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세 방면에서 연구되고 있다. 첫째는 자연과학적인 인간학이며, 둘째는 철학적 인간학이고, 마지막으로 신학적 인간학입니다.
자연과학적인 인간학은 인간의 경험 과학적인 측면 이상을 넘지 못합니다. 철학적인간학은 이성의 한계, 곧 피조물의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신학적 인간학은 위의 두 종류의 인간학과는 성격을 달리합니다. 현상적이거나 경험적이거나 귀납법적이라기 보다는 연역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이는 권위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 권위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입니다.
1. 신학적 인간론
인간론은 신학에 속한다. 인간 자체의 고찰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에 대한 지식이 신학에 속하게 된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이 소유한 지식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결코 나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지 않고서는 인간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칼빈의 지론입니다.
시편 기자가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라고 말했듯이 이 시간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태양의 광선이 물체에 먼저 비취고, 그 빛이 반사되어 우리의 망막에 도달할 때 우리가 인식할 수 있습니다.
육지를 떠난 배가 이제 시간이 흘러 바다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좌우 사방을 둘러보아도 물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타고 있는 배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확인하려고 한다고 합시다. 배 밑창에 내려가 하루 종일 바라보면서 알아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배 갑판 위로 올라가서 주위를 응시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위로 하나님과 옆으로 동료들과 아래로 피조물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인생의 자기 위치와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와 존재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권능을 경험한 후 자신의 죄악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눅 5:8).
2. 인간론의 목적
인간을 배움으로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함이요, 그를 경외하며 더욱 깊이 섬기기 위함입니다.
3. 문제의식
우리는 인간성을 상실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인간성 상실의 현상은 ‘대중화’란 개념으로 잘 설명됩니다. 인간이 개인으로 있을 때는 책임감도 있고, 수치심도 있고 도덕적이지만, 일단 집단화 되어 버리면 얼굴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립니다. 익명성 때문에 나타나는 인간 죄성의 발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성 상실현상을 유발시키는 또 다른 요인으로는 대중 매체에 의한 의식화 산업의 횡포를 들 수 있습니다. 대중매체에 의한 광고방송에 세뇌되어 구매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인간성 상실현상을 일으키는 또 다른 요인으로는 이데올로기로 길들여진 사고를 들 수 있습니다. 이데올로기가 부정적으로 사용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자못 심각합니다. 현상유지를 위해 통치자들은 안정하다는 허위의식이 조장될 수 있습니다. 심각한 위기 상황이면서 현상유지를 위해 통치자들은 안전하다는 허위의식으로 백성들을 기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조주의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인간성 상실 역시 심각합니다. 현대의 관료화된 사회구조 속에서 전체를 보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지성적 엘리트를 요구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맡은 기능과 역할에만 충성하는 기능적 엘리트를 선호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한낱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해버리는 인간 소외의 비참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판단에 의하면 인간상실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사실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 인간은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섬기는 우상 숭배의 죄와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하는 정욕의 노예로 전락되었습니다(롬 1:18-25).
4. 인간의 창조
1) 인간의 기원
기독교의 인간관은 창조주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인간의 성격이 규정됩니다.
인간의 기원에 관한 성경 구절은 마 19:4-5, 막 6:7, 딤전 2:13, 창 1-2장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의 창조에서 끝이 납니다. 인간 속에서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는 서로 연결됩니다.
2) 인간 창조의 독특성
첫째 “우리가 만들자”는 데서 독특성이 나타난다.
이는 인간 창조가 있기 전에 특별한 신적 협의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창 3:27).
둘째 인간에게 부여된 성질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각기 종류대로 창조되었습니다(창 1:11, 12, 21, 24, 25).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셋째 인간을 조성하신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창 2:7의 조성과정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므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넷째 인간에게 부여된 주재권에서 발견됩니다.
창 1:26절에 보면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닮아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상대적 주권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나타납니다.
5. 인간의 본질
요한 웨슬레의 인간이해
1.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인간
웨슬레의 인간관은 오직 성경을 기초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을 기초로 인간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그는 인간의 정확한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전도자로서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인간을 “구원의 대상”으로 봄으로써, 인간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인간을 고찰하였다.
웨슬레의 신학이 “구원의 신학”이었다는 증거는 그가 일생을 전도자로서 구령사업에 헌신했다는 점 이외에도 그의 신학의 핵심이 성화론에 있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웨슬레의 관심은 항상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새로워진 영으로서 현실에서 성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웨슬레의 구원은 현재의 구원에 국한시켜, 의인과 성화를 의미하고 있는데, 특히 성화에 그의 강조점을 두어 구원론을 전개하였다. 웨슬레는 인간을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 현재 여기서 구원 받아야 하는’구원의 대상‘으로 이해한 것이다.
2. 성경적인 은총의 낙관주의
웨슬레는 인간의 전적타락을 말하면서는 종교개혁자들의 비관주의적인 인간이해를 따르고 있지만, 인간의 구원을 말할 때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의 낙관주의적인 견해를 갖는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과 그에 따르는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는 “선행적 은총”의 개념으로 그의 견해를 설명하는 데, 이것을 우리는 성경적인 은총의 낙관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웨슬레는 죄의 깊이를 개혁자들 못지않게 보는 동시에 그 보다는 더욱 깊은 구속의 은총을 투시함으로써, 신자에게 소망을 안겨주는 값비싼 은총을 재천명한 것이다. 은총의 역사를 미래에 남겨놓고 체념하는 듯한 종교개혁자들에 비하여 웨슬레는 보다 실존적인 관점에서 현재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봄으로써 은총의 낙관론을 천명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더 나아가 성화론에 나타난 웨슬레의 신학은 그가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인간의 무능력에서 보다는 능력에서, 그리고 인간의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이해하고 있으므로 은총의 낙관주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종말론에서도 그는 지옥에 대한 위협보다 지금 우리에게 유효한 복음의 약속과 이 복음의 활용이 장차 도래할 삶을 준비하는 것임을 보이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다.
웨슬레는 도덕무용론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다. 그대들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말라. 이는 그대들이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이며,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에 그대들이 믿음이 있다면, 믿기만 한다면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빌4:13). 그대들은 그를 사랑할 수 있고 계명을 지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닌 것(요일 5:13)이다.
3. 웨슬레의 구원론적 인간이해
1. 피조물로서의 최초의 인간
1)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 있는 인간
웨슬레의 창조신학의 명백한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또 그의 창조의 놀라운 질서를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었다. 웨슬레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위치를 발견하고자 했다. 18세기의 철학이 자연질서 내에서의 인간의 중요성을 단지 지적질서의 중심점으로 묘사했다면, 웨슬레는 인간의 중요성을 자연질서나 지적질서가 아니라 오직 영적질서에 그 중심점을 주고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나님의 부성적 관심과 사랑의 특별한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웨슬레는 우주 안에서의 인간의 중요성과 유일한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 안에서의 인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2)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
웨슬레는 인간은 먼저 흙, 공기, 불, 그리고 물의 복잡한 합성이라고 하면서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체가 아닌 그 무엇은 생각, 판단, 상상, 기억 그리고 오감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것을 웨슬레는 물질적 실체가 아닌 육체의 모든 부분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인간의 영혼이라고 하였다.
물질적인 피조물 전체보다 영혼은 더 가치가 있다. 그러나 웨슬레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려 하지 않는다. 몸과 영혼은 너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그는 몸과 영혼의 영원한 연합을 추정한다. 웨슬레는 인간의 영혼이 가지는 여러 속성 외에 자유를 또 하나의 심적 요소로 보아 이것으로 행동의 결단과 선악의 선택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가치와 존귀성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는 존재라는 성경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음을 웨슬레는 강조한다. 웨슬레는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또한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이담의 원상태는 죄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이었음을 강조한다.
웨슬레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자연적 형상으로 인간은 영원한 존재로서 이해력과 의지, 자유, 및 여러 정서를 지니고 있는 영적인 존재이다.
둘째는 정치적 형상인데, 이로써 인간은 다른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능력을 소유한 존재이다.
셋째는 도덕적 형상이다. 하나님이 지니고 있는 사랑, 정의, 자비, 진리, 순결 등을 그대로 소유하고 있는 의롭고 거룩한 존재이다.
웨슬레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 세 가지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서 도덕적 형상을 가장 중요시 하였고, 이 도덕적 형상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은 특별한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2. 죄인으로서의 자연적 인간
1) 타락한 인간의 상태
웨슬레는 죄의 기원을 원죄로 설명한다. 원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웨슬레는 바울과 어거스틴,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 아담이 범죄한 결과로 인간의 이성과 의지와 자유의 기능은 부패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사랑과 순종은 자기사랑과 자기의지로 대치되었다. 인간의 성품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영혼이 완전 부패하였으며, 마음의 생각, 계획이 항상 악하게 되었다. 그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결과 자연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내어 놓게 된 것이다.
웨슬레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특히 도덕적 형상)을 전적으로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고, 선을 행할 자유의지가 도무지 없다. 아담 이후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지하다. 웨슬레는 이러한 인간을 자연적 인간이라고 부른다.
웨슬레는 죄란 알려진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의도적 범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웨슬레는 죄의 본질의 근원인 악의 기원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않고 인간의 본성인 자유의지에 둠으로써 인간의 선한 창조를 재삼 강조한다. 웨슬레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기 전에 벌써 심중에서 죄를 범했는데, 그 죄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게 하는 영적교만이라고 하였다. 이 영적교만의 근원은 바로 인간의 행동의 근본이 되고 활동을 촉진시키며 행위에 의미를 주는 인간의 본성인 자유의지 안에그 뿌리가 있다는 것이다.
2) 원죄의 전달과 타락의 결과
웨슬레는 원죄의 전달 형태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아담은 온 인류의 우두머리 또는 대표자이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전 인류를 대표해서 죄를 지은 것이다. 그가 지은 죄책은 그의 후손들 각 사람에게 전가되었고 그 결과로서 그들은 영적인 죽음과 현재적인 죽음과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둘째 아담의 죄로 인하여 그 후손들이 파멸되는 또 다른 방법은 육체적인 출산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육체적인 출산을 통한 부패성의 전달은 온 몸 자체가 죄스럽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죄는 인간의 육체적 본성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는 영혼의 감염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웨슬레는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였고, 진노의 자싱이 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아를 죄 없는 자로 여기지 않고 아담이 지은 원죄의 죄책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담의 죄의 댓가인 사망이 영아들에게까지 선고되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신학적으로 우리는 이 원죄를 전가된 원죄와 유전된 원죄로 분명하게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전자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 나마 죄책이 있게끔 하는 아담의 죄를 말하며, 후자는 원의를 상실하여 부패된 것을 말한다.
웨슬레는 또한 아담의 죄책과 그의 후손들의 원죄로 인한 죄책을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참으로 아담의 죄는 우리의 죄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아담의 죄는 우리의 죄이다. 이는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사람의 죄였다. 사도 바울이 그 죄는 우리와 모든 후손에게 전가되었다고 말했듯이 이는 곧 우리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아담의 타락의 간접적인 결과가 죄책과 부패성이었다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보다 직접적인 결과는 고통과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3. 은총아래 있는 율법적 인간
1) 선행적 은총 아래 있는 인간
웨슬레에 의하면 인류는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아담 이후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인간 자체에서는 찾을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희망이 있을 뿐이다.
웨슬레가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구분되는 점은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역사하느냐의 문제에서 머리털 하나만한 두께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 차이점을 웨슬레는 선행적 은총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웨슬레는 타락한 인간에 대한 관념을 구원론적인 입장에서 그의 선행적 은총의 개념과 연관시키면서, 모든 인간은 완전히 타락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선행적 은총을 아울러 주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담이 타락한 결과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총은 구원 이전에 있어서 이미 역사하고 있다. 이 은총을 웨슬레는 선행적 은총이라고 한 것이다. 이 선행적 은총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자유롭게 값없이 주시는 은총으로서, 어떠한 제한이나 차별이 없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웨슬레가 말하는 선행적 은총은 칼빈이 말하는 일반은총과 구별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칼빈은 일반은총을 말하면서 이 은혜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에게조차 도덕적으로 선한 일을 하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칼빈의 무조건적 예정의 교리 때문에 이 일반은총은 결국 하나님의 구속계획 속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결과가 된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들에게 앞서가며, 함께 가며, 뒤따르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자연적 인간의 개념을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율법적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자연적 인간이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법을 모르고 있어서 평안을 누리고 있었으나 이제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이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이것을 웨슬레는 전적으로 파괴된 모든 하나님의 형상이 어느 수준까지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으나 이제 선행적 은총을 받은 모든 인간(율법적 인간)은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와 얼마간의 식별을 지니고 태어났다. 자연적 인간에게는 전혀 하나님의 지식이 결여되어 있으나, 모든 사람이 이제는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선행적 은총은 인간에게 인격적 행위를 가능케 해주며, 하나님의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회복시켜 준다. 인간은 선행적인 은총을 가짐으로써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완전 타락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는다든지,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선행적 은총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첫 번째 결과로서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원죄의 죄책을 해결해준다.
린스토롬은 웨슬레의 구원의 교리는 필연적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였다.
첫째로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은총관념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로 원죄에 대한 개체적인 견해와 선행적 은총 관념은 인간의 책임에 강조점을 두게 된다.
2) 구원에 대한 인간의 책임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에 있어서 은총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때에 제기되는 문제는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책임문제이다. 만일 인간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고 인간의 노력은 조금도 필요없는 것이라면, 구원받지 못한 인간에게 어떻게 그 책임을 물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웨슬레는 선행적 은총의 개념으로 인간의 책임을 주장한다. 곧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져서 하나님의 은혜에 능동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의 구원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면서도 그 안에서 책임있는 위치를 갖게 되었다.
4. 구원을 이루어 가는 복음적 인간
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인간
믿음이란 단지 머리 속에서만 맴도는 생명 없는 차디찬 동의이거나 어떤 이론과 같은 사변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고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의 공로에 대한 신뢰이다.
당시 영국 교회의 율법주위적인 의인사상의 영향을 받은 웨슬레는 인간은 스스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성취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올더스케이트 이후 웨슬레는 의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는 하나님께서 화목제물, 즉 그 아들의 보혈로 인하여 지난 날들의 죄들을 용서함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또한 이는 사망의 선고를 받고 있는 죄인을 생명으로 옮겨놓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웨슬레는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인 의인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인간편의 조건으로서 회개와 믿음을 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먼저 구원을 이루는 믿음에 선행하는 전제조건으로서 회개와 그에 합당한 열매를 강조했는데, 그가 말하는 회개란 인간이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아의식 또는 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온전한 구원(성결의 삶)을 이루어 가는 인간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 복음적 인간은 이제 계속적인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온전한 구원인 성화된 삶을 향해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고 웨슬레는 말한다. 그에 의하면 사람이 거듭날 때 이미 성화가 시작되는데, 이를 흔히 초기의 성화라고 한다. 성화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연약성 때문에 야기되는 무의식적인 죄의 결과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신자라 할지라도 그의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의식적인 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을 순간순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신자의 회개를 강조한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회개와 믿음이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 안에 계속 머무르며 성장하기 위해서도 전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바울의 은총에 대한 강조한다. 또한 그는 성경의 은혜를 지속하기 위해 요구되는 신자의 믿음은 보다 더 능동적인 믿음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을 그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갈 5:6).
웨슬레가 말하는 성결은 생활에서의 성결이요,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믿음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그 사랑에 의하여 일어나는 사랑의 생활인 것이다. 따라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통하여 지속되는 성결의 삶을 온전한 구원 또는 지속적 구원으로 보는 웨슬레에게 있어서 사랑 또는 성결의 삶은 곧 선행의 삶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믿음은 사랑의 마음과 활동적인 선행의 문을 연다. 성결의 삶은 사랑의 안에서 발전하는 실제적인 삶이다.
루터의 인간론 연구
Ⅰ. 루터의 신학적 인간론
루터의 인간론의 사상적 배경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하여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간다. 그는 세속을 단절하고서 수도원에 들어가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수도원에서 맡은 일을 정성스럽게 수행했으며, 자신이 견딜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극심한 금욕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루터의 끈질긴 영적훈련은 그의 문제해결에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에 두려움을 느낄 분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와 성지들이 남겨준 공로나 보화가 그에게 구원의 희망을 거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하나의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루터는 로마로 순례 여행을 갔을 때에 유물들이나 공로를 얻는 수단들이 타락한 것을 보고서 이러한 확신마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루터는 기존의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최초의 의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루터는 비텐 베르크로 옮기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는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던 요한 폰 슈타피우츠를 만나게 된다. 루터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의심을 슈타피츠에게 솔직히 털어 놓았다. 루터의 문제는 자신의 죄를 결코 다 고백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데서 기인하였다.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한다고 해도 여전히 고백하지 못하고 그래도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권고에 따라 성경 연구에 헌신하였다. 성경 연구의 목적은 죄와 은총, 의와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즉 어떻게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의로우신 하나님이 루터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의롭지 못하고 더러운 죄인임을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진노를 거두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시편연구를 통해서 여기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빛을 최초로 발견한다. 그는 시편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였다. 루터는 시편 22편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되풀이하신 말씀이 바로 자신이 겼었던 고뇌와 버림받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가장 비참한 죄인이 당해야 할 버림을 당한 것이었다. 루터가 미워할 수 밖에 없었던 의로우신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루터 자신을 위해서 지극히 비참하게 버림받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의와 사랑이 연결되었다. 이것이 루터신학의 출발점이다.
계속해서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사실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싫어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한 죄인을 처벌하신다고 믿었다. 루터는 죄인을 처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증오했으며, 비밀리에 신성모독은 아닐지 몰라도 심하게 불평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해서 화를 냈음에 틀림없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매일같이 묵상하는 과정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의 뜻을 주의 깊게 살피게 되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의란 새로운 자가 하나님의 선물, 즉 믿음에 의해서 산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의해서 계시된다는 것이다. 즉 자바로우신 하나님이 믿음에 의해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수동적인 의다. 여기에서 루터는 활짝 열린 낙원에 들어갔으며 거듭난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서 성경 전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소망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루터는 이와 같은 위대한 발견을 유명한 95개조를 통하여 널리 알리려 하였다. 특히 루터는 95개조의 논제에서 인간의 죄악성에 대한 자신의 깊은 개달음을 내보였다, 인간은 나쁜 나무로서 악을 의지할 뿐이다. 인간의 의지란 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라도 추구하려고 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에서 루터는 은총의 최우위성을 께우치게 된다. 루터는 인간측에서 악한 의지와 심지어는 은총에 대한 반항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은총보다 앞서지 못한다. 율법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밖으로는 선하게 보일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죄이다.
루터의 인간이해는 비관적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결정해 나가는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에 의하여 이끌려지는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열매를 맺고, 악한 사람은 악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루터에 의하면 인간 스스로 선한 나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스스로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지극히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1. 루터의 자연인 이해
루터의 인간론이 지니는 특징은 몸과 영의 관계를 보다 전인적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이다. 인간이 전인적으로 육적이 될 수 있고, 전인적으로 영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아담의 그릇된 선택으로 인하여 전인적으로 육적인 상태, 곧 타락한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루터에 의하면 자연인 자체는 곧 죄인이다. 루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기 이전의 인간은 죄인의 상태에 놓여 있다.
이 명제는 루터의 인간론의 출발점이요 핵심이다.
2. 죄인으로서의 인간
1) 루터의 원죄사상
스콜라 신학자들은 원죄를 의가 결핍된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루터는 로마서를 토대로 하여 “인간의 의지 속에 들어있는 내적인 질이 부족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지성에 있어서 내적인 빛이나 기억력의 결여만이 아니라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인간관계(내적인 인간, 외적인 인간, 몸과 영혼 전체까지)에 있어서 공정하고 성실한 자세가 결여된 것을 말하며, 그 전체 인간의 기능을 올바로 발휘할 능력이 결여된 것을 의미한다.
첫째 루터는 원죄를 정욕으로 본다.
정욕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이기주의를 말한다. 즉 이것은 선한 일을 행하려는 인간의 가장 고상한 의지 속에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을 말하며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도와 수단으로 삼으려는 이기주의인 것이다. 루터는 정욕을 인간의 지기추구와 연관시키고 있다.
둘째 루터는 원죄를 불신앙으로 본다.
원죄가 이기적인 자기 추구일 때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위배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앙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불신앙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그 결과 이웃에게 돌아가야 할 것을 돌리지 않는 면으로도 나타난다. 불신앙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데서 나타난다. 루터는 이같은 사실을 로마서 강해에서 기술하고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마음은 자기애, 자기기쁨, 자기의에의 의존으로 연결된다.
루터는 로마서 9:11-13을 주석하면서 “어떤 사람이 야곱은 모태로부터 성결함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들은 모두 다 원죄로 인해 더러워졌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루터는 원죄를 단순히 부분적인 약점이나 죄로 보지 않았고, 그것은 전인간의 완전한 타락으로 본 것이다
시편 51:5절을 통해 “내가 죄악 중애 출생하였으며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내가 잉태될 때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불의하였다, 나는 일찍이 아담에 의해 의를 상실하였고, 따라서 의롭지 않게 잉태되었기 때문에 불의한 자가 된 것이다.
루터는 시편 90:8를 주석하면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모든 죄를 낱낱이 알 수 없다고 선언해야 옳다. 특히 자신의 원죄가 얼마나 막중한가 살펴보면 이점이 더욱 명백해진다.
2) 인간의 상태 : 죄인으로서의 인간
인간의 현재적 상태에 대한 루터의 가장 명료한 표현은 “인간은 죄인이다”는 것이다.이것은 인간이 죄를 지었다거나 혹은 지금도 죄를 짓는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 자체가 죄에 물들어 있다는 뜻이다. 루터는 시편 51편을 주석하면서 “우리는 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큰 지혜이다.”
인간 본성 자체가 죄악이면서 또한 그 죄악됨을 감추기 때문에 인간은 죄와 타락의 심각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죄와 구원의 문제를 시편과 로마서를 연구하는 중에 실마리를 찾게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과 이를 믿는 인간의 믿음인 것이다.
3. 루터의 의인론에 나타난 인간이해
1) 십자가의 신학
첫째 하나님은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를 루터는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둘째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을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 볼때에만 하나님을 정당하게 말 할 수 있고 경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신학은 죄로부터의 구속, 곧 의인론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2) 십자가의 신학의 빛에서 본 신앙 의인화의 인간관
① 전가된 의인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의로운 존재가 되었다. 루터의 전가된 의인이란 우리의 죄악성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여겨 주시는 선언을 말한다.
② 믿음에 의한 의인
믿음에 의한 의인은 루터의 의인론의 핵심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준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야 의롭게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루터는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말한다. 신앙만이 사람을 의롭게 하며, 율법을 성취하게 한다. 선행은 신앙 자체에서 나온다.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고 마음과 영과 정신과 능력에 있어서 전혀 새 사람이 되게 한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을 임하시게 한다. 믿음은 선행을 끊임없이 행하지 않을 수 없다.
③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
전가된 의라는 사상은 곧바로 모든 크리스찬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의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것 이외에 우리를 이러한 선언에 합당하도록 만들어 주시고, 우리를 의로우심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전가된 의를 통하여 인간을 성결케 하시고 성령을 주셔서 사람의 본질까지 정결케 해주신다.
3) 십자가의 신학에서 본 인간해방
루터는 마리아의 찬가(눅1:46-55)의 주석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는 인간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무력했었으나 그리스도는 전능한 일을 수행했으며, 죄, 죽음, 세상, 지옥, 악마, 그리고 모든 악을 극복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비천하고 겸비할 때 하나님은 그를 높여 주신다는 것이다.
루터는 인간이 고난을 극복하고 해방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갖추어야 할 요건으로 비천함과 겸손, 그리고 믿음을 들고 있다.
① 계집 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눅1:48)
동정녀 마리아는 자신의 비천한 신분으로 그녀의 여생을 만족하게 보냈으며, 결코 존경받거나 칭송받기를 추구하지 않고, 그녀 자신의 겸손을 인식하게 되는 일도 없었도, 더 나아가 마리아는 자신의 비천한 처지에서 하나님을 섬겼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비천함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지 못했다.
마리아가 스스르를 비천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이어서 루터는 하나님이 이처럼 비천한 마리아를 돌아보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② 권세있는 자를 그위에서 내리치셨으며(눅1:52)
루터는 이 구절의 주석을 통하여 하나님은 고난받는 자들을 위로해 주시고 권세와 힘을 가진 자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시는 분임을 나타내고 있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추방하셨다는 걸과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다는 것에 주목한다.
③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 1:53).
루터는 하나님이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주린 자를 배부르게 하심을 말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이루어 짐을 주장한다.
인간은 굶주림을 통해 가난의 고통을 알게 되며, 이것에 대한 대비책과 도움이 인간 스스로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이다.
④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눅1;54)
루터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었음을 알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으로서 저들을 위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그리하여 죄, 죽음, 지옥에서 저들을 구속하여 의와 영생과 구원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결과 우리는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벧전 2:9)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의 풍성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이 풍성한긍휼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순전한 은혜로 받은 것이다.
⑤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눅 1:55)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타락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없다면 온 세상은 죄 중에서 정죄를 받으며, 저주받은 상태에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킨 그리스도의 탄생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라고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복된 씨로서 온 세계 만민이 그를 통해 저주로부터 해방을 맞게 된 것이다. 죄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지금까지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의 빛에서 본 인간해방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인간이 고난을 극복하고 해방을 이루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루터는 주장한다. 즉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고난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루터의 인간론의 한계가 있다. 루터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자유의지가 아닌 노예의지를 갖고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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