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9절)
최근에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천국에도 전화가 있고 지옥에도 전화가 있어서 좌석 예약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천국의 전화번호는 66-3927이고, 지옥의 전화번호는 11-1111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구약성경의 권수 39와 신약성경의 권수인 27을 합한 66이 천국의 국번이 되고 39와 27이 그 고유번호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옥의 전화번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최고라는 일류의식, 일등의식 등 자기만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합쳐서 11-1111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천국의 전화번호보다는 지옥의 전화번호가 훨씬 외우기가 쉽고 따라서 지옥의 좌석 예약자들이 더 많다는 정보가 이해가 갑니다. 천국 좌석을 예약하려면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고, 지옥 좌석을 예약하려면 자기가 최고라는 주장만 열심히 하면 되니까 당연히 천국좌석 예약은 어렵고 지옥좌석 예약은 쉬울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남들이 보기에 나는 어떠한가?" "나는 왜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이제는 나도 인정을 받을 때가 되지 않았는가?" "저 사람은 왜 나를 이토록 형편없이 취급할까? 등의 질문은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괜히 마음이 울적해지고 자꾸 신경질을 부리는 것은 다른 것은 얻었지만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됨과 자신의 존귀함을 깨닫게 됩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또는 자기의 종들을 통해서, 그리고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죄 가운데 빠진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범죄하여 숨어 있는 아담을 부르시고, 아내 사라를 누나로 속일만큼 비정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시며, 지금도 하나님은 상처입은 자와 소망을 잃은 자, 상심한 자와 낙심한자, 좌절감에 빠진 자와 혼란 속에 있는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1. 왜 그렇게 보이는가?(7, 10절)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5절에 보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인간이 불행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재에 있
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무언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사단의 충동을 받고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보았을 때 이전과는 아주 다르게 보였습니다. 6절에 보면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도 한 나무인지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선악과였지만 자신이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보니까 따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선악과로 보였던 것입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니까 따먹으면 어떻게 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농아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 칠판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는 들을 수 있고 또 말할 수 있게 하시고 그 아들은 듣지도 못하게 하고 말하지도 못하게 하셨을까요? 왜 유독 그들은 그렇게 만드셨을까요?"이 엄청난 질문은 어린아이의 가슴을 무섭게 후려쳤고 그 무서운 말을 다 쓰기도 전에 아이들의 몸은 굳어 버렸고 마음도 얼어버렸습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때 한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그녀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눈에는 눈물 방울이 맺혔습니다. 그녀는 곧장 칠판으로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분필을 쥐고 또박또박 써 내려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모습 이대로 당신 보시기에 좋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좋은 모습임을 인정하십시오. 당신이 인정하시는 그때에 당신의 아버지께서는 당신 가운데 강하게 자리잡으실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이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눈이 밝아졌다"고 하는 것은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 곧 자의식에 눈이 뜨여지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아담, 하와가 자의식에 눈을 뜨는 순간 그들은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그들이 벌거벗은 몸으로 지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곧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감각적 충동과 욕망에 끌려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파괴한 결과 그들의 정상적인 영과 육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문화는 자기사랑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은 공주병 증상에 관해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인간은 본래 자기도취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병적인 자기사랑으로서 좌절감과 대인관계에서의 기피증, 심지어는 자신을 증오하는 상태까지 갑니다. 반면에 지나친 자기 반성은 신앙생활에 커다란 해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왜 그렇게 부담스러워 하는가?(8절)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처음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그들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관계 곧 명령과 복종의 관계를 깨뜨리고 스스로 모든 일이 주인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땅히 있어야 할 관계를 깨뜨리고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는 교만이 바로 죄의 뿌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대하기가 두려워졌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그 자체가 부담스러워졌습니다. 두 사람은 날이 저물고 서늘한 바람이 불 때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서늘한 때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갔던 아담과 하와가 들뜬 마음을 가라 앉히기에 알맞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것조차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황급히 하나님의 낯을 피하기 위하여 동산에 있는 나무들 사이에 몸을 숨겼습니다(8절). 여기서 "숨는다"는 단어는 인간의 잠재의식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심리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짓고 나서는 부담스럽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여 자기 자신을 가리우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솔직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놓아야만 합니다. 10절에 보면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하여 숨었나이다".
파스칼은 인간에게 가상의 모습과 실제의 모습이 있는데 "우리는 계속해서 가상의 모습을 치장하고 보존하고 노력하며 실제 모습은 무시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실제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때로는 다른 모습으로 바꾸려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허무하게 만드는 시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가상의 모습으로 도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실재 모습을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와 함께 교제하시기 위해 에덴 동산에 찾아오셨습니다. 아담을 부르시며 찾아오신 하나님은 아담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묻기도 하였지만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요한 시간에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을 때 이상하게도 에덴동산은 불길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가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차단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적절한 시점에 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왜 그렇게 하였는가?(13절)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시켰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여자가 나무 실과를 내게 주기 때문에 먹은 것에 불과하다고 답변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이 하와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고 했을 때 그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서로를 원망하고 핑계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오히려 핑계와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사이의 분리와 소외는 가장, 학교, 직장 등 여러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느끼고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개하기는 커녕 자신의 잘못에 대해 빠져나갈 핑계를 대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범죄한 인간은 할 수만 있으면 죄의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려고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40일이 지나도록 내려오지 않자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후에 이 사실을 책망하는 모세에게 아론은 백성의 책임으로 돌렸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과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손을 씻으면서 오직 군중의 책임이라고 그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범죄하지 않아야 하지만 만약 범죄하였다면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인정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문제를 푸는 근본적인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빠져나갈 궁리를 찾지 말고 회개의 기회로 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서 그분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십중 팔구 또 다시 그렇게 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 때문에 가장 기뻐하는 사람(마 2:1-11), 김덕선 목사 (0) | 2024.03.18 |
---|---|
내가 행하리라(시 91:14-16), 김덕선 목사 (0) | 2024.03.18 |
전도의 즐거움(눅 15:4-10), 김덕선 목사 (0) | 2024.03.18 |
태도가 변해야 한다(이사야 49:3-5), 김덕선 목사 (1) | 2024.03.18 |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는 방법(빌 1:7-11), 김덕선 목사 (0) | 2024.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