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리뷰

빵 만으로는 살 수 없다. 이어령

by liefd 2024. 2. 27.
반응형

 

 

이 방이 내 몸이고 이 포도주가 내 피다, 진리를 건성으로 듣지 말고 내 몸의 일부로 만들라

비유란 아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수님은 항상 지상의 것으로 천상의 것을 보여 주셨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눈물과 함께 빵을 먿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빵과 같다. 내 얼굴에 땀이 흘러야 빵을 먹는다는 그 뜻입니다.

감정의 눈물과 생리적 눈물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감정이 섞인 눈물은 생리적 눈물보다 그만큼 단백질이 더 많이 검출된다고 합니다.

 

눈물을 잃었다는 것은 곧 인간성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눈물 단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56:8). 실제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는 눈물단지라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목이 가는 병인데 장례식 때 문상객들이 흘린 눈물을 그 병에 담아 무덤에 함께 묻었다고 합니다. 망자에 대한 애정과 존경의 표시입니다.

 

크리스천의 눈물은 남을 위헤 울어 주는 사랑의 눈물이고, 죄에 대한 참회의 눈물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도 세 번 우셨습니다.

한 번은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11:32-35, 소리 없는 눈물),

 

또 한 번은 예루살렘의 성을 보시면서(19:42-43, 엉엉 우는 눈물),

 

세 번째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통곡의 눈물을 흘리셨다(5:7).

우리에게도 회개의 눈물, 영혼을 적시는 눈물이 필요하다.

 

어느 유명한 생태학자는 인간을 결함 동물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부족한게 제일 많습니다. 인간에게는 사자의 발톱, 타조의 빠른 걸음, 독수리의 힘찬 날개, 공작새의 화려한 꼬리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사회를 만들고 문명이라는 것도 만듭니다.

 

살아간다는 뜻의 영어 live를 거꾸로 읽으면 놀랍게도 evil()이 된다.

자궁은 영어로 womb, 무덤은 영어로 tomb, wt 한끗 차이입니다.

 

대여섯 살 난 아니가 뭘 먹고 살지, 뭘 입고 살지, 뭘 입고 살지? 고민하다가 야 이거 안되겠다 하고 길거리에 나서서 맥주병이나 깡통을 줍고 다니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미렇게 말합니다. “얘 걱정 말아라. 내가 너 하나 못 먹일 것 같으냐? 하나님의 심정이랄 똑 같습니다.

 

헝공기나 우주선을 만드는 엔지니어들은 꿀벌에서 배운 육갑형 집을 배워서 가장 가볍고 단딘한 구조물을 만드는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축구 골문의 네트까지도 4각형에서 6각형으로 바꾸고 있지 않습니다.

 

유학간 아들이 어머니와는 매일 전화나 이메일로 소식을 전하는데 아버지와는 무심하더랍니다. 아들이 문득 아버지가 열심히 일해서 내가 이렇게 유학왔는데 아버지께 감사해본 적이 없었구나. 그래서 아들이 크게 후회를 하면서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마침 아버지가 전화를 받으셨는데 받자마자, 엄마 전화 바꿔줄게, 히시더랍니다. 그러자 아들이 오늘은 아버지랑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왜 돈 떨어졌나? 제가 아버지께 큰 은혜를 받았는데 너뭐 불효한 것 같아서요? 너 술 마셨니?

 

예수님의 이름, 그 아이디만 있으면 바로 하나님과 접속이 됩니다.

 

아치 모양의 둥근 교회 지붕을 돔(dome)이라고 부릅니다. 돔이란 그리스 말로 집, 주거를 뜻하는 도모스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이탈리어의 두오모로 변하면서 하나님이 사시는 영원한 집, 교회당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천국 혹은 하늘을 가리키는 헤븐은 덮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짜 인간이 되려면 육체와 영혼아 합쳐져 있어야 합니다. 죽으면 하늘 나라에 간다는 믿음은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세계 공통어입니다.

우리 민족은 사람의 영육을 합혀 혼백이란 말을 썼습니다. 혼은 하늘로 날아가고 육체는 땅에 흩어집니다. 그래서 혼비백산(魂飛魄散)이란 말을 썼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일은 세상 모든 것에 액세스하는 것입니다. 직장에 접속하고, 국가, 세계 모든 것에 접속하는 거에요. 액세스란 말이 삶 그 자체입니다.

 

종교를 영어로 '릴리전'(religion)이라고 하는데 그 어원을 보면 끊어진 것을 다시 잇는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목사님이 성도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이들을 이끌어 스스로 하나님과 접속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엑세스란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아버지께로 나아간다는 말이 엑세스로 표현되어 잇다(2:18).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간다(나아간다, 집속한다, 5:2).

기도는 접속이다. 아이디는 주 예수, 비밀번호는 할렐루야, 아멘

 

다른 종교에서는 하지 말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말처럼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이끕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극장 앞에서는 연소자 입장 불가라고 써 붙이는데, 기독교 문화코너에서는 성인만 가능(adult only)라고 표현합니다.

 

레스토랑(restaurant)이라는 말은 마태복음 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Come to me, all you who labor and are heavy laden, and I will give you rest.

 

Csikszentmihalyi는 헝가리 출신 미국학자로서 긍정심리학 분야의 선구적 학자입니다. 그는 "몰입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무엇인가에 열정을 갖고 몰입함으로서 행복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고통도 불행도 창조적 상상력을 통하면 행복으로 변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추운 아이슬란드에 시인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포도는 치료와 피와 구제를 상징합니다. 포도껍질에는 효모균이 있습니다. 포도껍질에 있는 효묘가 포도의 당분을 이사노하탄소와 알콘올로 만드는 것이 발효작용인데 이 과정애서 인간의 몸에 해로운 균들이 사라지고 이로운 것들이 생성됩니다. 성경에서 포도주로 상처를 치유하고 갈증을 해소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보내셔서 인간을 구원한 것을 상징합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합니다(21:28-31). 형은 네 아버지 열심히 일하겠습니다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제사장들과 같은 기득권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도 하지 않고 포도원 주인 행세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둘째 아들은 아버지한테 대들고 안한다고 반항하지만 결국 회개하고 실제로 포도밭에 갑니다. 세리, 창기, 가난하고 소외된 인간을 말합니다.

 

제비는 흔히 좋은 소식을 의미해서 우체국에도 상징으로 제비를 씁니다. 제비는 또한 복을 가져다 줌으로써(흥부전) 힘없고 가난한 민중을 위로하는 새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콘솔콘솔(console)하고 울었다는 이야기에도 제비는 위로의 새로 등장합니다(38:14, 84:3). 새들은 보통 인간의 눈을 피해서 짓습니다. 까치는 사람이 못오를 나무 꼭대기에 집을 짓습니다. 참새는 처마 밑 깊숙한 초가지붕 속에 집을 짓고 알을 낳습니다. 하지만 제비는 사람들 처마 밑에, 손을 닿을 수 있고 가장 왕래가 빈번한 곳에 둥지를 틉니다. 사람을 믿으니까 거기다가 둥지를 트는 겁니다.

흐린 날 제비가 낮게 나는 것은 벌레들이 낮게 날아 그걸 잡아 먹기 위해서다.

 

기독교에서 위로와 믿음을 상징하는 제비는 또한 때를 알고 지키는 것의 상징으로도 등장합니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대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레를 알지 못하는도다(8:7).

신앙은 흥부전에서 나오는 제비가 물어다 주는 박 속에 보물이 나오는 것이 아닌다. 영어로 제비는 swallow인데 배고프고 올바른, 끝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상대를 말합니다.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흰비둘기는 순결과 평화의 상징으로 셍긱합니다.

노아의 방주에서도 까치는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지만, 비둘기는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잘 수행하고 왔기 때문에 평화의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비둘기는 또한 아름다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시편이나 아가서를 보면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런 사람의 눈동자를 비둘기의 눈에 비교합니다. 그리고 비둘기는 온순합니다. 큰 비둘기든 작은 비둘기든 순서없이 함께 먹습니다. 하지만 비둘기는 한번 싸우기 시작하면 어느 한 쪽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더 잔인하게 쪼아 죽인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사이가 좋다가도 한번 틀어지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비둘기는 아름다운 새, 평화의 상징, 축복받은 새이면서도 기독교적으로는 성령을 상징합니다(3:21-22).

성경에서는 까마귀를 혐오스러운 새, 부정한 새들 중에 하나로 정해 먹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11:13-19).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까마귀조차도 사랑하시고 귀하게 쓰십니다. 까마귀는 굶주린 엘리야에게 음식과 물을 갖다 줍니다(왕상17:2-6).

 

마가복음에 보면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는 새가 바로 까마귀입니다(12:24).

반포지효(反哺之孝), 진나라 무제가 이밀에게 높은 관직을 내리는데도 늙은 할머니를 봉향하기 위해 관직을 사양합니다. 무제가 화를 내자 이밀은 자신을 까마귀에 비유하면서 까마귀가 어미새의 은헤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조모가 돌아가시는 닐까지만 봉양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까마귀는 부화한지 60일 동안은 어미가 먹이를 물어다 주지만 새끼가 다 자라면 사냥에 힘이 부친 어미를 먹여 살린다고 합니다. 이런 까마귀를 가리켜, 자애로운 새라는 뜻의 반포조라고 부릅니다.

 

원래 까마귀는 전 세계 어디를 가든지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지요. 두뇌가 얼마나 좋은지 조류 중의 영장류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새들이 아무 힘이 있어도 호두를 까먹을 수는 없습니다. 딱딱한데다 둥그렇게 생격서 굴러가버리니가 손이 없는 새들이 먹기 힘들죠. 그런데 까마귀는 이걸 까먹습니다. 주로 도시의 까마귀들은 호두를 따다가 신호들에 차들이 설 때 바뀌 앞에 놔둡니다. 빨깐 불이 들어오면 휙 날라와서 호두를 놓는거죠. 그러면 호두가 출발하는 자동차 바퀴에 깨지겠죠? 그려면 까마귀가 날라와서 호두를 먹는 거예요.

 

일본에 가면 정말 까마귀가 많은데, 얘들이 돌을 던지며 내좇으면 얘들 얼굴을 꼭 기억해 두었다가 딱딱한 열매를 따서 복수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새들은 일생의 80-90%를 먹잇감을 구하는데, 까마귀는 잡식성이라 다양하게 먹기 때문에 한 시간만 일해도 충분히 배가 부르다고 합니다.

 

까마귀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부엉이입니다. 부엉이는 밤에 활동하니까 까마귀 떼를 습격합니다. 그러면 미국 사람들이 부엉이 모형을 만들어 낮에 까마귀 떼들이 모여 들면 그때 한꺼번에 잡아들입니다.

사람들이 까마귀를 꺼림직하게 여기는 대표적인 근거는 동물의 시체를 파먹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까마귀의 생태적인 습성일 뿐입니다.

 

독수리는 하나님이 부정한 동물이라고 해서 먹지 못하도록 금했습니다(14:12). 한편으로 성경은 독수리를 젊음에 비유하기도 합니다(103:5). 공동번역에 보면 네 인생에 복을 가득채워 주시어 독수리같은 젊음을 되찾아주신다. 독수리는 스무 살 쯤 되면 동굴 속에 들어서 오래된 털을 다 뽑고 부리를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늙은 독수리는 부리를 바위에 갈고 비툴어진 것은 깨트려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동굴밖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이전의 독수리 모습이 아닙니다. 전보다도 더 힘세고 씩씩한 모습으로 바뀌어 나옵니다.

 

독수리의 또 하나의 습성은 태양을 향해 곧바로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카메라 필터와 같은 얆은 막이 눈을 덮고 있어서 선글라스의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를 똑바로 바라 보면서 곧장 날아오를 수 있는 유일한 새라고 합니다.

 

문화적으로 독수리는 백성을 보호하는 왕을 상징해왔습니다. 왕가의 문자 같은 것을 보면 머리가 둘 달린 독수리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는 눈이 옆에 붙어 있기 때문에 정면에서 그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옆모습을 그리게 되는데 그러면 불완전한 모습이 됩니다. 그래서 양옆에서 본 새의 모습을 분리해서 그린다고 합니다. 또한 과거 세상을 지배했던 두 권력인 교황()과 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이 조용하려면 이 둘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대칭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쌍두 독수리가 탄생했다고 합니다.

 

지금 미국의 대통령이나 연방정부의 문장으로 사용하는 국장에도 독수리가 등징합니다. 1720620일에 미국 의회의 승인을 받은 이 국장은 앞뒤 두면으로 나뉘어 앞면에는 흰머리 독수리가, 뒷면에는 커다란 눈이 피라미드 형태의 건축물 꼭대기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 왼발은 올리브 나뭇 가지를, 오른발은 화살을 움켜지고 있으며 머리 위에는 미국 독립선언에 참가한 13개주를 살징하는 별 13개가 그려져 있습니다. 독수리 발이 움켜지고 있는 두 사물, 올리브와 화살은 각각 평화와 전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올리브 쪽을 보고 있습니다.

 

부모라 할지라도 내가 준 만큼 안해주면 섭섭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하나님이 아무 것도 안준다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외치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이 하나님과 나의 문제가 됩니다. 조국이나 이스라엘 백성, 모세가 이끌고 나갔던 민족이라는 집단과의 관계가 아니라 바로 나와의 관계입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원주민들에게 우리라는 말을 잘못 써서 선교에 실패한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선교사가 아프리카 원주민들 앞엣거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하니까 원주민이 하나 둘 다 가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기도 드리는데 다 도망가죠? 물었더니, 아 당신들이 자기네가 모두 죄인이라고 했잖아요?

 

그 선교사는 우리라는 표현을 아프리카 원주민 전체를 포함한 인간 전부를 가리키는 말로 쓴 것입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는 우리라는 말이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포함한 우리, 또 하나는 말을 듣는 상대방과 구별되는 나를 가리키는 우리, 원주민들은 후자의 의미로 알아들은 겁니다.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9-10). 신을 받드는 욥을 사탄은 “기브 앤 테이크의 현세적인 이해관계로 본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세계에서 신과 인간은 까닭있는 경외로 그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신들이 양파로 갈라져 그리이스군과 트로이군을 응원하는 것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는 정반대입니다. 여호와는 욥이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욥의 소유물을 빼앗습니다. 자기와 욥의 관계가 현실적 이해를 초월했을 때만이 값어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욥에게 영광이 아니라 도리어 수난을 줍니다.

 

일리아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서사시의 전체 구조를 엮어가는 날줄과 씨줄 역시 이러한 분노의 실입니다. 그러나 욥기는 수난의 고통의 이야기입니다. 욥은 이런 시련 속에서도 신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신앙이 현세의 욕망 충족을 위한 기복적인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욥이 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욥은 하나님과 자신, 즉 수직적인 면으로만 인생과 우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서 욥은 처음으로 수평적인 것, 즉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사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욥은 그리스인들처럼 인간주의적인 입장에서 삶의 현실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3:3-9).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그럼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율법사는 머릿속으로 제사장이라든지 레위적의 귀족들, 유대교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답변합니다.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기독교의 마지막 상징이며, 수직 수평이 모순으로 만나는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는 그 점점 시간과 공간의 만남을 의미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