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요? 언제 행복합니까? 연애할 때, 아이가 태어날 때, 즉 사람은 행복은 관계에 있습니다. 사람의 불행은 관계가 깨어질 때입니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제일 먼저 확인해야 할 부분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존귀한 모습을 매순간 확인하십시오. 이사야 49장 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에서 내가 누구일까요?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야이십니다. 헛되다는 생각이 들 때 상황도 바라 보지 마시고, 사람도 보지 마시고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여호와께 있느니라.“ 그럴 수록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사야 49장 5절에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하지만 우리는 어느 한 순간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사야 49장 4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신앙생활 할 때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결과가 신통하지 않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라는 표현이 우리를 흔들어 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내가 헛되이 공연히 수고가 하고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잘 해왔던 부분에 대해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드는 실체가 무엇일까요? 바로 마귀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본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십니까? 고린도후서 4장 6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때로는 주의 종이 말씀을 통해서 책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주의 종이 책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의 종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말라기 2장 6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에베소서 5장 13-14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나는 이렇게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 때문에 상처받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님도 한 순간에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공연히 무익히 내 힘만 다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돈으로 팔아 넘기고, 어려운 상황에서 각기 제 갈길로 가는 그들의 모습 때문에 주님은 일시적으로 마음이 상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고 사랑해 주었건만 갑자기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을 때 주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요?
바로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여호와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보시고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 때문에 결과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 우리는 여기서 무너지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호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생각지 않은 채널을 통해서 위로해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가운데 소원을 주시고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마음이 상해서 주님을 멀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때 우리를 낮추시고 마음이 상할 때 어떻게 우리를 달아보십니다. 신명기 8장 2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를 시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상할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바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서운함을 느끼고 하나님과 거리를 어떻게 유지하는지 보십니다. 우리는 마음이 상할 때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이 상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 보십니다. 대개 마음이 상할 때 잘 해왔던 것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이 상할 때 우리가 포기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럴수록 더욱 주님이 기뻐하시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아무리 힘들어도 약한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하나님께 감사하면 당신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침내 당신을 축복해 주십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누구를 탓하거나 자책하지 말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인생의 쓴물을 만날 때 하나님은 단물로 바꾸어 주시는 분으로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질병으로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당신이 경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신이 기도응답 받은 후에 당신이 질병으로부터 고침받은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자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 잘 하십시오. 출애굽기 15장 2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쓴물을 단물로 만들어 주시고 그들이 믿음 생활을 더 잘하는지 달아보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이전보다 더 잘 순종하는지 여부를 시험하십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시면서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안하나 내가 시험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당신이 계획하던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상해서 뒤집지는 마십시오. 민수기 16장 14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노라.” 당신의 신세를 탄식하고 싶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상처, 수치가 생각 날 때에 자책감에 빠져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스바냐 3장 17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스바냐 선지자가 처한 상황,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도 지금 바벨론의 포로에 사로잡혀 가게 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상황보고 달라지지 않고, 감정따라 흔들리지 않고 약속믿고 굳게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당신의 위기, 최악의 상황이 언젠가 축복의 상황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 바다 근처에 당도할 때입니다. 바로 그때 애굽 군대가 뒤에서 추격해 들어오고 앞에서는 시퍼런 홍해바다가 놓여 있습니다. 진퇴양난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홍해 바다가 당시에는 커다란 불행의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홍해바다 사건이 두고 두고 엄청난 축복의 사건으로 바뀌게 됩니다.
여호수아 2장 19-1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에 두 사람의 장탐꾼을 보냅니다. 두 사람이 라합의 집에 들어가서 피신하게 되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라합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당신의 백성에게 주신 줄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당신들 때문에 간담이 녹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홍해바다 건너는 사건은 두고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를 방해하고 괴롭히는 사람들로 인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처럼 우리의 지경을 넓혀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붙여 주시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사람과의 관계 회복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다 행복하여도 부부관계가 좋지 않으면 불행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부부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부부에게 원하시는 부분이 무엇일까요? 서로를 사랑하고 축복하고 살아가는 것 중요합니다. 서운하게 만드는 것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주고 축복이 막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서로 다른 것 때문에 힘들러 하지 말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데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연약한 형제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시하기 쉬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상처입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고치려고 하기 보다는 이해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교회가 아니면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갈등하고 때로는 힘들지만 우리의 약한 부분을 다듬어 가십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 까요? 나의 삶을 막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원수를 갚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한동안 이 말씀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느껴왔습니다. 내가 그 사람 때문에 당한 아픔과 상처를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데 어떻게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속도 없는 사람입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실컷 미워해라. 내가 누구 때문에 미워하지 말라고 한지 아니! 네가 미워하면 그 사람의 못된 것 너도 그대로 닮게 된다. 서운한 마음이 테이프 돌아가듯이 계속 너의 마음에 돌아가면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너가 그 사람을 위해 축복 기도하면 너는 더 이상 그 사람에게 매이지 않게 된다. 도리어 그 사람으로 인해 너는 복을 받게 된다.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축복하는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 사람을 위한 일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곧 나를 위한 일입니다.
마음에 쓴뿌리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할 때 그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바로 그 사람이 상처가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합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짜증이 나고 분노가 치미는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물론 용서하는 것과 용납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용서는 당장 할 수 있지만 용납은 감정의 찌꺼기가 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태도를 갖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서 그렇게 해야지 하는 감정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태도가 바뀌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을 만나도 섬기는 태도, 축복하는 태도, 용서하는 태도만 가지면 당신은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순간 순간 우리의 감정적으로는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붙잡고 우리의 태도만 바뀌면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태도의 진정한 변화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가능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질 때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관점이 생겨닙니다. 새로운 가치관이 생깁니다. 새로운 욕구가 생깁니다. 사랑하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용서하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품의 변화, 태도의 변화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관계의 변화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타인과의 관계입니다. 상대방이 잘하고 못하고 거기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오래참아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감싸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말없이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감동을 받을 때 변화가 됩니다.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나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비록 상황이 힘들고 어려워도 못하겠다고 하지 말고 충성하십시오. 죽도록 충성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우리가 충성해야 합니까? 요한계시록 2장 9-10절에 보면 “환난과 긍핍 가운데 죽도록 충성하십시오.” 책망하고 충고할 때 온유한 마음으로 하십시오. 모든 일에 절제하십시오. 이것 때문에 누구 때문에 못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갈 5:23).
혹시 과거에 내가 저질렀던 잘못이나, 받았던 상처 중에서 아직도 나의 마음 속에 남아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과거에 고백하지 않은 죄로 인해 그것이 나에게 상처를 아직도 주고 있지 않습니까? 과거에 죄책감으로 인해 마음이 항상 눌려서 그것이 우리의 삶을 패배시키지 않습니까? 우리의 감정 문제, 치유받지 못한 상처가 우리의 축복을 빼앗아 가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회개하지 못한 죄, 은밀한 범죄, 불순종, 속박 등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 그런 것들이 자녀들에게 있지 않습니까? 거절당하고 버림받은 느낌, 정서적인 학대, 부정적인 자아상, 쉽게 상처받는 것, 열등의식,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공허감 등이 있지 않습니까? 부정적인 말, 말을 할 때마다 과장하고, 거짓말을 섞고, 도벽, 인테넷 중독 등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견고한 진이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의 죄책감에서 자유함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고 죄가 생각날 때 그 때 잘해야 합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나서도 죄가 생각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다시 죄가 생각날 때 다시 죄책감에 빠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만 죄가 생각나게 하는 것은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이론을 파하고 우리의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감정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나 충동에 의해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그러한 일로 인해 믿음이 약해지거나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시키는 자가 되십시오. 죄의 소원이 우리 속에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죄를 다스리는 자가 되십시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악한 습관을 바로 버려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상처를 줍니까? 에베소서 4장 30-32절에 보면 여섯 가지 악한 습관이 나옵니다.
쓴뿌리
우리는 모든 쓴뿌리를 버려야 합니다. 쓴뿌리는 산과 같은 독으로 주위의 모든 것들을 녹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있었던 피해를 계속 기억하면서 길러온 내적 증오감을 말합니다. 누가 나의 증오심 때문에 피해를 받고 있는가? 나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도 상처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쓴뿌리는 상대방이 아닌 바로 악독한 마음이 들어있는 자기 자신을 녹입니다. 사단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우리의 거점을 막아 버립니다. 그러나 쓴뿌리의 결과는 육체적인 쇠약, 정서적인 방해, 비논리적인 사고방식 등이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쓴뿌리가 치유되기를 소원합니다.
노함과 분냄
노함은 강하고 파괴적인 열정입니다. 분냄은 상처를 주기 위해 파괴하려는 욕구입니다. 이것은 쓴뿌리 보다 위에 있으며, 어떤 파괴적인 행동의 원인이 됩니다. 잠재해있던 감정이 밖으로 표출됩니다.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
떠드는 것은 으르렁대듯이 소리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사자가 먹이를 앞에 두고 덤벼들 때 내는 소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훼방은 타인을 파괴하려는 의도 안에 있는 쓴뿌리가 밖으로 표출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말의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상처를 주고 잘라내고 파괴합니다.
모든 악의
악의는 다른 사람의 가치를 파괴하려는 사단의 의도를 뜻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파괴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에 전념하는 삶의 방식을 뜻합니다.
이런 감정들의 배합은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주제에 기초한 많은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으면서 즐깁니다.
당신은 아직도 이런 쓴뿌리를 가지고 있습니까? 누구 또는 무엇 때문입니까? 에베소서 4장 3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없애 버리라. 바로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도움을 청할 때 성령님께서 도우심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성령님을 모셔 드릴 때 모든 상황이 바뀝니다.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나의 태도로 인해 누가 피해를 입고 있는가? 당신이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당신의 친구들, 가족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있지 않은가?
사단은 우리를 파괴하기 위해 세 가지 거짓말을 사용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이해하게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이 조건적이고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 인정받기 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도록 유도합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난 적이 있습니까? 그 사람과 맺었던 친밀한 감정 때문에 당신은 큰 슬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헤어짐 때문에 당신은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친밀한 관계를 저버릴 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똑같이 그런 아픔을 당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들을 당장 없애 버리라 고 말합니다.
당신의 쓴뿌리가 당신의 인생을 망치지 못하게 하라. 창세기 49장 5-7절에 보면 레위 지파는 잔인, 분노 노염으로 저주를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동생 디나의 강간 사건으로 인해 세겜 족속을 할례받게 만들고 고통스러워 하는 틈을 이용해 다 죽이고 맙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32장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레위 지파는 하나님 편에 서서 행동할 때 축복의 가문으로 바뀌게 됩니다. 더 이상 우리는 누가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피해 의식에 잡히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자책감에 빠지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인생의 쓴뿌리를 축복으로 바꾸었던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어려서부터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배신을 당했던 사람입니다. 애굽에서는 한 여자 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억을함을 당했습니다. 감옥에서는 술맡은 관원으로부터 실망과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쓴뿌리의 피해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믿음의 비젼을 품고 살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형제들에게 그대로 토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창세기 50장 20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악까지도 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상처를 통하여 구원의 영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잘못해 놓고 상대방에게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바꾸어주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상대방이 해야 하는 말입니다.
서로를 위로한다고 하면서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속을 뒤집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바로 욥과 그의 세 친구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욥이 고난당하는 것을 7일 동안 함께 지켜보면서 너무 딱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들은 도대체 욥이 무엇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할까? 어떻게 하면 이런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즉 고난의 이유와 고난의 해결이 그들의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누가 먼저 말을 꺼집어냈을까요? 욥의 친구입니까? 욥입니까? 고난을 당할 때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요? 참다못해 욥이 먼저 입을 열어 말합니다. 욥기 3장 1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한순간에 욥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욥이 재산을 다 날리고 살아하는 7남 3녀 천재지변으로 다 잃어버렸을 때에도 믿음의 중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화 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0). 욥의 아내가 그래도 당신의 순점함을 지키겠냐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을 때에도 고비를 잘 넘겼습니다. 욥기 2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 이렇게 욥은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욥이 시간이 지나면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신세타령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고 모든 것이 어둡게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가면서 태도가 변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사람은 쌓인 것이 있으면 폭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잘 참았지만 누가 옆에 있을 때 털어 놓고 싶은 심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처음에는 하나님 관점에서 바라보며 잘 견뎌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에게 챙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만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것 때문에 속이 상하고 약한 소리를 하게 됩니다. 이 때에 해답을 줄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때에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렇게 하면 더 반발하게 되고 서로의 관계만 안좋아집니다. 우리가 서로 위한다고 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주고 관계가 더 악하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중에 나타나셔서 누구를 먼저 책망하십니까? 먼저 욥을 책망하시고, 그 다음에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십니다. 먼저 욥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게 하고 기도를 받으라고 명하십니다(9절). 그 순간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두 배나 축복하십니다. 7남 3녀의 사랑스러운 자녀들과 손자의 축복을 주십니다(13-16절). 하나님의 축복이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하여 막혔던 부분들을 해결할 때 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 예수님, 이 짐은 제가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에 그것을 버리려고 해보았지만 항상 실패했습니다. 이 짐은 제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제 피부나 제 뼈와 같이 저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구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은 하늘로부터 내 삶에 들어와 사십니다. 저는 이 시간 주님이 제 삶에 들어오셔서 역사하기를 원합니다. 제 힘으로는 이 짐을 주님께 드릴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이 짐을 거두어 주실 줄 믿습니다.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며 주님께서 나의 구원자가 되심을 감사드립니다.
제직의 자세
1. 기본적인 예절
예배의 예절
최고의
잘못된 유형의 헌금관을 몇 가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바쳐진 헌금이 잘못 쓰이고 있으므로 나는 헌금하지 않겠다는 유형
돈을 많이 번 다음에 헌급하겠다는 유형
목사들 먹여 살리려고 하는 헌금이니 하지 않겠다는 유형
헌금의 기준을 어떤 사람에게 두고 그 사람에 따라 하는 유형, 일명 찬조금 유형
체면 때문에 하는 바리새인형
액수가 너무 적어서 헌금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신자의 유형
자기 쓸 것 다 쓰고 찌꺼지를 하나님 앞에 서슴지 않고 던져 넣는 유형
사회생활에서 특히 삼가야 할 행동
특히 성도간에 돈 거래를 삼간다.
소개와 보증서는 일을 삼간다(잠11:15, 20:16, 22:26-27,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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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는 방법(빌 1:7-11), 김덕선 목사 (0) | 2024.03.17 |
응답의 확신(요일 5:13-15), 김덕선 목사 (2) | 2024.03.13 |
고르반(마 15:1-9), 김덕선 목사 (1) | 2024.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