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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찰스 피니, 승리의 원리, 로마서

by liefd 2024.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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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회심시키지 못하는 설교방법(피니)

1. 설교의 동기를 죄인을 구원하는 것보다 인기를 얻는 것에 두라.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보다 청중을 기쁘게 하고 명성을 얻기 위해 연구하라.

 

3. 사람을 많이 모으기 위해 대중적이고 일시적이며 선풍을 불러 일으키기 좋은 주제를 선택하라.

 

4. 죄를 추상적으로 비난하라. 그리고 당신의 회중 안에 유포된 죄를 가볍게 지나가라.

 

5. 덕의 사랑스러움과 천국의 영광에 대해서만 설교하고 죄의 죄 됨에 대해서는 설교하지 말라.

 

6. 결석한 자의 죄만 책망하고 출석한 자들은 자신에 대해 만족하도록 만들어서 그들이 설교를 즐기게 하고 마음이 상해서 돌아가게 하지 말라.

 

7. 세상적인 교인들에게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설사 지옥이 있다 하더라도 아무도 지옥에 보내시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주라.

 

8. 어떤 거듭남도 불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하나님은 누구나 나의 아버지가 되시며 인간은 모든 형제라는 것을 선포하라.

 

그는 성령의 영향력이 결여된 복음 진리는 오히려 죄인들의 마음을 더 강팍하게 해서 하나님을 대항케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 하나님의 진리를 막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1:18)

 

하나님으로부터 기록된 계시를 갖고 있자 못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도덕적으로 뒤틀리고 왜곡된 어떤 것, 즉 하나님의 율법과 올바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의란 그런고로 태만, 즉 마땅히 되어야 하는 인격으로 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오직 그리고 전적으로 자의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는 의미는 어떤 사람이 진리의 합법적 영향력을 억눌러서 진리가 그의 의지를 제대로 지배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의 합법적 영향력을 억눌러서 진리가 그의 의지를 제대로 지배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사랑과 순종의 요구에 저항하는 것이며, 따라서 죄의 총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고의적, 지적 그리고 의도적인 반역입니다.

 

그들이 진리의 영향을 계속 저지한 결과 드디어 양심의 기능이 중단된 것입니다.

불의로써 진리를 막는 자들에 대한 이러한 진노는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든지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선적 서기관과 바리세인 들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희도 너의 조상들의 분량을 채우는도다.

 

2. 구속론(3:25-26), 고전15:3, 고후5:21, 5:8, 42:2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두 가지 위대한 진리들을 새겨 주려 하셨습니다.

 

첫째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하여 멸망한다는 것

 

둘째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자비에서 기원한다는 것, 그리고 자비로운 목적 이외의 아무 다른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지 그리고 오직 순종을 통해 가능한 최대의 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구속을 통해 당신의 율법과 그것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분명히 표현하셨습니다.

갈보리에서 이루어진 희생은 공적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희생제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자기 아들을 죽음에서 내어 주시고 이 아들은 자기 생명의 피를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흘리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죄인 인류에게 잠겨 있던 자비의 문을 활짝 열어 제치셨던 것입니다.

 

3. 믿음에 의한 성화(롬 3:31)

 

이신칭의 교리는 율법에 대한 진정한 순종을 낳음으로 성화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화는 성결이며 성결은 율법에 대한 순종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신칭의의 교리는 의무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페기하지 않고 단지 율법의 형벌만을 폐기할 뿐입니다.

 

4. 우리에게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5:8)

 

여기서 확증한다는 것은 밝고 강한 빛 속에 내어 놓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에게 이 사랑이 나타났습니까?

 

우리에게입니다.

 

어떻게 이 사랑이 확증되었습니까?

 

그 아들이 주를 위해 죽도록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입니다. 또한 그분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어떤 목적 때문에 그분은 자기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십니까?

 

그분은 자신의 사랑이 비이기적임을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친구가 아니라 원수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 속에 두 가지 확신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대항한 우리의 죄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죽으신 것에서 입증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 대하여 죽음(6:11)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가 전에는 우리를 지배해 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주관자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죄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의 영향권 밖으로 벗어나서 죄의 모든 매력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생명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열심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바치는 영원한 제사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계속적으로 그에게 바쳐서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그의 관심사를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을 정말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믿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정말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을 것을 기대하며 이 구원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사이에는 두 개의 분명한 구원관이 있습니다.

 

한편은 복음을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사실을 죄로부터 구원받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지옥에서 구원받는 것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그들은 죄 자체에 구원받는 것을 죄의 형벌에서 구원받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죄악의 속박으로부터 건지시고 그들을 비참한 상태에서 들어올려 사랑의 자유를 주시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영광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지옥에서 구원받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형벌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저주의 공포를 없애주고 그러면서도 그들을 죄 가운데서 자신들을 위해 살도록 내버려두고 그들이 평생을 죄 가운데서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면죄부임에 분명합니다.

 

6. 죄의 삯(6:23)

 

죄의 삯은 사망이라, 여기서 사망이란 하나님의 율법의 징벌로서 시행되는 죽음을 말합니다.

이기심이 죄입니다. 모든 법률은 제재조항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들은 보상이거나 혹은 처벌 중에 하나입니다. 순종에 대해서는 상을 약속하고, 불순종에 대해서는 또한 처벌을 경고합니다. 또한 제재는 자연적이거나 제도적인 것입니다. 또한 정부의 제재도 있어야 합니다. 정부의 또 하나의 역할은 어떤 환경 하에서 우리가 징계라 부르는 일입니다.

 

형벌은 정당한 것 이상이나 이하의 위협을 가해서는 안됩니다. 정의가 하나님의 율법의 속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재적 정의란 처벌이 위반한 의무에 상응하는 것임을 의미하고 내포합니다.

통치적 정의는 또 하나의 속성입니다. 율법의 이러한 측면은 범법에 대하여 안전을 제공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형벌의 제재는 공공의 유익과 그것에 대한 입법자의 관심에 대한 적절한 표현인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 형벌은 죽음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동물적 죽음이 아닙니다. 만일 죽음 이후에 즉시 천국에 간다면 그것은 전혀 형벌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그것은 영적 죽음도 아닙니다. 여기서 죽음은 인간의 법률에서 사형에 해당합니다.

 

죄의 삯인 죽음과 반대되는 영생입니다. 영생은 단지 영원한 존재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축복의 상태를 의미하며, 그 기초로써 영원한 거룩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생명이란 진정한 생명, 살 가치가 있는 생활, 실제적으로 풍부한 즐거움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징계는 법의 유지보다 범과자의 회복에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천국에서 지옥을 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천국 도성에서 보다 영원히 타오르는 고통의 불꽃이 환하게 보입니다(부자와 나사로의 경우).

 

7. 율법적 체험(7)

 

1) 사도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경우를 가정하고 있는 것인 것 하는 것은 본문의 해석에 필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일반적인 원리와 모든 사람이 그런 상황 속에서는 동일한 행동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2) 사도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많은 말은 종교의 형식만 남아 있는 타락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 사랑을 버렸으며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과 똑같이 희망과 공포라는 율법적 동기의 영향 밑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3) 본 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몇 가지 표현은 습관적인 타락자가 아니라 잠시동안 유혹과 정열에 넘어가서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이 잘못된 것처럼 말하는 신자의 경우를 묘사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8. 교회의 남편, 그리스도(7:4)

 

그리스도는 종종 교회의 남편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고후 11:2).

 

첫째,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따르며, 그와 연합할 때 그의 이름 안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둘째, 아내의 독립된 관심은 남편의 관심 속에 묻혀버립니다. 교회와 관계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꼭 그만큼 그리스도의 관심거리가 됩니다.

 

셋째,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처럼 만일 한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나머지 한 사람은 동정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모든 고통에 동정하시며 교회도 그리스도의 모든 고통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넷째, 아내는 자신의 의지를 남편에게 굴복시키고 순종할 것을 서약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관계도 꼭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뜻에 의해 지배됩니다.

 

다섯째, 아내는 남편을 자기의 머리로 인정합니다.

머리로부터 육체를 다스리는 영향력이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로부터 교회를 다스리는 영향력이 나옵니다.

 

여섯째, 아내는 남편을 자기의 공급자요, 보호자요, 인도자로 바라봅니다.

결혼한 여자가 남편의 보호 하에 있는 것처럼 모든 신자들도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보호 하에 두는 것입니다.

 

일곱째, 아내의 법적 지위는 남편의 그것에 용해되어서 법적으로 별도의 개인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만일 소송이나 부채가 아내에게 있게 되면 남편이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됩니다. 아내가 죄를 범하면 남편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인간의 법률에 의하면 남편은 아내가 범한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교회의 모든 행위에 대해 책임을 떠맡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죄를 덮으시기 위해서 구속을 이루셨으며 자기 백성을 위해 중보하기 위해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9. 전적 타락(8:7)

 

1) 육신의 생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육체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한 적개심이다. 사도에 의해 사용된 육신적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능동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정신이나 육체의 어떤 부분이 아니라 마음의 선택 혹은 선호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자기를 만족시키는 것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2) 회심하기 전의 모든 인간은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항한 원수의 상태에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에 대해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공통적 마음이나 성질을 가진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모든 상상이 끊임없이 악합니다.

모든 나라,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성령의 간섭 없이는 아무도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3) 육적인 마음, 혹 육신적 정신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본래 우리의 원수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들은 우리를 기쁘게 만들어 줍니다.

회개치 않는 죄인들은 끝없는 증오로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극도로 미워합니다.

 

나는 전적 타락을 육체적인 것이나 체질적인 것이나 혹은 심신의 구조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아주 다른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나는 모든 타락이 자발적인 것이며 능동적인 범죄라고 설파했습니다. 죄인 자신의 행위이거나 또는 그 자신이 창조한 그 무엇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개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써, 그리고 회개해야 되는 것은 본성 때문이 아니라 자기 행위 때문이라는 것, 자기 본성이 아니라 행위가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에게 보여줌으로써 가능합니다.

 

10.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8:28)

 

우리가 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보편적 의미로 사용된 본문인데, 그것은 절대적으로 모든 것들, 즉 현재와 미래,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상에 있어서의 모든 것들이 성도의 궁극적 축복을 위해 사용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모든 것안에는 자비나 축복, 심판이나 연단, 혹은 하나님의 책망, 심지어 자신의 죄악, 다른 사람들의 죄, 가장 연약한 자들의 죄 까지도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

욥의 경우가 그러한 예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표어는 결국에는 틀림없이 만사가 잘 풀릴 것이다."

 

11. 율법의 종교와 복음의 종교(9:30-33)

율법적 고려에 의해 생겨난 행위와 믿음에 의해서 생겨난 행위 사이의 구분입니다. 사람이 어떤 통치에 순종하는 경우에는 두 가지 원리 가운데 어느 하나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희망과 공포의 원리입니다.

 

그것은 양심의 영향하에 있는 것입니다. 양심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보여주며 사람은 희망과 공포에 의해서 순종하도록 권유를 받습니다.

 

다른 한 원리는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것을 가정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희망과 공포 때문에 순종하고 다른 아이는 애정과 신뢰에 있어서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어떤 순종의 행위를 요구하실 뿐 아니라 그것이 사랑에서 우러나오기를 원하십니다.

 

1) 율법적 순종은 희망과 공포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위선적이며, 이기적이며, 외적이며, 강요된 것입니다.

 

복음의 순종은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신실하며, 자유로우며, 즐거우며 신실한 것입니다.

 

2) 율법의 노예 상태와 복음의 자유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의 자유는 율법의 요구를 부인하는데 있지 않고, 그것을 행하는 그 자체가 부담이 아닌 즐거움이 되는 그러한 마음 상태에 있다.

 

노예상태와 자유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노예들은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에 섬깁니다. 자유인은 선택에 의하여 섬깁니다. 율법의 굴레 하에 있는 사람은 순종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기 때문에 의무를 행합니다. 그리고는 의무를 행했으니까 천국에 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복음의 자유 속에 있는 사람도 그것을 행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이기심에 의해 영향을 받고 후자는 사심없는 사랑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12. 마음의 신앙(10:10)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느니라.”

 

지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판단-견해-입니다. 정신적으로 판단해서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자발적인 마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것은 의지에 아무런 변화를 낳지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도덕적 목적을 전혀 낳지 못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발적인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해서 삶에 아무런 변화를 낳지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마음의 신앙은 참된 신뢰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뢰감 가운데 의지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그러한 의탁과 꼭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정신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의지의 행동입니다. 이런 종류의 신앙은 항상 감정에 영향을 미치며 삶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자연히 그것은 의를 향하는 경향이 있으며 의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신앙은 의-참된 순종-에 이른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브라함은 이삭을 피의 희생으로 드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지혜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음의 신앙은 단순한 노력-신뢰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결심에 의해서만 도달되어야 합니다.

 

13. 세상에의 동화(12:2)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그리스도인은 사업이나 유행이나 정치에서 세상과 동일한 원리나 동일한 동기에서나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해서도 안되며, 그러한 목적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1) 사업

사업에서 우리가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하는 첫번째 이유는 철저한 이기심 때문입니다. 사업가들의 습관과 태도는 극단적인 이기심 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리나 그리스도인들은 정반대의 원리 위에서 행동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

 

또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한 사랑과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아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능한 싸게 사서 비싸게 팔라. 그리하여 일등이 되라. 이런 원리 속에서 세상을 본받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세상에서 사업이 행해지는 방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그리고 그가 보여 주신 정신에, 또한 그가 가르치신 방식에 그리고 규범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모범은 자기 부인과 자비와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업에 있어서 세상을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입교할 때 하는 서약과 정면으로 충동합니다.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행동하며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자아를 버리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자신을 바치며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겠다고 서약하지 않았습니까?

 

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다 잡아 먹어버린 것이 바로 이 세상을 본받는 영입니다.

사업에 있어서 세상을 본받는 것은 죄인을 회심시키는 길에 최대의 걸림돌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모든 사람이 복음의 원리 위에 사업을 할 때 그것이 세상에 미치게 되는 엄청나고 즉각적인 건전한 영향력 때문입니다.

 

2) 유행

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유행을 좇지 말아야 합니까?

 

유행은 복음의 영과 직접 맞서는 것이며 유행은 지상의 것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행은 그들의 신앙고백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유행은 세상의 영을 광범위하고 완전하게 찬성하는 것입니다.

 

유행은 세상의 평판이 당신의 우상임을 보여줍니다.

유행을 좇을 때 당신은 불경건한 죄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행을 따름으로써 당신은 세상적인 영에 당신을 넘겨주라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셈이 됩니다.

유행을 좇을 때 당신은 교만과 어리석음과 세상적인 영으로 자신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3) 정치

그리스도인은 왜 정치에 있어서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할까요?

 

세상 정치는 아주 부정직하기 때문이다.

정지에 세상을 본받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함께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을 슬프시게 합니다.

당신은 죄인들의 길에 걸림돌을 놓습니다.

 

14. 종교의 완성으로서의 사랑(13:10)

 

성경은 사랑이야말로 율법과 복음이 공히 요구하는 것의 총화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이며 사랑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사랑의 율법에 대한 순종과 죄에 대한 반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들이 무엇입니까?

 

1. 사랑과 일치되지 않는 것이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미움, 악의, 분노, 시기, 등 순수하고 온전한 사랑과 일치되지 않는 어떤 정서도 없어야 합니다.

 

2. 사랑과 일치되지 않는 것이 삶에 없어야 합니다.

모든 행동, , 생각이 계속해서 사랑의 완전하고도 전적인 통제 하에 있어야 합니다.

 

3.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최상이어야 합니다.

 

4.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심없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5. 이웃에 대한 사랑이 동일해야 합니다. 이웃의 이익과 행복을 우리 자신이 그것만큼이나 커다란 가치를 가진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온전한 사랑은 사람을 인도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합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기 때문도 아니요 상을 받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극단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가 이니고 단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 것은 덕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고려없이 단지 그것을 하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도 덕이 아닙니다.

 

 

15. 의심스러운 행위는 죄악된 것이다(14:23)

만일 사람이 그 합법성이 의심스러운 일을 하면 죄를 짓는 것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로 하여금 어떤 행위의 적법성을 의심하게 하시면 그는 거기서 멈추어서 그 문제를 겅토해 보고 만족스럽게 해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적법한 지 어떤 지를 의심하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은 그가 이기적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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