 나라(spotty Christendom)가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그러나 서구 사회에 미치는 기독교의 영향력이 전반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모든 세대가 기독교 신앙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미국 교회의 3분의 2 이상은 이미 정체기를 맞았거나 쇠퇴하는 중이다.[2]
‘종교’는 사회에 유익을 주거나 해를 끼치지 않지만, ‘교회’는 해롭고 악할 뿐 아니라 사회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성과 젠더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기독교가 고수하는 입장은 기본적인 인권을 제한하거나 위협하는 관점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때일수록 스스로를 점검하고 기도하며 어떻게 새로운 복음의 접점을 마련하여 그 문화 속에 들어갈 수 있을지 따져 보아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선포하며 그 모델을 보여 주되 주변 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방식으로 설득력 있게 그 일을 해야 한다.
이러한 접점을 마련하는 과정에는 늘 비슷한 어려움이 따랐다. 그중 한 가지를 들자면 ‘영적 교만’이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인간의 교만 때문에 부흥이 어떻게 약화되는지 고찰하며, 영적 교만은 기독교인 사이에서 쓸데없이 발생하는 다툼이나 분열 혹은 파벌을 통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어려움으로 혼합주의를 들 수 있다. 이는 사사기에서 볼 수 있듯이(삿 2:11-15), 기독교인이 자신의 신앙을 그 문화 속에 자리한 우상과 뒤섞어 버릴 때 나타난다.
오늘날의 교회를 살펴보자면, 이전 시대에는 결코 발생하지 않았던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바로 기독교 신앙에 점점 더 적대감을 드러내는 문화를 다루어야 하는 어려움이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란 단지 (중국이나 인도 또는 중동에서 볼 수 있는) 비기독교 문화가 아니라 탈기독교 문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화 속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일까?
수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제로 하였다. 곧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도 신성한 질서 체계(sacred order)를 믿고 있다고 여겼다. 다시 말해,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세계가 절대적인 도덕의 근거가 될 뿐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까지 약속한다는 믿음을 주변의 모든 사람도 가지고 있다고 믿어 왔다.
탈기독교 사회와 복음 전도의 어려움
후기 현대 사회로 들어서며 역사상 처음으로 신성한 질서를 거부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개인의 자유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인간이 순응해야 할 초월적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또 우리 스스로가 가치관을 정하고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문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혹 구원이 필요하다면, 그 구원이란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부터 해방되는 구원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죄의식이나 초월성에 대한 인식도 없고 전통적인 신앙의 이해도 부실해서 절대자나 사후 세계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까? 현대 교회는 이처럼 지금까지 만나 본 적이 없는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TV나 라디오 또는 영화가 전달하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다차원적인 방식으로 개인의 정체성, 자유, 행복, 상대주의와 같은 현대 사회의 내러티브와 믿음을 전달한다.
• 이는 우리에게 단지 새로운 믿음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믿음을 형성하는 방식 자체를 바꾼다. 이때의 믿음은 매우 빈약해서 스스로를 바라보고 싶은 방식에 적합할 때에만 채택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버려진다.
제임스 에글린턴(James Eglinton)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실린 “대중주의 대 혁신주의: 누가 최선의 길을 알겠는가?”(Populism vs
Progressivism: Who Knows Best?)라는 기사에서 오늘날 분열된 문화가 드러내는 양극화 현상을 다루었다. 거기서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두 가지 경쟁적인 전망이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이렇게 밝힌다.
한 전망으로는 위대한 국가를 다시 세우고 개인을 단체보다 중요시하며 과거의 전통을 지키는 데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이 모인다.
다른 전망으로는 철저히 개인화된 미래로 나아가며 과거라는 속박을 벗어버리고 혁신을 붙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문화에서 각 진영은 자신들의 전망을 수용하지 않은 사람들을 배척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전망은 개인의 자유로부터 우상을 만든다. 또 다른 전망은 인종과 국가, 혈연과 지연으로부터 우상을 만든다. 둘 다 세속적이다. 양쪽 모두 초월적인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피조물을 신으로 둔갑시킨다.
심각한 문제는 교회가 이런 양극화에 사로잡혀 진보든 보수든 정치적 연합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을 예로 들면, ‘진보 복음주의’(blue evangelicalism)와 ‘보수 복음주의’(red evangelicalism)가 함께 발흥하는 양상을 보인다. 전자는 인종과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정의를 외친다. 그러나 성과 젠더 또는 가족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
현대 문화에서 복음의 접점을 이루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여섯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가 어떤 문화를 대상으로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가 무엇인지 복음으로 먼저 분석해야 한다.
•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다.
• 모든 관계는 교환적이다.
• 모든 정체성은 깨지기 마련이다.
• 모든 만족의 근원은 실망을 가져다준다.
모순적이게도 이와 같은 상태에 있으므로 우리는 객관적으로 자유롭지 않다. 지역 사회는 쇠퇴하고 가정은 깨어지고 있으며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완고하고 냉담한 관료주의가 판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주관적으로도 자유롭지 않다. 모든 사람이 내면의 고독을 느끼며 어딘가에 노예처럼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전제, 새로운 전도 모델의 필요
바로 우리가 속한 사회에는 여전히 교회를 찾아 헤매거나 교회에 와 보라는 초대에 마음이 열려 있는 비기독교인이 많다는 전제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신앙의 근간도 갖추지 않았으며 세상을 지배하는 문화의 내러티브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적대감만 키우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 세대에게 새롭고도 설득력 있게 복음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또 이와 관련하여 초대 교회가 보여 준 역동적인 복음 전도를 현대판으로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시대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고 기본적인 이해가 결여된 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회심하며 교회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역동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주목 (Attention)- 복음을 주목하게 만들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복음이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들의 관심을 복음으로 이끌 수 있을까? -
• 기독교는 공동체와 인간관계를 얄팍한 계산으로 대하지 않는 자유를 제시한다.
• 기독교는 자신의 성취 여부와 상관없이 타인으로부터 소외되어도 깨지지 않는 정체성을 제시한다.
• 기독교는 수치심이나 반감을 남기지 않고 죄의식을 대하거나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 기독교는 고통으로 상실되기보다 그 깊이를 더해 가는 인생의 의미를 제시한다.
• 기독교는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만족을 제시한다.
• 기독교는 정의를 추구하면서 타인을 억압하지 않도록 지켜 주는 토대를 제시한다.
• 기독교는 다가오는 미래만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침착하고 평안히 맞아들이게 하는 상태를 제시한다.
• 기독교는 인생에서 경험하는 초월적인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다. -
매력 (Attraction)- 기독교에만 있는 탁월한 요소를 보여 주다
기독교에 대해 사람들이 제기하는 의문이나 반대에 답변을 제공하는 전통적인 변증법을 사용하기 전에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내리고 있는 답변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 기독교는 고통으로 상실되기보다 그 깊이를 더해 가는 인생의 의미를 제시한다.
• 기독교는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만족을 제시한다.
• 기독교는 공동체와 인간관계를 얄팍한 계산으로 대하지 않는 자유를 제시한다.
• 기독교는 자신의 성취여부와 상관없이 타인으로부터 소외되어도 깨지지 않는
정체성을 제시한다.
• 기독교는 수치심이나 반감을 남기지 않고 죄의식을 대하거나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 기독교는 정의를 추구하면서 타인을 억압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토대를 제시한다.
• 기독교는 다가오는 마래만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침착하고 평안히 맞아들이게 하는 상태를 제시한다.
• 기독교는 인생에서 경험하는 초월적인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다.
예증-사람들의 궁금증에 진리로 답변하다
이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전통적으로 제기되는 의문을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하나님이나 성경과 관련해 주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다. 또 성경과 관련해서는 역사적 신뢰성이라든가 과학과의 양립 가능성 등이 거론되곤 한다.
오늘날 비기독교인은 특별히 교회가 역사적으로 행한 부당한 사례를 문제 삼을 때가 많다. 가령 노예 제도를 묵인하거나 여성을 억압했던 사례라든가 최근에는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를 배척하는 사례 등을 문제 삼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겸손하면서도 분명한 태도로 답변해야 한다.
그러면서 질문자가 제기한 의문이 어떤 가정과 도덕적 판단에 기초하고 있는지 부드럽게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럴 때 믿음의 도약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신 (Conviction)-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하다
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 만큼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설명해야 한다. 복음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메시지이다(욘 2:9). 이러한 복음 제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점을 내포해야 한다.
인생의 의미란 ‘자유해지는 데’ 있다”고 이야기하는 현대 문화에서 복음을 전할 때,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 나쁜 소식: 당신은 자유를 원하지만 사실은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도 당신은 다른 무언가를 위해 살아야 하며,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에 종속되어 타인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은 자신의 실존에 근거하여 의롭다는 정체성을 얻으려 하는데, 이는 결국 깨질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만큼 타인을 무시하기 마련이다. 나아가 당신이 찾고 있는 깊은 만족도 사실은 당신이 파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세상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만족이다. 이 모든 사실은 당신이 영원하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그분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이는 영원한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는 삶이나 다름없다.
• 좋은 소식: 예수님은 세상이 내세우는 힘의 논리를 십자가에서 뒤집으셨다. 그분은 섬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권세를 내려놓으셨기 때문이다. 또 당신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타인에게 함부로 대하며 정의롭지 않게 행한 삶에 대해서도 그분이 대신 정의로운 형벌을 받으셨다. 이로써 당신은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는 정체성을 얻게 되었다. 이는 당신이 무언가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확인시켜 주는 정체성이다.
세상의 통념을 바꾼 초대 교회
여기서는 허타도가 소개하는 내용을 다섯 가지 요소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동시에 그 모든 요소가 전체를 구성하고 있기에 다 함께 묶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밝힌다. 그렇다면 이러한 점을 유의하면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지닌 사회적자세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여러 인종과 민족이 함께한 공동체
다시 말해, 동일한 문화권 안에서 종교를 이어받은 모든 사람들은 신앙에 있어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들의 민족이 그들의 신앙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각 민족과 문화가 신성한 권위를 지니고 있기에 그 자체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가진 신앙은 달랐다. 그들은 참된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며 모든 사람은 그분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에게 신앙이란 민족의 배경과 상관없이 더욱 근본적인 차원에 속하는 문제여서 다른 무엇보다 깊은 연대감을 주었다.
그러므로 어떠한 민족이나 문화적 배경을 지녔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자신이 본래 이어받은 문화와는 다른 공동체, 즉 여러 인종과 민족이 함께하는 공동체에 소속되었다. 이는 그 어떤 종교도 이루지 못한 새로운 공동체였다(행 13:1-3; 엡 2:11-22 참고).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는 데 헌신한 공동체
이교 신앙을 가졌던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인의 혁신적인 신앙생활을 보고 “가난한 기독교인뿐 아니라 가난한 이교도인까지 돌본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되갚지 않고 용서한 공동체
초기 기독교인은 타인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거나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해도 앙갚음이나 복수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처형을 당하거나 원형 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오히려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로 유명했다(이는 예수님에 이어 스데반이 보여 준 모습이기도 하다).
낙태를 비롯한 유아 살해를 강력히 반대한 공동체
당시의 기독교인은 낙태를 비롯한 유아 살해를 강력히 반대했다. 단지 이론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반대했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버려져 죽어 가거나 노예로 팔려 갈 위기에 처한 아이를 발견하면,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양육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가치가 절하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초대 교회는 낙태에 반대했으며, 이는 자기 민족을 중심으로 계층화되어 명예만 중시하던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눅 1:15; 약 1:27; 시 139:13-16 참고).
성 윤리를 근본적으로 바꾼 공동체
결혼한 여성은 다른 누구와도 관계를 가질 수 없었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았다. 남성은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와도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상대가 자기보다 낮은 지위에 있다면 어떤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러한 사회적 폐단으로부터 결혼과 성관계를 분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결혼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를 하나님 사랑과 구속이라는 우주적 질서에 연결시켰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셨기에 우리는 다른 대상이 아니라 오직 그분께만 우리를 온전히 드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바로 그 사랑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다른 두 존재인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성관계는 자기 만족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언약 관계 안에서 삶 전체를 내어 주는 행위로 여겨졌다. 곧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뛰어넘는 연합을 이루어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각자의 아름다움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행위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성 관계를 더욱 높은 자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매력적인 정망이 열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본받아서 현대 교회가 지녀야 할 사회적 자세는 어떠한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민족 교회를 세우는 공동체
모든 사회가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교화가 다민족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따라서 각 지역 교회가 문화적 유연성을 발휘하여 자기 전통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또 그와 관련된 역사에만 향수를 느끼며 고착화돤 방식으로 사역하지 않는다면, 복음의 능력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어 문화의 장벽을 넘어 여러 사람들을 연합시키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가난한 자를 돌보고 정의를 추구하는 공동체
교회가 전하는 말씀(복음)과 보이는 행동(정의) 사이에 바른 관계를 세우는 것이다.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정의가 ‘아닌’ 잘못된 정의부터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전체주의 사상이나 칸트 식으로 독립적인 개인을 강조하는 사상 또는 공리주의처럼 한 가지 틀을 통하여 세상을 해석하는 환원주의적 이론들이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파악해 한다.
정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독특해서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의 공정성을 함께 추구한다. 또 권력 계층이 아닌 자들을 실제로 존중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돈과 소유물을 나누는 일에도 관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손한 자세로 소통하는 화평의 공동체
오늘날 서구 문화를 분열시키는 요인은 특정 민족이나 경제 관련 이슈만이 아니다. 현재 우리는 이념적으로 분열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공적 담론에서조차 서로의 생각을 신중히 경청하며 관대하게 나누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은 진정으로 공손한 자세를 보기 원하는 세상 앞에서 그러한 본이 무엇인지를 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기독교인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공손한 자세를 갖추는 과정에는 타인을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도 포함된다. 이러한 노력은 교회 안팎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이에 낙태를 죄로 규정한다. 만일 다른 선택의 방안이 없다는 이유를 들며 낙태를 정당화하게 되면, 결국에는 유아 살해나 치매에 걸린 노인을 안락사하는 일까지도 정당화하게 된다.
초대 교회는 정치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천적인 차원에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데 앞장섰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은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의 삶 전체를 책임지고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단지 아이의 생명을 살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성장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족의 손길과 사랑을 베푸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세상에 대항하는 성 문화를 이루는 공동체
오늘날 기독교를 반대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시대에 맞지 않는 성 윤리를 강조한다는 데 있다.
오늘날 교회는 성관계가 자아 성취나 실현을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세상의 성 문화 논리를 간파해야 한다. 또 그러한 논리가 결국에는 우리 모두를 비인격적인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의 성관계는 언약 관계를 성숙하게 다지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섹스 소비자를 위한 상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성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결혼과 가정생활을 무너뜨린다.
기독교가 말하는 성관계는 서로에 대한 깊은 배려를 바탕으로 한다. 자신의 인생을 상대를 위해 내어 주며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만 그러한 관계가 허락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세상에 대항하는 - <팀 켈러의 탈기독교시대 전도>, 팀 켈러 지음, 장성우 옮김 - 밀리의 서재
성 문화를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 가야 한다. 이 문화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내포한다.
• 남성과 여성은 결혼 전에 성관계를 갖지 않아야 한다.
• 남성과 여성은 상대의 외모나 배경이 아니라 성품에 근거해서 결혼 상대를 찾아야 한다.
• 이혼을 했든 사별을 했든 아니면 처음부터 결혼을 하지 않았든 홀로 있는 지체들도 교회 안에서 가족으로 여겨져야 하며,그들도 함께 아이들을 돌보고 깊이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 교회 안에 동성애적 성향을 지닌 이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소중한 구성원으로 여겨야 하며 정결한 삶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소명을 따라갈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 성과 젠더에 관한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라고 해도 그들을 환영하고 겸손과 인내와 사랑으로 그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이러한 세속적 내러티브는 다음과 같은 신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정체성(Identity): “당신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야 한다.”
• 자유(Freedom):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당신이 선택한 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
• 행복(Happiness): “당신은 자신이 느끼기에 가장 행복한 일을 해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도 그 행복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 과학(Science):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객관적인 과학과 사실로부터만 주어진다.”
• 도덕성(Morality): “모든 사람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
• 정의(Justice): “세상 모든 사람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공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
• 역사(History): “역사가 진행될수록 종교는 퇴보하고 사회는 진보한다.” - <팀 켈러의 탈기독교시대 전도>, 팀 켈러 지음, 장성우 옮김 - 밀리의 서재
기독교인의 성품을 형성하는 대항적 교리 교육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추어야 한다.
•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후기 현대 문화의 내러티브와 어떻게 다른지 직접적으로 대조하여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문답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 고대의 예배 방식을 현대의 문화적 상황 속에 조화시킨 예배를 드려야 한다.
• 기독교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예술을 활용해야 한다.
• 기독교인의 성품을 형성할 수 있도록 목회자와 평신도 리더십을 함께 교육하는 신학 훈련을 진행해야 한다.
• 현대인의 바쁜 일상으로 거의 사라져버린 경건의 시간을 재개발해야 한다.
버지니아대학교에서 종교와 문화 및 사회 이론을 가르치는 제임스 헌터(James D. Hunter)는 자신의 책 To Change the World: The Irony, Tragedy, and Possibility of Christianity in the Late Modern World(세상을 바꾸다: 후기 현대 사회에서 드러나는 기독교의 아이러니, 비극, 그리고 가능성)에서 지금까지 기독교인이 시도했던 세 가지 문화적 전략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모두 다 결점이 있는 전략이라고 한다.
• 문화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면서 그 문화를 지배하려는 전략
•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그 문화로부터 철수하려는 전략
• 문화와 타협하고 그 문화에 동화되려는 전략
여기서 헌터가 제시하는 대안적 전략은 문화 속에 그대로 있되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는 전략이다. 그는 기독교인이 문화를 지배하려 하거나 또는 그로부터 철수하려하거나 아니면 그에 도오하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설명한다. 오히려 기독교인은 문화의 전 영역에 들어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교회에서 모일 때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평신도가 복음의 영광을 추구하며 세상 속에서 자신의 일과를 매일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 그리하여 과학자, 경제학자, 정치철학자, 예술가 또는 그 누구든 간에 철저한 신학적 사고에서 주어지는 통찰로 빛을 발해야 한다. 이처럼 평신도에게 최적화된 신학을 위해 교회가 맡아야 할 역할은 안주인 노릇이 아니라 종노릇이다
이와 같은 문화적 상황에서 복음주의 신앙은 호소력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각 개인이 신앙을 결단하고 회심을 경험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음주의 신앙은 개인의 선택을 강조하는 오늘날 문화에 적합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도전이 되기도 한다.
탈기독교시대에는 아직 한 번도 기독교 부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일은 전례없이 일어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이 약속에 마감 기한은 없다.
탈기독교 사회에서 복음의 접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협력적이면서도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교회가 필요하다.
왜 협력적인 사고가 필요할까?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사안에 두루 강점을 갖춘 단 하나의 교단이나 전통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 복음 전도와 양육,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 비판, 부흥과 영적 각성, 정의와 자비의 사역, 신앙과 일의 통합, 그리고 성 윤리에 관한 역사적 기독교의 관점 등 모든 문제에 대해 완벽하게 준비된 개인이나 교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독립적인 사고가 필요할까? 뉴비긴이 반복해서 강조한 바와 같이, 오늘날 교회가 세속 문화에서 발생하는 온갖 우상에 사로잡혀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배경에서 서로 다른 우상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논의에 전부 다 찬성하는 교회 역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배경에 속한 교회에서는 현대 복음주의나 성 윤리에 관한 담론이 불편하게 여겨질 수 있고, 마찬가지로 인종이나 경제 관련 이슈에서 정의를 강조하면 민감하게 반응하는 교회도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복음의 접점을 마련하고자 애쓰는 이들이라면, 서로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을 점검하는 훈련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
이와 동시에 각자가 세속 문화에서 경험하는 우상의 문제를 다루는 데 타인의 조언을 일방적으로 따라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협력적이면서도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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