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의 시대적인 배경
열왕기하 14장 25절에 의하면 아밋대의 아들 요나의 가정이 갈릴리 가드헤멜에 있었으며, 주전 8세기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통치하던 기간에 예언자로 등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멜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밧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북왕조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크게 세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내란의 시기입니다. 여로보암 1세,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이, 오므리 아합 왕들의 통치시기입니다.
둘째, 부유와 번영의 시기입니다. 아하시야, 여호람, 예후, 여호아하스, 여호아스, 여러보암 2세 왕들의 통치시기입니다.
셋째, 급격한 몰락의 시기입니다. 스가야, 샬룸, 므나헴, 베가, 호세아의 통치시기입니다.
"요나"라는 이름의 뜻은 비둘기, 그는 아밋대의 아들로서 가드헤벨 사람입니다. 가드헤멜이란 곳은 스불론 지파의 기업으로(수 19:10-13),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동북쪽으로 약 5킬로 지점에 있는 곳입니다.
유대인은 속죄일에 회당에서 의식의 일부로소 항상 요나서를 읽습니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우리는 요나와 같으니이다" 라고 응답합니다. 우리는 불순종함에 있어서, 영혼구원에 무감각 하는 데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요나입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면에서 요나입니다.
요나서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한 길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니느웨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다른 한 길은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가는 다시스의 길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두 길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의 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길, 신명기에 복과 저주의 길(신11:26-28), 시편에는 축복받는 길이 있고, 망하는 길이 있습니다(시 1:1-2), 예수은 넓은 길, 좁은 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7:13-14). 요한계시록에는 천국과 지옥의 길이 있습니다(계 20:10, 14, 15).
왜 요나가 니느웨의 길을 버리고 다시스로 갔습니까?
첫째 이유는 영적으로 잠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다시스의 길로 가는 여정에서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잠자던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1). 성도가 영적으로 눈이 감기면 다시스의 길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 이유는 신앙적인 독선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은 민족적 편협주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복을 주셔서 선민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사명은 그들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에 빠져서 사명과 봉사를 잃어버렸습니다.
셋째 이유는 사명의 어려움과 사역지의 위험 때문입니다.
이 성은 너무 커서 가로 지르려면 삼일이 걸린다(3:3), 그 성 사람은 악독하여 하나님의 심판 직전에 있는 상태입니다. 300년간 세계를 지배한 막강한 군사적을 가진 도시로 요나가 홀로 하나님의 명령을 들고 간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할 때 세상을 사랑합니다. 불순종의 길로 갑니다. 신앙을 특권화합니다. 사명과 봉사를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립니다.
요나서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이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나서는 모두 4장에 48절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를 네 가지로 계시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야웨(여호와)라는 이름이 23번, 엘로힘(하나님)이란 이름이 10번, 야웨와 엘로힘이 합쳐서 나오는 것이 네 번(1:9, 2:1, 2:6, 4:6), 엘(하나님)이란 이름이 1번 나옵니다. 모두 40번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고, 인칭대명사로는 20회 가량 나옵니다.
야웨(여호와)라는 이름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1:1). 엘로힘(하나님)은 주관자, 지도자라는 의미의 일반적인 이름입니다. 엘(하나님)은 능력있다, 강하다는 뜻입니다. 모든 권능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요나서를 통해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고 하번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제시하셨고, 자신이 모든 것의 주관자요, 모든 권능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요나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1:1).
둘째로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를 가만히 두시지 않으십니다(1:4).
불순종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습니다. 자기 자기뿐 아니라 자기 주위에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는 불순종은 수많은 손실로 끝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요나 한 사람을 깨우쳐주시기 위해서 4절에는 대풍을, 17절에는 큰 물고기를, 4장 6절에는 박넝쿨을, 4장 8절에는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요나와 함께 탄 무리들의 기도요(1:14), 고기 뱃속에서의 요나의 기도(2:1-9),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의 기도(3:8)입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두 번째 임하시니라.
여섯째로 하나님은 모든 백성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요나는 구원이 이스라엘게만 필요한 줄 알았습니다. 자기 나라의 적국이며 타락한 도시인 니느웨는 망해야 하는 곳인줄 알았습니다.
일곱째로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폭풍을 움직이시고, 바다를 흉융케 하시고, 뛰노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며, 큰 물고기로 요나를 삼키게 하시고, 토하게 하시고, 회개한 니느웨 성 사람을 감찰하시고, 박넝쿨을 준비하여 갑자기 자라게 하시고 벌레를 준비하여 박넝굴을 씹게 하시고, 뜨거운 동풍을 불게 하시고 햇볕을 뜨겁게 요나 머리 위에 쬐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요나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의 공식적 표현과 거기에 대한 인간의 확고한 반항으로 시작됩니다. 요나가 니느웨 성을 가기 싫어했던 것은 대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였다는 위압감이나 사악함 때문은 아닙니다(3:1-5). 4장 2절에 보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기 원치 않았던 이유는 자신이 심판의 메시지를 가지고 가면 그들이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실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내리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저주를 받아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멀어지는 것은 내려가는 것뿐입니다(1:3, 5, 2:6).
요나서의 특징
첫째, 요나서는 잃어버린 자들과 정죄당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둘째,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로 가라는 사명을 받았지만 고집을 부리고 도피하는데 반해, 이방인 사공들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하여 경외하는 것을 보게 된다.
셋째, 요나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의 패턴이다.
1장
요나가 도망가는 것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피하는 것은 뷸행이요 슬픔입니다. 모든 건물에는 비상구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정말 사랑하는 자에게는 환난을 당해도 피할 길을 주십니다. 불순종은 요나가 했는데 떠는 사람은 선원입니다.
우리는 불순종의 항구에서 마침 만나게 되는 배를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의식적으로 불복하면서 일시적인 마음의 인상이나 주관적인 느낌이나 혹은 꿈이나 환상 등을 인도의 결정적인 길잡이로 삼는 것은 위험하고 비성서적입니다. 내 발에 등이 되는 것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시 119:105).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불순종의 길 밖에 없습니다. 불순종의 대가는 비싼 대가를 요구합니다. 요나는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습니다. 다시스행 배삯은 육로로 가는 니느웨행 여비보다 훨씬 비싼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는 관광호가 아니라 상선입니다. 노예를 싣고 팔러 가는 노예선입니다. 그래서 이 배는 왕복표를 팔지 않습니다. 한 번 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욥바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배 밑층으로 내려가고, 결국 바다 밑에까지 내려갔습니다. 자기의 뜻을 따라가는 삶은 내려가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내려갈까 염려하노라”(히 2:1).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변화는 생각의 변화입니다. 생각 다음으로 변해야 할 것이 감정입니다. 생각의 변화, 감정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이들을 바라로는 눈 자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즉 관계의 변화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정의감보다 훨씬 높고 귀한 것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정당한 정의감이라 하더라도,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자에 대한 사랑보다 더 높고 귀할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한 존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내 욕심으로 상처를 주기에는 그들의 인격이 너무 귀하고 그들의 행복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사실이 들어올 때 비로소 사람은 죄를 이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자녀뿐 아니라 그들의 재산도 소중히 여기십니다. 내 재산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재산도 소중합니다. 내 시간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시간도 소중합니다. 내 인격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인격도 소중합니다. 내 감정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감정도 소중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그 속에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받기 원하고 존경받기 원하며 용서받기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사람 중에는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 불행해지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여러분과 저의 니느웨가 있습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남편과 때론 아내도 있습니다.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온갖 수모와 모욕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픔을 주는 가족과 친척과 형제들이 있습니다. 과거에 사귀었던 도덕적으로 타락한 친구들도 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한 때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 같은 나라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복음을 들고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내 귀에 크게 들려지는 것이 영적인 생활입니다. 온 이스라엘과 엘리 제사장에게 들리지 않은 하나님의 음성이 오직 사무엘에게만 크게 들려지므로 사무엘이 그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으로 크게 쓰여지듯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음성이 크게 들려지는 역사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귀를 막는 자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방법도 거칠어집니다. 그래야 우리가 깨닫기 때문이다. 레위기 26장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않으면 칠 배나 더 큰 재앙과 심판이 있을 것을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18절, 21절, 26절, 28절). 죤 밀턴은 40세에 맹인이 되었고 아내를 잃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인격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세 가지 면에서 죄가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을 불순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악한 죄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포 시스). 그 이유는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무관심과 불순종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에 대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도들이 기도하는 죄를 범하므로 교회는 능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셋째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죄를 짓는 것은 되는 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죄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영적생활을 방해하는 죄입니다. 맥가브란 박사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부흥을 가져다 주는 것은 기도이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성도와 교회가 힘을 잃어버리면 세상의 세속화는 더욱 거세게 일어납니다.
기도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기도없는 신자의 삶은 하늘 문이 닫힌 상태입니다. 하늘 문을 여는 여는 열쇠가 기도입니다. 할레스비는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의 능력을 이 세상에 주실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요나의 선교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메시야의 오심과 이방인들의 부르심에 이르기까지의 구속사의 가장 위대한 사건 가운이었습니다. 당시에 니느웨 성의 특징은 크고 악독한 성읍이었습니다(1:2). 8세기의 니느웨는 신 앗수르 제국의 거대한 권력판도의 중심지로서, 고대의 근동 제국을 정복한 대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앗수르의 권력 밑에서 만큼이나 그토록 잔인하게 수난을 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니느웨의 별명은 강도의 도시입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가에 있는 도시로서, 엣날에 니므롯이 건설했고(창 10:11, 12), 산헤립이 수도로 정한 후에 스스로 높아져서 교만이 하늘까지 갔던 그런 도시입니다. 유대인들이 제일 싫어하고 제일 미워하는 곳인데 어떤 사람이 굉장히 미워서 죽든지, 살아지든지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여러분의 니느웨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정반대편 다시스로 도망을 치게 된다. 죄는 시시한 것에서 시작해서 큰 것으로 변하고, 가까운 데서 시작해서 멀리까지 가고, 쉬운 것에서 시작하여 힘든 것까지 하는 것입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게 됩니다. 욥바에 내려가서 배가 있는 것을 보고서, 원하는 대로 길이 열린다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큰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 무서운 죄입니다. 니느웨로 가는 것보다 다시스로 가는 비용이 많이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돈을 낭비하면서 도망가는 요나를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불순종하는 것이 훨씬 더 고생스럽습니다
다시스는 스페인 남서 해안에 있는 도시로서 은과 철과 주석과 납이 많은 곳이었습니다(겔 27:12). 다시스는 요나가 도망하기에 가장 완벽한 곳이었습니다.
첫째, 다시스는 그가 가기로 예정되어 있는 니느웨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그 당시 세계 최고 끝이었습니다.
둘째, 다시스는 무역과 산업의 도시로서, 어느 정도 안정과 평안을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나는 동쪽으로 거친 사막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서쪽으로 잔잔한 지중해를 건너는 항해를 시작하였습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니느웨와 다시스 중에서 지금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요나는 니느웨와 정반대방향으로 가려고 결심합니다. 일생동안 하나님의 뜻을 등지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내좇기는 것이요, 기쁘게 순종함으로써 얻게 되는 복을 차버리는 것입니다.
요나가 두려워한 것이 선교사역의 실패 때문인가요, 아니면 앗수르 사람의 적대감 때문인가요? 요나 역시 선교 사역의 어려움을 고려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메시지의 가혹한 내용이 요나를 억눌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도망친 진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방인 니느웨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4:2).
하나님께 사용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 중에 하나는 마음의 상처가 치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우리를 보내십니까? 우리가 가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 뜻에 불순종해서 도망치는 것이 지뢰를 밟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거기에 순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의 총명함과 분별력을 거두어 가심으로써 자기도취에 빠지게 하십니다.
침체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잠이 유난히 많이 온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배 시간에는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쏟아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포자기했기 때문입니다. 폭풍은 영혼이 잠들어 버린 영혼을 깨우는 하나님의 외침이었습니다. 집에 갑자기 도둑이 들거나 강도를 만나거나 위기를 당했을 때 그냥 재수 없는 일로 치부하고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무언가 우리에게 경고의 음성을 발하시는 것입니다.
준비된 길이라고 해서 언제나 바른 길은 아닙니다(메튜 헨리).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피해야지 그리스도에게서 떠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주님으로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순종하면 자신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까지 고통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불순종하면 세상에서도 비난거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면 일이 자꾸 악화됩니다. 지금 내 맘에 가책이 되는 부분이 있으면 빨리 처리하십시오. 집사님 미안합니다. 권사님 내가 지난 번에 잘못했습니다. 반드시 하십시오. 그러면 살아납니다. 자기가 삽니다. 상대방이 삽니다. 교회가 삽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각자가 아니라 한 몸의 지체이기 때문에 손가락 끝이 아파도 온 몸이 아픈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잠잠하겠느냐?, 이에 요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니느웨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안전하지 못할 것이오. 배를 돌리시오. 돌아갑시다. 그러면 폭풍은 그칠 것이오. 그러나 요나는 주님의 뜻을 거스리기로 결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십시오. 그렇게 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잠잠해질 것입니다.“(1:12) 다시 말하면 요나는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은 자살과 같은 것입니다. 요나의 회개는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배를 돌려서 욥바로 가든지, 아니면 지기만 구명보트를 달라고 해서 노를 저어 욥바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니느웨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정한 회개입니다.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은 죽을지언정 니느웨에 가기는 싫다는 하나님께 대한 대항인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와 사죄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회개는 죄의식의 고통과 자포자기와 자기멸시로 끝이 납니다. 바다에 자신을 던진다고 요나의 불순중의 문제가 해결됩니까? 자포자기는 문제의 해결이 아닙니다.
요나는 도망치다가 풍랑을 만나더니 지금은 물고기 뱃속에서 고통스러운 사흘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있을 곳이 아닌 데 있고,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면서 손발이 묶인 포로처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그를 구원하시려고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 물고기가 있었던 것도 우연히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두면 익사해 버릴 요나를 물고기가 삼키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요나를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전하는 놀라운 방법이었습니다. 또한 물고기가 요나를 꿀꺽 삼킨 것은 요나의 절망과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일로 나아가는 멋진 계기가 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죄는 짓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지난 과거들을 보상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끝없는 채찍과 심판을 계속했습니다. 불순종의 죄는 사탄적인 것이기 때문에 회개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을 보게 됩니다. 불순종은 많은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많은 고생과 괴로움을 당합니다.
2장
지금 요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거기서 새롭게 변합니다. 거기서 자포자기하지 않고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그제서야 위기를 딛고 일어섭니다.
특별한 것을 잘한다고 훌륭한 신앙의 사람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것에 충실하고 신실한 자가 참된 신앙인입니다. 정상적인 삶에 성실하지 않는 자들의 특징은 인생에 고난이 많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말씀하실 때 듣지 않고 도망하던 요나에게 하나님은 많은 초자연적인 사건을 통해 역사하셨지만 요나는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위해 특수학교의 문을 열고 강제로 입학시킵니다. 바로 물고기 뱃속학교입니다.
첫 번째 교과과목은 기도입니다.
기도의 중단은 영혼의 죽음이며,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성도의 특징은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기도하는 생활이 중단되었다면 틀림없이 불순종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교과과목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기도를 거의 하지 않고, 말씀을 거의 읽지 않는 것은 영적생활의 죽음이다. 기도를 하지 않은 채 말씀만 읽어도 병약한 삶을 얻는다. 말씀은 거의 읽지 않은 채 기도만 많이 하는 것은 더 많은 생명력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견고함이 없습니다. 매일 충분한 양의 말씀을 읽고, 마음껏 기도할 때 건강하고 능력 있는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은 기도생활에 달려있습니다.
요나는 그의 짧은 기도 가운데 시편을 일곱 번이나 인용했습니다.
요나서 2장 2절은 시편 120편 1절의 인용입니다. “내가 받은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요나서 2장 3절은 시편 42편 8절의 인용입니다.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요나서 2장 4절은 시편 31편 22절의 인용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 끊어졌다 하였사오며”.
요나서 2장 5절은 시편 69편 2절의 인용입니다.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들어왔나이다.”
요나서 2장 7절은 시편 142편 3절의 인용입니다.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
요나서 2장 8절은 시편 31편 7절의 인용입니다. “내가 허탄한 것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요나서 2장 9절은 시편 3편 9절의 인용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의 인용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곳에 항상 바른 신앙이 자리 잡게 됩니다.
요나의 기도의 네 가지 특징
첫째, 정직, 3-6절에 요나는 그의 비참함을 알 뿐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째, 참회, 8절에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셋째, 감사, 요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반역으로부터 돌이키게 하시고 다시 한 번 주를 부를 수 있도록 해주시는데 대하여 감사하였다.
넷째, 희생과 서원, 9절에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서원을 하였더라,
요나는 고기 뱃속에서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2:7).
첫째로 그는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 우리를 얼마나 평안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요나가 두 번째로 발견한 것은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내 욕심의 덩어리였던 것이었습니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2:8). 요나는 자신이 지금 바다 속에 있느냐 육지 위에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참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 우상을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요나가 세 번째로 발견한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줄 알았더니 사실은 이방인들에 대해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새로이 깨닫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전혀 없음을 깨닫게 되지 않고는 참된 회개를 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힘입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9절).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소명을 받은 후에 다른 이방인들이 기도한 것처럼 하나님께 호소할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라는 것도 순수한 자기희생보다도 저항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가 뱃속에 들어갔을 때도 머리가 먼저 삼켜졌고, 토해서 나올 때에도 머리가 만져 나왔습니다. 즉 요나는 고기 뱃속에서 180도 방향 전환하였습니다.
3장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들이 해야 하는 최대의 헌신은 순종입니다(사 1:9, 신30:15-16, 히 11:8). 믿음의 증거가 순종입니다(약 2:26). 우리는 요나서 1장을 통하여 불순종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에 대해서, 2장은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3장은 순종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제 2의 기회를 주실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니느웨 백성을 그대로 두면 멸망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 사람을 보내어 회개케 하려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요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가 없었다면 그는 물고기의 먹이가 되어서 죽었을 것이고, 불순종의 사람으로 사라지고 말았겠지만,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일으키셔서 또 한 번의 기회를 통하여 그로 하여금 역사에 오래오래 남는 선교사, 전도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분명한 말씀의 인도 없이 하나님의 일에 뛰어들다보면 맨 처음엔 열정으로 되지만 나중에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칭찬받지 못하면 섭섭해 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답답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있으면 그것이 완전한 보장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견디고 어려워도 넘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 회개하는 것은 다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이 열려 있을 때 말씀을 잘 받아들이면 신앙이 쑥쑥 자라는데, 그때 미루고, 피하고, 핑계하면 결국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변함이 없으시고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이루시고 마시는 하나님이신데도, 회개하면 그 사람이 멸망당할 죄인이라 해도 “그래 용서하마” 하시고는 뜻을 돌이키시는 일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민 21:7-8).
니느웨는 사흘 걸려야 한 바퀴 돌만큼 큰 성입니다. 사람이 하루에 한 20마일 걷는다면 60마일(96킬로)쯤 되는 아주 큰 성입니다. 니느웨 성은 바벨론 성 보다 컸으며, 성곽 위로 마차 세대가 달려가도 될 만큼 튼튼한 성벽을 세웠으며, 높이는 60미터, 성벽 위에 탑이 1500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요나가 선포한 메세지에 의하면 니느웨는 사십 일이 지나면 온 성이 무너집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개인이 망하고, 가정이 망하고, 민족이 망합니다. 회개는 생각과 마음과 태도와 행동을 완전히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요나가 겨우 하룻길을 외쳤는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야 회개가 시작되고, 회개해야 진짜 믿음이 생깁니다. 금식을 선포합니다. 금식은 자기 욕망을 절제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표시입니다. 니느웨에 가서 요나가 한 것은 히브리어로 다섯 단어입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할 것입니다." 요나의 순종에서 나온 미약한 행동과 말씀의 결과는 니느웨의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는다(3:8)는 것은 미래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하나님께만 자신의 삶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니느웨 왕의 조서에는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3:9). 1장 6절에서는 선장이 요나에게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타협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철저하고 신실한 반응을 요구합니다. 칼빈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는 일단 믿음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고, 또한 세상의 모든 귀한 것들을 하찮게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일에 대해 생각을 바꾸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분이 생각을 바꾸신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실 때 그분은 인간의 사건들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바빙크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불변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그분은 피조물들과 같은 삶을 사시며, 그들의 변화무쌍한 행동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주변에는 변화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신다는 것은?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상태와 위치를 감안하여 우리를 다루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수준에 맞추어 우리를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신다는 원리는 예레미야 18:7-10절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과 믿음에 따른 축복은 그 자체가 성경 전반에 걸쳐 우리의 행위를 바꾸기 위하여 주어진, 동기유발적인 진술로 제시되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경우 일어난 일에 대한 일반적인 법칙을 나타내 줍니다.
만일 사람들이 악으로 돌아선다면 축복의 예언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둘이 죄악을 회개한다면, 저주의 예언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차르녹은 니느웨의 경우를 언급하면서 “니느웨 거민들이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일반법칙에 따라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고를 받자 그들은 믿음을 표시했고, 선지자의 말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사용하신 언어는 무한한 인격적 하나님보다는 인간에게 적용해야 할 어울릴 언어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언약과 심판의 선언, 벌과 상으로 우리를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회개시키시고 용서하실 뜻을 품으시고, 그들에게 끔직한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그리고 그 경고가 강력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뜻하신 목적, 즉 그들을 낮춰서 자신들의 과오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깨닫도록 하시는 데에는 더더욱 효과적일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 자식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애쓰며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회개해야 하나님께서도 뜻을 돌이키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삶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우리가 그분께 반응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반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는 것은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새 생명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격려일 뿐입니다.
4장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멀리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시키십니다. 우리를 회개와 항복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신 후에 우리로 하여금 두 번째 봉사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요나가 주의 말씀에 따라 메시지를 선포했을 때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를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눅 11:30).
4장 1절에 매우 싫어했다는 표현과(라이)과 3장 8, 10절에 악한 길이라는 표현과 같은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즉 요나의 엄청난 악함과 증오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 1인칭(내가)의 진술이 다섯 번 나온다. 3절에서도 네 번이나 나옵니다. 요나의 자아가 무려 9번이나 나타납니다. 요나는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건 신앙이 아니라 열등감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요나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의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성실한 선포와 성실한 경청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롬 10:17)
셋째,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들은 후에 믿음의 행실을 보여 금식을 선포하고 상복을 입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행위에 따르는 일부로서 특정한 죄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죄와 포악에서 돌이켰습니다. 8절에 보면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우리들은 온갖 죄악, 음란, 교만, 이기심, 믿는 형제들을 향한 사랑의 부족, 게으름, 물질주의 등등 그 무엇이든지 이 모든 구체적인 죄에서부터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개시켜 구원하셨구나 감사해야 하는데 요나는 화가 났습니다. 자기 마음에 성처를 준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그분이 좀 안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없습니까? 그것이 자기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시 109:17-18). 내 남편은 안될 거야, 누구는 안될 거야?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요나는 니니웨가 멸망당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불평을 터트립니다. 요나는 기뻐해야 하는 상황에서 불쾌했고, 즐거워해야 하는 상황에서 화를 내었고, 사명의 성공을 생각하며 보람과 긍지를 느끼면서 감사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기 생명을 취해 달라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요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첫째,로 요나가 불쾌하게 된 것은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할입니다.
요나가 불쾌하고 화가 난 것은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안해 준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둘째로, 요나가 불쾌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심판하는 공의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할 때 용서해주시는 자비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이신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요나가 불쾌하게 된 것은 자기 불순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당하게 하려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본문 2절에 인용한 말씀은 시 145편 8절, 출 34:6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영적인 일을 하면서 육이 역사할 때 오는 위험(4:5-6)
많은 크리스찬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영육간에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육의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롬 8:13-14). 영적인 일을 하면서 육의 사람이 될 때 거기에는 반드시 큰 위험이 따라옵니다. 다시 영적인 안일에 빠집니다. 그 성 동편에 앉되(5절).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5절).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성숙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영혼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내 나라만 생각하고, 내 문제만 생각하고, 내교회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다릅니다. 더 많이 가슴을 열고 흩어 구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요나는 니느웨 백성보다 하나님을 훨씬 더 괴롭히고 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 밖으로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뜨거운 햇볕을 피하려 초막을 짓고는 그늘 아래에 앉아서 니느웨의 결과를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니느웨가 멸망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요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그의 마음 속 깊이, 용서보다는 복수심, 인내보다는 성급함, 사랑과 용납보다는 미움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보게 됩니다.
자기를 위하여 스스로 초막을 짓고 들어가 앉아서 니느웨 백성이 어떻게 되나 보자하고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십니다. 니느웨가 회개하였다는 모습을 봤을 때 요나가 기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한 영혼이 회개하면 천국에서는 잔치가 있다고 하셨는데 요나는 한 성읍이 회개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박넝쿨이 머리에 올라가 시원하게 만드니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벌레를 준비하셨습니다. 동풍까지 준비하셨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정신이 몽롱하여 죽기를 자청합니다. 한때는 바다에서 죽게 해달라고 하다가, 물고기 뱃속에서는 살려달라고 하다가,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서 질투심이 생겨서 죽겠다고 하다가, 박넝쿨을 보고는 기뻐서 싱글벙글하다가, 그늘이 사라지지 또 죽겠다고 변덕을 떠는 것이 요나의 모습입니다. 수없이 마음이 변하고 불순종과 불신앙과 미성숙함을 나타내는 요나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박넝쿨의 비유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순전히 선물받은 것을 잃을 때에 고통스러워하고 있구나. 그러나 나는 직접 내가 창조한 것 때문에 슬픔을 당하고 있노라. 어떤 사람은 자기가 미워하거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은근히 안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그 분 안되게 해주세요, 벌을 받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는 잘못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분노보다 사랑이 더 강하시고, 심판보다는 용서를 더 하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넓은 벌판에 의미 없이 던져진 존재”라고 하면서 허무주의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는 것 자체가 고난과 질병과 사고와 아픔의 연속이기 때문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고 비관주의를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은 자기가 원하거나 선택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잠시 지내는 동안이지만 즐기고 살자는 쾌락주의에 빠져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는 특별한 의도와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자기는 율법을 지키느랴고 고생을 했고, 안식일을 지키고 희생제물을 갖다 바치고, 절제도 많이 하고 수고도 많이 했는데, 자기는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멸망 받을 니느웨 백성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공평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이 교회에서도 나타납니다. 교회를 위해서 내가 얼마나 봉사를 했는데, 수고를 많이 했고, 헌금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라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모습입니다.
요나는 40일 후에 심판이 이르리라고 말했으나 심판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기가 예언한대로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실망시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또한 요나는 순종한 후에도 기쁘지 않아서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면서도 마지못해 순종하고 분노하면서도 순종한다면 순종도 불순종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경고의 교훈입니다
.
우리가 알 수 있는 요나의 한 가지 잘못은 그가 아직도 하나님의 뜻에 화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요나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자비를 잊었습니다. 요나가 화를 낸 이유는 그가 생각한 만큼 하나님을 몰랐다는 데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죄인이 회개할 때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못마땅했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허물 많은 사람이며, 용서받고 구원받은 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이방인 선교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마음이 좁고 편협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예수님은 오셔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족속으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조용히 말씀하시는데, 요나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말대꾸를 하며 성을 내다가 죽을 지경이 된다고 합당한 일이라고 계속 우깁니다. 사실 처음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갈 때 누가 화를 냈어야 합니까? 또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할 때에 화를 내실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한다고 죽여 달라고 할 때에도 화낼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지금도 고개를 높이 들고 덤벼드는 요나에게 화를 내실 분은 정작 하나님이신데 요나가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란 어린아이를 의미하는데, 거기에 어른들을 합치면 니느웨 인구는 60만 명이 가깝다고 합니다. 요나 네가 땀 흘려서 심은 것도 아니고 하룻밤에 낫다가 시들어버리는 흔한 박넝쿨을 네가 그렇게 아낀다면 하물며 천하보다 귀한 수많은 영혼들이 거하는 이 성을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준비(4:6-7)
요나서는 요나 한 사람에게 향한 하나님 자신의 다양한 준비하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불순종한 요나를 향해 대풍과 푹풍을 준비하셨다(1:4).
둘째로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요나를 위해 제비가 뽑히게 하셨습니다(1:7).
셋째로 하나님은 잘못 회개하는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다(1:17)
넷째로 하나님은 요나의 전도를 통해 니느웨의 부흥을 준비하셨습니다(3:4).
다섯째로 하나님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4:6).
여섯째로 하나님은 박 넝쿨을 의지하는 요나를 위해 벌레를 준비하셨습니다(4:7).
일곱째로 하나님은 요나를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습니다(4:8)
오늘날 우리는 서구 교회의 몰락을 보고 있습니다.
몰락의 원인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세속화, 개인화, 분열화입니다.
요나 신드롬에 빠져 있는 성도는 영적으로 침체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요나 신드롬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것입니다(1:3).
불순종, 사명의 포기를 말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철저한 인본주의입니다.
둘째로 요나 신드롬은 누워 깊은 잠에 빠진 것입니다(1:5).
요나의 잠은 영적인 잠, 사망의 잠입니다(시13:3). 양심의 파선을 의미합니다(딤전 1:9). 요나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요나 신드롬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1:12).
요나는 세 번이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말했습니다(1:12, 4:3, 4:7). 비관적이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불평하며 불순종하는 모습이다.
넷째로 요나 신드롬은 철저한 이기주의입니다.
성 동편에 앉아 화를 내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요나의 신드롬은 물질 중심의 신앙관입니다.
요나의 기쁨은 박넝쿨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보다 박넝쿨이 제공해 준 그늘을 더 사랑했습니다. 물질 중심의 신앙관입니다.
선교보다 먼저 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직분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부흥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될 때 성숙해 집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시는 마음입니다(딤전 2:4).
둘째로 하나님은 죄인들이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눅 15:7, 10, 호 6:1-2).
셋째로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람이 영적으로 바로 서는 것을 원하십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는 영적인 자리에 바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인 것입니다(시 119:67).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생활의 출발이 있고, 성숙이 있습니다(마 5:48).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변화는 생각의 변화입니다. 생각 다음으로 변해야 할 것이 감정입니다. 생각의 변화, 감정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이들을 바라로는 눈 자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즉 관계의 변화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정의감보다 훨씬 높고 귀한 것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정당한 정의감이라 하더라도,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자에 대한 사랑보다 더 높고 귀할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한 존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내 욕심으로 상처를 주기에는 그들의 인격이 너무 귀하고 그들의 행복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사실이 들어올 때 비로소 사람은 죄를 이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자녀뿐 아니라 그들의 재산도 소중히 여기십니다. 내 재산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재산도 소중합니다. 내 시간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시간도 소중합니다. 내 인격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인격도 소중합니다. 내 감정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감정도 소중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그 속에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받기 원하고 존경받기 원하며 용서받기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 중에는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 불행해지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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