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는 나의 무능함이 드러나는 곳이다.
도대체 무엇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을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들이 위함이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신명기 11장 9-11절에 보면 가나안 땅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비옥한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0절에 보면 가나안 땅이 애굽 땅과 다르다고 말씀하고 있다. 애굽은 물이 풍부한 곳이었다. 그런데 11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들어갈 가난안 땅이 애굽 땅과는 달리 비옥한 땅이 아니라 산과 골짜기의 땅이고 비를 흡수하는 땅, 즉 광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런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을까요? 이 산은 나무가 없는 광야의 언덕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렇게 척박한 곳이지만 하나님께서 돌보셔서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나안의 의미이다.
우리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게 하셔서 예쁜 꽃들을 피어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갔는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이다.
신명기 32장 10-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에게 나는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 일부로 둥지에서 떨어뜨리고 땅에 닿기 전에 다시 그 날개로 받아 올리는 것과 같이, 우리를 날개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광야라고 하는 고통을 주셨다.
광야는 우리를 쓰러뜨리기 위한 곳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곳이다. 광야는 피할 길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길이다. 불확실한 곳에서 확신을 얻어낼 수 있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시험과 관련해서 성경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3개 있는데 그것은 시험(test), 시련(trial), 유혹(temptation)이다. 야고보는 성도들이 시험을 만날 때 기쁘게 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약 1:2-4). 여기서 시험은 테스트이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것은 성적을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이 부족한자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테스트와 믿음의 시련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휴대전화 개발팀이 전화기를 상품으로 팔기 위해서 결함이 무엇인지 3개월 동안 테스트해서 보완하는 작업을 한다. 이것이 일종의 트라이얼(시련)이다. 시험과 시련에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있다.
우리가 겪는 시험이나 시련의 의미를 지금 당장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과정들을 통해서 하시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대나무가 휘어지지 않고 곧게 자라는 것은 줄기의 중간 중간을 끊어주는 시련이라는 마디가 있기 때문이다. 험한 환경에서 자라는 나무일수록 나이테가 좁고 강도가 단단해지는 법이다. 목수들에 의하면 나이테가 넓은 나무는 쉽게 자란 나무여서 속이 무르고 쉽게 터지기 때문에 건축자재로 쓰기 힘들고, 적송이야말로 최고의 품질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신약성경을 보면 믿음의 시련이란 단어가 두 번 나온다. 그 하나는 야고보서 1장 3절의 믿음의 시련이고, 다른 하나가 베드로전서 1장 7절의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시련이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야고보는 온전한 사람으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칭찬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이다.
사람들이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순간 새로움에 대한 통로가 됨을 깨닫게 한다. 이것이 믿음의 역할이다.
자신을 바꾸어 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참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땅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갈릴리 바닷가, 숯불은 그에게 실패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실패의 현장을 새로움의 기회로 바꾸어 주셨다. 은혜란 자신의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정말 두려운 것은 사단의 시험이 아니라 사단이 시험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유혹이 없다면 그것은 사단에게 이미 유혹하지 않아도 될 사람으로 분류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사단은 단지 우리를 유혹할 뿐이지, 직접적으로 쓰러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단과 세상은 언제나 자신을 과시하면서 우리를 위축하게 한다.
시련은 과정이고 실패는 결론이다. 만약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넘어가면 그것은 실패가 된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면 시련이 되는 것이다. 실패는 내가 그것을 과정으로 보는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실패가 아니라 시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도움을 늦추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해서 하나님이 도와 주실 때까지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현실을 직면하게 하고 그것을 극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인생을 부분과 전체의 관계성 속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이 영원이라는 거울 속에 자신을 비쳐 볼 수 있도록 성경을 허락하셨다.
자신의 이익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것이 새 백성에게 요구되는 조건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뜻에 대해서 의심하지 말자.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우리의 사명을 포기하지 말자.
이렇게 형편없는 연구실에서 페니실린을 만들었다니...이 열악한 환경이 나로 하여금 페니실린을 만들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일이 잘 안될 때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주로 자기 자신이 아닌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 원인은 상황이나 환경보다는 삶에 대한 태도임을 발견하게 된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신비이고, 그리고 오늘은 선물이다.
사단이 예수님에게 던진 세 가지 질문의 핵심이 무엇인가? 나는 네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알고 있다. 네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방법이 있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봐라. 사람들이 너를 메시야라고 믿지 않겠는가? 또 네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것을 보여 준다면 사람들이 너를 믿을 것이다. 네가 정말 이 세상을 회복하러 왔다면 내가 그것을 쉽게 얻는 한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내게 절하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을 주겠다. 사단의 이러한 질문의 핵심은 “쓉쉽고 빠른 길이 있는데 왜 그렇게 힘들고 먼 방법을 선택하는가?
사람이 떡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오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지난 40년 동안 광야에서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기적이 결코 우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나의 노력이 우리를 바꾸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는 사단의 질문에 대해서 동일하게 대답하셨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비록 한 순간에 보이는 기적을 통해서 당신이 누구인가를 증명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질문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사단이 예수님께 내게 절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겠다는 의미는 마땅히 거쳐야 할 과정을 생략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경주해야 한다. 쉽고 빠른 길의 유혹을 버리고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소원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삶의 태도에 있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다(시126:5-6).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뿌려야 할 씨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크 마르탱, “수단을 정결케 하는 일에 깨어 있으라”
우리는 늘 목적이나 목표만을 이야기 해왔다. “너는 무엇이 될래? 네 꿈은 무엇이니? 라는 질문을 받았을 뿐 너는 어떻게 해서 그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니?라는 질문을 받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하나님의 삶의 방식을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가 좋아하는 방식, 내가 익숙한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가 가진 능력을 우리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먼저 사용하라는 것이다. 사단은 “네가 먼저다”, 다음에 이웃이 있고, 주님 혹은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것이다. 나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순서에 있다.
기독교인들은 내가 가진 능력과 재능, 그리고 재물이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만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받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얼마 전까지 은혜 받았다고 좋아하던 사람이 갑자기 침체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자신들의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앙은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믿음을 이용해서는 안된다.
기독교의 윤리관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for others)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을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는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나의 능력, 재능, 그리고 지위,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이다.
남을 위해서 내가 고통을 받는 것, 타인을 위해서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자기의 필요만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와 나라를 향한 내가 속한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실제를 보여 주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보여 주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이 돌로 떡을 만들 능력을 충분히 갖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떡으로 만들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의 삶의 원칙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의 우너칙은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가나안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삶의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임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서양인들은 대부분 직장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에 반하여, 한국인은 직장을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곳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각자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해지도록,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이것이 기독교의 소명의식이다.
우리의 삶 속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리기를 한 것은 토끼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정한 몸표애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기 위해서 달린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신이 정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달리기도 한다.
성전 꼭대기 위에서 뛰어내리라는 사단의 시험은 예수님께 능력을 과시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해 나타내 보이라고 한 것이다. 뭔가 보여 주겠습니다(이주일 신드롬).
오늘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 핵심은 힘, 내가 가잔 능력이다. 옛말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그것은 힘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한다. ”네 힘을 보여줘라. 그래야 사람들이 너를 인정하고 따를 것이다. 세상은 자신의 힘을 보여 주고 힘 앞에 굴복하라고 한다. 그러나 복음은 자신이 가진 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섬기라고 말한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신 자신을 내어 주는 원리, 갈보리 언덕에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원리이다.
요즘 인터넷 유머 가운데, 잘못된 판단, 딸국질 멈추는 약주세요, 예 잠깐만요, 약사가 약을 찾는 척하다가 갑자가 그 남자의 뺨을 찰싹 후려쳤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어때요? 딸꾹질 멈추었죠? 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나 남자가 약사를 빤히 쳐다보며 약이 필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아내인데요 라고 대답했다.
삶의 한 단면만을 보고 인생 자체를 평가해서는 안된다.
사단은 예수님께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회의를 품게 만든다. 정말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인도하시나?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왜 삶이 이렇게 힘들지.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신 6:16-17절에서 맛사의 시험
이스라엘 백성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때까지 그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잊어버리고 또 다른 증거를 요구하고 또 요구하였다. 따라서 르비딤에서 물을 달라고 한 것은 그동안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깊은 불신앙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모세는 그들에게 왜 하나님을 시험하느냐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늘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관심이 있다. 신앙은 나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셔야만 하나님이 되시는가?
하나님이 내 삶을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하나에 일회일비하지 말고, 하나하나에 승부를 걸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겨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신 6:16-17).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심하지 말자. 오히려 그 시간에 나를 향하신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살자.
오늘날 기독교인의 삶에 능력이 사라진 이유 가운데 하나는 순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성공을 위한 긍정의 힘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다.
사단은 세 번째 질문을 통해서 정체성에 대한 도전을 하고 있다. 네가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내가 그것을 줄 수 있다. 그러니까 나를 섬겨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나는 하나님만 경배하는 사람이다. 사단은 네 정체성을 포기해, 네 신앙 때문에 손해 보잖아!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샤브라(sabra)’라고 부른다. 사브라란 비가 오지 않고 탱볕이 내리쬐는 사막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은 선인장에 피는 꽃을 말한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샤브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가장 긴 가시 끝에 아름다운 꽃을 피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면 너의 삶 속에서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토끼와 거북이의 두 번째 습관에서 누가 이겼을까? 토끼는 지난번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달렸다. 지난 번 경주처럼 나무 밑에서 자는 척하다가 거북이가 안심하는 순간 달려가서 골인지점을 통과하는 거야. 그리고는 나무 밑에서 잠자는 척을 했다. 그런데 한 참을 지나도 거북이가 오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던 토끼는 반대편 방향으로 헐떡거리며 올라가는 거북이를 발견하고 저럼 멍청한 녀석 엉뚱한 곳으로 달리고 있잖아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그 순간 토끼는 거북이가 기어오르는 언덕이 바로 골인지점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토끼는 열심히 지난 번 경주 때 자신이 잠들던 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나무를 찾다가 그만 결승지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뒤늦게 사태를 깨달은 토끼가 사력을 다해서 달렸지만 이미 거북이는 결숭점에 도달한 이후였다.
토끼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자주 빠지기 쉬운 함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과거에 받은 상처에 대한 기억 때문에 결국,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말씀이다.
선악과 사건과 세 가지 시험의 공통점과 차이점
요일 2장 16절에 보면 우리가 세상에 부딪히는 유혹이 크게 세 가지, 욕신의 정욕은 방탕의 욕구, 안목의 정욕이란 소유욕, 이생의 자랑은 명예를 말한다.
마4 장 시험, 돌이 떡이 되게 하라-육신의 정욕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이생의 자랑
절하라-안목의 정욕
창 3:6 보암직: 안목의 정욕
먹음직: 육신의 정욕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 이생의 자랑
NO BIBLE, NO BREAKFAST, 하루에 성경 10장, 시편 5장, 신약 2장, 구약 2장, 잠언 1장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을 경배하라 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모세는 강조하고 있다.
무엇이 예배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그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임을 입술이 아니라 삶으로 인정하는 것이 예배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살리는 일로 부르셨음을 자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회복시키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교회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곳이다. 교회는 서로를 세우고 격려하는 곳이다.
왜 예수님은 신명기를 인용할 때 뒤에서부터 인용했을까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신 8장 3절, 두 번째 대답을 신 6장 6절, 세 번째 대답으로 6장 13절
모세는 신명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하나님이 네 삶을 인도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신다. 그러나 사단은 근본이 되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나중으로 밀어 놓고 역순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시급하게 다가오는 문제인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명예를 앞에 내세운다.
과거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 조금씩 양다리를 걸쳐 놓고 살았다. 즉 바알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겼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영국인들이 개와 고양이의 차이 설명
개는 주인이 자신에게 먹이를 줄 때 먹이를 주는 주인을 신(神)으로 여긴다. 그것은 주인이 신으로서 자신의 필요를 공급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에게 충성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고양이는 개와는 달리 주인이 자신에게 음식을 주는 것은 자기가 신이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주인이 자기에게 음식을 주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지난 2008년 북경 올림픽 경기에서 수영 400미터와 200미터 경기에서 박태환 선수가 금과 은메달을 땄다 그러나 1500미터 예선전에서는 탈락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단거리용 근육 만을 단련시켰기 때문.
사람들은 세상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진정한 복이란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시편 1편은 진정한 복이란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그것은 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하는지(why), 무엇을 해야 하는지(what),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how)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을 인정할 때 우리가 높아진다. 그를 높이라 그러면 그가 너를 높이리라.(잠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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