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 . .
우리가 어떤 부분이든 너무 지나치면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과 주위의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심각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바로 갈등문제입니다. 즉 세대간의 갈등, 지역간의 갈등, 이념간의 갈등(진보/보수), 계층간의 갈등(부자/가난한자) 등입니다. 이러한 갈등은 자세히 보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도 너무 극단화되면 안됩니다.
대부분 이단에 빠진 분들을 보면 극단적으로 치우친 분들이 많습니다. 무엇이든지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문제가 됩니다.
요즘 세계적으로 테러의 공포에 있습니다. 대부분 테러에 가담하는 자들이 극단주의자들입니다. 특히 요즘 모슬림 국가의 알라신을 섬기는 이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폭탄과 기름을 몸에 뿌리고 불로 뛰어 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점은 인생을 살아갈 때 극단적인 모습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부분이 극단적이든 간에 극단적인 모습은 자기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보편적인 진리 가운데 권선징악(勸善懲惡)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처벌하시고 선을 도모하십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보니까 종종 예외도 있더라는 겁니다. 자기는 최대한도로 의롭게 살려고 하지만 너무 지나치면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되 의만 가지고는 안 되고 지혜가 함께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좋은 것도 극단화되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극단화되면 악이 됩니다. 극단은 반드시 극단적인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완벽과 의와 지혜와 성실을 향하여 꾸준히 노력하되, 가끔 연약함으로 인해 실수가 나타날 때에도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 23: 23).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지극히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 박하가 하나 생기면 십일조 내느라고 1/10을 잘라냅니다. 향이 하나 생겨도 1/10을 잘라야 합니다. 이들은 십일조를 철저히 한다고 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이 빠뜨렸기 때문에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입니다.
율법에는 글자보다 더 중요한 정신이 들어있는데 의로운 것, 자비로운 것, 신뢰하는 것, 이것을 다 잊어버리고 향 자르느라고 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알아서 그 정신을 따라 율법을 지켜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포괄적인 모습, 품어주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영원히 품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서로 좀 부족한 부분을 발견해도,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참 지혜를 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극단적인 인생이 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온전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편안하고, 서로에게 덕이 되고, 서로를 용납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경 잠언에 보면 아굴이라는 지혜자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신경을 쓰고 시시콜콜 따지며 마음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의인도, 완전한 지혜자도, 완전한 무식자도 없습니다. 때문에 그저 우리들이 말하다가 보면 좋지 않은 말도 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의롭고 정직하고 옳게 말하며 살지만 어쩌다가 말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한 마디 가지고 꼬투리를 잡아서 다투고 관계를 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을 향하여 열심히 전진하되 인간의 연약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왜? 사람은 아무도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인간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완전한 지혜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도 23절에서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지혜자가 되고 싶어서 노력을 했는데도 완벽한 지혜란 없더라는 것이지요.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인생을 다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다고 아는 척하지 말고, 의롭다고 의로운 척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극단을 피하고 온건한 삶을 누리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정직, 정의, 지혜를 열심히 추구해야 하지만, 우리에게 이것이 모자라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영원히 품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서로 좀 부족한 부분을 발견해도, 내 종만 나를 저주한 것이 아니라 나도 내 종을 저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참 지혜를 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악을 완전히 피해서 살 수는 없지만 악을 피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심판과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선과 정직과 정의와 지혜를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극단을 피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온전한 삶을 삽시다. 서로에게 편안하고, 서로에게 덕이 되고, 서로를 용납하는 가운데 우리가 편안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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